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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현장-남기고 싶은 이야기]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24)

14년 전의 일이다. 강산이 뒤바뀐다는 10년도 지난 일을 떠올리고 있지만 지금도 그 기억이 생생하다. 그게 안타깝다. 그만큼의 시간을 거쳐도 아직도 그 때의 일들이 내 가슴에 또렷이 새겨져 있다는 사실이 가슴을 아프게 만든다. 지금부터 할 얘기는 미스테리다. 지금도 의혹의 시선을 거둘 수 없고, 그 때 그 시절의 일들을 생각하면 과연 정의는 살아있는가란 자문을 하게도 만든다. 그러나 믿는다. 시간의 차이가 있었을 뿐 역사는 도도히 흘러갔다. 나 혼자만의 분노와 좌절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제주도민 사회가 과거의 잘못된 행태를 바로잡는 나침반으로 여겨 준다면 여한이 없다.

 

1998년 4월30일. 난 경선에서 어이없이 무너졌다. 새정치국민회의 제주도지사 후보 경선에서 아무리 곱씹어봐도 ‘말도 안 되는’ 룰의 게임에서 졌다. 하지만 패배는 패배였다. 다음날은 5월1일. ‘가정의 달’의 첫날이다. 무언가를 훌훌 털고 싶었다. 가정을 돌아볼 시간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선 다음날 출근한 나에게 한 과장급 공무원이 다가와서 말했다. “선거조직 없이 출마해서 TV토론에서 도민에게 그동안 해왔던 일을 알리고 떠나십시오. 당선을 염두에 둘 필요는 없습니다. 안 그러면 그동안의 정책을 후임자가 다 깔아뭉갤 것입니다.” 고마웠지만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냥 쉬고 싶었다.

 

 

그런데 현역의원인 현경대 의원의 전화가 왔다. 그는 내 초등학교 동창이다. 서울에서 농림부의 관료로 재직 중일 때도 음으로, 양으로 우리 제주인들에게 많은 기여를 한 인물이다. 물론 나 역시 그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5월2일 제주시 칼호텔에서 점심을 하며 그를 만났다. 그는 대뜸 “출마할 테니 도와달라”고 말했다. 그에게 물었다. “당신인가?” 그는 고교 선배인 ‘현임종’이란 이름을 꺼냈다. 솔직히 그가 좀 미웠다. 경선이 엊그제 인데 이렇게 불쑥 나의 처지는 안중에도 없이 이렇게 말할 수 있는가? 유쾌하지 못했다. 그때 나로선 그렇게 말할 수 밖에 없었다. “당신이라면 당연히 도울 수 있다. 그러나 현 선배라면 내가 꼭 돕겠다고 얘기하기는 어렵다.” 솔직히 마음속으로 누구를 돕고 말고 할 계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 다음날인 5월3일. 난 기자회견을 자청했다. “경선결과를 인정 못한다. 부정경선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나 이의신청은 않겠다. 다만 경선과정에서 생긴 불법적 사실을 선관위와 사정기관이 조사해주기 바란다.” 그렇게 밝혔다. 그 시절 도지사 후보 공천자 확정은 5월7일이었다. 난 “도지사 후보 공천자가 확정되면 그 후 출마 여부에 관한 입장을 발표하겠다”고 말하고 회견을 마무리했다.

 

그러나 잠시라도 잊고 싶었다. 5월5일 어린이날 난 이기풍 선교기념관을 찾았다. 기도하며 많은 생각을 했다. 경선패배의 승복문제를 고민했다. 흐름에 맡기자고 생각해봤다. 예단하지 말자고 마음을 다 잡아보았다. 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 ‘무책임하다’는 도민의 목소리와 ‘비겁하다’는 야유가 들려왔다. 93년 12월 말 부임하고 난 뒤 전임도정의 면면을 훑어보며 솔직히 속으론 분노했다.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 도정이 다시 등장하도록 둔다면 우리 도민과 역사에 죄를 지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마음 속으론 “그럼 나보고 어쩌란 말이냐”는 항변이 또 있었다. 도민에게 마음을 바치는 지도자보다 도민의 마음을 도둑질하는 지도자를 여당 대의원들이 선택했는데? 내 책임은 아니라고 발뺌하고 싶었다.

 

5월12일 현경대 의원이 미는 한나라당(새누리당의 전신) 현임종 후보의 TV대담을 지켜봤다. 케이블TV에 출연, 그가 하고 있는 언사를 지켜보다 마음에 불안감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꼭 내가 도지사를 할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도정을 너무 모르고 있다는 느낌이 들더니 이러다 고스란히 도정을 어이 없는 쪽으로 넘겨줄 수 밖에 없다는 위기감으로 뒤바뀌었다. 그날 서울로 올라갔다. 이수성 전 총리를 만났다. 그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는 게 좋겠습니까?” 그도 좀 미안한 얼굴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내가 국민회의 도지사 후보로 공천될 거란 확신을 심어줬기 때문이다. 그는 나에게 물었다. “당선되고 싶은가?” “아닙니다.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동안 한 일은 제대로 알리고 싶습니다.” 그리 대답했다. 그는 그러자 “경선승복이 원칙이다. 그러나 네가 정치를 앞으로 계속 할 생각이면 경선불복에 신경 쓰지 말고 출마해라. 그렇지 않으면 도민들이 널 잊어버린다.” 그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그날 밤 제주로 내려와 현임종 선배에게 전화했다. 그리고 다음날 오전 그와 아침식사를 곁들여 만났다. 마음을 털어놨다. 출마하겠다는 마음과 3자 구도로 선거를 치를 수 밖에 없게 된 점을 이해해 달라고 말했다. 그는 펄펄 뛰었다. “당신이 출마한다면 내가 출마할 일은 없었다”며 크나큰 역정을 냈다. 사실 그날 오전 9시50분에 난 출마를 결심, 선거에 뛰어든다고 발표를 하는 기자회견이 예정돼 있었다. 그런데도 입장 번복을 요구하는 그의 강권이 집요했다. “그렇다면 출마 않겠다. 알아서 잘해보시라”는 말을 던지고서야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본심이 아니었다. 천주교계에 발이 넓은 그에게 가까운 한 신자를 통해 곧바로 그에게 입장을 다시 전달했다. 다시 한번 양해를 구했다. 그리고 그날 난 6·4 지방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 때의 사정으로 난 그 분과의 관계가 완전히 꼬였다. 그가 나에게 등을 돌리는 계기가 됐다. 하지만 그 후 한참이 시간이 흐른 2002년 초. 그 때 그 분은 나에게 큰 오해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도민 모두가 익히 아는 사실이겠지만 난 2002년 선거에도 나섰다. 그 해 연초 그는 물론 현경대 전 의원과도 막역한 사이인 한 인사를 만났다. 작고하신 현오봉 전 국회의원의 보좌관을 지냈던 분이다. 그는 나에게 넌지시 이렇게 말했다. “그 때 돈을 너무 많이 요구한 것 아니오? 현임종 그 양반이 말하길 신 지사 측 캠프의 운영경비를 어는 정도 보전해 주기로 했는데 그 금액이 너무 적다고 당신이 몽니로 출마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고 합디다.” 뜨악했다. 전혀 모르는 사실이자, 있지도 않은 사실이었던 것이다. 98년 지방선거 시절 현임종 후보는 그렇게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현임종 선배에게 전화를 걸어 한 걸음에 달려갔다. “선배! 저를 그렇게 보셨습니까? 제가 고작 그런 놈인 줄 아셨습니까?” 그렇게 따졌다. 하지만 그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막무가내였다. 오해는 풀리지 않았다. 기가 찼다. 그 때의 풀리지 않은 오해를 풀고자 난 2002년 지방선거를 앞둔 4월 아내의 손을 잡고 직접 그의 집을 찾아갔다. 문전박대만 당했다. 더 이상 오해를 풀 다른 방법이 없었다. 앙금도 풀리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올해 치러진 4월 총선을 앞둔 어느 날 그를 우연히 만났다. 그가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지금이라도 마음의 앙금을 그가 푼 것 같아 그래도 조금이나마 짐을 던 것 같은 느낌이다.

 

 

하지만 이제까지의 얘기는 사실 98년 6·4지방선거를 전후로 벌어지는 너무도 기가 차고, 어이 없는 일들에 비하면 그저 작은 에피소드에 불과하다. 선거를 이틀 앞둔 6월2일 나와 여당인 국민회의 후보는 각각 제주시 탑동광장과 종합경기장 광장으로 나뉘어 대규모 군중유세전을 펼쳤다. 탑동광장 유세에서 난 그렇게 도민들에게 말했다. “이 선거전은 거짓과의 싸움이다. 제주도를 지키려는 자와 제주도를 팔아 먹으려는 자와의 싸움”이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경선에 불복한 후보’란 오명을 뒤집어 쓰며 치른 선거는 세간의 예상대로 나의 참패로 끝이 났다. 결과는 내가 8만1491표(득표율 30.8%), 한나라당 현임종 후보 4만3559표(16.4%)였다. 국민회의 상대 후보가 거둔 13만9695표(52.8%)에 한참을 밀린 참혹한 결과였다. 선거는 그렇게 끝이 났다. 그런데 그 선거를 전후로 황당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선거를 사흘 여 앞둔 6월1일 제주시 한경면 판포리에 사는 함모씨가 양심선언을 한 것이다. 아내인 국민회의 대의원 홍모씨가 한 일식집에서 상대 후보의 부인에게서 국민회의 도지사 후보 경선 직전 50만원을 받았다는 것이다. 대규모 유세가 벌어진 6월2일엔 더 기가 찬 일이 벌어졌다. 선관위가 상대 후보의 종합경기장 유세를 모니터링 한 뒤 “유세군중을 동원하기 위해 79대의 전세버스를 이용, 조직적인 동원이 벌어졌다는 혐의”를 적발해 검찰에 고발했다. 한나라당 측은 그 차량 대수를 130대로 고쳐 재차 고발했다. 더욱이 6월9일엔 손모라는 한 청년이 제주시내 한 성당에서 정의구현사제단 신부의 주선으로 양심선언 기자회견을 했다. 놀라운 것은 상대후보의 수행비서 박모씨로부터 지역조직 운영 명목으로 돈을 받았다는 것이다. “800만원을 받았는데 선거가 끝나고 난 뒤 소외감이 밀려오고, 이런 잘못된 선거는 고쳐져야 한다는 생각에 양심선언을 한다”고 밝혔다. 기가 찼다.

 

그런데 그런 모든 얘기들이 모두 다 유야무야가 돼 버렸다. 양심선언을 한 손모란 청년은 그 직후 행방불명이 됐다. 후보의 부인에게서 돈을 받았다는 사람은 받았다고 양심선언을 했는데 그 마저도 그냥 무혐의로 종결됐다. 선관위가 고발조치한 전세버스를 이용한 조직적 군중동원 사건은 자원봉사자인 이모씨가 구속되고 4명이 불구속입건되는 선에서 마무리됐다. 6월25일 제주지검의 중간수사결과는 동원된 버스가 무려 132대나 된다는 사실만을 확인했을 뿐 몇 명이 책임지는 선에서 끝났다. 수사도중 모 검사가 “선거문화를 30년 후퇴시켰다. 집권당이라지만 해도 너무했다”고 조사중 말했다는 얘기가 흘러 나왔지만 검찰 선에서도 사건은 축소되고 덮어버리는 선으로 마무리됐다. 그 시절 구속된 이모씨의 여식이 “내 아버지는 아무런 죄가 없다”고 언론에 기고까지 했는데 그렇게 끝났다.

 

의혹은 2002년 선거를 앞둔 5월 풀렸다. 어느 날 상대후보의 선거사무장이었던 이모씨가 나를 찾아왔다. 그는 나에게 양심선언서를 내밀었다. “선거캠프에서 조직적으로 군중을 동원했는데 문제가 벌어지자 대신 몇몇이 죄를 뒤집어 쓰기로 했다”는 것이다. "한 사람 구속은 불가피하다. 누가 구속돼야 수습된다. 1개월만 고생하면 보석으로 나오게 하겠다"는 당선자의 언질이 있었고 이모씨가 자진해서 죄를 뒤집어쓰기로 하고 감옥으로 갔다는 것이다. 실로 수하졸개들을 대신 감옥으로 보내는 조폭들이나 하는 짓을 서슴없이 저지른 것이다. 2002년 6월 선거에서도 난 패배했다. 솔직히 그 시절 그가 나에게 가져온 그 양심선언서는 우리 캠프에 호재였다. 하지만 그 카드는 쓰지 않았다. 정책선거로 제주의 발전을 논의하는 판으로 가고 싶었지 그런 일로 진흙탕 싸움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덮어두고 싶었던 그 사안은 지난 2010년 지방선거 때 나에게 양심선언을 한 그가 다시 찾아와 괴로움을 털어놓자 제주도의회 도민의방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세상에 알렸다. 그가 스스로 기자회견을 자청, “양심에 반하는 일이었고 선거문화를 후퇴시킨 그 때의 일로 도민에게 죄송한 마음을 어떻게든 풀고 싶어 사실을 밝힌다”고 말했다. 그는 그 시절 암투병 중인 환자였다. 시한부 생명을 언도 받은 탓에 진실을 털어 놓고 세상을 떠나고 싶었다는 뜻도 말했다. 그러나 고작 2년 전인데도 언론은 냉담했다. 그저 선거판의 주장으로만 치부할 뿐 진실확인을 위한 노력은 보이지 않았다. 암투병 중이던 그는 지난 봄 결국 세상을 떴다. 먼 하늘나라에서라도 이제 그가 마음의 빚을 덜기를 기원한다.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는 또 있다. ‘800만원을 받았다’고 정의구현사제단의 주선으로 양심선언한 그 청년의 행방을 쫓던 한 검사 출신 변호사는 그해 가을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됐다. 우리 선거캠프에서 “고향 제주의 발전을 위한 일을 해야 한다”고 의욕을 보이던 이다. 그런 그는 가을 어느날 제주시 탑동의 한 골목길에서 흉기에 찔린 채 승용차 안에서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영구미제 사건으로 경찰의 수사가 마무리된 사건이다. 이런 얘기를 하며 문득 그가 나에게 넘겨준 그의 글을 읽었다. 98년 7월2일자로 논문 형식으로 쓴 그의 글이다. ‘4·3 그 문제와 해결의 법적 측면’이란 제목이 달려 있다. 찬찬히 그의 글을 읽다 보면 얼마나 그가 고향 제주도를 사랑했고, 힘 없는 자들의 아픔을 나눠 가지려고 했는지 알 수 있다. 솔직히 눈시울이 붉어진다. 지금 그런 의문이 있다. 어떻게 그 시절 의혹과 문제를 제기한 이들은 하나 같이 숨지거나 아니면 행방이 묘연하고 그렇게 ‘사죄의 진심’마저 우리 사회에서 수용하지 못하고 투병 끝에 끝내 세상을 하직해야 하는가?

 

98년 6월30일 난 민선 1기 도지사를 끝으로 퇴임했다. 그 때쯤 모 언론사의 한 기자가 나를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 “정말로 미안합니다. 언론이 제 할 일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가 그렇게라도 얘기해주니 고마웠다. 하지만 난 이제 책상을 정리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시절 내 비망록에 난 이렇게 적고 있었다. “지난 3년간 경쟁과 자존을 바탕으로 제주도의 비전을 설계했다. 시스템을 정비했다. 그러나 일부 언론의 편향된 시각과 기득권 세력의 반대에 부딪혀 독선과 독주라는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정작 날 괴롭힌 건 도민들의 일방적이고 부정적인 비판적 시각이었다. 더욱이 어느 사회보다 거짓이 잘 먹혀들어가는 게 제주사회라는 두려움이 나에게 있었고, 그 두려움이 나를 괴롭혔다. 도민은 진정 거짓을 원하는 것인가란 회의가 들었다.”

 

퇴임식을 마친 나를 세 분이 위로해주었다. 사무관 시절 그렇게 나를 혼내며 키우셨던 이승택 전 지사님과 김형옥 전 제주대 총장님, 그리고 김영호 제주교대 학장님이시다. 그 자리에서 이 전 지사님은 이런 말씀을 해주셨다. “우리 제주사회는 너무 많은 사람이 너무 많은 것에 대해 관심을 가지면서도 너무 적은 소수가 너무 적은 책임만을 지는 사회다.” 그분의 말씀이 지금도 귓전을 때린다. <25편으로 이어집니다>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

 

=1942년생. 오현고를 나와 육군사관학교 4년을 중퇴, 1967년 5회 행정고시에 합격해 공직자로 입문했다. 제주도 기획관, 주이탈리아 한국대사관 농무관, FAO(국제식량농업기구) 한국교체수석대표, 농림수산부 축산국장, 농업구조조정정책국장, 기획관리실장을 거쳐 YS정부 시절인 1993년 12월 제29대 제주도지사로 취임했다.

 

이어 첫 민선 지방선거인 95년 6·27선거에선 무소속으로 출마, 당선돼 31대 지사를 역임했다. 그러나 98년, 2002년 두 번의 제주지사 선거에선 연거푸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그후 축협중앙회장을 거쳐 친환경 농업회사법인인 (주)삼무와 전시판매장인 삼무힐랜드를 운영했지만 지사 재직시절 뇌물수수사건에 휘말려 2년여 수감된 뒤 풀려났다. 삼무힐랜드는 수감기간 중 문을 닫았다.

 

제주삼다수와 관광복권, 제주국제컨벤션센터, 제주교역, 제주세계섬문화축제 등이 그의 지사 재직시절 작품이다. 현재 제주생태도시연구소 이사장직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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