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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 살다] '헌마공신 김만일과 말 이야기' 저자 권무일 소설가 휴먼스토리
강의실에서 숙식 해결하며 대학생활, 사막 건설현장 누비다 제주에서 '제2인생'

어려운 가정환경, 강의실에서 자며 공부해

 

그의 나이 일흔셋. 경기도 화성이 고향인 그가 제주도에 터를 잡은지 10년째다. 그는 2004년 무작정 제주도로 내려왔다. 농사를 지으며 글을 썼다. 일흔이 다 돼 소설가가 됐다. 제주도에 내려온지 4년만인 2008년 겨울 단편소설 '해피의 고백'으로 등단했다. 그래서 제주도는 그에게 '제2의 인생'을 만들어준 곳이다. 등단 후부터 그의 주제는 일관되다. 제주도의 역사와 문화. 바로 그는 소설가 권무일이다.

 

어린시절 먹고 살기도 어려웠다. 어머니는 사기 그릇을 팔아 생계를 꾸렸다.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공부는 꿈도 꾸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화성을 도망치듯 떠나 인천으로 향했다. 공부가 너무 하고 싶어서였다. 인천의 대건고등학교에 입학했다. 부모님께서 뒷바라지를 해주지 못해 아예 학교 교실에서 기거했다. 그나마 공부를 잘해 장학생으로 학업을 마쳤다. 그리고 고교졸업 후 재수를 하며 3년간 대입에 매달린 끝에 서울대 철학과에 입학했다.

 

 

대학생이 됐다고 집안 형편이 핀 건 아니다. 가정교사 아르바이트로 학비와 생활비를 마련했다. 그렇게 어렵게 대학생활을 마친 뒤 행정대학원에 입학했다. 대학원을 다닐때도 그는 강의실에서 잠을 잤다. 인생의 반려자인 아내는 그때 만난 사람이다.

 

그 시절 행정대학원을 나오면 국영기업과 공무원을 선택할 수 있었다. 어려운 처지인지라 '쥐꼬리' 봉급인 공무원은 아니었다. 국영기업에 취직하기로 결정했다. 포항제철(현재 포스코)이 생길 때였다. 1971년 포항제철에 입사하고 정말 열심히 일했다. 하지만 포철 생활은 2년에 끝냈다. 견디질 못한 것이다.

 

무작정 제주행 비행기에 오르다

 

 현대건설로 직장을 옮겼다. 사막의 열풍을 따라 중동에도 다녀왔다. 2년간 중동에서 모래바람을 맞아가며 나라와 민족을 위해 일했다. 조국 대한민국에서 코흘리개 두 아이와 아내가 그를 응원했다.

 

건설업계에서 잔뼈가 굵어가며 그도 승승장구했다. 기업을 옮겨가며 대표와 임원을 지냈다. 예순이 넘도록 산업의 역군으로 뛰었다. 그리고 은퇴를 했다. 그런데 따지고 보니 할줄 아는게 없었다. 비슷한 처지에 있는 퇴역 친구들과 밤낮을 술로 지새웠다. 몇달을 그렇게 보냈다.

 

하지만 운명처럼 제주가 떠올랐다. 문득 전원생활이 꿈속에 나타났다. 아무런 잉녀도 없는 제주가 가장 먼저 떠오랐다. 굳이 인연을 따지자면 '국제조명'이라는 회사의 대표로 일할때 조명수주를 위해 제주도에 출장차 내려온 일이 있었던게 전부다.

 

그때 제주의 맑은 공기, 아름다운 풍광에 빠져들었다. "은퇴하면 제주에 살고 싶다"는 막연한 꿈을 꾼게 전부다. 그는 무작정 제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리곤 곧바로 제주출장 때 자주 찾았던 서귀포시 모슬포로 발길을 옮겼다.

 

마라도 유람선 선착장을 끼고 있는 산이수동 마을에 집을 빌렸다. 20여평 규모의 텃밭이 딸린 집이었다. 아름다운 제주의 자연경관을 즐길 여유조차 없었다. 그래도 서울살이 시절 따놓은 부동산 중개인 자격증이 있어서, 그걸 믿고 부동산을 차렸다.

 

좀 되는가 싶었다. 그러나 일감은 줄고, 성미와도 맞지 않았다. 물론 돈벌이도 아니었다. 먹고는 살아야 했기에 그는 주변 지인들에게 돈을 빌려 땅을 샀다. 그리고 그 땅을 담보로 은행에서 돈을 빌렸다. 빌린 돈으로 생계를 유지한 것이다.

 

더구나 아내와 떨어져 있어서 아내에 대한 그리움이 더해갔다. 그러다 2011년 3월 아내가 제주도로 내려왔다. 그런데 아낸 제주에서 새로운 공부의 꿈을 키웠다. 아내 노인숙씨(67)는 2012년 3월 제주대학교 중어중문학과 대학원에 당당하게 입학했다. 그의 나이 66세였다. 현재 노씨는 석사학위논문을 준비하고 있다. 이와여대를 나와 아이들 돌보며 손주까지 본 주부였던 아내가 뒤늦게 가슴에 품었던 학업의 꿈을 펼치고 있는 것. 아내는 이미 사전준비로 2010년 방송통신대에 진학, 중어중문학 전공을 미리 섭렵했다.

 

나에게 글쓰는 소질이 있을 줄이야…

 

어쨌든 먹고 살아야 했다. 2천평 규모의 귤농사를 짓기도 했다. 농약을 뿌리지 않고 농사를 지으려니 힘에 부쳤다. 더욱이 아내도 없었고, 혼자 해야할 일이었다. 그렇게 농사를 지으면서도 저녁이면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사색과 명상이 취미라면 취미였던 그에게 외로움을 달랠 '무언가'가 나타났다. 저녁마다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파보다 보면 볼 수록 제주도는 새로웠다. 제주4.3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다. 제주4.3을 공부하면서 제주의 역사를 처음부터 다시 공부했다. 마을마다 전해져 내려오는 신화와 전설, 그리고 김만덕에 대해 아예 전문적인 연구에 들어갔다. 바로 그의 소설 '의녀 김만덕'을 낳게 만든 취재과정이다.

 

제주도에 내려온지 4년째 이젠 '떡하니' 소설가로 등단했다. 계간 문예지인 <문학과 인식> 2008년 가을호를 통해서다. '해피의 고백'이란 단편소설이다.

 

그의 소설 '해피의 고백'은 '해피'라는 이름의 강아지를 사람으로 다룬 의인소설이다. '회장'이라고 불리는 주인공은 '해피'라는 강아지를 귀하게 여기고 녀석과 놀기를 즐긴다. 소설속에 등장하는 '회장'은 동물 애호가가 아니다. 나이와 함께 어쩔 수 없이 인간세계에서 멀어져 가고 결국 고독의 늪에 빠져가는 인간실존의 문제를 다뤘다. 인간이면 누구나 맞이하는 운명이다.

 

그의 눈은 그후 제주로 옮겨갔다. '김만덕'의 일대기를 소설의 소재로 삼은 것이다. 이미 꽤 자료를 탐독했던 터라 소설 쓰기에 속도가 붙었다. 2009년 초 <의녀 김만덕>이란 소설을 떡하니 세상에 내놨다.

 

가난한 어부의 자식으로 태어나 조실부모하고 삶을 위해 기생이 될 수밖에 없었던 김만덕의 일대기를 그린 작품이다. 김만덕은 사재를 털어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렸다. 그는 비참한 현실을 극복한 김만덕의 모습을 통해 제주여인의 기질과 기상을 알려내고 싶어 했다.

 

그는 또 지난 1월 제주말(馬)을 소재로 '헌마공신 김만일과 말 이야기'라는 역사소설을 펴냈다. 그는 자연재해로 힘든 날들을 보내야 했던 제주사람들이 관리들의 착취와 가렴주구로 인해 더 큰 고통을 당해 왔던 역사적 사실을 고발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이 책을 통해 다가올 전란에 대비해 군사양성과 전마육성을 주장한 율곡 선생을 떠올렸고 성숙한 외교정책을 폈던 광해군을 재해석해 냈다.

 

-제주에 정착하는데 힘들지 않았나.

 

"처음에는 힘들었지만, 지금은 좋다. 내가 먼저 손을 내밀면 된다. 내가 먼저 다가서서 물어보고, 그 사람들 애환을 들으며 같이 울어주고, 웃어주니까 좋아 하더라. 내가 먼저 하면, 제주도 사람들은 반드시 보답을 한다. 어떤 방법으로라도 보답을 한다. 제주도 사람들이 남에게 피해를 주는 기질을 갖고 있는게 아니다. 다만 처음 내려오면 궨당도 아니고 연고도, 지연/학연도 없기 때문에 어울리기가 힘들 뿐이다. 제주도 사람들이 외지인을 골탕먹이거나 그런 일은 없다. 육지의 다른 지역에 비해 오히려 더 순수하다."

 

 

-제주도는 어떤 곳인가?

 

"제주도는 육지의 변방이 아닌, 제주도의 뚜렷한 정체성과 자존심을 가진 지역이다. 변방의 역사가 아니라, 제주도만의 특별한 역사와 정신과 전통을 가진 곳이다. 제주도를 중심에 놓고 볼때 한반도와 일본이 변방이지 않느냐.(웃음) 제주도의 고유문화를 살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체성을 찾아야 한다. 과거 제주도로 귀양 온 사람과 관리들이 육지만 바라봤기 때문에, 제주도 사람도 육지를 지향하고 있다. 귀양 온 사람은 왜 대접을 받고, 제주도에서 태어나고 제주도를 일으킨 사람은 왜 도외시 하느냐. 제주도를 위해 노력한 사람들을 하나하나 발굴해야 할 때다."

 

-제주도에 하고 싶은 말이 있나?

 

"관광제주가 아닌, 문화를 중심에 놓고 제주를 재정립해야 한다. 예를 들어, 제주신화를 무당의 문화로 보지 말고 제주사람들의 정신적 뿌리로 보고 좀 더 넓게 문화를 승화해야 한다. 우리나라가 우리의 전통문화를 도외시하고 외국 문화를 무분별하게 받아들여 우리문화를 잃어버린 것처럼, 제주도도 똑같은 길을 걸을 가능성이 높다. 제주도 문화를 제주도 사람 스스로가 깨버리고 육지, 서양문화를 받아들이면 제주도의 문화는 아무 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 서울에 있는 사람들은 제주도를 다봤다고 한다. 한번 왔다가면 끝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제주도를 깊이 있게 보면 다르다. 제주도 문화 또는 인물을 표현한 도로명을 만들면 어떨까 생각한다. 예를 들면 김만일로, 김만덕로 등으로 이름을 붙이면 관광온 사람들이 궁금해 하지 않겠나."

 

-앞으로의 바람이 있다면. 또 현재 구상중인 작품이 있나?

 

"제주도의 역사를 재해석 하려는 작업을 하고 있다. 제주도가 지정학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곳인지를 연구하고 있다. 그 연구의 중심은 제주도를 중심에 놓고 역사를 해석하려는 작업이다. 방대한 일이고 꼭 해야할 일인데, 기력이 떨어진다.(웃음) 이러한 연구 결과를 소설로 쓸지, 역사서로 쓸지는 아직 고민중이다. 결국 제주의 정체성과 혼이 담긴 작품을 쓰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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