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의 사정으로 몇 주 연재가 중단돼 죄송합니다. 그간 저에게 좋은 의견과 격려를 보내주신 여러 분들에 지면을 통해서 감사를 드립니다. 지난 2월 21일 맥그린치 신부 기념사업회가 정식으로 발족하게 된 기쁨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필자 주
지난 회에 실린 ‘십시일반의 기적’은 보통 사람들이 일궈낸 기적이다. 오늘 거론할 사안은 ‘기관과 단체가 만들어낸 십시일반의 기적’이다.
PL 480이 화두다. PL 480은 미국이 농업기술 발전으로 인해 농산물이 과잉생산되자 이를 식량이 절대 부족한 후진국 원조에 활용한 프로젝트이자 관계법이다. 과잉생산으로 폭락한 자국 농산물 가격안정에 기여함과 동시에 후진국의 기아를 탈출하게 해준 일석이조의 효과를 보았다. 우리나라도 1956년부터 1978년까지 PL 480에 의하여 원조를 받았다. 미국 곡물 원조를 받은 한국 정부는 이 곡물을 국민들에게 팔아서 식량난을 해결함과 동시에 이 판돈을 대충자금이라 하여 미국과 한국정부로 구성된 합동위원회에서 합의하에 이 자금을 쓰도록 했다.
1956년부터 1960년까지 PL 480에 의해서 우리나라가 원조 받은 금액은 미화로 약 2억3천만 달러 정도다. 우리나라가 일본과 외교정상화하면서 보상으로 받은 금액이 7억 달러라는 점을 고려하면 적은 돈이 아니다.
그 돈은 이시돌 목장과 제주도민의 목축업 활성화 자금으로 투여됐다. 왜 그랬을까? 1963년 이전 PL480은 정부 대 정부 간에만 이루어졌다. 규정이 미국은 후진국 정부에 직접 주지 사회단체나 기관에 기부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 이 법이 바뀌면서 민간단체에도 이 잉여농산물을 주어서 지역사회개발사업에 쓰도록 하기 시작한 것이다. 미국이 ‘이시돌농촌산업개발협회’에 이 농산물을 주면, 이시돌농촌산업개발협회는 이 농산물을 축산농가에 헐 값에 팔아 그 돈으로 지역개발사업에 쓰도록 하는 형식이다. 하지만 그런 막대한 농산물을 원조 받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맥그린치 신부는 미국 잉여농산물 법(PL 480)이 개정돼 민간단체에도 원조를 받을 수 있다는 소식을 듣고 1961년 미국으로 날아간다. 정말 동분서주로 미국정부를 상대로 소위 ‘로비’를 한다. 맥그린치 신부는 이 자금을 도입하지 않고서는 이시돌 목장과 제주축산업의 성장은 한계가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모든 인적동원에 나섰다. 그러나 그는 막바지 승인단계에서 또 한 번의 장벽이 부딪친다. 보증할 기관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맥그린치 신부는 한국정부(농림부)와 그 당시에 후진국 구호 기관의 대표적인 단체인 미국가톨릭 구제회(C.R.S), 유솜(USOM-주한미국경제협조처)에 매달렸다. 당시 규정에 의하면 미국은 농산물만 원조해 줄 뿐, 수송비용은 모두 원조수혜국이 부담해야 하는 것이었다. 돈이 있을 수 없는 이시돌농촌산업개발협회은 수도 없이 관계기관에 도움의 손을 내밀었고 결국 미국~부산~제주 한림 항 수송비용을 해결했다.
대단한 원조물자 같지만 지원받은 곡물은 대부분 옥수수였다. 맥그린치 신부는 즉시 배합사료공장 건립에 나섰다. 동시에 개척농가사업도 착수했다. 당시 계획을 <표>를 통해서 보면 다음과 같다.
연 차
| 사육돼지
수(두)
| 필요한 사료량(MT)
| 사료생산계획
| PL480
원조사료량
| |
면적(정보)
| 생산량
| ||||
1963
1964
1965
1966
1967
1968
| 20,000
20,000
20,000
20,000
20,000
20,000
| 12,000
12,000
12,000
12,000
12,000
12,000
| 0
500
2,000
4,000
6,000
8,000
| 0
750
3,000
6,000
9,750
12,000
| 12,000
11,250
9,000
6,000
2,250
0
|
자료: 김서연(제주도 축산과장), 이시돌 축산개발사업, 제주도지 제10호
표를 보면 돼지를 비육 두로 2만마리를 키우기로 하고 이에 필요한 사료생산계획을 세우는 내용이다. 처음에는 전체를 원조 옥수수로 하고 차츰 자체 개발을 통하여 원조 사료량을 줄여간다는 계획이다. 1963년에서 1967년까지 5개년 계획이다. 연간 돼지 2만마리를 키워서 수출, 외화 625만 달러를 벌어들이고 면양 8천마리를 사육하여 양털 3만관을 생산, 외화 16만 달러를 절약한다는 원대한 계획이다. 계획은 철저하게 정치·종교적으로 활용할 수 없다는 원칙이 있었기에 맥그린치 신부는 그의 본업(?)인 한림성당 주임신부 직을 사직했다.
그
리고 이시돌농촌산업개발협회 전무로 전직, 본격적으로 제주농촌개발사업을 시작하게 된다. 그는 재정을 투명하게 하기 위하여 외국인 신부를 초청, 오직 재정만 담당하게 했다. 대외원조 자금의 도덕적 해이를 방지하기 위한 조치인 것이다.
사업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제주의 목축업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농촌사업에 일대 전환기를 가져 온다. 농가 100가구(실제는 98가구)를 모집하여 3만평씩 땅을 30년 최장기 저리(연 3.5%, 당시 보통은행대출이자는 40%내외임)로 분양했다. 여기에다 주택, 돼지, 면양 등도 마찬가지로 장기 저리로 외상을 줬다.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당시 우리나라 농촌경작지 평균면적이 3천평 미만인 점을 고려하면 기업목장의 시초라고 아니 말할 수 없다.
이시돌 배합사료공장의 사료도 시중 3분의 1 값으로 양돈농가에 팔았다. 반드시 양돈이나 면양을 키우는 곳에만 팔았다. 물론 턱없이 시장가격보다 낮게 사료를 팔다보니 그 사료가 다시 시장에 흘러 나와 곱절 가격으로 되팔리는 일이 비리가 벌어져 사법당국의 수사선상에 오르는 일도 벌어졌다.
그 후 PL 480 원조는 중단됐다. 그러나 이시돌의 계획은 지속됐다. 개발방향의 틀이 잡혀 이시돌 사업의 상징이 됐다. 1969년에는 제주도와 협력, 개척단지를 조성했다. 130개 농가에 기술 및 융자지원에 나서 자립이 가능하도록 했고, 1973년에는 양돈협업농가를 일궈내 200 가구에 기술·시설·사료지원과 종돈분양을 할 수 있었다. 1983년도에는 소가 없는 농가에 개량 소 350마리를 축협에서 조사한 가격의 절반에 분양하기도 한다.
PL 480은 미국이 쓰다가 남은 농산물에 불과했지만 맥그린치 신부는 그걸 지역개발의 소중한 종자로 삼았다. 그걸 나눠 낙후 지역의 가난을 벗어나는 또 다른 기적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이제 한국은 원조를 받는 나라에서 졸업했다. 오히려 가난한 나라를 도와주는 원조국으로 성장했다. 올해만도 해외원조가 3조원을 넘어설 예정이다. 그러나 정부는 이 원조들이 단기적이고, 소규모이다보니 ‘나눠먹기’로 끝나고 있다는 비관적 전망을 내놓고 있다. 어떻게 하면 생산적인 해외원조가 될 것인지를 걱정하고 있다. 해외원조금액을 이시돌농촌산업개발협회의 PL 480 사례에서 찾아보면 사실 답이 나온다. 우리의 원조효과도 더 커질 수 있다.
우리 원조금액이 더 큰 종자돈으로 활용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글=양영철/ 12편으로 이어집니다>
☞맥그린치 신부는? = 1928년 남아일랜드의 레터켄에서 태어났다.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사제로 1954년 제주로 부임한 후 지금까지 60년간 제주근대화·경제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성당을 세운 뒤 수직물회사를 만들고, 4H클럽을 만들어 청년들을 교육했다. 신용협동조합을 창립, 경제적 자립의 토대를 만들었고, 양과 돼지 사육으로 시작된 성이시돌 목장은 제주축산업의 기초가 됐다. 농업기술연수원을 설립하고 우유·치즈·배합사료공장을 처음 제주에 만든 것도 그다. 그는 그 수익금으로 양로원·요양원·병원·호스피스복지원과 어린이집·유치원을 세워 가난한 이들을 도왔다. 그 공로로 5·16민족상, 막사이사이상, 대한민국 석탑산업 훈장 등을 받았고 1973년 명예 제주도민이 돼 ‘임피제’라는 한국명을 쓰기 시작했다.
◆양영철 교수는?
=제주대 행정학과를 나와 서울대와 건국대에서 행정학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학위 논문은 “내생적 지역개발에 관한 연구 .” 맥그린치 신부의 제주근대화 모델을 이론적으로 살핀 저술이다. 현재 한국지방자치학회 회장, 대통령 소속 지방자치발전위원회 위원 및 제2소위 위원장을 맡고 있다. 조선말 ‘의녀’로 불리는 김만덕 기념사업회 기획총괄위원장이면서 ‘나비박사’로 알려진 석주명 기념사업회 공동대표이기도 하다. 제주특별자치도 출범, 자치경찰 탄생의 이론적 산파 역을 한 게 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