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 제주로 밀려오고 있다. 한마디로 러시다. 마치 '문명의 충돌' 기세로 다가오는 분위기다. 동북아 한국과 중국의 인연은 깊고도 오래다. 하지만 지금의 중국은 과거의 안목으로 종결될 인상이 아니다. <제이누리>가 중국 다시보기에 들어간다. 중국학자들 스스로가 진술한 저서를 정리한다. 그들이 스스로 역사 속 궁금한 것에 대해 해답을 찾아보고 정리한 책들이다. 『역사의 수수께끼』『영향 중국역사의 100사건』등이다.
중국문학, 문화사 전문가인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가 이 <중국, 중국인> 연재 작업을 맡았다. /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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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仁宗) 조정(趙禎)이 집권 후기 통치계급 내부에 나날이 부패가 심해졌다. 밖으로는 외교적으로 편안함만을 위해 타협하였고 내부적으로는 악순환이 계속돼 보수적으로 변했다. 관료 기구가 방대해지고 관원들은 탐오부패하고 공공연하게 뇌물이 성행하였다. 군대의 수는 적지 않았으나 전투력을 상실해 서하(西夏), 요(遼)의 침공에 매번 패전하였다. 어쩔 수 없이 은을 ‘하사’하면서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이 모든 것이 쉽게 대처할 능력이 없던 조정을 근심에 쌓이게 만들었다. 더욱이 그를 걱정하게 만든 것은 불혹의 나이가 됐으면서도 황자를 얻지 못해 절손의 처지에 빠졌다는 것이다.
조정은 13세에 즉위하였다. 15세에 유태후(劉太后)가 그를 위해 곽(郭) 씨를 황후로 세우고 아름다운 여인들을 골라 후궁으로 채웠다. 무슨 이유 때문이지 몰라도 황후나 비빈(妃嬪)들 모두 황자를 낳지 못했다. 이 때문에 조정은 궁중에 적제상(赤帝像)을 봉공해 황손을 얻을 수 있게 해달라고 아침저녁으로 기도하였다. 경우(景祐) 4년에 후궁 유미인(兪美人)이 아들을 낳았지만 오래 살지 못했다. 보원(寶元) 2년 묘미인(苗美人)이 아들을 낳자 조정이 기쁨에 넘쳤다. 조정은 기쁜 나머지 친히 보배 같은 아들에게 ‘昕(흔)’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태양이 막 솟는 시간’이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1년 반을 넘기지 못하고 요절하였다. 경력(慶歷) 원년 주재인(朱才人)이 아들을 낳자 조정은 ‘曦(희)’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새벽 햇빛’이라는 뜻이다. 어린 아들을 악왕(鄂王)에 봉하였으나 3살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떴다. 조정은 이에 타격을 받아 자신에게 아들이 없음을 한탄하며 우울증에 빠졌다. 황손을 얻는 일이 당시 조정의 큰일이 되면서 그에 따라 황자를 사칭하는 ‘가짜 황손’ 사건이 발생하였다.
황우(皇祐) 4년 4월 어느 날, 경성에 이름이 전대도(全大道)라는 여산(廬山)화상(和尙)이 나타났다. 그는 품위가 있고 의표 당당한 청년을 데리고 와서는 그 청년이 황상의 황자라고 하면서 황상을 만나기를 청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경성이 떠들썩해졌다. 사람들은 서로 소식을 전하면서 모여들어 청년을 둘러쌌다. 이러쿵저러쿵 용모에 대해 아무렇게나 평가하면서 소곤소곤 에워쌌다. 개봉부 권지(權知) 전명일(錢明逸)이 소식을 듣고 크게 놀라 감히 태만할 수 없는 사건이라 판단하고 사람을 파견해 화상과 청년을 아문으로 데리고 와 예로써 대하며 거처를 마련해 주었다. 그리고 급히 조정에 상소를 올렸다.
소식을 전해들은 조정은 시끄러워졌다. 대신들의 의견이 분분하였다. 이쪽에서는 황상이 얻은 세 아들들은 요절했는데 어디서 감히 황자라 사칭하는 자가 나타났다는 말인가 ; 분명 사기일 것이니 다시 그런 일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일벌백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저쪽에서는 황제의 사생활을 어떻게 일일이 다 알 수 있다는 말인가 ; 만약 화상의 말이 사실인데도 주살한다면 그 결과를 누가 책임질 수 있는가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제각기 떠들어 대며 의견일치를 보지 못했다. 조정은 그 일을 보고 받고는 노기충천하여 한림학사 조개(趙槪)와 지간원(知諫院) 포증(包拯)을 파견해 신속하게 사건 본말을 확인한 후 아뢰라 명했다.
포증은 인정에 끌리지 않는 공평무사한 인물이었다. 공정하게 사건을 판결하기로 유명하였다. 조정의 신임을 받고 있던 포증이 사안을 듣고는 엄중하다 여기고 전부 들춰내 진상을 파악하리라 결심하였다. 끝까지 파고들어 허점을 들춰내 진상을 밝혔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청년의 이름은 냉청(冷靑)이었다. 그의 모친 왕(王) 씨는 원래 조정 후중 중의 궁녀로 궁궐의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나중에 그녀는 조그마한 과오를 저질러 궁에서 쫓겨났다. 살아갈 방도가 없게 되자 냉서(冷緖)라는 낭중의생(郎中醫生)에게 시집갔다. 결혼 후 왕 씨는 냉서와 사이에 1남 1여를 낳았다. 그 아들이 냉청이다. 냉청은 어릴 적부터 행실이 좋지 않았다. 공부도 열심히 하지 않았으며 노동도 싫어 일도 하지 않았다. 밥이 오면 입을 벌리고 옷이 오면 손을 내미는 안일하고 나태한 삶을 살았다. 그는 빈둥거리며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돌아다녔다. 나중에 가출해 도처를 돌아다니다가 여산으로 들어갔다. 화상 전대도는 냉청이 궁녀의 아들이라는 것을 들었다. 청년의 풍채가 좋으며 의표도 당당한 것을 보고는 그를 받아들였다. 전대도는 당시 황실에 계승자가 없어 조급해 하고 있고 왕 씨가 궁중 경력이 있는 까닭에 어딘가 허점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였다. 만약 냉청을 잘 조율하고 감언이설로 황제를 속일 수만 있다면 자신도 명예와 재물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 여겼다. 그래서 전대도와 냉청은 밀실에서 음모를 꾸미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매일매일 냉청을 훈련시켜 황자로 꾸민 후 여산을 나왔다. 그런데 세상 일이 어디 그리 쉬우랴. 그리고 당시 뛰어난 판결로 유명한 포증을 만났으니 마각이 드러나는 것은 시간 문제였을 뿐. 두 사람 모두 주살 당하는 것으로 ‘가짜 황자’의 익살극은 막을 내렸다.
이 일 이후 ‘무자(無子)’는 조정의 마음병이 되었다. 하루 종일 궁궐에 들어박혀 모든 후궁들과 동침을 했으나 결과는 그저 헛수고로 돌아왔다. 아들을 얻기는커녕 자신의 육체도 망가졌다. 정신과 신체가 피곤해지니 병이 생겼다. 그는 깊은 궁궐에 오랫동안 칩거하고 단약을 복용하면서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대신들이 매번 국정에 대해 상주할 때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형식적으로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가우(嘉祐) 4년 후궁 동어시(董御侍), 주어시(周御侍)가 각각 딸을 낳았다. 이때부터 조정은 완전히 낙담하게 되었다. 자신의 아들로 하여금 황위를 계승하게 할 희망이 사라졌다는 것을 받아들였다. 어쩔 수 없이 양자 종실(宗實)을 들여 후사를 잇게 하고 ‘曙(서)’라는 이름을 하사하면서 자신의 욕심을 내려놨다. 그런 후 2년이 채 되지도 않은 어느 날 조정은 고질병이 재발해 복녕전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그의 나이 54세였다.
조정은 일생 동안 딸은 많았으나 아들은 얻지 못했다. 진짜 황자는 없었고 가짜 황자만 시끌벅적 군중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끝내 한을 품고 죽었다는데 음란무도의 결과인가 아니면 전대의 과보인가. 물론 지금의 관점으로 본다면 우스운 일이긴 하지만.<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