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시황의 불로초 전설이 어린 ‘서복(徐福)’의 이야기는 여전히 한·중·일 동북아 3국과 제주에서 회자되는 고대사 미스테리다. 사실관계가 여전히 미스테리로 남아 있고, 역사적 진실에 대한 논란이 여전히 분분한 주인공이 바로 서복이다. ‘서복의 이야기’를 독특한 고대사 해석과 제주사의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는 권무일 작가의 눈으로 소개한다. 4편으로 나눠 연속기획으로 연재한다./ 편집자 주 |
지략을 써서 천하를 손아귀에 넣을 만큼 영명한 진시황이 서복의 속임수를 모를 리 없지만 진시황에게는 딴 욕심이 있었을 것이다. 불로초를 채집하러 가면서 생산이 가능한 동남동녀를 3000명이나 데리고 가고 더욱이 오곡과 기술자를 대동하는 것은 불로초를 채집하기보다는 어느 곳엔가 정착하기 위함이 아닌가.
첫째로 진시황은 서복이 호언장담한 것처럼 불로초를 구해오지 못한다 해도 조선과 삼한 등 동방국가들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둘째 진시황이 동이족 등 변방의 이민족을 분산, 거주시켜 반항세력들의 결집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조치였을 것이다. 셋째 제나라 사람들에게는 나라를 잃은 앙금이 남아있는 터에 진시황의 폭정과 만리장성 축조 등의 노역을 피하여 불로초를 구실로 서복 등이 해외로 도주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때 조선의 사정은 어떠했는가? 기원전 300년경 연나라 진개(秦開)장군의 공격으로 조선은 2000리의 땅을 빼앗기고 만번한(滿番汗-요서지역, 갈석 부근으로 비정)까지 물러나 있었다. 연나라까지 영토를 넓힌 진나라와의 경계도 만번한이었다. 진나라의 계속적인 위협에 조선의 준왕(準王)은 몸소 진시황을 찾아뵙고 항복하겠다고 약속했으나 차일피일 미루면서 진시황에게 무릎을 꿇지 않았다. 당시에 조선에는 제나라와 연나라의 망명자들이 속속 몰려들고 있었고 준왕은 그들을 흔쾌히 받아들이면서 권토중래의 힘을 키우고 있었다.
조선의 사정을 모를 리 없는 진시황은 연안을 순행하면서 호시탐탐 공략을 노리고 있었을 것이고 서복 또한 동족들이 대거 조선으로 몰려간 마당에 조선과 그 주변국가에 대하여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었고 자신의 항해에 조선 연안을 지나가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길임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서복이 그가 장담한 것처럼 신선들이 살고 불로초가 있는 삼신산의 위치를 안다고 해도 또는 사술을 써서 진시황을 속이고 망명의 길을 떠난다 해도 막연히 창망대해로 뛰쳐나갈 수는 없는 것이다. 서복선단에는 경험이 축적된 해양인이 있어 안내를 담당했을 것이고 그들은 당연히 한반도 서해안을 누비던 한족(韓族)이었을 것이다.
서복선단이 가고자 하는 정착지가 어디가 되었던 발해로 나아가야 하며 발해를 지나면 황해에 이르고 황해를 항해하자면 한반도가 있고 탐라가 있고 멀리 일본이 있다. 산동반도에서 한반도로 가로질러가는 항로는 망망대해를 지나는 원양항해이기 때문에 그 당시만 해도 아직 개발되지 않았는데 신라 때 김춘추가 천신만고 끝에 건넜고 당나라의 소정방이 13만 대군을 이끌고 백제를 치러 온 후에 널리 알려진 항로이다.
분명 서복선단은 중국의 동이족과 한반도의 바닷사람들에게는 익숙해 있는 연안 항해를 시도했을 것이다. 발해만을 지나 동북진하여 묘도열도를 거치고 석성도, 장산군도를 지나 요동반도 연안을 따라가면 압록강 하구에 이르며 다시 남진하여 대동강 하류를 지나고 옹진반도와 당은포(남양)를 거치고 서해안을 따라 항해하면 변산반도를 지나 영산강 하류와 남해안에 이른다. 거기에서 어렵지 않게 탐라로 갈 수 있고 남해안에서 바로 대마도를 거쳐 일본으로 갈 수도 있으며 탐라를 거쳐 일본으로 갈 수도 있다. 서복선단은 이와 같은 항로를 따라 탐라에 이르고 탐라를 거쳐 일본으로 갔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연안 항해를 함에 있어서는 첫째로 육지나 섬을 바라보면서 항해하고 바람과 풍랑에 대비하여 쉽게 정박할 수 있어야 하며 도중에 항구에 기착하여 물과 음식을 공급받아야 한다. 연안 항해에서는 항로를 벗어나지 않도록 육지나 섬을 바라보면서 항해해야 하는데 100km정도의 시인거리(視認距離-배에서 보이는 육지 또는 섬까지의 거리)를 유지하여야 한다. 탐라는 남해 중에서 시인거리 안에 들어가며 남해안에서 대마도를 거쳐 일본으로 향하거나 탐라를 지나 일본의 후쿠오카까지 가는 도중에도 여러 섬이 시인거리를 확보해 준다.
둘째로 바람의 역할이다. 서복선단에 많은 사공이 있다 해도 역풍을 맞으며 항해하기는 쉽지 않다. 한반도 서해안은 계절풍지대로 늦가을부터 봄까지는 북풍계열의 바람이 불고 초여름에서 초가을까지는 남풍계열의 바람이 분다. 특히 한반도에서 탐라까지 그리고 남해안이나 탐라에서 일본까지는 바람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셋째로 조류의 영향이다. 한반도의 서해안과 남해안은 리아스식 해안으로 해안선의 굴곡이 심하고 조류의 빠르고 느림과 방향은 지역적인 편차가 심하여 물길을 잘 아는 동이족 특히 한반도의 바닷사람이 아니면 안 되며 여기에는 고대부터 배를 만들어 바다를 횡행하던 탐라 사람들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발해만을 지나는 동안에는 당연히 진나라 군선이거나 해적으로 오인 받을 수 있어 조선의 군사에 의하여 여러 번 검열을 받았을 것이고 일시적으로 정박하여 물과 식량을 얻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당시 진나라와 고조선의 껄끄러운 관계상황에서 고조선의 땅에 상륙한다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서복집단은 남으로, 남으로 항해를 계속한다. 고조선의 남쪽에는 마한을 비롯한 삼한이 버티고 있다. 삼한은 지금의 황해도, 경기도, 강원도, 전라북도를 영역으로 삼고 있었지만 영산강 유역을 비롯한 전라남도 지방은 삼한의 영역 밖이었다. 당시 마한은 54개국의 집합체로 지배세력은 목지국(目支國)이었고 변한과 진한은 각각 12개국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고대 마한의 인구가 10만이고 그 중에서 목지국은 5000이라는 설이 유력한데 그렇다면 목지국을 제외한 국가들의 인구는 2000-2500명 수준이었을 것이다. 서복이 삼한 땅에 밀고 들어가려면 하나 또는 그 이상의 국가를 내쫓거나 소멸시켜야 하는데 그 방법은 전쟁 밖에 없다. 그러나 삼한이 고조선의 영향권에 있었고 진나라와 고조선은 외형상 친교관계에 있었으며 항해를 인도했던 사람들도 동이족 또는 한족(韓族)이기 때문에 큰 충돌은 없었을 것이다.
수개월에 걸친 긴 항해에는 휴식, 물자조달 또는 바람과 풍랑으로 말미암은 피항(避港) 등의 이유로 교통이 발달하고 물산이 풍부한 항구를 골라 기착하여 어느 기간 정박하여야 하는데 이때에 많은 물품구매와 물자조달이 이루어진다. 과일, 채소는 물론 부족한 식량을 구매하기 위해서는 물물교환이나 화폐의 사용이 불가피한데 그때 한반도 사람들은 중국의 문물을 접하게 되며 말로만 듣던 화폐는 보물과 같은 것이었다. 은나라에서 주조된 명도전과 진나라 때 통용하던 반량전이 한반도 남해안과 일본에서 발견된 것은 꼭 서복은 아니더라도 당시 중국과 거래가 이루어졌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서복선단은 수개월에 걸친 항해 끝에 영산강 유역에 이른다. 영산강은 강폭이 넓고 깊어서 내륙 깊이 항로가 발달되었고 내륙항인 나주는 많은 물산의 집산지로 알려져 있다. 서해안으로부터 남해안으로 가거나 탐라 또는 일본에서 오는 배들이 으레 영산강 유역에 정박하기 때문에 거기에서는 내국뿐만 아니라 외국의 문물을 쉽게 접할 수 있고 여러 국적 또는 무국적의 바닷사람들이 왕래한다.
영산강 유역을 비롯한 전남지방은 청동기시대부터 6세기에 이르기까지 나라의 형태를 가지지 않았고 삼한도 경제적인 목적 외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당시 그 지역에는 국(國)도 아니고 부족사회도 아니고 씨족집단도 아닌 바닷사람들의 집단이 형성되어 있었고 그들을 부리는 사람들은 배를 여러 척 소유하고 여러 명의 뱃사람들을 고용하고 있는 돈 많은 호족이었다. 해양호족을 중심으로 한 집단은 기업의 형태를 가졌고 고용된 뱃사람들, 즉 바닷사람들은 능력과 일의 양에 따라 이윤을 분배받았다. 후술하겠지만 해상호족의 맹주는 탐라의 거족이었고 맹주국은 탐라국이었으며 또한 탐라에서 많은 젊은이들이 몰려왔고 그들은 기량이 뛰어나기에 더 많은 배당을 받을 수 있었으며 그리하여 가족을 불러 영산강 주변의 기름진 평야에 눌러앉는 사람들도 불어나고 있었다.
바닷사람들은 황해를 거쳐 발해만까지, 남해안, 그리고 탐라의 해역까지, 일본까지 심지어는 동지나해를 지나 영파 또는 항주까지 자유자재로 드나드는 자유인이었다. 바닷사람들은 누구보다도 한반도 서해안의 간단치 않은 뱃길을 훤히 꿰고 있다. 옛날의 뱃길은 언제나 변함없이 같은 길이고 같은 시기에 바람을 따라 같이 움직이기 때문에 바닷사람들은 그들이 한반도 사람이건 중국 동쪽에서 온 동이족이건 탐라사람이건 간에 그 뿌리가 달라도 쉽게 동화되며 금방 친숙해진다.
바닷길은 현지 사정에 익숙하거나 경험이 많은 사람이 아니면 알 수가 없어 서로 협력하고 협조를 얻어야만 항해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육지와 달라서 그들에게는 이래라저래라 하는 사람이 없다. 바닷사람들은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필요를 좇아 이리저리로 이동하기 때문에 그들은 바다를 공유하며 구태여 내 땅 네 땅을 가리거나 텃세를 부리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국경이 없으며 자유롭다.
바닷사람들에게 언어는 있으나 문자는 필요로 하지 않는다. 특히 바닷사람의 한 축을 이루는 탐라에는 고구려어, 백제어, 신라어 등 한반도의 언어와 남방민족의 언어가 섞여 그 어원을 찾기가 힘들고 기록하기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문적이 별로 없다. 땅을 차지하고 있는 국가들은 자기들끼리 땅따먹기에 여념이 없었기 때문에 당최 바다에는 눈길을 돌리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바다에 접해 있으면서도 고기잡이 외에는 바다를 몰랐다. 그러나 황해는 국가가 아닌 해양세력의 세상이기에 그들은 바다를 횡행하며 육지의 고관대작들이 요구하는 물건들을 공급하기도 하였다.
영산강 앞바다에 수십 척의 배가 몰려오고 있었다. 서복선단이다. 이렇듯 어마어마한 선단은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다. 더욱이 정박한 배들에서 꾸역꾸역 내리는 사람들의 모습에 해안가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서복선단을 이끄는 뱃사람들 중에는 안면이 있는 사람들도 꽤 있고 이산가족을 상봉하는 무리도 눈에 띄었을 것이다. 황해를 내 집 드나들듯하던 이 지역 사람들, 탐라사람들이 서복선단의 요원들 중에 많이 섞여 있고 또한 동이인들도 낯익은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서복선단이 타고 온 대선과 선진문물을 접하면서 토착세력 가운데 눈 밝은 호족들은 중국과의 무역을 통한 치부수단에 눈을 떴고 이때에 중국이 필요로 하는 것은 무엇인지 파악했을 것이며 선박제조기술도 익혔을 것이다. 이야 말로 한반도와 탐라에서 해양세력과 해양호족이 일대 변화를 맞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영산강 유역과 그 인근의 항구도시에도 해상호족들은 뿌리를 내리고 있었기에 그 어디에도 발을 디디기 어려운 서복은 눈을 부릅뜨고 있는 해상호족들에게 회유도 하고 협상도 하면서 기웃거렸고 나중에는 큰 섬인 남해도 또는 거제도에 정착을 시도했을 것이다. 그러나 6,000여 명의 무리가 정착할 곳은 한반도 어디에도 없었다. 서복선단은 남해 가운데 서서 남쪽에 아득히 보이는, 그러나 시인거리(視認距離) 안에 있는 한라산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서복은 거제도 해금강에, 그리고 남해의 금산에 마애명을 남기고 멀리 보이는 탐라를 향해 떠났다. 서복 일행 중에는 탐라 출신으로 탐라를 잘 아는 사람도 섞여 있을 것이니 탐라로의 항해는 순조로웠을 것이다.
서복은 탐라에 닿았고 조천포에 상륙하여 천신에게 제를 지냈다. 조천포 한 바위에는 서복이 남긴 <조천(朝天)>이라는 마애명이 남아있었는데 연북정(戀北亭)을 지을 때 묻혀버렸다고 한다. 천신제를 마친 서복이 한라산을 올려다보니 자애로운 어머니의 가슴처럼 포근하고 주위의 숲과 오름들은 그림같이 아름다웠을 것이다. 건장한 몇 사람만 데리고 서복은 한라산을 오른다. 한라산을 오르자면 멀고 지루하고 때로는 가팔라 오를수록 높아지고 오르다가 정상을 우러르면 우러를수록 까마득하고 경이롭다. 한라산 정상에는 둥글게 파인 백록담이 자리하고 정상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면 무변대해가 펼쳐지고 하늘은 땅과 바다가 아울러 받치고 있어 과연 크고 넓다. 서복은 북쪽으로 눈을 돌려 한반도 쪽을 바라보며 지나쳐온, 감히 접근도 못한 백두산, 묘향산, 금강산, 지리산을 못내 아쉬워하며 회한에 젖었으리라.
서복은 한라산을 두른 숲과 여기저기 솟은 오름들, 넓게 드리운 평원을 헤매면서 불로초를 찾았을 것이고 한라산에서 자라는 온갖 기화요초가 다 불로초이고 그들이 그렇게 갈망하던 삼신산의 하나인 영주산이 바로 여기 한라산인 것을 그때서야 깨달았을 것이다. 서복이 심기일전하여 오곡의 씨를 뿌리고 6,000여 명이 자리를 틀 대지를 찾으니 땅은 화산회토이고 산과 계곡은 짐승들의 땅이라 안거하기에는 좁고 이미 이 땅을 차지한 탐라사람들의 부릅뜬 눈길이 마음에 걸렸을 것이다.
서복선단은 해안을 빙빙 돌다가 정방폭포에 이르러 자기가 지나왔다는 마애명을 남기고 어디론가 정처 없는 길을 떠났다. 서귀포의 지명유래가 서복이 서쪽으로 돌아갔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라지만 뱃길의 향방을 누가 알랴. 바야흐로 서복은 불로초의 꿈은 버리고 평원광택(平原廣澤)을 찾아 노를 저어갔을 것이다. 그들의 종착지가 일본인지 모를 일이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 권무일은? = 경기도 화성 출신. 서울대 철학과와 행정대학원을 졸업했다. 포스코 근무를 시작으로 현대그룹 임원, 실버종합건설과 흥선종합건설 대표이사와 국제조명 사장을 지냈다. 2004년부터 제주에 정착해 집필 활동을 하고 있다.
2007년 '문학과 의식'을 통해 소설가로 데뷔해 장편소설 '의녀 김만덕(2008년)'과 '남이(2011년)'를 집필한 데 이어 '말, 헌마(獻馬) 공신 김만일과 말 이야기'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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