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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무일의 '서복이야기'(1) 바다를 건너던 그날

  진시황의 불로초 전설이 어린 ‘서복(徐福)’의 이야기는 여전히 한·중·일 동북아 3국과 제주에서 회자되는 고대사 미스테리다. 사실관계가 여전히 미스테리로 남아 있고, 역사적 진실에 대한 논란이 여전히 분분한 주인공이 바로 서복이다. ‘서복의 이야기’를 독특한 고대사 해석과 제주사의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는 권무일 작가의 눈으로 소개한다. 4편으로 나눠 연속기획으로 연재한다./ 편집자 주

 

 

 

 

13세에 전국7웅(戰國七雄-진‧조‧초‧연‧한‧위‧제)의 하나인 진(秦)나라의 왕위에 오른 영정(嬴政-나중에 진시황)은 즉위 26년(기원전 221년)만인 39세에 이르기까지 6국을 차례로 점령하여 천하통일을 이룩하였다. 그는 남쪽으로는 광동, 광서, 안남(베트남)을 복속시켜 계림(桂林), 상군(象郡), 남해(南海)의 삼군을 설치하고, 서쪽으로는 사천(四川), 귀주(貴州), 감숙(甘肅)을 복속시켜 중국의 지경을 넓혔다.

 

제나라를 끝으로 중국을 통일한 그는 자신을 삼황오제(三皇五帝)보다 위대한 칭호로 스스로 시황제(始皇帝)라 칭하고 자신이 세운 진나라가 만세(萬歲)에 이르기까지 영원하기를 갈망했다.

 

그 후 그는 죽을 때까지 12년간, 4차에 걸쳐 중국 동해안의 항구도시를 순행하였는데 그 중 산동반도 낭야(琅琊)에 두 번, 고조선과 경계에 있는 갈석항에 한 번, 양자강 하류 항주에 한 번이었다. 이렇듯 그는 바다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그가 방문한 네 항구는 동이족이 사는 곳이었다.

 

그가 수도 함양(서안)에서 만여 리가 넘는 이들 항구로 행차할 때는 온량거(轀輬車)라는 큰 수레를 탔는데 수레는 크고 넓어 10여 명의 궁중여인을 아울러 태웠고 네 마리의 말이 나란히 서서 끄는데, 혹 있을 암살을 대비하여 서너 대의 똑같은 마차가 움직였다고 한다. 5000여 명의 군사가 호위했으며 진시황의 행차에 앞서 길을 닦는 토목공사가 진행되었다. 그가 대륙 깊숙이 자리한 함양에서 만여 리가 넘는 동쪽 해안을 여러 번에 걸쳐 찾은 이유는 무엇인가?

 

 

 

6국을 통일한 진시황은 몽염 장군에게 30만 군사를 딸려 흉노를 멀리 물리치고 만리장성을 쌓았지만 (고)조선에 대하여는 손수 찾아와 나라를 바치지 않으면 무력을 동원하여 쳐들어가겠다고 협박했다. 협박일 뿐이지 엄격한 의미에서 조선을 손아귀에 넣지는 못했다. 조선의 준왕은 손수 함양에 찾아가 조회에 참석하여 군신의 맹약을 하겠다고 약속은 했지만 10년 가까이 미적미적 끌기만 했다.

 

진나라의 꾐에 속아서 무참하게 당한 제나라의 전례가 있었기 때문에 항복은 곧 죽음이라는 것을 준왕은 똑똑히 알고 있었다. 진나라의 장수 왕분이 40만 대군으로 제나라 수도인 임치성을 공격하고 있었을 때였다. 난공불락의 임치성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진퇴양난의 진나라 군영에서는 화친사를 보내 제나라 왕 건(建)을 성에서 나오게 하는데 성공했다. 진시황을 만나기 위해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성문을 나선 건왕은 순식간에 목숨을 잃고 나라를 빼앗겼다. 조선에게도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고 누가 보장할 수 있겠는가? 준왕은 최후의 일전을 각오하며 군사훈련을 강화하고 있었다. 진시황은 육로로 하여 요동으로 달려가 조선을 치고 싶었으나 조선이 흉노와 연합하여 맞서면 승리는 장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조선과 그 남쪽의 삼한까지 집어삼키려면 뱃길밖에 없음을 진시황은 잘 알고 있었을 것이고 그리하여 바다를 통하여 조선에 짓쳐 들어갈 궁리를 했었던 것 같다.

 

진시황이 1차로 낭야를 방문했을 때 방사 서복이 찾아온 것이다. 서복은 상서를 올려 말한다. 『사기(史記)』에 기록된 몇 구절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중국의 동쪽 바다 가운데 삼신산이 있는데 이름하기를 봉래, 방장, 영주라고 하며 그곳에 신선이 산다고 합니다. 신선들은 거기서 나는 불로초를 캐서 먹고 살기 때문에 아프지 않고 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고 합니다. 불로초는 영물이니 청하옵건대 신에게 동남동녀 각각 1500명과 백공(百工) 그리고 오곡의 씨앗을 주시면 불로초를 채취하여 대령하겠나이다.

 

 

 

진시황으로서는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서복의 호언장담이 헛소리란 것을 모를 리 없지만 서복이 조선의 땅에 들어가거나 근처를 지난다 해도 조선의 사정을 염탐할 수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선발대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불로초를 구해온다면 더없이 좋은 일이라 꿩 먹고 알 먹는 격이 아닌가. 반면에 서복으로서는 진나라의 폭정과 노역에서 벗어날 수 있는 호기회가 아닌가.

 

낭야는 산동반도 남안에 위치하여 산이 북풍을 막아주고 한류와 난류가 교차하는 지점으로 겨울에도 온화한 지역이라 고대로부터 항구가 발달했고 한때는 월나라의 수도이기도 했다. 또한 산동반도에는 울창한 숲이 있어 선재(船材)를 대는데 유리했을 것이다. 또한 조선술과 항해술에 익숙한 동이족들이 모여 사는 곳이어서 서복이 배를 만들어 출항하기가 쉬운 곳이기도 하다. 배를 만들기 위해서는 많은 나무가 필요하고 벌목, 건조, 운반 그리고 조선(造船)에 이르기까지는 대략 1년여가 소요되며 기술자와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다. 그래서 진시황은 3000가구를 낭야대 아래에 이주시켰을 것이다. 동남동녀를 15세 전후로 보았을 때 제나라의 수만 가구를 온통 까뒤집어 강제로 끌고 와야 할 것이다. 뱃사공은 어떠한가? 그렇지 않아도 만리장성 축조현장에 수많은 젊은 사람들이 동원되었을 텐데도 불구하고 건장하고 경험이 많은 사공을 불러 모아야 한다. 아마도 진나라의 학정과 노역에 신물이 난 사람들이 모여들었을 것이다.

 

배에 태울 사람들, 동남동녀 3,000인과 백공, 사공과 호위군사 그리고 서복을 비롯한 지휘관을 결정하고 선재를 마련했다 하더라도 정작 배를 만드는 기술자와 축적된 기술과 노하우가 전제되어야 하고 바다에 떠서 풍랑을 가르고 바람을 이겨낼 튼튼한 구조를 갖추며 한 배에 많은 인원을 태우고 계산된 속도를 유지할 수 있는 배를 만들어야 하는데 이러한 기술은 선박 제조와 항해의 역사를 통하여 축적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진시황이 통일한 7국 가운데 진‧조‧초‧한‧위 5국은 화하족(華夏族-나중에 漢族)의 원류로 황하와 양자강 유역에서 발달한 문명국이지만 바다와는 무관한 내륙지방에 위치해 있었던 관계로 바다를 눈여겨보지 않던 나라들이다. 그들은 바다를 몰랐다. 중국의 동쪽해안은 황하와 양자강의 세찬 물결이 밀려 내려오고 하구에 모래톱이 쌓이기 때문에 배를 띄운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고 남쪽 해안은 그들이 통틀어 말하는 소위 남만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당최 바다를 바라보거나 진출할 생각은 하지도 못했고 오히려 그들은 백성들이 바다로 나가는 것을 엄하게 금지하곤 했다.

 

 

 

당시 중국의 배는 바다보다는 강을 운행하는 배들이었고 바다를 항해하는 배들과는 구조상 차이가 있었다. 강을 오가는 중국의 배는 선체의 밑이 뾰족하게 구조된 첨저선(尖底船)으로 속도는 빠르나 강풍에 약하고 배끼리 충돌했을 때 균형을 잃고 쓰러질 염려가 있다. 그러나 중국의 동쪽해안에 살던 동이족과 발해만을 거쳐 조선의 서해안에 살면서 해양을 횡행하던 조선과 한반도의 한족(韓族)이 만들어 사용하는 배는 저판이 평탄하고 튼튼하게 구조되는 평저선(平底船)이었다. 평저선은 선재가 휘어질 필요도 없어 흔한 소나무를 재목으로 쓸 수 있고 덜 마른 생목(生木)도 무방하며 제조기간과 제조기술도 간단하다.

 

첨저선과 충돌하면 첨저선을 쉽게 침몰시킬 수 있고 간만의 차가 심한 서해안에서는 갯벌에 정박해도 밀물이 되면 쉽게 균형을 잡으며 암벽에 부딪혀도 손상이 적다. 평저선은 한국에 고유한 배로 발전되어 한선(韓船)이라고 부르는데 특히 제주도에서는 테우와 덕판배에 그 고유의 형태가 남아있다. 평저선은 비록 속도는 느리지만 바람과 풍랑에 강하다. 고려 때 여몽연합군이 일본정벌에 나섰을 때 하카다만에서 태풍을 만나자 남송에서 파견된 중국 배는 병사들과 더불어 흔적 없이 사라졌지만 고려의 배는 한 척도 손상을 입지 않은 것으로 보아도 알 수 있다.

 

배의 규모는 어떠한가? 후한의 원강(㝨康)이 쓴 『월절서(越絶書)』에 의하면 전국시대 월나라의 대익(大翼)이란 배는 길이가 120척, 폭이 1장6척, 총 승선인은 91인으로 그 중에 노꾼이 50인이라 했으니 나머지 41인은 전사이거나 관리자였다. 고려 왕건이 후백제와 해전을 벌일 때 왕건이 타는 배는 길이가 96척으로 갑판 위에 누각이 있었으며 기타의 일반 군선은 탑승인원이 노꾼 말고 30명 정도였다. 중국 천주만에서 발굴된 송나라 때의 배는 첨저선으로 길이가 110척이며 고려 초기에 송나라 상인들이 타고 온 배들 중에는 승선인원이 30-50인 배가 31척, 60-69명이 12척, 100명 이상이 탄 배가 10척이며 고려의 배가 70명을 태우고 중국으로 간 기록도 있다.

 

중국 상해 복단대학(復旦大學) 오걸(吳杰) 교수는 서복선단에 있어서 배 한 척에 동남동녀 100명, 사공 50명, 무장군졸 10명, 백공 10명, 관리인 5명이 탄 것으로 계산하여 서복선단의 전체인원을 5250으로 추정했다.

 

송상이 왕래하던 고려 초의 경우를 감안하여 검토해 보자. 배마다 동남동녀 50명, 백공 10명, 관리 및 호위병 10명, 뱃사공 30명으로 계산하면 60척의 배에 6000명이 승선하여 항해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서복은 화려한 누선을 타고 선도하고 있을 개연성이 있다.

 

새로운 가능성, 새로운 영토, 새로운 대륙에 목말라있는 진시황은 1년 후에 낭야에 다시 나타나 무려 60척에 이르는 서복선단이 출항하는 모습을 드높은 포부를 가지고 바라보았고, 배짱 좋은 서복은 앞으로 부딪히게 될 위험과 도전들이 무엇인지 모르면서 미지의 땅으로 달려 나가고 있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 권무일은? = 경기도 화성 출신. 서울대 철학과와 행정대학원을 졸업했다. 포스코 근무를 시작으로 현대그룹 임원, 실버종합건설과 흥선종합건설 대표이사와 국제조명 사장을 지냈다. 2004년부터 제주에 정착해 집필 활동을 하고 있다.

 

2007년 '문학과 의식'을 통해 소설가로 데뷔해 장편소설 '의녀 김만덕(2008년)'과 '남이(2011년)'를 집필한 데 이어 '말, 헌마(獻馬) 공신 김만일과 말 이야기'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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