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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패신저스(Passengers) (4)

동면에서 깨어난 프레스턴과 오로라는 호화 우주선에서 모든 것을 독점적으로 즐기는 ‘자유인’의 삶을 누린다. 안락한 잠자리, 최첨단 의료시설, 약품, 식량 등 아발론호는 생존을 위한 모든 게 갖춰져 있다. 노동의 수고도 필요 없고, 생명과 안전을 위협하는 것도 없다. 그러나 두 사람은 그런 자유인의 삶이 행복했을까.

 

 

5000명의 대규모 우주 이주자들을 120년간 동면 상태로 조정해 태우고 떠난 아발론호에서 프레스턴은 기계 오작동으로 30년 만에 깨어난다. 오로라는 외로움을 못 견딘 프레스턴의 조작으로 역시 자의와는 상관없이 31년 만에 ‘깨어남’을 당한다.

 

프레스턴과 오로라는 마치 에덴동산의 아담과 이브처럼 짝을 이뤄 아무도 없는 거대한 우주선 안에서 여생을 마친다. 물론 목적지였던 ‘홈스테드 II’라는 행성에 도착해 보지 못한다. 작가였던 오로라는 예기치 않게 우주선에서 프레스턴이라는 남자와 짝을 이뤄 보내게 된 자신의 일생에 후회가 없다는 기록을 남긴다.

 

동화 같은 결말이다. 동화는 항상 주인공인 선남선녀가 역경을 극복하고 ‘함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라고 끝을 맺는다. 어디 동화뿐이겠는가. 내로라하는 사람들이 말년에 제출하는 ‘자서전’도 대개는 ‘자신은 열심히 살았으며, 후회 없는 삶을 살았노라’고 선언할 뿐 회한과 아쉬움을 담지는 않는다.

 

프레스턴과 오로라가 자신들에게 주어진 삶의 조건에 만족했다면 아마도 자손들을 남겼을 듯하다. 그들의 자식들이 늙어서라도 자신들의 목적지였던 ‘홈스테드 II’에 도착할 수 있었다면 자식을 낳았을지도 모르지만 90년 후에는 자식들도 이미 모두 늙어 죽었을 때다.

 

 

고대처럼 ‘근친혼’이 이뤄졌다면 3대가 번성할 수 있는 시간이고, 5000명의 승객들이 동면기에서 깨어났을 때 적어도 수십명의 프레스턴의 후손들과 만났을 터이다. 하지만, 우주선에서 프레스턴과 오로라가 키워 남긴 것은 중앙홀에 있는 커다란 나무 한그루였다.

 

인간이 생존할 수 있는 조건들이 완벽하게 갖춰진 호화우주선에서 모든 것을 독점했던 프레스턴과 오로라는 아마도 ‘자유인’의 삶을 누렸을 것 같다. 그러나 그런 ‘자유인’의 삶이 과연 행복했을지는 모르겠다.

 

1941년 루스벨트 대통령은 인간이 누려야 할 권리로 ‘4대 자유’를 말하며,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표현할 자유’ ‘신앙의 자유’ ‘공포로부터의 자유’ ‘결핍으로부터의 자유’로 정리한다. 아발론호 속에서 프레스턴과 오로라를 억압하고 통제할 사람은 없다. 안락한 잠자리, 최첨단의 의료시설, 약품, 식량 어느 것 하나 부족함이 없다.

 

하다못해 과자 부스러기 하나만 흘려도 어디선가 청소 로봇이 쏜살같이 달려와 치워준다. 삶을 위한 노동의 수고도 없다. 생명과 안전을 위협하는 것도 없다. 어쩌면 루스벨트 대통령이 선언한 4대 자유가 완벽하게 구현된 에덴동산 못지않은 우주 낙원이다.

 

그러나 4대 자유만 보장되면 인간은 과연 만족하고 행복할까. 루스벨트의 4대 자유란 냉정하게 판단하면 모두 ‘~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소극적 자유’이며, 인간의 행복을 위한 최소한의 ‘필요조건’일 뿐이다. 몇가지 최소한의 필요조건만 충족됐다고 인간이 자유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 돈과 건강이라는 필요조건만 갖춘다고 해서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다. 행복의 ‘충분조건’은 필요조건과는 다른 또 다른 무엇이다.

 

 

진정한 자유는 억압과 공포, 결핍으로부터의 자유 등 ‘~으로부터의 자유’라는 소극적 자유가 아니라 ‘~을 할 수 있는’ ‘적극적 자유’다. 프레스턴과 오로라는 소극적 자유는 마음껏 누릴 수 있었지만 그들이 꿈꾸는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자유는 철저히 봉쇄된 상태로 일생을 마친다.

 

작가로서 성공하고 싶은 꿈, 친구들과의 떠들썩한 파티나 오로라의 말처럼 낙엽 떨어지는 센트럴파크를 산책할 수 있는 사소한 자유조차 더 이상 누릴 수 없다. 과연 그들은 행복했을까. 공포도, 결핍도, 억압과 통제도 없지만, 정작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딱한 일이다.

 

지금 대부분의 대한민국 국민들이 루스벨트 대통령이 선언한 4대 자유를 누린다. 그럼에도 모두 자유롭거나 행복하지 못하다고 말한다. 분명히 프레스턴과 오로라처럼 자유를 누리는데도 정작 하고 싶은 것을 자유롭게 할 적극적 자유는 누릴 수 없다.

 

열심히 공부한다고 모두가 ‘좋은 대학’에 가고, 열심히 일한다고 모두 사장이 되거나 부자가 되는 것도 아니다. 연예인을 꿈꾼다고 연예인이 되지도 않으며, 결혼하고 싶다고 결혼하거나, 아이를 낳고 싶다고 마음대로 몇씩 낳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일부 ‘금수저’를 뺀 대부분의 우리들은 언제쯤이나 소극적 자유만이 아닌 적극적 자유까지 누릴 수 있을까. 그것이 가능하기는 할 것인가. 소극적 자유에 목말랐던 시절이 더 불행할까 아니면 적극적 자유에 목마른 지금이 더 불행할까. [본사 제휴 The Scoop=김상회 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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