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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현장-남기고 싶은 이야기]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26)

아내와 난 사실 사회복지 문제에 깊이 있는 지식이 없었다. 물론 먹고 살기에 급급해 살다보니 주변 이웃들을 돌아볼 기회가 적었다. 우린 어렵사리 살다 내가 공무원 생활을 시작하면서 그나마 생계를 꾸려가게 됐고 분에 넘치는 지위와 호사를 누렸다. 그저 하늘에 고마울 따름이다. 솔직히 말하면 도지사로 부임하기 전엔 어려운 이웃들을 어떻게 돌봐야 할 지도 몰랐고, 그저 푼푼이 생기는 대로 기부나 하면 될 줄 알았지 행동으로 나서지도 못했다. 그런 우리에게 괘종시계처럼 다가온 인생사가 있다.

 

돌이켜보니 사회복지에 눈을 뜨게 만든 건 큰 아이와 더불어 나눴던 시간들 때문이다. 큰 아이 용인(부산지법 판사 역임. 변호사·제주대 로스쿨 교수)은 내가 고시에 합격하기 전 농사를 짓고 살 무렵 태어났다. 덜컥 생긴 아들 덕(?)에 가족을 부양해야 할 의무에 놓인 내가 고시를 볼 수 밖에 없었던 이유다. 그러나 큰 아이는 선천성 심장판막증이란 병명을 안고 태어났다. 선거판에서 병역비리 의혹을 받은 아이다. 하도 기침이 잦고 열이 많았지만 우리 부부는 그걸 단순 감기로 알았다. 그러다 그 시절 제주시 칠성통에 있는 이동일 내과에 가서 물어보니 “수술하지 않으면 4년을 못 넘긴다”는 것이었다. 억장이 무너졌다. 돈은 궁했고 아이는 매일 아팠다. 분유를 살 돈은 꿈도 못 꿀 때인지라 그저 좁쌀 미음으로 먹여 살렸다. 그러다 고시에 합격하고 첫 근무지로 제주도청에 발령받아 받은 월급이 1만1300원이었다. 그 시절 쌀 한가마니가 5000원이다.

 

 

물론 우리로선 큰 돈이었다. 아내는 수술비를 마련할 생각으로 매달 3000원을 꼬박꼬박 적금을 부었다. 하늘이 도우셨던가? 큰 아이가 초등학교 1학년이 될 무렵 까지 아이는 생존했고, 어찌 어찌 수술비용이 만들어졌다. 또래 애들에 비해 유난히 몸이 부실해 기껏 체중이 14kg이었던 아이다. 지금도 선하다. 제주동교에 다니던 아이의 담임은 과거 제주도 행정부지사를 지낸 김호성 부지사의 아내였다. 그분의 따뜻한 마음으로 아이를 보살펴 주던 걸 잊을 수 없다. 그리고 어느 정도 돈이 모아졌다고 생각되자 아이를 서울대 병원으로 데리고 갔다. 서울대병원 이영균 박사 집도로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지금 내과의원을 따로 하는 강영민 박사도 그 당시 그 병원에 인턴으로 있으면서 많이 도와줬다. 지금도 고마운 마음 가눌 길이 없다.

 

그렇게 고맙게 잘 자라준 큰 아이는 대학 재학시절 우리 부부와 생이별해야 했다. 노태우 정권 시절 내가 마사회의 체육부 이관 문제로 박철언 전 장관에게 맞섰다가 미국으로 쫓겨 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큰 아이는 사법시험 1차에 합격했다. 대견스럽고 고마운 일이었다. 미국에 체류 중일 때도 아이 엄마는 합격을 기원하며 매일 기도를 올렸다. 그런데 아이가 2차 시험을 치르는 날이었다. 아들의 하숙집에 전화를 해보니 도대체 연락이 닿지 않는 것이었다. 직감적으로 무슨 변고가 생긴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걱정이 컸던 지라 우선 아내가 서둘러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그런데 찾아보니 기가 막혔다. 아들은 2차 시험도 치르지 않고 서울의 한 집창촌인 ‘청량리 588’의 한 쪽방에 쪼그려 있던 것이다. 어떻게 된 영문이냐고 물으니 아이의 답이 걸작이었다. “도서관에서 2차 시험준비를 하는데 죽 둘러보니 죄다 사법고시를 공부하는 사람들이었고, 면면을 보니 괜찮은 친구들이 많아 굳이 자기까지 법조인이 될 까닭은 없는 것 같아 치웠다”는 것이다.

 

그러고선 그 집창촌에서 하는 일이 요즘 ‘밥퍼 목사’로 유명한 최일도 목사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살자”고 죽이 맞아 노숙자들의 점심을 제공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집창촌 여성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도 찾고 있다”고 말했다. 아내는 가슴을 치며 말문이 막혀 버렸다. 나에게 자초지종을 알리는 전화가 왔고 나로선 노발대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추방되듯 현지 체류를 명 받았지만 농림부의 승인도 받지 않고 곧바로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날아왔다. 아들의 명운이 걸린 일이어서 아버지인 나로선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곤 아들에게 찾아갔다. “일단 집으로 가자”고 말했더니 이 녀석은 “그냥 아들 셋 중 하나는 없는 걸로 치면 안되겠습니까”로 되받았다.

 

정말 꾹 참았다. “일주일간만 아버지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난 뒤 그래도 네 말이 맞다면 네 길을 가라”고 하고 함께 시간을 보냈다. 아무런 승인도 없이 한국에 들어왔으니 농림부의 징계를 무릅쓴 행동이다. 하지만 내겐 직장을 잃는 것보다 아이문제가 더 급했다. 도무지 아이를 설득할 명분이 떠오르지 않다 문득 떠올랐다. “예수도 열 두 제자를 3년간 데리고 다니며 훈련시켰다. 그렇게 훈련시키고 세상에 내보냈다. 그런데 아무런 훈련도 안된 네가 세상으로 나간다고? 말이 되느냐”고 퍼부어댔다. 그러자 아들은 슬슬 말을 따르는 분위기로 바뀌었다. “충분히 스스로를 단련하고 훈련한 뒤 나서겠다”는 확약을 받고 다시 미국으로 떠날 수 있었다. 하지만 큰 아이는 그 후에도 고시 공부에 큰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힘겨운 이웃을 보살피겠다며 야학 선생 일에 매달렸다. 내가 93년 말 지사직에 부임할 때도 그랬다. 그러다 큰 아이는 뒤늦은 98년 사법고시에 패스, 판사의 길을 걸었다.

 

운명처럼 나를 일깨운 사건은 내가 지사직에 부임하고 난 뒤였다. 관선지사에 부임하고 나서 고작 보름여이던 1994년 1월14일 오사카를 중심으로 일본 관서지방에 거주하던 제주출신 재일동포 4개의 단체가 관서제주도민협회로 통합, 출범한 것을 축하하고자 일본으로 갔다. 허기진 배를 움켜 쥐고 먹고 살기 위해, 차별과 학대 속에서도 악착같이 일하며 힘들게 번 돈으로 고향의 부모와 자식, 친지들에게 학교를 지어주고, 전기·수도가 들어오게 하는 등 마을마다 집집마다 그들의 손이 닿지 않은 구석이 없기에 평소에도 어떻게든 고마움을 표하고 싶었다. 축하행사에 참석하고 난 뒤 잠시 담소를 나누는 자리에서 어느 재일동포가 나에게 이렇게 물어왔다.

 

“제주도 주택보급률이 얼마나 됩니까?”
“도 전체로는 94% 정도 되는데, 제주시만 보면 86% 쯤 됩니다.”
“이곳 오사카에 거주하는 동포들 중에 자기 집 있는 사람은 30%도 안 됩니다.”

 

그의 말이 내 가슴을 쳤다. 제대로 못 먹고, 제대로 못 쉬며 한푼 두푼 모은 보따리를 들고 고향 제주를 찾았던 우리 동포들이 그렇게 살고 있다는 사실이 내 가슴을 후볐다. 컨벤션센터는 구상단계에서부터 바로 그런 우리 동포들에게 무언가 희망의 빛을 던지려는 욕심에서 출발했다. 96년 12월 그 컨벤션센터 문제로 오사카를 다시 찾아갔을 때 난 또 한번 눈물을 흘렸다. 소위 민생(民生)이라고 불리는 일본정부의 생활보조금을 받으며 생계를 꾸리는 할머니들을 만나게 된 것이다. 화북이 고향인 당시 81세의 강공열 할머니와 오라동이 고향인 73세의 김희효 할머니였다. 어렵지만 깔끔하게 정돈된 방 한켠을 보고 ‘역시 우리 제주여인들’이란 강한 인상을 받았다. 안내하던 오사카 민단지부 한 간부는 이렇게 말했다. “이 분들은 고향에 돌아가고 싶어도 의탁할 곳이 없어 못 갑니다. 일본에 있으면 그나마 민생보조금이라도 받을 수 있고···. 우리 민단으로선 이 분들이 돌아가신 후 장례 치르는게 큰 문제입니다.”

 

김희효 할머니는 결혼 후 얼마 안 돼 혈혈단신으로 일본으로 건너 와 평생 공장에서 일하면서 번 돈을 고향에 다 보내주고 노년을 남의 땅에서 살고 있다고 말했다. “고향에 돌아가는 게 소원이지만 친척이나 자식에게 짐이 되지 않겠느냐”며 쓸쓸히 웃었다. 난 할머니에게 고기라도 사 잡수시라고 얼마의 돈을 드렸다. 인사를 하고 나오는 날 할머니가 붙들었다.

 

“고향 도지사가 와신디, 고만 이서게(왔는데, 가만 있어봐)”

 

그러더니 곱게 개어 놓은 이부자리를 들추어 꼬깃꼬깃 보관해 두었던 일화 2만엔을 꺼내 내게 내미는 것이었다. “도지사! 이걸로 담배 상 노놩 피와(담배 사서 나눠 피워).” 난 그만 울고 말았다. 눈물이 앞을 가렸다. 그렇게 죄송한 마음이 든 적이 없다. 이들을 위해 도지사랍시고 난 무엇을 했단 말인가? 무엇을 하려 한단 말인가?

 

 

귀국하는 즉시 난 재일동포들을 위한 시책을 개발하도록 관련부서에 지시했다. 2차 세계대전 중 강제징용으로 일본에 끌려갔다가 사망한 제주인의 유골봉환사업, 불우한 재일동포 고향 방문사업, 그리고 재일동포를 위한 양로원 건립 운영이 추진사업으로 확정됐다. 이 가운데 재정적으로 가장 어려운 과제가 재일동포를 위한 양로원 건립운영이었다.

 

도내 양로원의 수용실태가 수용능력의 40% 수준 밖에 안 되는데 새로운 양로원을 건립한다는 것도 문제지만 재일동포들의 오랜 삶의 수준에 맞춘 시설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런 사업을 할 수 있는 개인이나 민간단체를 물색해 봤지만 선뜻 나서는 이도 없었다. 고민 끝에 마침 사회복지법인을 설립하고 양로사업과 장애인 복지사업을 준비 중에 있는 ‘은혜마을’ 재단측과 이 문제를 협의해 보기로 했다. 아내도 이 사회복지 법인 설립에 관여했고 재단의 이사로 있어 논의하기가 쉬웠다.

 

‘은혜마을’을 이야기하려면 1994년 영송학교 졸업식과 95년 6·27 지방선거 이후의 일들을 떠올릴 수 밖에 없다.

 

큰 아이의 심장수술 기억과 둘째 아이의 비정상적인 팔 때문에 아내는 장애인에게 특별한 애정을 갖고 있었다. 아내가 도지사 부인 자격으로 영송학교 졸업식에 참가한 장면이다. 아내는 학부모들에게 “아이의 졸업을 축하드립니다”고 인사를 건넸다가 학부모들이 “무슨 축하 말입니까? 내일부터 우린 집에서 감옥살이 할 건데···”라고 해 몹시 민망했다는 것이다. 졸업한 장애인들이 더 이상 보살핌을 받을 곳이 없다는 소리였다. 그래서 아내는 어떻게든지 유아와 18세이상 장애인들을 위한 복지시설을 만들고 싶었다.

 

제주 영락교회에서 담임목사로 지내다 서울 무학교회로 떠났던 김창근 목사가 95년 무더운 여름날 아침 서울 온누리교회의 하영조 목사와 함께 예고 없이 집무실로 찾아왔다. 김 목사는 “6월25일 탑동유세의 흥분을 아직도 잊지 못하겠다”며 “앞으로 제주에서 좋은 일 하고 싶어하는 좋은 사람을 소개해 주겠다”고 말했다. 얼마 후 한상훈 사장이라는 사람이 도지사실로 찾아왔다. 두 목사가 소개해주겠다고 했던 이로 그 때야 난 그가 서귀포 대유실업의 사장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선친의 제주사랑 이야기와 그 뜻을 받들어 땅을 지키고 있노라면서 자기는 미국에서 사업을 하고 있기에 주로 미국에 머무는 편이라고 말했다. 그리곤 그해 12월 한 사장 부부는 아내와 함께 우리 부부를 초청, 남서울호텔(현 제주시내 더 호텔)에서 저녁식사를 하며 유익한 시간을 가졌다. 한 사장의 부인 Y씨는 모 대기업 회장의 딸이었지만 불행하게도 ‘카와사키’라는 불치의 병을 갖고 태어난 아들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하와이로 건너가 어렵사리 기적처럼 병을 고쳤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감사의 마음으로 어려운 이를 돕는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들은 제주에 있는 소년소녀가장을 돕고 싶어했다. 난 아내의 뜻도 있었기에 더 시급한 일은 장애인을 위한 복지시설 운영이라고 화답했다. 아내도 그 시절 장애인들이 처한 상황을 소상하게 말했다. 한 사장 부부는 곧이어 필요한 돈을 물어봤다. 아내는 구체적으로 살펴본 것은 아니지만 “20억~30억원은 있어야 가능하기에 어려운 일”이라고 답했다. 그들은 선뜻 그 일을 했으면 좋겠다면서 우선 20억원 규모의 사업계획을 구상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나로선 의외였다. ‘계산을 모르는 사람들’과 ‘계산이 없는 사람들’의 만남이었다.

 

그후 한 사장은 실제로 20억원을 송금해왔다. 사회복지법인을 위한 재단을 만들기로 했다. 재단 출연자들이 기독교인이고 본인들이 드러내길 원하지 않아 개신교 장로와 집사인 분, 건축사이며 카톨릭 신자인 분, 그리고 아내로 재단이사회를 구성했다. 재단이사장직엔 제주시내에서 동장(洞長) 경험이 많아 사회복지 업무에 밝은 고희식 성안교회 장로가 선임됐다.

 

한 사장도 열심이었다. 당초 그는 1차로 20억원을 아내에게 보냈다. 그러나 금융실명제에 따라 돈은 돈 주인의 명의로 예금돼야 하기에 우선 한 사장 명의로 예금하도록 되돌렸다. 그후 한 사장은 10억원을 추가, 당초 약속했던 20억원보다 더 많은 30억원을 출연했다. 이 출연금을 바탕으로 1996년 5월17일 사회복지법인 ‘은혜마을’이 탄생했다. 그들의 사심 없는 뜻에 감명을 받은 우리는 시설부지를 우리가 재단에 기증하기로 하고 어머니가 생전에 아끼시던 감귤밭 1,611평을 친구 양세훈의 소유한 제주시 봉개동 임야 4,000평과 맞바꿔 현물로 재단에 출연했다. 30억원에 비견할 바는 못 되지만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돌아가신 어머니의 사랑과 정성이 재단에 출연되는 것이라고 아내와 생각했다.

 

재단을 우선 설립했다. 재단이사회는 그 시절 노인요양시설과 장애인시설 중 어느 걸 우선 할 것인지를 놓고 논의를 거듭하고 있었다. 물론 아내의 뜻은 영송학교 졸업식에서 느낀 바도 있었기에 장애인 시설이 우선이었다. 그 방향으로 논의가 진행되고 있을 무렵 일본 오사카를 다녀온 내가 97년 1월 13일 이사들을 초청, 재일동포들을 위한 시설이 필요하다는 점을 간곡하게 설명해 노인요양 시설로 방향을 틀었다. 물론 아내는 개인적으로 서운해 했다. 그만큼 장애인 사업은 늦어질 수 밖에 없었지만 나로선 도움만 받았던 재일동포들을 위한 시설을 민간 차원에서 만들 수 있어 보람과 안도감(?)이 한데 어우러져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소외된 이웃을 알게 된 일화는 또 있다. 1994년 4월20일이다. 그날은 서울을 다녀오면서 아침 첫 비행기로 제주로 돌아와 오전 8시40분쯤 도청에 출근했다. 출근해보니 으레 오전 8시쯤 내가 나오는 줄 알고 그 시간에 맞춰 도지사실로 찾아온 사람이 있었다. 지체장애인협회 제주도지부장 한태만씨였다. 40분이 넘도록 나를 기다린 것이다.

 

“한 회장! 아침 일찍 웬일이요?”
“나 한잠도 못 자수다(잤습니다).”
“무사(왜)?”
“지체장애인들이 오늘 시민회관 행사 끝나면 데모허켄 햄수다(데모한다고 합니다). 말리단 보난(말리다 보니) 밤새 소주 먹당 온겁주(먹다가 온 거죠).”

 

그러면서 그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 사연을 들어보니 지체장애인들이 운전면허시험을 치르기 위해선 불편한 몸으로 비행기 타고, 배 타고 광주 등지로 나가서 시험을 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제주도 운전면허시험장에 지체장애인들을 위한 자동운동능력측정기가 없어 벌어진 일이었다. 대략 1억원이면 구입할 수 있는 장비인데 지난 몇 년간 운전면허 소관청인 지방경찰청에선 중앙에서 예산배정이 안된다는 이유로 설치를 미루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도는 경찰청 소관이지 지방행정 책임이 아니라는 이유로 관심조차 안 갖고 있었다. 이 때문에 참고 참던 장애인들이 ‘장애인의 날’ 행사에 맞춰 지방경찰청에 몰려가 시위를 하기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오전 10시 시민회관에서 열린 ‘장애인의 날’ 기념행사에 참석한 나는 축사 말미에 “도지사가 책임지고 측정기를 구입해 면허시험장에 배치되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도민의 신체적·경제적 부담을 감안하면 자치단체가 구입해 지방경찰청 면허시험장에 기증할 수도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당연한 판단이다. 하지만 격앙된 표정과 목소리는 “무시거랜 고라도(뭐라고 말해도) 데모는 허쿠다(하겠습니다)”였다. 못 믿겠다는 소리였지만 난 약속을 지켰다. 그 조그만 사건이 계기가 돼 난 그 후로 틈나는 대로 소년소녀 가장과 독거노인 등을 찾아다니며 실태를 점검했다. 실질적인 복지시책을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곳곳을 찾아다니며 얻은 결론은 지역의 현실이나 특성을 감안하지 못한 정부의 사회복지 시책이 너무도 획일적이고, 생계유지 차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더욱이 기계적인 기준과 규정을 적용, 실질적으로 법과 제도의 보장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 오히려 우선순위에서 밀려나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 시절 ‘제주형 사회복지 시책 개발 용역’을 진행한 배경이다.

 

 

사실 그 당시 내가 파악한 바로는 제주의 소외된 이웃들은 정책과 제도의 영역 안에서 보단 일부 독지가들의 도움으로 그나마 삶을 영위하고 있는 바나 다름 없었다. 결례지만 실명을 들면 이렇다. 돌아가신 서귀포의 강창학씨는 사재를 털어 성요셉양로원을 건축하고 카톨릭에 기증했다. 수많은 사재를 쾌척했던 그는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심장병 어린이들을 돕는 일을 지속했다. 새마을부녀회는 도 전역에 홀로 사는 노인과 결연해 ‘며느리봉사단’을 만들어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서귀포의 김영탁씨가 만든 건축기술봉사회도 기억한다. 건설회사를 경영하던 그는 목수 등 건축관련 일을 하던 이들과 힘을 모아 이 단체를 만들었고, 그 단체는 어려운 이웃들의 집을 수리하거나 새로 지어주는 일을 지금도 하고 있다. 그 때 그 말을 전해들은 제주라이온스클럽의 고 양태일 제주지구 총재는 97년 말 회원적립금 7000만원을 내놔 도비 1억5000만원을 보태 독거노인 360여가구의 집수리에 필요한 자재를 제공할 수 있도록 했다.

 

세종의원 김순택 원장은 지금도 봉사에 열성인 것으로 알고 있다. 그 시절 그는 정기적으로 도 전역을 돌며 나병으로 불리는 한센병 환자들을 돌봐주고 있었다. 우리 부부 역시 마사회 사건으로 이역만리 미국으로 쫓겨났을 때 음성 나환자들의 눈물겨운 격려편지를 받았던 터라 나환자 분들에겐 각별한 마음이 있다. 나환자 하면 빼놓을 수 없는 분들이 도내 카톨릭 계의 다미안봉사회다. 그들은 매년 여름 소록도로 가서 이발과 미용·도배·청소·풀베기 등의 봉사활동을 펼친다. 그랬기에 나로선 언젠가는 그들의 봉사활동에 참여하리라 마음을 먹었다.

 

기회는 왔다. 민선 지사 시절이던 97년 8월4일 다미안봉사회 회원들은 물론 아내와 함께 소록도로 떠났다. 나는 도배조에 배속돼 일했고, 아내는 미용조 보조로 일했다. 놀라운 것은 그 시절 현장에 가 보니 조문부 제주대 총장이 먼저 와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이발조에서 머리 감기는 일을 맡았다. 그의 행동을 보며 속으로 많은 감명을 받았다. 하지만 무엇보다 3박4일의 봉사활동을 펴면서 다미안봉사회가 그곳을 다녀가는 봉사단체 중 단연 최고였다는 사실을 알았다. 지금도 천사 같은 눈망울의 그들이 그립다.

 

 

그렇기에 그 시절 ‘사전선거운동’으로 많은 오해가 있었지만 아내는 그런 마음으로 도내 경로당을 찾아 노인들을 만나는 걸 즐겼다. 집안의 어르신 같고, 부모님 같은 분들을 정성껏 모신다는 그런 마음이었다. 그런데 하루는 퇴근 후 지사공관에 가 보니 수많은 여성손님들이 몰려와 있었다. 누군지 알아보니 제주시 건입동 산지천변에서 일하는 분들이라고 들었다. 아내는 그저 ‘어려운 자매들’이라고 말했다. 나중에 알았다. 그들은 산지천 변에서 성매매로 생계를 꾸려가던 이들이었다. 그날 저녁 아내는 나에게 말했다. “용인이 아빠! 난 용인이가 왜 그랬는지 이해할 것 같아.” 내심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을 했지만 아니나 다를까였다. 아내는 그들의 실상을 낱낱이 나에게 말했다. 그 바람에 나 역시 건입동 산지 주변을 한낮에 찾아가 봤다. 놀랍게도 자녀를 둔 이들이 많았다. 마음이 답답했다. 도청으로 돌아와 곰곰이 생각하다 소관 국장을 불렀다. “일정기간 기술훈련을 시키고 거처라도 마련할 방법이 없는 지 찾아보라”고 지시했다. 제주를 떠나 뭍에서 기술훈련을 거치게 한 뒤 취업을 알선해 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선불금’으로 그들은 사실상 붙잡혀 있는 신세나 다름없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현실을 알아야 했고, 수도 없이 많은 사례를 접해야만 했다. 아내는 우리가 살며 배우고 깨우쳐야 할 분야로 ‘사회복지’란 주제에 일찍 눈을 떴다. 98년 내가 도지사직에 낙선하자 아내는 “이제 맘 놓고 공부를 할 수 있겠구나”란 생각을 한 것 같다. 지사로 있을 때 아내와 같은 여러분들의 그런 순수한 뜻을 번듯한 정책과 제도, 시설로 바꿔내지 못한 것 같다. 지금도 아픈 우리의 이웃들에게 죄스러운 마음이다.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

 

=1942년생. 오현고를 나와 육군사관학교 4년을 중퇴, 1967년 5회 행정고시에 합격해 공직자로 입문했다. 제주도 기획관, 주이탈리아 한국대사관 농무관, FAO(국제식량농업기구) 한국교체수석대표, 농림수산부 축산국장, 농업구조조정정책국장, 기획관리실장을 거쳐 YS정부 시절인 1993년 12월 제29대 제주도지사로 취임했다.

 

이어 첫 민선 지방선거인 95년 6·27선거에선 무소속으로 출마, 당선돼 31대 지사를 역임했다. 그러나 98년, 2002년 두 번의 제주지사 선거에선 연거푸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그후 축협중앙회장을 거쳐 친환경 농업회사법인인 (주)삼무와 전시판매장인 삼무힐랜드를 운영했지만 지사 재직시절 뇌물수수사건에 휘말려 2년여 수감된 뒤 풀려났다. 삼무힐랜드는 수감기간 중 문을 닫았다.

 

제주삼다수와 관광복권, 제주국제컨벤션센터, 제주교역, 제주세계섬문화축제 등이 그의 지사 재직시절 작품이다. 현재 제주생태도시연구소 이사장직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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