1998년 6·4지방선거에서 낙선한 후 한동안 정치수사에 시달려야 했다. 단식을 불사하며 검찰의 표적수사에 저항하며 한 여름을 보냈다. 그리고 마무리됐다. 조용한 일상으로 돌아가게 됐다. 아내는 대학원에 진학, 사회복지학 석사과정을 이수하고자 뭍 서울로 오가는 생활을 시작했다. 책가방용 핸드백과 옷가지를 사주며 난 마치 학부모가 된 것 같은 미묘한 행복(?)감에 사로 잡혔다.
사람의 생활수준은 한번 높아지면 다시 낮추기가 어렵다고 했던가? 그게 아니었다. 오히려 더 행복했다. 학교문제로 매주 서울에서 2~3일을 보내야 하는 아내는 그렇게 매주 한 차례 오전 9시40분 서울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아내가 떠나고 나면 난 집안 청소와 빨래, 쓰레기 치우기 등을 했다. 집안 살림을 독점(?)하는 느낌이었다. 사무관 시절 돈 1000원도 아끼던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승용차 생활에 익숙해져 있던 아내도 어느 날 서울의 학교에 다녀와서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대중교통이 좋고 편합디다. 700원이면 지하철로 아무데나 갑니께(갑니다).”
그 시절 난 앞으로 내가 할 일을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도 제주도지사를 지낸 마당에 그저 무위도식하며 세월을 보내선 안되리라고 생각했다. 제주에 실질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했다. 정치적인 것보단 진정 제주사회에 도움이 될 비정치적인 분야로 자꾸 눈을 돌렸다. 그 때쯤 생각한 게 비정치 분야의 연구소 운영과 녹차 재배농사, 두가지였다.
연구소 운영은 사실 비용이 문제였는데 쉽게 해결됐다. 흡사 기독교에서 말하듯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주셨다”는 것처럼 말이다. 검찰도 조용해진 어느 날 탐라대 정구철 교수(현 제주국제대 교수, 전 제주국제자유도시개발센터 감사)와 6·4 지방선거 때 내게 도움을 주었던 진희종(시사진행자, 현 제주도 감사위원)씨가 찾아왔다. “서울에서 하던 사업을 정리하고 중문에 정착할 계획을 갖고 있는 이희택씨란 분이 신 지사님이 당분간 해외연수라도 갈 수 있도록 재정적인 협력을 하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물론 나로선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다.
참으로 고마웠다. 선거에서 떨어지면 가까웠던 사람도 멀어지는 세태인데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제주도가 고향도 아닌 사람이 나에게 관심을 가져준 게 무척 고마웠다. 하지만 그때 난 개인적인 도움을 받을 마음의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 그렇기에 난 그의 제의를 정중하게 거절했다. 그랬는데도 그 분은 날 다시 만나기를 원했다. 결국 서귀포 어느 식당에서 그들 부부를 만났다. 그 자리에서 그는 “해외연수가 아니면 연구소를 개설하는 데라도 협력하겠다”며 1억원을 지원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난 그들 부부에게 감사하다는 말 대신에 이렇게 말했다. “아니 요즘 1억원 갖고 연구소를 설립하고 운영하는 게 가능합니까?”
그래도 도지사를 지낸 내가 1억원을 갖고 무슨 구멍가게 연구소를 하란 말이냐고 퉁명스럽게 쏘아 붙인 것이다. 내 말에 무안해진 이씨는 “일단 시작하면 더 협력하지요. 제주에 한 10억원 상당의 부동산도 있습니다.” 그렇게 그는 말했지만 얼굴엔 불쾌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 후 연말에 내가 그들 부부를 위해 베푼 망년회 자리에서 이씨는 자리에 앉자마자 말도 없이 연거푸 소주 몇 잔을 들이키더니 갑자기 나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신 지사! 세상에 당신같은 사람이 어디있소. 그래도 생면부지인 내가 1억원을 내놓고 싶다고 했는데, 고맙다고는 못할 망정 그게 뭐요. 오늘 신지사하고 인연 끊어버리려고 이 자리에 나왔는데···와서 막상 사모님을 뵈니까 내 마음이 변하네. 신지사보다 사모님이 훨씬 낫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안중에 없었다. 답답하게 일만 생각하다보니 그를 서운하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후 난 그의 도움으로 ‘플러스 생활복지연구소’를 설립할 수 있었다. 그 시절 난 막대한 투자나 거창한 정책을 통한 환경·복지문제 해결보다는, 환경과 복지는 하나라는 전제 하에 일상생활 속에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소위 ‘생활복지’의 개념을 구상하고 있었다. 그런 구상을 실현하기 위한 일이 바로 그 연구소 설립이었다.
더불어 내겐 필요하면 언제든지 내가 이용할 수 있는 종중(宗中) 임야 4만3천평이 있었다. 종중에서 내가 관리하도록 맡긴 땅으로 나 역시 공동소유자로 등기돼 있는 땅이다. 난 이 임야를 이용해 축산을 할 것인지, 감자나 더덕재배를 할 것인지, 아니면 녹차재배를 할 것인지를 놓고 검토 중이었다. 난 이리저리 고심하다 녹차재배로 결론을 내렸다. 과잉생산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감귤의 보완작목 역할을 녹차가 해줄 수 있으리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참고로 녹차는 전남 보성과 강진·영암·해남지역과 경남 하동·산청, 그리고 제주도가 주산지다. 그 당시 재배면적은 200만평으로 연간 생산량은 1천톤 내외였다. 하지만 국내 수요를 충당하지 못해 400톤 내외를 수입하고 있었다. 제주도에선 1980년부터 태평양화학 계열기업인 장원산업(주)에서 52만평 규모의 녹차단지를 개발, 당시 국내생산량의 52%를 점유하고 있었다. 녹차재배에 관해서는 81년 정부와 제주도의 방침에 따라 제주대 허인옥 교수가 ‘제주도 차(茶)산업의 발전가능성에 대한 조사연구’를 한 바 있다. 허 교수는 제주도 중산간 지역에 8천 정보의 녹차재배가능지가 있으며 이 가운데 3천정보를 녹차재배지로 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주장을 했다. 나로선 심정적으로도 공감하는 터라 스스로 농업에 종사한다는 뜻도 있지만 제주도에선 아직 기업 외에는 손을 못대는 녹차재배를 시도함으로써 농민들이 할 수 있는 녹차재배 ‘매뉴얼’을 경험적으로 만들어보고 싶었다. 바라는 농민이 있으면 스스로의 경험을 토대로 만든 일종의 지침을 나눠 줘 도움을 주고 싶었던 것이다. “30여년 우리가 감귤에만 의존하고 살았다면 이제 해발 200고지 이하는 감귤, 그 이상은 녹차로 작목체계를 개선·보완함으로써 우리 농민들이 생업기반을 계속해서 확보할 수 있을 것”이란 판단이었다.
도지사 재임 중일 때도 그렇게 속을 썩이던 큰 아들 녀석이 낙선하고 실업자가 된 98년 그해 11월6일 사법시험 합격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도무지 사법고시 공부에 열을 올리지 않았던 큰 아들은 그때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95년 첫 선거에서 너무 쉽게 당선돼서일까? 큰 아들을 비롯해 날 도와준 사람에게 제대로 인사를 하지 못했다. 아들은 “선거공신들이 저마저도 배척하더라”며 나에게 서운한 마음을 드러내기도 했다. 내가 ‘인의 장벽’에 둘러 싸이고 있어선지 아들은 독기를 품었다. 떳떳하게 아버지에게 얼굴을 들이대고 싶었던 모양이다. 막상 큰 아들 용인(현 제주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이가 사법고시에 합격하자 언론에선 ‘사이클 히트’(cycle hit)란 표현을 써 가면서 우리 부자들을 치켜 세웠다. 아버지는 행정고시, 큰 아들은 사법고시, 둘째 아들은 외무고시 합격자라고 소개해 줬다. 어찌 됐든 큰 아들의 합격소식은 6·4지방선거에서 낙선한 후 여러 어려움을 겪던 우리 부부에게 큰 위로가 돼 주었다.
그 때쯤 민주평통 자문회의 상임부의장 자격으로 제주도에 내려온 이수성 전 국무총리에게서 한번 만났으면 한다는 전갈이 왔다. 저녁식사를 마친 그를 그랜드호텔 그의 방에서 만났다. 그는 “지나간 일이지만 DJ는 분명히 신 지사에 대한 공천을 약속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내년 상반기 중에는 정치적 결단을 할 예정이므로 신 지사가 앞으로 국회의원을 하든지, 정부에서 일하든지, 아니면 곁에서 도와주든지 했으면 좋겠다”는 요청을 했다. 그 요청은 후에 그가 위원장이 된 백범기념관 건립위원회의 제주도위원장을 내가 맡는 계기가 됐다.
낙선의 고배로 쓰라리던 그해. 12월 한달만을 남겨놓았다. 감귤생산조정제 시행으로 벌어진 논란, 국민회의 제주도지사 후보 경선에서의 어이없는 실패와 불복, 6·4지방선거 출마와 낙선, 검찰수사와 단식 등으로 내 인생에서 굵직한 일들이 스쳐가더니 몸도 피폐해졌다. 40일간 통풍증세에 따른 후유증까지 나타났다. 도지사에서 평범한 도민으로 돌아가는 게 퍽이나 쉽지 않았던 한 해가 지나고 있었던 것이다.
‘정치왕따’-. 내게 딱 알맞은 말 같았다. 그때 난 과거 정치에 뒤늦게 뛰어들었다가 이른바 스타일을 구긴 정치인들을 생각해보다가 문득 연세대 명예교수인 김동길 교수를 떠올렸다. “그래! 그를 한번 만나보자. 두 왕따가 만나는 것도 좋은 회동이 될 것이다.” 내 전화를 받은 김동길 교수는 무척 반가워했다. 10월3일 그와 약속한 장소인 조선호텔 ‘카페 로얄’로 갔다. 그는 한사코 “신 지사는 실업자니까 점심은 자기가 사겠다”고 했다. 점심을 하면서 그는 나에게 시골 도지사로서의 반란과 현실정치에서의 실패를 개혁의 이름으로 묶어 책을 내 보라고 했다. 3김(金)이 망친 것들을 지금은 직접 지적할 때가 아니므로 기록으로 말하라는 것이었다. 그 시절 국민의 정부를 이끌고 있는 김대중 대통령은 실패한다는 게 그의 단호한 생각이었다. 왜냐하면 DJ의 정치적 바탕과 수준은 ‘돈’으로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라면서 국회의원이나 자치단체장 공천에 관해서도 과거 일부 국회의원, 자치단체장 등의 돈을 통한 성공과 실패 사례를 들었다. DJ그룹의 행태를 상당히 혐오하는 눈치였다.
“그래 신 지사, 국민회의 공천 받기 위해 얼마 헌금했나?”
“없습니다.”
“말이 되나? 돈도 안 바치고 공천 받으려 했다니.”
“정말입니다 선생님! 저는 DJ가 그 나이에 대통령이 됐으니 개혁할 사람을 공천하리라고 확신했습니다.”
“자네 진짜 왕따 감이군. 그쪽 사람들 말이야. 돈 안주면 안되고, 돈 줬다 하더라도 더 많이 준 쪽 손을 들어주는 사람들이야.”
씁쓸했지만 어찌됐건 12월에 접어들면서 김 교수의 말마따나 글을 써보기로 했다. 죽은 과거가 아니라 앞으로 고쳐가면서 살아내야 할 과거를 위해서다. 과거와 단절된 미래는 없기 때문이다. 갑자기 글을 쓰기 시작하는 나를 보고 아내가 이유를 물었다. “내 나이에서 10년을 뺀 삶을 앞으로 살아가기 위해서요.” 그게 그 시절 내 답이었다.
우리 부부는 1998년 12월 31일 밤 11시30분부터 제주시 영락교회에서 진행한 송구영신 예배에 참석했다. 우리가 한 해 동안 다 셀 수 없는 감사의 은혜를 받았음을 고마워하며, ‘1998년 우리의 모든 것’을 다시는 되돌리지 않아도 되는 망각이라는 과거의 수레에 실어보냄으로써 참으로 길었던 한 해와 작별했다.
1999년 1월1일. 내 삶에서 지나간 56년을 정리하고, 남은 삶을 준비해야 할 해가 됐다. 관조와 긍정으로 내 인격도, 삶도 그리고 역사도 바뀌어가기를 간절히 소망하면서 한 해를 맞았다. 미국 남성들 사이에선 “나이 50이 넘으면 직업, 전공 그리고 부인까지 모두 바꿔 볼 필요가 있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어쨌든 31년간 공직 밖에 몰랐던 내가 기독학교 설립 기획에서 녹차다원을 조성하고, 연구소 설립과 운영, 그리고 대학강의 등. 아내만 빼곤 다 바꿔보고 싶은 그런 삶에 대한 유혹으로 한 해를 살고 싶었다.
2월 초 아내와 함께 미국에 다녀왔다. 미 의회의 초청으로 미국 국가조찬기도회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그 때 <제민일보>에 기고했던 글을 좀 길지만 소개한다. 감상이지만 당시의 생각을 남기기 위해서다.
정치가 아름답다 지난 2월 초 아내와 나는 미의회(美議會)의 초청으로 미국 국가조찬기도회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다.
우리 정치판의 잣대로 저들의 정치판을 읽어버린 나의 실수였다.
클린턴 대통령은 교황과 후세인 국왕 등 세계평화를 위해 수고하는 사람들을 위한 기도를 요청하였다.
인종과 종료를 넘어서서 1백40여 개 국의 친구들을 국가조찬기도회에 초청한 이유는 바로 세계의 평화와 화해를 위해서였다.
물론 미국의 정치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클린턴 대통령에 대한 탄액절차가 끝났을 때 우리나라 같으면 당연히 있을 법한 그 흔한 정파적 성명 하나 없이 의회지도자들은 일상의 국사로 되돌아 갈 것을 국민에게 약속했고 클린턴 대통령은 국민에게 용서와 화해를 간청할 수 있었던 것이나 부시, 카터 등 미국의 전직대통령들이 그들 사이에 ‘주막 강아지’가 비집고 들어갈 틈도 주지 않은 채 클린턴 대통령과 함께 다정하게 대통령 전용기를 타고 후세인 국왕 장례식에 참석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미국 정치지도자들의 ‘평화와 화해하는 힘’ 때문이었다.
워싱턴 일정을 끝내고 복지프로그램과 환경문제에 대한 협의를 위하여 유타주 솔트레이크시와 일본의 오키나와를 거쳐 돌아오는 비행기 속에서 나는 ‘신념·평화·화해’에 바탕을 둔 정치가 아름답다는 생각으로 내내 유쾌할 수 있었다.
후기 - 이 글을 막 끝냈을 때 2월 20일자 모 중앙일간지에 실린 로마인 이야기를 쓴 시오노 나나미의 대담을 읽었다. 그 한 부분을 여기에 소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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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그렇게 연초부터 미국 클린턴 대통령의 조찬기도회에 아내와 함께 참석한 후 미국 곳곳을 다시 살폈다. 내 연구소 설립 구상에 도움을 얻고 싶어서였다. 미국 유타주 솔트레이크 시의 복지사업과 일본 오키나와의 환경농업 현장을 찾았다. 특히 오키나와에선 류쿠대학의 히가 교수를 찾아가 만났다. 그는 EM(Effective Micro-organism; 유효 미생물군)을 만들어낸 이다. 또 기독학교설립 기획단 구성과 국내 기독학교 탐방은 물론 신청 뒤 3개월 만에 개간 허가가 난 문중임야 개간, 그리고 과학재단에서 지원되는 초빙교수로 2학기부터 해야 할 제주대학교 출강준비 등. 바쁜 일과가 99년 초부터 이어졌다.
하지만 그 1999년에 난 언론의 집중적인 조명을 받았다. 바로 그해 내가 축협중앙회장이 돼 이른바 ‘국회할복사건’의 주인공이 되리라고는 꿈 속에서도 상상하지 못했다. <30편으로 이어집니다.>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
=1942년생. 오현고를 나와 육군사관학교 4년을 중퇴, 1967년 5회 행정고시에 합격해 공직자로 입문했다. 제주도 기획관, 주이탈리아 한국대사관 농무관, FAO(국제식량농업기구) 한국교체수석대표, 농림수산부 축산국장, 농업구조조정정책국장, 기획관리실장을 거쳐 YS정부 시절인 1993년 12월 제29대 제주도지사로 취임했다.
이어 첫 민선 지방선거인 95년 6·27선거에선 무소속으로 출마, 당선돼 31대 지사를 역임했다. 그러나 98년, 2002년 두 번의 제주지사 선거에선 연거푸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그후 축협중앙회장을 거쳐 친환경 농업회사법인인 (주)삼무와 전시판매장인 삼무힐랜드를 운영했지만 지사 재직시절 뇌물수수사건에 휘말려 2년여 수감된 뒤 풀려났다. 삼무힐랜드는 수감기간 중 문을 닫았다.
제주삼다수와 관광복권, 제주국제컨벤션센터, 제주교역, 제주세계섬문화축제 등이 그의 지사 재직시절 작품이다. 현재 제주생태도시연구소 이사장직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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