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 아서(Arthur)는 어린 시절 부모에게 버림받고 학대당한 정신적 충격으로 줄곧 ‘뜬금없이’ 웃음이 터지는 기묘한 정신병을 앓는다. 아서를 학대한 어머니는 ‘그럼에도’ 아서에게 항상 예의바르고 항상 웃기를 강요한다. 아서는 견디기 어려운 고통과 불안, 분노를 ‘웃음’이라는 가면 뒤에 감추고 살아야 한다.
‘페르소나(Persona)’는 가면의 라틴어다. 고대 그리스의 연극배우들은 자신의 배역에 따른 ‘가면’을 쓰고 무대에 올랐다. 자신의 개인적인 슬픔과 걱정을 간직한 채 자신이 맡은 ‘밝은’ 연기를 제대로 소화하지 못할 것을 걱정해서였다고 한다. 반대의 경우도 물론 마찬가지겠다. 서양 놀이인 트럼프에서 ‘조커’란 자신의 고유한 성질과 가치 없이 상황의 요구에 따라 무엇으로든 변하는 존재다. 항상 웃고 있는 ‘조커’란 그렇게 대단히 슬픈 존재다. 웃는 모습을 보고 싶어하는 관객들을 위해 웃고 있는 가면을 쓰고 울어야 하는 배우처럼 슬픈 존재가 어디에 있을까.
아서는 자신의 가난과 ‘웃음병’을 온전히 자신의 책임이나 운명처럼 받아들인다. 자신을 멸시하고 조롱하는 세상에도 분노를 표출하지 않는다. 동네 ‘양아치’ 아이들이 재미삼아 두들겨패도 그러려니 하고 만다. 웬만하면 복수를 위해, 혹은 또다른 피해를 당하지 않기 위해 권총이라도 사러 나서겠지만, 아서는 친구가 건네는 총기도 마다한다. 크게 재능이 있어 보이진 않지만 코미디언이 되겠다는 소박한 꿈을 간직하고 나름대로 노력도 하고, 정신병원에서 정기적으로 처방받는 약도 성실하게 먹으며 지낸다.
그러던 어느날 자신의 ‘병’이 부모로부터 버림받고 학대당한 결과라는 것을 알게 된다. 자신이 고담시 최대 부호 웨인의 사생아라는 어머니의 말을 믿고 웨인의 어마어마한 대저택에 도움을 청하러 갔건만, ‘그것마저 거짓이었다’는 걸 알아챈다. 어머니를 베개로 눌러 죽이고, 자신을 우롱한 동료를 사살하고, 자신을 시청자들 앞에서 조롱하기 위해 토크쇼에 초청한 진행자를 생방송 중 사살한다. 가장 밝게 웃는 조커의 분장을 한 채 진행자를 향해 총기를 발사한다. “나는 내 인생이 비극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희극이었다”고 선언한다.
그리스 문화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 희곡의 모든 비극은 ‘이성’과 ‘감성’의 갈등에서 비롯된다. 그리스 사람들은 세상의 모든 비극은 인간의 감성적인 욕망과 이성적인 도덕·윤리 사이의 갈등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파악했다. 이성적으로 통제되지 않는 ‘날것(생)’으로서의 감성적 욕망은 문제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욕망들을 이성의 힘으로 통제하기는 항상 어렵다. 아마도 우리 모두가 겪는 갈등일 것이다. 아서의 ‘비극’ 역시 학대받는 자신의 고통과 분노를 이성으로 위태롭게 통제하면서 시작됐다. 복수하고자 하는 욕망도 나름대로 이성으로 통제해 왔지만, 그 이성의 통제력이 한순간 무너졌다.
이성의 통제력을 포기한 순간 아서는 완전한 자유를 느낀다. 그리고 완전한 ‘악당’으로 태어난다. 이성을 통째로 던져버렸을 때, 개인적으로는 완전한 해방을 맛보고, 비극적이었던 삶이 ‘즐거운’ 희극이 된다. 조커 특유의 자지러지는 웃음이 터진다. 문제는 이 순간부터 조커는 행복한데 고담시 전체가 불행해졌다는 점이다.
우리 사회에 웃고 있는 ‘가면’ 뒤에서 울고 있는 ‘조커’들이 얼마나 많을까. 그들의 ‘가면’이 웃고 있는 것은 ‘먹고사니즘’ 때문일 수도 있고, 우리가 배워온 윤리와 도덕이라는 이성적 통제일 수도 있겠다. 그들이 ‘먹고사니즘’도 포기하고, 윤리와 도덕이라는 아슬아슬한 통제력도 팽개치고 자유로워지고 싶어질 때 그들은 영화 속의 아서처럼 통제불가능한 ‘슈퍼 빌런’이 돼버릴지도 모르겠다.
우리 사회에 잊을 만하면 등장하는 ‘슈퍼 빌런’을 향해 모두 합심해서 돌을 던지는 것은 아마도 무의미하겠다. 우리가 매일 마주치는 수많은 사람들이 웃고 있는 ‘가면’ 뒤에서 울고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조금은 그들의 입장과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 더 중요할 듯하다. 악마와의 전쟁에서의 승리보다는 악마의 출현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 더 현명하지 않겠는가. [본사 제휴 The Scoop=김상회 정치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