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9 (금)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검색창 열기

[격동의 현장-남기고 싶은 이야기]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31)

민선 2기 도지사 선거에서 낙선한 뒤 초야에 묻혀 지냈다. 플러스생활복지연구소에서 강의를 하거나 젊은 세대들과 복지문제를 거론하며 그저 우리 고향 제주도의 ‘행복한 생활공동체’를 머릿속에 그렸다. 종중(宗中) 땅을 개간해 만든 녹차밭은 그 시절 내 땀이 스며들던 일터였다. 1999년 6월 하순 그날도 다원(茶園)을 조성할 예정인 교래리 밭 개간현장을 다녀오던 날이었다. 차를 몰고 막 교래마을을 벗어나는데 갑자기 까닭 모를 슬픔이 내 마음 속에 밀려왔다. 앞을 가린 눈물 때문에 운전을 계속할 수 없었다. 길가에 차를 세웠다. 가슴 속 울음이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하나님! 나의 하나님! 일하고 싶습니다."

 

바로 그 때 전화벨이 울렸다. 축협중앙회 이범섭 부회장이었다. 정부가 농·축협중앙회 강제통합을 추진하고 있는데 이에 동조하는 축협중앙회장을 축협조합장들이 불신임결의로 해임했다는 것이다. “신 지사님을 축협중앙회장으로 추대하겠으니 이 어려운 시기에 와서 도와 달라”는 부탁이었다. 그는 그러면서 원로 조합장들이 나를 만나러 제주도로 내려올 예정이라고 말했다. “그럴 필요는 없다. 며칠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말했다.

 

 

이 부회장과의 통화를 끝내고 10년 전 ‘마사회 이관’사건을 떠올렸다. 1991년 농림부 축산국장 시절 ‘6공의 황태자’ 박철언 전 체육부 장관에게 맞섰다가 미국으로 쫓겨 갔던 일이 생각났다. 농민들의 자산인 마사회를 농림부가 관리하지 못하고 체육부로 넘어간다는 것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 사표까지 쓰면서 저항했던 것이다. 이례적으로 당시 강영훈 국무총리가 ‘신구범 국장을 문책하라’는 지시까지 하는 상황으로 일이 번져 결국 내가 미국행을 택할 수 밖에 없었다. 그때 전국의 축협조합장들은 들고 일어나 ‘마사회 이관 반대’ 국회청원에 나섰고, 나에 대한 문책지시에도 항의했다.

 

10년 전 나를 도왔던 축협조직이 지금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그들의 요청을 거절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서울로 갔다. 그러나 막상 서울로 가보니 추대가 아니라 경선이었다. 출마희망자도 나를 포함해 6명이나 됐다. 고민을 거듭했다. 하지만 기왕 받아들이기로 한 마당에 정정당당히 임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판단했다. 강덕종 전 축협 제주도지회장을 서울로 불러들였다. 오경욱 양돈조합장을 비롯해 제주도내 5개 축협조합장들은 협력하겠다는 뜻을 알려왔다.

 

경선 참여를 결정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우선 농·축협 중앙회 통합반대는 이 나라 축산업을 지키는 것은 물론 정부가 통제하는 협동조합이 아니라 농어민 등 조합원이 주인 역할을 할 수 있는 올바른 협동조합 개혁을 위해 필요한 기회라고 생각했다. 또 추대한다면 축협중앙회장을 맡고, 경선이라면 피한다는 건 아무래도 내 방식이 아니었다. 물론 전국 192명의 축협조합장 가운데 확실한 지지표는 제주도내 조합장 5표 밖에 안 돼 경선에서 이긴다는 보장도 없었다.

 

하지만 농림부에서 잔뼈가 굵으면서 축산국장 때는 축협을 담당했고, 농업정책국장 시절엔 농협을 담당했으며, 기획관리실장 때는 청와대 박재윤 경제수석과 손잡고 협동조합 개혁을 추진한 나로선 필연이기도 했다. 제주도지사로 임명되는 바람에 협동조합 개혁 추진을 중도에 포기했던 나로선 농·축협 통합 문제가 불거진 마당에 비록 농·축협 통합법안이 국회에 이미 제출돼 있다 하더라도 넘어갈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평소의 지론인 신(信)·경(經) 분리와 연합회에 바탕을 둔 협동조합 개혁 구상을 실현할 수 있는 기회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나를 아끼고, 나와 가까웠던 사람들은 대부분 나의 축협중앙회장 출마를 만류했다. “좀 있다가 도지사 다시 해야 하는데···만일 축협중앙회장 선거에서 낙선하면 신구범은 완전히 끝나는 거야.” 그렇게 나를 뜯어 말렸다.

 

축협중앙회장 선거에 나섰지만 선거운동은 고작 8일간 했다. 7월9일이 축협중앙회장 선거일인데 7월1일부터 그저 바람처럼 경기도에서 시작해 강원도까지 고속도로를 달리는 차 안에서 관내 축협조합장들에게 전화로 출마신고를 하며 한 바퀴 돌아본 게 전부였다. 이틀동안의 휘발유와 숙박비 그리고 밥 값이 선거비용의 전부였다.선거 결과 난 투표자 185표 가운데 121표를 얻어 축협중앙회장으로 당선됐다. 당선되면 기쁨과 환호가 있기 마련인데 당선자 발표를 듣는 순간 기쁨보다는 어떤 보이지 않는 힘에 이끌려 간다는 비장함이 나를 짓눌렀다. 투표했던 조합장들도 승자와 패자로 나뉜 게 아니라 함께 어려운 길을 가야 할 동지를 맞이한다는 긴장감에 휩싸여 있었다.

 

알다시피 협동조합의 원칙은 1844년 영국 로치데일에서 설립한 로치데일 공평 선구자 조합(The Equitable Pioneers of Rochdale Society)이 정한 것에서 비롯됐다. 국제협동조합연맹(ICA)은 로치데일 조합의 원칙을 준용해 7대 원칙을 세우고 있고, 이게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고유 원칙이다. 가입자유, 민주적 관리, 경제적 참여, 자율과 독립, 교육·훈련 및 정보의 제공, 협동조합 간 협동, 지역공동체 참여. 그게 7원칙이다.

 

그러나 1961년 군사쿠테타 정부는 농협조합법을 제정, 중앙회장을 대통령이 임명하는 등 정부가 통제하는 소위 ‘관제 협동조합’의 시대를 열었다. 그런데도 그 이후 민주화 과정에서도 심지어 DJ 정부에서도 협동조합에 대한 정부의 통제를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한 마디로 구조조정을 구실로 농·축협중앙회를 단순·강제 통합해 버리는 것으로 방향을 잡은 것이다. 오히려 농·축협 등 우리나라 협동조합의 과제는 협동조합을 정부의 통제에서 해방시켜 농·어민에게 되돌려 줘야 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선 비대한 중앙회를 없애던가, 슬림화하는 게 더 맞는 말이었다. 신용사업과 경제사업도 분리해 협동조합이 역할이 중앙 중심이 아닌 일선 중심, 그리고 신용사업 위주가 아닌 경제·지도사업 위주로 개편돼야 했다.

 

1997년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후보의 대통령 당선 후 설치된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는 협동조합개혁방안을 100대 국정과제에 포함시켰다. 이에 따라 농림부에서는 98년 4월 협동조합개혁위원회를 설치하고 7월31일 이 위원회가 건의한 3개 방안 중 세 번째 안을 채택, 강제통합을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3개안 중 1안은 현행체제 내에서 독립사업부제 강화, 2안은 기능별 분리, 통합방안(각 경제사업 별 연합회와 협동조합은행), 제3안은 현행 각 중앙회를 단순통합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농림부가 채택한 제3안은 협동조합개혁위원회에서 논의조차 한 적이 없던 사안이다. 협동조합 원칙에서 볼 때 제2안이 가장 바람직한 개혁안이었지만 통제의 유혹을 버리지 못한 정부가 이를 택하지 않은 건 처음부터 갈 길을 정하고 ‘짜고 친’ 요식행위라고 볼 수 밖에 없었다.

 

농협중앙회를 제외한 나머지 조합 중앙회의 저항은 거셌다. 특히 축협중앙회에서는 임시총회를 거쳐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하는 한편 통합안에 동조한 박순용 회장을 불신임 해임해 버렸다. 검찰은 그때쯤 감사원 감사결과를 근거로 축협 중앙회 임직원과 조합장에 대한 대대적인 수사와 내사, 계좌추적에 착수해 5월3일 229명을 입건하고 72명을 구속했다. 감사원 감사와 검찰의 수사 등 공포 분위기를 만들어 놓은 다음 정부가 구조조정을 빌미로 농·축협 통합을 강제로 밀어붙이고 있던 때에 내가 축협중앙회 회장으로 취임하게 된 것이다.

 

7월9일 축협중앙회장에 당선된 현장에서 취임식까지 마치고 다음날 오전 10시 김성훈 장관을 만나러 농림부로 갔다. 간단히 인사를 건네고 신임 축협중앙회장으로서 농·축협 통합 추진의 원칙에 어긋난다고 말하고 재검토를 할 수 있도록 시간을 달라고 요구했다. 감사원 감사와 검찰 수사 등 공포분위기 속에서 통합을 추진하는 이유도 물었다. “회장에 당선되도록 나도 도왔어요”라고 말하던 김 장관은 짐짓 안색이 달라졌다. “신 회장! 농·축협 통합을 장관이 하는 것이라는 인식은 곤란해요. 내가 하는 게 아닙니다. 빅딜(Big Deal)의 일환이요. 나도 받고 싶지 않은 독배(毒杯)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협동조합 개혁에 장관이 직접 간섭하기 싫었기에 지난해 7월27일 농·축·인삼협 중앙회장에게 9월 말까지 서로 협의해서 공동으로 정부에 안을 내달라고 했고, 그 후에 11월과 12월 두 차례나 연기해 주었는데도 불구하고 합의안 도출에 실패, 결국 해를 넘겨 99년 2월20일 농·축협중앙회장이 결별을 선언하고, 언론으로부터는 오히려 농림부 장관이 개혁에 소극적이라는 지적을 받기까지 했다고 그동안의 과정을 장황하게 설명했다. 더욱이 그는 축협중앙회 내에도 대부분 중앙회 통합을 바라고 있지만 노조, 비대위, 협의회 등 일부 조직이기주의 세력이 있으니 자체 조직 내의 의견을 잘 확인해보라고 충고까지 해주는 것이었다.

 

내가 다시 물었다. “장관님! 지금까지 그렇게 인내하고 기다려 준 정부가 이번 8월 임시국회에서 이 법안을 꼭 처리하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라도 있습니까?” “신 회장! 내년에 있는 총선 때문에 이번 회기에 처리하지 못하면 정기국회에서는 처리가 불가능하고, 그렇게 되면 협동조합 개혁은 물 건너가는 거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기조로 하는 ‘국민의 정부’ 농림부 장관의 말이었다. 장관실을 나오면서 다짐했다. ‘오만과 독선, 그리고 자리에의 집착이 시장개방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우리 축산농가에게 칼이 돼 고통을 주고 있다. 원칙과 정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지 않은가. 앞으로 싸움이 있을 뿐이다.’

 

 

축협중앙회장 취임 후 첫 직원조회에서 난 농·축협 통합법안 국회 통과 저지를 위한 의지를 천명하고, ▶무한 책임 봉사 ▶협동조합 문화 복원 ▶기업품질 경영 ▶자존, 질서 그리고 원칙을 강조했다. 전임 축협중앙회장의 불신임 해임, 정부의 눈치를 보는 임원·간부와 노조를 중심으로 한 직원간의 갈등 등으로 인해 무너져버린 축협중앙회 지휘부의 책임과 권위 그리고 신뢰를 복원하고, 이를 바탕으로 축협중앙회 지휘부가 책임을 지고 일할 수 있도록 본래의 기능으로 되돌아갈 것을 요청했다. “우리가 정부에 원칙을 요구하려면 우리 스스로 원칙을 지켜야 합니다.”

 

건물 밖에 내걸었던 붉은 색 현수막을 걷어내고 ‘단결투쟁’이라 적힌 머리띠도 풀고 정상업무로 복귀하는 직원들을 바라보면서 “누가 이 성실한 축협의 일꾼들을 분노하게 했는가”란 생각으로 몸을 떨었다.

 

정치적인 해결 밖에 없다고 판단한 나는 바로 정치권 그리고 그 주변인사와의 접촉에 나섰다. 물론 언론사도 대상에서 제외하지 않았다. 모 일간지를 찾아갔을 때의 일이다. 마침 편집국장이 내가 농림부에 근무하던 시절 출입하던 기자여서 털어놓고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그는 우리와 관련된 부서의 간부들을 불러내 이야기를 함께 듣도록 배려까지 해줬다. 내 말을 다 듣고 난 간부들이 한마디씩 거들었다.

 

“달걀로 바위치기요, 정부가 하라는 대로 하는 게 좋을거요.”
“신 회장! 다시 제주도지사나 하지 뭐 하러 이런데 끼어 들어요.”

 

나는 국회 농림해양수산위원회에서 농·축협 통합법안이 통과되던 8월12일까지 김대중 대통령을 제외하곤 정치권의 거의 모든 사람을 만났다. 미친 놈처럼 뛰어다닌 것이다. 만나는 형식도 면담요청, 조찬, 오찬, 만찬, 기습방문 등 다양했다. 내가 만났던 주요 인사들이 농·축협 통합문제와 관련, 원칙적인 협동조합 개혁이 되도록 해달라는 나의 요청에 대해 대답한 내용들은 열거하면 이렇다.

 

▶김종필 국무총리=7월13일 오후 1시 총리 집무실로 가 만났다. 그는 반갑게 맞아 주면서 내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농·축협 통합 추진에 문제가 있는 걸 알고 있다고 했다. 준비해 간 보고서로 설명하면서 “당사자인 농·축·인삼협 중앙회가 실질적인 협동조합 개혁방안을 마련할 수 있도록 3~6개월 시간을 달라”고 했다. 그는 “농림부 장관도 정부에 공동건의하면 검토해 보겠다고 했다니 한번 농·축·인삼협 3자가 협의해서 안을 만들어 보라”고 하면서 “보완하는 안이지?”하고 반문했다. 나는 “기왕이면 총리께서 농림부 장관에게 지시해 주셨으면 한다”고 건의했다. 나는 그의 집무실을 나오며 이렇게 말했다. “만일 이 농·축협 통합법안을 이대로 통과시키면 국민의 정부는 대한민국 협동조합 사상 가장 부끄러운 법을 만든 정부가 될 것입니다.”

 

▶이만섭 국민회의 총재대행=“어려운 문제이기는 하나 우리 정책위 의장이 머리가 좋으니 그와 상의하시오.” 이 총재대행의 말을 듣고 나오다가 남궁진 대표비서실장이 자리에 있기에 그에게도 설명을 했더니, 실무적인 설명자료를 요구하면서 후에 자료를 보고 이해가 되면 대행과 논의하겠노라고 약속했다. 그러나 그후 그는 나를 만나는 것을 피했다.
▶한화갑 국민회의 사무총장=“신 지사! 당신 판 깨려고 왔지?”
▶박상천 총무=“국무회의 통과해서 법안이 국회에 계류 돼 버렸는데 어떻게 하란 말이야. 국회로 넘어오기 전에 손을 썼어야지. 난 몰라.”
▶김원길 정책위의장=“정균환 의원하고 의논해 보세요.”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7월15일 오후 2시 그의 집무실에서 만났는데 변정일 의원과 이강두 의원이 배석해 줬다. 조용히 보고를 듣고 난 그는 통합의 문제점이 무엇이냐고 물어보고, 원칙적인 얘기 속에 신중한 입장을 피력했다.
▶이상득 정책위의장=“통합법안에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농촌지역 국회의원들이 농협 쪽을 의식할 수 밖에 없지 않겠나. 그러나 해 봅시다.”
▶신경식 사무총장=그는 내게 한나라당의 ‘정책발표’ 시안을 보여주면서 “한나라당은 반대할 것이요”라고 말했다.

 

▶박태준 자민련 총재=“왜 충분한 사전협의도 없이 농림부가 법안을 국회에 냈나. 검토해보지.” 그는 농·축협 통합법안이 국회에서 통과된 이후 내가 다시 찾아간 자리에서 이긍규 원내총무가 “이 통합법안은 11개 개혁법안을 하나도 통과시키지 못하게 된 국민회의 박상천 총무가 대통령에게 보고할 게 하나도 없으니 옷 로비 특검제, 김종필 국무총리 불신임결의안과 연계해서 통과시켜 달라고 사정하기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라는 말에 굉장히 화를 낸 적이 있다.
▶김현욱 사무총장=“충남은 축산지역이요, 내가 축산인들에게 신세를 많이지고 있는데 총리께 잘 건의해서 축협회장의 뜻이 이뤄질 수 있도록 할 것이요. 신 회장은 내가 농림부 시절부터 잘 아는데 걱정 마시오.” 그러나 막상 농·축협 통합법안을 통과시키기로 자민련이 국민회의와 합의한 8월12일 오전 자민련 당사로 그를 찾아갔을 때 그는 “나는 그동안 최선을 다했다는 것만 이해해 주시오”하면서 등을 돌렸다. 그는 내가 국회에서 할복, 여의도 성심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한밤중에 찾아와 내 침대 곁에 조용히 서 있다가 간 사람이다.

 

 

▶김정길 청와대 정무수석=불쾌해 하면서 원칙론만 이야기하는 그에게 나는 강한 어조로 얘기했다. “농·축협 통합법안은 위헌소지도 있고 추진과정에서도 인권침해가 많이 있습니다. 정부가 만약 이를 강행한다면 이에 따른 불행한 사태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정부가 책임져야 합니다.”
▶김성재 청와대 민정수석=장애인이면서 개신교 목사이기도 한 그를 만났을 때 그는 이미 농림부와 농협으로부터 그쪽 입장의 설명을 들은 것 같았다. 그는 축협중앙회는 10·26 이후 전두환 정권 때 정치적 장난으로 농협중앙회로부터 분리된 것이 아니냐고 지적했다. 그러나 농·축협 통합안과 축협이 지적하고 있는 문제를 중심으로 하는 통합반대안을 민정수석실에서 객관적으로 비교검토해 보고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농·축협 단순통합이 문제가 있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이를 재검토하게 되면 마치 국민의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전체 개혁체제가 무너지는 것으로 청와대에서는 인식하고 있습니다.”

 

▶김상근 목사(제2건국운동본부 기획단장)=기독교인인 최준구, 엄원섭 조합장과 함께 만난 자리에서 그는 김영진 국회 농힙해양수산위원장의 후원회장을 맡고 있다면서 “우선 국회에서 신중하게 이 법안을 처리하도록 요청하고, 민정수석비서관이 농·축협 중앙회의 통합·반대 두 안에 대한 판단서를 (대통령에게) 보고하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그와 대화하는 가운데 김성훈 장관이 한국농업경영인연합회를 시켜 청와대 쪽에 엄청난 로비를 하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김진홍 목사=그가 시무하고 있는 경기도 화성군 광양만 두레마을의 할빈교회로 아내와 함께 찾아가 주일예배를 드린 후 그를 만났다. 그는 두레마을을 운영하면서 협동조합에 관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내 설명을 다 듣고는, “정부가 왜 그러지?” 하면서 “끝까지 싸울 거지요?”라고 묻고는 협력할 길을 찾아보겠노라고 했다.

 

▶김영진 국회 농림해양수산위원회 위원장=“서로 양보하는 타협안을 만들어서라도 무난하게 이번 임시국회에서 통과시키는게 좋을거요. 대통령의 의지가 확고합니다”라고 말하는 그에게 나는 통합법안을 심의하려면 축협중앙회가 청원한 입법안도 병행심의해야 함을 요청하고, 만일 정부안이 그대로 통과된다면 ‘그것은 법도 아니’라고 말했다.
▶정대근 농협중앙회장="통합되더라도 기존 축협중앙회와 지역·업종조합의 권익은 보호할 것입니다. 협동조합은 공법인입니다"라고 내게 말했던 그를 나는 2007년 12월 초 내가 수감된 서울구치소에서 만났다. 뇌물수수로 감옥에 온 그는 나를 보더니 "신 회장! 나는 죄 없어요. 농협은 공법인도 아닌데 뇌물죄라니요?“라며 울음을 터뜨렸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했다. 정말 수도 없이 많은 사람을 만났다. 축협 임직원들과 조합원들이 차가운 길바닥에서 메아리 없는 외침을 하도록 하는 건 나의 도리가 아니었다. 단순히 농·축협 통합을 반대하는 게 아니라 이 기회에 협동조합 자체의 전면적 개혁을 원하던 나로선 ‘이상한’ 길로 일이 흘러가고 있는 걸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상황은 점점 백척간두로 몰려가고 있었고, ‘개혁’이란 전가(傳家)의 보도(寶刀)를 쥔 정권은 그저 닥치는 대로 칼날을 휘두르며 그 기세를 올리고 있었다. 퇴로가 없었다. 굴복과 저항의 갈림길에서 난 분연히 맞서는 저항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 그게 축협중앙회장인 나의 숙명이었다. <32편으로 이어집니다>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

 

=1942년생. 오현고를 나와 육군사관학교 4년을 중퇴, 1967년 5회 행정고시에 합격해 공직자로 입문했다. 제주도 기획관, 주이탈리아 한국대사관 농무관, FAO(국제식량농업기구) 한국교체수석대표, 농림수산부 축산국장, 농업구조조정정책국장, 기획관리실장을 거쳐 YS정부 시절인 1993년 12월 제29대 제주도지사로 취임했다.

 

이어 첫 민선 지방선거인 95년 6·27선거에선 무소속으로 출마, 당선돼 31대 지사를 역임했다. 그러나 98년, 2002년 두 번의 제주지사 선거에선 연거푸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그후 축협중앙회장을 거쳐 친환경 농업회사법인인 (주)삼무와 전시판매장인 삼무힐랜드를 운영했지만 지사 재직시절 뇌물수수사건에 휘말려 2년여 수감된 뒤 풀려났다. 삼무힐랜드는 수감기간 중 문을 닫았다.

 

제주삼다수와 관광복권, 제주국제컨벤션센터, 제주교역, 제주세계섬문화축제 등이 그의 지사 재직시절 작품이다. 현재 제주생태도시연구소 이사장직을 맡고 있다.
 

 

 

 

 


 

 

추천 반대
추천
0명
0%
반대
0명
0%

총 0명 참여


배너

관련기사

더보기
50건의 관련기사 더보기

배너
배너
배너
배너

제이누리 데스크칼럼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실시간 댓글


제이누리 칼럼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