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을 경복시킬 수 있는 지모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사람이 한 번 보면 대단히 수준이 높고 솜씨가 뛰어나야한다. 고대 변사(辯士)의 유세처럼 끊임없이 흘러넘쳐야 한다 ; 둘째, 표면적으로는 무미건조하고 평담하지만 지극히 현묘한 이치를 포함하고 있으면서도 타인에게 쉽게 간파당하지 않아야한다. 제갈량(諸葛亮)이 놓은 석두진(石頭陣)(★)처럼 사람마다 다르게 이해하게 만들어야 한다. 결정적인 순간에 이르면 안개에 가려진 산과 강이 드러내듯이 분명하게 드러내 보여야한다. ‘현산로수(顯山露水)’(★★)다.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을 드러내 사람을 확연대오하게 만들어 감탄을 자아내게 만들어야 한다. 전국시대(戰國時代, BC475~BC221)에 범려(范蠡, BC536~BC448)는 월(越)나라 왕을 도와 오(吳)나라를 멸망시킨 후 월나라를 떠나 제(齊)나라에서 치이자피(鴟夷子皮)(★★★)라 이름으로 바꾸고 제나라 대신 전성자(田成子) 문하로 들어간다. 나중에 전성자가 제나라를 떠나 연(燕)나라로 도망갈 때 범려는 부신(符信)을 지고 전성자를 따라갔다. 망성(望城)에 도착하자 범려가 말했다. “주인께서는 물 마른
말에 문채가 없으면 오래도록 전하지 못한다고 굳게 믿는 사람이 있다 ; 침묵은 금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이 두 가지 말은 언뜻 보면 모순된 것처럼 보이지만 따져보면 언(言, 말)과 행(行, 행동)의 정도 문제를 포함하고 있다. 일찍이 위(魏) 명제(明帝, 226~239 재위) 시기에 어떤 사람이 초군(楚郡) 태수 원안(袁安, ?~92)에게 물었다. “이미 돌아가신 내무대신 양부(楊阜, 172~244)는 충언하였고 직간했는데 태수께서는 어찌 그를 충신이라고 칭찬하지 않는가요?” 원안이 대답하였다. “양부와 같은 그런 대신은 그저 ‘직사(直士)’라고 부를 수는 있지만 충신이라고 부르지는 못하오. 왜 그가 ‘직사’에 불과하다고 이야기하는지 아시오? 신하가 된 자로써 군주의 행위에 불합리하거나 규율이 없는 부분을 발견하였다 하더라도 해서는 안 되는 게 있소. 여러 사람들 앞에서 군주의 잘못을 지적해 군왕의 과오를 천하에 전파하면서 반대로 자신은 강직한 선비라는 명성을 얻는 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니오. 이미 고인이 된 사공(司空) 진군(陳群, ?~237)은 학문이나 인품 모두 훌륭하오.
“냉정을 유지하고 기회가 오면 즉시 행동에 옮기자.” “상황에 따라 대처하여야한다.” 전국시기 ‘농가(農家)’학설의 대표인물 허행(許行 : BC372~BC289)은 자식기력(自食其力)을 제창하였다. 자식기력이란 현대어로는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자기 힘으로 생활해 가는 것을 말하지만 허행의 뜻은 모든 것을 스스로 생산하고 만들어 써야한다는 말이다. 만부득이 할 때에만 교역하여야 한다는 말이다. 근본적으로 사회분업을 부정하였다. 허행은 제자 수십 명과 함께 무명옷을 입고 짚신을 삼고 자리를 만들면서 삶을 유지하였다. 유가사상을 신봉하는 진상(陳相)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허행을 만난 후 유가사상을 버리고 새로이 ‘농가’학파를 신봉하게 되었다. 어느 날 진상이 맹자(孟子)를 만나게 되자 전력을 다하여 농가사상을 설파하였다. “나는 허행 선생님의 관점이 도리에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무릇 현명한 군주는 모두 백성과 더불어 농사를 지어야 합니다. 자신이 직접 밥을 지어 먹어야 합니다. 국정도 겸임해 처리하여야 합니다. 자급자족 할 수 없다면 어찌 현명한 군주라 할 수 있겠습니
특정 상황 아래 신용이란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일 수 있다. 도구에 불과할 수도 있다. 자신의 매력을 뚜렷하게 나타내 보이게 하거나 특정한 목적을 달성하는 도구이기도 하다. 동한(東漢, 25~220)말년에 태사자(太史慈)(★)가 군(郡)에서 관리를 역임하고 있을 때 공교롭게도 시비를 쉬이 가릴 수 없는 사건이 군(君)과 주(州)에서 발생하였다. 각기 나누어 시비를 가려주기를 상주하였다. 도성인 낙양(洛陽)에 먼저 도착하는 상주서가 우세를 차지하게 되는 상황이었다. 당시 주(州)에서 상주한 상소는 이미 보낸 상태라 군의 관리는 뒤처질까 염려돼 태사자를 선발한 후 주에서 보낸 상소를 가진 사람을 뒤쫓게 하였다. 태사자는 밤낮으로 길을 재촉해 낙양에 도착하자마자 전문적으로 신민이 보낸 상소를 받는 공거(公車) 아문에 상소를 제출하였다. 때마침 주에서 파견한 관원이 도착해 문을 지키는 관원을 찾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상소를 제출하려 하였다. 태사자가 물었다. “상소를 전하려는 모양이지요?” 주에서 온 관원이 답했다. “그렇습니다.” 태사자가 물었다. “당신의 상소는 어디에 있소? 표제의 낙관이 잘못된 것은 아
우리가 신용을 지키라고 제창하는 목적은 교역 중에 상대방에게 자기 뜻에 따라 행동하게 만들려하는 데에 있다. 그렇기에 자기편이나 맹우에게 믿음으로 대한다. 만약에 적이라면? 적에게도 신용을 지켜야 할까? 그건 너무 어리석은 일이다. 공자(孔子)가 진(陳)나라에 머물 때의 일이다. 공자가 밖으로 나가려면 포(蒲)나라를 경유하여야했다. 때마침 포나라의 공숙씨(公叔氏)가 군사를 일으켜 위(衛)나라와 대적하려 하였다. 공숙씨가 공자가 포나라를 경유해 위나라로 간다는 소식을 듣고는 병사를 보내 공자를 도중에 막아서서는 공자에게 말했다. “위나라에 가지 않는다면 우리는 당신을 보내줄 것이오.” 공자는 가만히 생각하다가 길을 막아선 병사에게 위나라에 가서 맹약을 맺지 않겠노라고 약속하였다. 병사는 그 말을 믿고 성을 나서게 하였다. 성문을 나서자마자 공자는 곧바로 마부에게 위나라 방향으로 질주하라고 명했다. 공자의 제자 자공(子貢)이 물었다. “방금 맺은 약속을 위반하여도 되는 것입니까?” 공자가 답했다. “강요당하여 한 약속은 성하지맹(城下之盟)(★)이다. 신도 준수할 수 없다.” 가장 신용을 지키는 사람
반드시 기억해둬야 한다. 경솔하게 승낙해서는 안 된다. 승낙한 사람과 승낙을 받은 사람, 두 방면에서 이 문제를 분석해보자. 먼저 승낙 받은 사람의 입장에서 보자. 타인이 어떤 상황에서 무엇인가를 승낙했다고 가정해보자. 분명 특정한 환경 아래서 자기 자신의 이익을 고려하였을 것이다. 어떤 희생을 감수하였을 것이다. 만약 상대방이 너무 쉽게 승낙했다면 그때 상대방이 그 승낙을 실천할 수 있을지 없을지를 고려해봐야 한다. 특히 승낙한 특정 정세가 사라진 후에도 상대방은 그런 희생을 감수할 지를 고려해봐야 한다. 위(魏) 소왕(昭王) 6년, 진(秦)나라는 조(趙)나라와 함께 위나라를 공격하였다. 승리를 거둔 후 위나라의 업성(鄴城)을 조나라에 나누어주기로 하였다. 위나라 왕은 진·조 양국의 위협해오자 마음이 조급해졌다. 급히 군신을 소집해 대책을 논의하였다. 상국(相國) 망묘(芒卯)가 말했다. “왕이시여, 우려하지 마옵소서. 신이 적군을 물리칠 대책이 있습니다.” 위왕이 다급히 대책을 얘기해 달라고 다그쳤다. 망묘가 말했다. “조나라와 진나라는 본래부터 갈등이 있었습니다. 이번
신용은 개인의 미덕이기에 어떠한 공리(功利)도 포함돼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면 과연 옳은 판단일까? 아니다. 생활의 방법과 목적이 섞갈린 판단이다. 틀려도 한참 틀린 생각이다. 삼국시대에 유비(劉備)가 조조에게 의탁한 적이 있다. 조조(曹操)는 유비를 예주목(豫州牧)에 임명하였다. 어떤 모사가 조조에게 말했다. “유비는 뛰어난 재능이 있고 원대한 계략이 있어 인심을 얻고 있습니다. 관우(關羽)와 장비(張飛) 같은 장수는 만 명이 당해 내지 못할 정도로 용감무쌍합니다. 그들은 유비에게 목숨을 바쳐 충성하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유비는 가슴에 큰 뜻을 품고 있고 책략 또한 헤아리기 매우 힘듭니다. 옛사람이 이르길 ‘하루라도 적을 놓아두면 몇 세대가 지난 후손까지 화가 된다’(『左傳·僖公33年』)고 하였습니다. 지금 일찌거니 그를 제거하지 않으시면 반드시 후환이 될 것입니다.” 조조가 고개를 끄덕이다 곽가(郭嘉)(★)에게 의견을 물었다. 곽가가 말했다. “그 관점도 이치에 맞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시작됐는지 말하려 합니다. 승상께서 지금 군대를 일으킨 목적이 무엇입니까? 백성을 위하여 잔악한 나쁜
관계나 정계, 사업에 발붙이려면 신용(믿음)이 가장 중요하다. 입신처세의 근본이다. 춘추시대(春秋時代, BC770~BC476), 제(齊) 영공(靈公)(★)은 후궁의 후비들에게 남장을 시키기를 즐겼다. 남자 모자를 씌우고 남자 장화를 신겼으며 남자 장식물을 패용하도록 하였다. 그런 풍조가 시작되자마자 윗사람이 하는 대로 아랫사람이 따라하면서 전국이 여자가 남자 옷을 입는 조류가 형성되었다. 영공은 백성이 궁정을 따라하는 것을 무척 싫어해 각급 관리에게 엄금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모든 거리, 시장, 마을에서 남자 의복을 입은 여인이 발각되면 덧저고리를 찢어버렸고 띠를 잘라버렸다. 남장하는 풍조를 여러 차례 금지했으나 근절되지 않았다. 영공은 화가 치밀어 안자(晏子)(★★)에게 물었다. “과인이 명령을 내렸는데도 백성은 어찌해 거역하는가? 금지하든 말든 근절되지 않고 있으니 말이요.” 안자가 말했다. “왕이시여. 궁정에서는 장려하고 궁 밖에서는 금지하는 것은 문 앞에 소머리를 매달아놓고 말고기를 파는 것과 똑같습니다. 온 나라의 여인에게 남자 의복을 입지 못하게 하려면 먼저 궁정의 여인에게 남자 옷을 입히지 않으면 됩니다. 궁정에서
마지막으로, 어린이 황제는 누가 있었을까? 중국 봉건전제주의 사회에서 권력을 잡고 황위에 오른 개국 황제들은 정권과 천하 강산을 자신의 사유재산으로 여겼다. 그 사유재산은 절대 남에게 양보할 수 없는 것이었다. 황제는 절대 권력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황위를 영원히 점유하려 하였다. 그렇기에 황제들은 모두 장생불로를 도모한다. 그러나 태어난 자가 어찌 죽음을 피할 수 있으랴. 태어난 자는 모두가 죽는 것이니. 죽음이 다가왔을 때 그들은 황위를 가장 가깝고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 양위하려 하였다. 바로 아들이다. 친자야 말로 그나마 가장 믿을 수 있었으니. 이것이 바로 황위 세습제도다. 설사 황자가 아직 어린 나이에 불과하다 할지라도, 심지어는 아직 강보에 쌓여있다고 할지라도 황위를 계승하였다. 그렇게 중국역사에는 많은 어린이 황제가 존재한다. 통계에 따르면 중국역사상 어린이 황제가 29명이나 된다고 한다. 중국역사상 최초의 어린이 황제는 서한(西漢)의 소제(昭帝)로 기원전 86년에 황위를 계승하였다. 최후의 어린이 황제는 청대 선통(宣統)으로 1909년에 황제가 되었다. 그중 나이가 가장 어린 어린이 황제는 동한(東漢) 상제(殤帝) 유륭(劉
이외에 ‘장기’ 황제라 부를 수 있는 황제는 누구일까? “심심할 때 장기를 내오시게. 사(士)와 상(象)이 되는 법을 배워 효과 있게 집안일을 처리하게. 졸(卒)은 앞으로 나가니 되돌아온다는 말 하지 마소. 반드시 곧바로 가는 차(車)를 배우고 마(馬)처럼 경사지게 가지 마소. 만약 다른 사람이 내 은정을 막아서면 나는 포(包)처럼 곧바로 때리리다.”(『계지아桂枝儿·영부팔권咏部八卷』)당唐 숙종(肅宗) 이형(李亨)은 장기에 열중을 넘어 몰두하였다. 그러면서도 사(士)나 상(象)을 배우지도 않았고 졸이나 차를 닮지도 아니하고 그저 비뚜로 가는 마만 배웠다. 전대의 폐해가 쌓여 천보지란(天寶之亂, 안사〔安史〕의 난)이 발생한다. 숙종과 총비 장량제(張良娣)는 군사를 거느리고 서북방향으로 피난하였다. 도망치는 와중에서도 숙종은 장기를 잊지 못했다. 산처럼 쌓인 전선의 군정 보고에는 관심도 두지 않았다. 그저 장 씨와 장기를 두며 놀기에 바빴다. 승상 이밀(李泌)이 낭떠러지에서 말고삐를 제대로 잡지 않으면 ‘마외파(馬嵬坡)사건’(사병들이 들고 일어나 양국
동성애란 현재에는 뭐 그리 별스럽지 않은 언어가 되었다. 현대에 와서야 유행한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 이 말은 고대 중국의 상황과는 맞지 않는다. 중국에는 오래전부터 동성애가 존재했었다. 한(漢) 애제(哀帝) 유흔(劉欣)이 바로 그다. 동현(董賢)은 재능 있고 잘생겼으며 시원스러웠다고 한다. 어사(御史) 동공(董恭)의 아들로 태자사인(太子舍人)에 천거되었다. 애재는 그와 왕래하는 사이 사랑의 감정이 싹텄다. 곧바로 동문랑(董門郎)에 봉하고 그의 부친을 패릉령(霸陵令)에 봉했으며 광록대부(光禄大夫) 직을 하사하였다. 그러고 나서 오래지 않아 동현을 또 부마도위시중에 봉했다. 『한서漢書·동현전董賢傳』에 “출궁하면 오른쪽에 함께 탑승해 모셨고 들어오면 곁에서 모셨다. 10일 사이에 거액을 하사하니 그 존귀함이 조정을 뒤흔들었다”라고 기록돼있다. 그 둘은 언제나 함께 하였다. 같은 침대에서 공침하였다. 한 번은 같이 잠을 자다 애제가 먼저 깼다. 그런데 동현이 자신의 옷깃을 깔고 누워있는 것이 아닌가. 애제는 자신의 ‘애인’이 잠에서 깰까봐 가위로 자신의 옷깃을 갈라내었
청대 강희(康熙), 옹정(雍正), 건륭(乾隆) 3대 황제가 재위한 140년간 망문생의(望文生義, 본래 의미를 잘 검토하지 않고 문자를 힐끗 보고 그럴싸한 해석을 내림), 포풍착영(捕風捉影, 바람을 잡고 그림자를 붙듦), 임의라직(任意羅織, 제멋대로 모해함) 등의 형태로 죄상을 들어 지식인을 박해하고 그들 가속과 족인들까지 도살하는 문자옥을 서슴지 않았다. 살인을 밥 먹듯이 하였을 뿐만 하니라 처자와 자녀조차 죽임을 벗어나지 못했다. 죽은 자를 부관참시 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으니 그야말로 “살인을 초개처럼 여기니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구나(殺人如草不聞聲)”이었다! 어찌 사람이 초개보다도 못할까. 듣도 보도 못할 정도로 살인을 자행하였다. 많은 폭군들은 백성과 지식인을 도살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기 부하인 문신과 무장에게도 칼을 휘둘렀다. 중국역사상 공신을 주살하기로 이름 난 인물은 한(漢) 고조(高祖) 유방(劉邦)과 명 태조 주원장이다. 유방은 원래 군력이 약했다. 부하 한신(韓信), 소하(蕭何), 장량(張良), 번쾌(樊噲) 등의 문신과 무장의 책략과 무공을 등에 업고서 팽월(彭越), 영포(英布) 등 투항한 장수의 협력아래 강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