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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무일의 '서복이야기'(3) 위만조선의 해양세력에 눈돌린 진 이후의 중국

  진시황의 불로초 전설이 어린 ‘서복(徐福)’의 이야기는 여전히 한·중·일 동북아 3국과 제주에서 회자되는 고대사 미스테리다. 사실관계가 여전히 미스테리로 남아 있고, 역사적 진실에 대한 논란이 여전히 분분한 주인공이 바로 서복이다. ‘서복의 이야기’를 독특한 고대사 해석과 제주사의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는 권무일 작가의 눈으로 소개한다. 4편으로 나눠 연속기획으로 연재한다./ 편집자 주

 

서복이 불로초를 구실로 낭야를 떠나고 나서 2년도 안되어 진시황은 양자강 하류인 전단현(錢塘縣-항주)을 방문한다. 동방경략의 꿈을 버리지 않은, 그래서 아직도 배가 고픈 그는 일찍이 항구도시로 발달한 전단현을 돌아보고 귀경길에 올랐다. 그러나 그는 돌아오는 길에 온량거에 탄 채로 불귀의 객이 되고 만다. 자신이 세운 진나라가 만세까지 지속되며 자신 또한 불사신이 되고자 꿈꾸던 진시황은 50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20세의 아들 호해가 왕위를 물려받았으나 그는 아버지 대의 충신들을 죽이고 황음무도하여 정사를 돌보지 않다가 4년 뒤에 살해되면서 진나라는 멸망의 길을 걸었다.

 

 

 

이 어지러운 시기에 군웅이 할거하더니 항우와 유방이 패권을 다툰다. 결국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의 막강한 힘을 자랑하던 항우는 무인의 어리석음으로 인하여 패퇴하여 죽고 유방이 한나라를 세워 천하를 호령한다. 한고조 유방은 승리에 도취되어 공신에게 논공행상을 하면서 명장 한신을 초나라 왕에, 팽월을 양나라 왕에, 경포를 회남 왕에, 노관을 연나라 왕에 봉하였으나 이제 쓸모가 없어진 한신을 죽이고(토사구팽), 곧 이어 팽월을 주살한다. 유방의 칼끝이 자신에게 돌아올 것을 안 회남 왕 경포는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란 생각에 반란을 일으켜 유방에게 맞섰으나 결국 쫓기는 몸이 되어 죽음을 맞이한다. 이윽고 유방이 연나라에 군사를 보내 노관을 치자 노관은 적국인 흉노로 도망하여 목숨을 건진다. 그때 노관의 부하 위만은 노관을 따르지 않고 군사 1000명과 더불어 조선으로 망명한다.

 

조선의 준왕은 그를 받아들여 벼슬을 주고 서쪽 변방을 지키게 한다. 그러나 위만은 연나라에서 속속 밀려오는 사람들을 규합하여 준왕을 몰아내고 왕권을 빼앗는다. 때는 기원전194년으로 서복이 동도한지 18년, 진시황이 죽은 지 16년 뒤의 일이다. 길지도 않은 한 세대 안에서 일어난 일이다.

 

한고조가 죽자 황비 여태후는 아들 혜제를 꼭두각시로 만들고 전권을 휘두르고 있었는데 『사기』에 의하면 위만이 찾아와 한나라의 외신이 되겠다고 자처하자 두 나라는 동맹을 맺고 위만으로 하여금 흉노를 견제하고 한나라에 대항하는 여러 주변국가의 준동을 막아줄 임무를 부여하는 한편 여러 만이(蠻夷)의 군장들이 천자를 알현하고자 할 때는 막지 말라는 것이었다. 여태후는 도씨검, 비파형청동검, 철제무기를 위만조선에 대줄 만큼 위만을 신임하고 있었다. 최몽룡 교수는 이러한 무기들이 연나라가 만들어 쓰던 것으로 위만조선의 옛터에서 많이 발견된 점을 들어 한나라가 위만조선에 무기를 대주었다고 추정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만이(蠻夷)’가 어떤 국가 또는 어떤 종족인가를 상고할 필요가 있다. 중국에서는 주나라 때부터 자기네 종족을 화하(華夏)라 칭했고 변방의 이민족을 경멸과 폄하의 뜻으로 이(夷)‧만(蠻)‧융(戎)‧적(狄) 또는 동이(東夷)‧남만(南蠻)‧서융(西戎)‧북적(北狄)이라 불렀다. ‘만이’라고 할 때는 동이와 남만을 통틀어 이르는데 동이는 그렇다 치고 남만은 어디를 지칭하는가? 백제에서는 탐라 또는 아직 정복하지 못했던 전남지역을 ‘남만’이라 부른 기록이 있으며 고려시대 이규보의 시에서도 탐라를 ‘남만’이라 부른 사례가 있다. 따라서 ‘만이(蠻夷)’에서 만(蠻)은 탐라를 포함한 남해안의 해상세력이고 군장은 해상호족이었을 개연성이 있다. 여태후가 그들을 특별히 직접 만나고자 함은 그들이 가져올 진귀품을 기대해서일 것이다.

 

 

 

위만조선은 이 틈을 이용하여 주변국가를 공격하여 세를 확장하고 있었다. 또한 한반도와 일본, 탐라에서 들어오는 물류를 독점하고 중국의 물화를 그들 주변국에 파는 등 중개무역을 하고 있었다. 위만은 한반도의 해상세력이 가져온 물건들을 자기네 배에 옮겨 싣고는 발해만을 거쳐 산동반도에 이르고 황하를 거쳐 장안에 이른다. 위만은 중개무역을 통하여 몇 갑절의 이윤을 챙긴다. 부국으로 성장한 위만조선은 남쪽으로 마한과 접하고 서쪽으로는 요서까지 국경을 넓히고 바다를 장악한다.

 

춘추전국시대 그리고 진나라 때 중국이 조선 등 동쪽 지역에서 수입하는 물자는 철‧동‧주석 등의 광물과 말(馬), 짐승의 가죽, 소금, 탐라에서만 나는 황칠나무 등이었다. 진나라의 통일전쟁, 초한의 전쟁 등 드넓은 광야에서 전쟁을 치러야 하는 중국으로서는 다량의 무기와 말, 그리고 군복의 재료인 짐승의 가죽이 무진장 필요했고 소금의 산지는 발해만 연안과 한반도 서해안에 주로 분포되어 있는 반면 중국의 동해안에는 황하에서 흘러내리는 민물로 인하여 염도가 약하므로 소금 생산량이 적었으므로 중국은 오래전부터 소금의 공급은 동이족에게 의존해 왔다. 탐라의 황칠나무는 황금색을 좋아하는 중국인에게는 관복과 건물장식에 사용하는 위세품이었다. 그리고 양탄자, 유리, 청옥, 향료 등 사치품은 서역이나 남만을 통해서 공급받고 있었다.

 

진시황은 남만을 복속시키고 서쪽으로 영토를 넓혀 인도, 아라비아 그리고 말레이시아 등지와 교역을 넓혔지만 진나라가 망하면서 진시황이 복속시킨 나라들은 중국과 연을 끊고 제 자리로 돌아갔기 때문에 서역이나 남지나에서 들어오던 진귀품들의 교역로가 거의 끊겨 버렸다. 나라가 통일되고 정국이 안정되면 궁중과 귀족 특히 여인들에게는 사치품 내지 호사품이 만연하게 마련이라 서남으로 교역이 끊긴 한나라는 위만조선을 통하여 진귀한 물건을 공급받을 수밖에 없었는데 이는 동지나해를 거쳐서 중국의 남부지역까지 오가는 해양세력이 있어서 가능했던 것이다. 해양호족들은 값나가는 물건을 찾기 위하여 한반도를 넘어 일본과 탐라 등 먼 곳까지 눈을 돌렸고 특히 탐라사람들이 멀리 중국의 동남쪽으로 항해하여 귀한 물건을 사온다는 사실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상황은 위만조선이 한나라에 패망한 기원전 108년까지 지속되었다.

 

 

 

기원전 141년에 한나라의 7대 황제로 등극한 무제는 장건을 시켜 서역으로 통하는 교통로인 비단길을 틈으로써 아라비아, 페르시아, 인도의 문물이 들어오고 중국의 문물이 멀리 로마까지 전파되는 계기를 마련했고 진시황 때 복속시켰던 남만을 다시 복속시켜 말레이시아, 태국, 베트남 등 남지나반도의 진귀한 보물이 들어올 수 있는 통로를 열었다. 그러나 내륙을 통하여 낙타나 말에 의하여 운반되어오는 물자들은 배로 운송하는 경우에 비하여 부피나 무게가 훨씬 적었고 길도 험난하며 도중에 도적을 만나는 경우가 허다했다. 따라서 위만조선이 장악한 무역의 규모가 크게 타격을 받지는 않았다.

 

한무제는 조선이 만주의 넓은 영토를 호령하고 있으면서 무역으로 인하여 막강한 경제력을 가지고 있는 현실을 눈뜨고는 볼 수 없는 노릇이었다. 급기야 한무제는 장군 순체(筍彘)에게 5만의 군사를 주어 육로로 공격하게 하고 누선장군 양복(楊僕)에게 7000의 수군을 딸려 발해만을 통과하여 조선의 왕검성으로 진입하게 했다. 역사상 우리나라와 중국 사이의 첫 번째 대전이었다. 7000의 수군을 태운 수백 척의 전선(戰船)이 발해만을 거쳐 압록강 하구의 왕검성으로 물밀 듯이 몰려왔다. 이때 조선은 양복의 수군과 치열한 해전을 벌였다. 한나라의 수군은 전멸하고 배는 산산이 부서져 버렸고 양복은 단신으로 헤엄쳐 산속에 숨어버렸다. 조선이 한나라를 이길 배와 수군을 갖추었다기보다는 자체적으로 군대까지 가지고 있던 서남해의 해양세력들이 대거 발해만으로 집결하여 싸움으로써 승리를 거둔 것 같다. 이는 우리의 해상세력이 크게 번창하였고 강력한 체제를 갖추고 있었음을 여실히 증명하는 것이다.

 

이 싸움은 1년간 지속되다가 우거왕이 신하에게 암살됨으로써 조선은 막을 내렸다. 한무제는 조선이 있던 땅에 4군을 설치했는데 그 중 황해도까지 깊숙이 자리한 낙랑이 국제간의 무역을 담당했기 때문에 서남해의 해상세력들은 낙랑을 거치거나 직접 중국으로 교역을 펼칠 수 있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 권무일은? = 경기도 화성 출신. 서울대 철학과와 행정대학원을 졸업했다. 포스코 근무를 시작으로 현대그룹 임원, 실버종합건설과 흥선종합건설 대표이사와 국제조명 사장을 지냈다. 2004년부터 제주에 정착해 집필 활동을 하고 있다.

 

2007년 '문학과 의식'을 통해 소설가로 데뷔해 장편소설 '의녀 김만덕(2008년)'과 '남이(2011년)'를 집필한 데 이어 '말, 헌마(獻馬) 공신 김만일과 말 이야기'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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