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 제주로 밀려오고 있다. 한마디로 러시다. 마치 '문명의 충돌' 기세로 다가오는 분위기다. 동북아 한국과 중국의 인연은 깊고도 오래다. 하지만 지금의 중국은 과거의 안목으로 종결될 인상이 아니다. <제이누리>가 중국 다시보기에 들어간다. 중국학자들 스스로가 진술한 저서를 정리한다. 그들이 스스로 역사 속 궁금한 것에 대해 해답을 찾아보고 정리한 책들이다. 『역사의 수수께끼』『영향 중국역사의 100사건』등이다.
중국문학, 문화사 전문가인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가 이 <중국, 중국인> 연재 작업을 맡았다. /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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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욱(李煜 : 937-978), 자는 중광(重光), 오대(五代) 후기 남당(南唐)의 군주다. 세칭 이후주(李後主)라 한다. 975년 송(宋)나라 군대가 금릉(金陵)을 깨뜨리자 항복하고 나중에 독살됐다. 시문, 음악, 서화에 능했다. 특히 사(詞)를 잘 지었다. 시문은 언어가 생동하고 현실과 자신의 신세에 대해 한탄하는 정서를 품고 있다고 평가받는다. 그의 작품은 제재나 의경에 있어 만당(晩唐) 오대(五代)의 염정(艶情) 위주의 패턴을 탈피했다.
송나라의 공격을 받고 옥에 갇히게 된 이욱은 하루하루 눈물 속에서 살아갔다. 아름다운 봄꽃과 가을 달을 보면서 고국의 정이 자연스레 피어났다. 그래서 천고에 전송되는 『우미인(虞美人)』을 창작했다.
春花秋月何時了,往事知多少! 봄날 꽃, 가을 달은 언제 지고 지난일은 얼마나 알고 있는가!
小樓昨夜又東風,故國不堪回首月明中. 어젯밤 작은 누각엔 또다시 봄바람 불어왔건만, 밝은 달 속에서 차마 고국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못하겠구나.
雕欄玉砌應猶在,只是朱顏改. 아름다운 난간과 옥 계단은 여전하련만 그저 홍안만 변했구나.
問君能有多少愁?恰似一江春水向東流. 내게 근심이 얼마나 많으냐고 물으시었소? 봄비는 내리자마자 강을 따라 동으로 흘러가는 것 같다오.
사로써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토로했던 시인 황제 이욱은 송 태종 조광의(趙光義)의 미움을 사게 될 줄 누가 알았으랴. 사 때문에 독약을 하사 받는다.
이욱은 남당의 말대 황제다. 그가 즉위할 때 남당의 국력은 이미 쇠하기 시작하였다. 국가가 패망한다는 위기의식은 심약한 군주를 짓눌렀다. 그는 송나라의 압박을 원수같이 싫어하면서도 무력으로 감히 송나라와 대적하지 못했다. 작은 방국으로 일부 지역에 안거하는 것으로 만족하였다. 공물을 보내 신하를 자처하기도 하였고. 정치상 겁쟁이요 문화에 있어서는 거인이라는 모순된 성격이 이욱에게 융화돼 있었다. 그렇게 중국 봉건사회에서 찾아보기 힘든 제왕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이욱의 부친 남당 중주 이경(李璟)도 사(詞) 문학의 거장이다. 이욱은 우미한 문화 환경에서 자라면서 그렇게 사에 대해서도 일가견을 갖게 되었고 좋아하게 되었다. 즉위 때에 국력은 이미 쇠한 상태였기에 그는 ‘어찌할 수 없이 지는 꽃’과 같은 운명에 맞닥뜨렸다. 이때의 그의 사는 궁정의 화려한 생활에 대한 미련을 표현하기도 하고 심한 애수를 품고 있기도 하다. 포로가 된 후 이욱은 고국을 그리며 눈물 속 나날을 보냈다. ‘짐이 곧 국가다’라는 봉건사회에서 황제였던 이욱은 국가의 멸망이 그의 가정의 멸망이었다. 이 시기 그의 사는 개인의 애수를 읊고 있지만 그런 애수는 국가의 멸망과 뗄 수 없는 관련을 맺고 있다. 옛날을 그리워하며 통한을 표현하고 있는 시들은 감동을 준다. 『상견환(相見歡)』을 보자.
無言獨上西樓 말없이 홀로 서루에 올랐더니
月如鉤 달은 마치 작은 갈고리 같더이다.
寂寞梧桐深處鎖淸秋. 적막한 오동만이 깊이 맑은 가을을 붙잡고 있었다오.
剪不斷 잘라도 잘리지 않고
理還亂 다스려도 여전히 혼란스러운 것.
是離愁 그게 이별의 근심이려니.
別有一番滋味在心頭. 그렇게 내 맘 속에 뭔가 또 다른 감정이 있더이다.
갈고리처럼 새로 나온 달, 오동나무에 붙잡힌 가을에 대한 묘사는 이별의 정이 처량하고 애달픔을 표현하고 있다. 남당의 황제 신분이었던 이욱이 북방에서는 유폐됐으니 그가 받은 고통은 일반인과는 다를 수밖에. 그의 마음속에 교차하는 것은 후회일까 통한일까? 어디에서부터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얘기할 사람도 어디에도 없으니. 이런 심정은 분명 애간장 끊어지는 아련함일 터이고.
이욱은 사를 지을 때 내용만을 본 것이 아니라 음률에도 매진했다. 그러면서 정사는 소홀했다. 황후 주아황(周娥皇)은 사도(司徒) 주종(周宗)의 딸이다. 사서에 두루 밝고 가무에 능했다. 그리고 비파 솜씨는 일류였다. 바람 불어 눈꽃이 휘날리는 어느 날 밤, 후궁의 따뜻한 전각 속에서 감미로운 미주의 주연을 베풀었다. 주아황은 술잔을 들고 앵두 같은 작은 입으로 웃음을 머금고는 이욱에게 말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좋은 밤, 어찌 춤추며 흥취를 돋우지 않을 수 있겠나이까?” 극도로 흥분한 이욱은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고 애정 어린 눈으로 주아황을 마주보며 말했다.
“바로 내 뜻이 그러오. 그런데 내가 새로운 곡을 창작해야 더 좋은 듯하오.” 성당(盛唐) 시기 광범위하게 유행했던 『예상우의곡(霓裳羽依曲)』, 그때는 이미 사람들에게 거의 잊힌 뒤라 주아황은 잔본만을 손에 들고 있었다. 그 자신이 새로이 창작하고 있었다. 오랜 기간의 노력으로 마침내 『예상우의곡』의 원형을 되찾았다. 개원(開元), 천보(天寶) 시기의 음악이 다시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그런 음악적 재능을 가진 주아황에게 있어 몇 수의 노래를 창작한다는 것은 여반장이었다. 그녀는 즉시 지묵을 가져오게 하고는 악보를 쓰기 시작하였다. 웅얼거리는 듯하면서 조용조용 생각도 하지 않는 듯 연이어 두 곡을 지었다. 하나는『요취무포(邀醉舞破)』요 다른 하나는 『한래지파(恨來遲破)』였다. 뒤이어 악사들이 두 곡을 연주했다.
주아황은 음률에 능통했을 뿐만 아니라 골패나 바둑 어느 하나 정통하지 않은 게 없었다. 이렇게 다재다능한 지인을 이욱은 대단히 총애했다. 그녀와 아침저녁으로 하루 종일 경쾌한 노래와 우아한 춤 속에서 함께 했다. 주아황이 죽은 후 이욱은 그녀를 회상하고 그리워했다. 주아황이 창작한 두 곡은 시간이 지나자 악보는 거의 잊혀졌다. 이욱이 옛 곡을 정리하고 주변에 탐문하자 당시 빈(嬪) 어류주(御流珠)만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도 이욱은 그렇게라도 안위 받았다.
한결같은 사랑을 나눈 황제는 중국 역사상 드물다. 이욱도 다르지 않았다. 주아황에게 누이동생이 있었다. 역사에서 소주후(小周后)라 불리는 그녀는 용모와 자태가 우아하고 아름다웠으며 안색이 단아하고 차분하였다. 주아황이 죽기 전에도 이욱은 비밀리에 그녀와 자주 만났다. 어느 봄 밤 달빛이 몽롱하고 얇은 안개가 꽃을 감싸고 있을 때 소주후가 아름답게 치장했다. 검은 눈썹 가볍게 쓸어 올리고 상투를 높이 올려 짧은 치마를 걸치고 금실 신발을 들고서는 급히 궁을 빠져나와 화당(畵堂) 남쪽을 향해 달려갔다. 그곳에는 단선을 들고 문인으로 분장한 이욱이 고개를 지켜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소주후가 이욱을 보자마자 마음대로 하라는 듯 품에 안겼다. 이욱과 자신의 누이동생의 애정에 대해 주아황은 그저 몰래 애달파 할 뿐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끝내 우울증이 지병이 되어 황천길에 오르게 되는 이유가 되었다. 어쨌든 이때부터 이욱은 소주후와 공개적으로 왕래하였다.
소주후의 음률에 대한 재능은 언니를 따를 수 없었다. 그러나 바둑은 고수였다. 바둑과 장기를 너무 좋아해 바둑 광이었던 이욱의 사랑을 받았다. 둘은 늘 포석을 하고 싸우는 것으로 낙을 삼았다. 하루는 이욱과 소주후가 바둑을 두는데 서로 맞붙어 양보하지 않았다. 더욱더 몰두하기 위해 어떤 간섭도 받지 않도록 이욱은 호위병들에게 궁문을 지켜 서서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명령했다. 어느 대신이 수입이 적어 국고가 텅텅 비게 됐다고 국가 재정 상황을 이욱에게 보고를 하려 했으나 황제를 만날 수 없었다. 다른 대신은 송나라가 출정하기 위해 군사들을 훈련시키고 있으니 준비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고 상주하려 했으나 호위병들에게 막혀 들어가지 못했다.
세 황제를 모신 원로 중신 대리경(大理卿) 소엄(蕭儼)이 그 소식을 듣고는 노기등등해 궁으로 달려가 바둑을 엎어버렸다. 그를 따라 들어갔던 문무 대신들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욱이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자 화를 참지 못해 얼굴색이 변하며 “그대 위정(魏征) 흉내를 낼 셈이오?”라고 소리를 쳤다. 노기에 찬 군주를 보면서 이엄은 발끈하며 엄하게 “신은 당시의 위정처럼 할 수만 있다면 하겠나이다. 그럼 폐하께서도 당시의 당태종(唐太宗)처럼만 되시기 바랍니다. 만약 신이 위정처럼 될 수 없다면 폐하께서도 당태종처럼 될 수 없나이다!”라고 꾸짖었다. 이 말을 들은 이욱은 아무 말도 할지 못하고 바둑을 접었다.
이욱은 서화에도 능했다. 회화는 담백하고 신선하여 자신만의 격조를 이루었다고 평가 받는다. 대나무를 그릴 때 뿌리에서 가지까지 하나하나 세밀하게 윤곽을 그렸다. 이른바 ‘철구쇄(鐵鉤鎖)’이다. 나무숲과 새들을 그리면 일반 화가들보다도 뛰어났다. 풍호운룡(風虎雲龍)을 그리면 패자의 풍채를 풍겼다. 이욱의 서법은 이마 모양처럼 볼록하고 굴곡이 있었다. 한송천장절(寒松千丈節)과 같은 절개가 있어 ‘금착도(金錯刀)’라 일컫는다. 그는 행서를 즐겼다. 필체가 가늘고 힘이 있어 문채와 운치가 갖추어져 있다고 평가 받는다. 풍연사(馮延巳)가 이욱의 생일을 축하하며 사를 지었는데 이욱이 답례로 친히 서화를 내리자 풍연사는 기쁨을 금하지 못했다고 전한다. 청량사(淸凉寺) 법당 앞에 덕경당(德慶堂)이 있는데 그 편액이 이욱이 친히 쓴 것이다.
978년 7월 7일 이욱은 독살 당한다. 이욱은 비록 나약하고 무능했다고 할 수는 있지만 폭군은 아니었다.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에 세금을 면제해줘 민심을 얻었다. 강남의 벼슬아치들과 백성들이 이욱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통곡하며 추모의 제단을 만들었다. 후궁이었던 여인들은 불경을 필사하면서 이욱의 명복을 빌었다.
송태조 조광윤(趙光胤)은 “이욱과 같은 문리가 있고 고상한 사람은 한림학사가 됐으면 됐지 어찌 일국의 군주와 어울린다는 말인가?”라고 했다고 한다. 어떤가? 천하를 제패했던 인물이 평가, 이욱과 맞지 않은가.<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