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belief)은 신뢰(trust)와 비슷하지만 근본적인 인식체계가 다르다. 신뢰가 경험적이고 논리적인 것이라면, 믿음은 다분히 감정적이고 영적인 영역에서 작동한다. 신뢰는 그 신뢰에 반하는 정보들이 들어오면 약화되거나 깨지지만, 믿음은 아무리 많은 반대 정보가 있어도 쉽게 깨지지 않는다.
1184년 프랑스의 대장장이 발리앙(올랜도 블룸)은 예기치 못했던 아내의 자살로 망연자실하고 세상에 미련도 없다. 한가지 마음에 걸리는 건 자살한 영혼은 영원히 구원받지 못하고 지옥에 떨어진다는 기독교적 ‘믿음’이었다.
믿음이라는 것은 경험의 문제이거나 논리의 문제가 아니다. 자살한 사람이 지옥 불구덩이에 떨어진 것을 목격한 적도 없고, 증언을 들은 바도 없다. 그렇다고 과학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마음속에 자리 잡은 믿음은 떨쳐버릴 수 없이 강고하다.
자살한 아내가 지옥의 불구덩이에 떨어져 영원히 고통받을 것을 두려워하던 발리앙은 어느날 마을을 지나 예루살렘으로 진군하던 십자군 한 무리와 마주한다. 십자군 지도자는 이벨린의 고프리 남작(리암 니슨)이다. 생면부지의 십자군 기사가 조금 따분하지만 ‘내가 네 아비니라’는 막장 드라마적인 멘트를 날린다. 출생의 비밀은 한국 드라마에만 등장하는 단골 메뉴가 아닌 모양이다.
발리앙은 그를 따라 십자군 원정에 동참한다. 고프리 남작이 ‘아비’라서가 아니다. 발리앙은 초면에 아비라고 들이대는 고프리 남작에게 아무 흥미가 없다. 다만 십자군에 참전하면 자살한 아내의 죄가 씻어질 수 있다는 또 다른 근거 없는 ‘믿음’ 때문에 십자군 원정에 동행한다.
사랑하는 아내가 이유 없이 우울증으로 자살하고 난 후 발리앙은 ‘신은 이미 나를 버렸다’고 생각하고 자신을 기억조차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면서도 믿음의 마지막 끈을 놓지 못한다. 믿음이란 그런 것이다.
십자군 전쟁의 역사는 사실상 기독교 역사의 ‘스캔들’에 해당한다. ‘성지 회복’이라는 대의명분 아래 유럽의 왕과 영주들은 더 많은 영토와 부를 위해, 장사꾼들은 전쟁통에 한밑천 잡으려고, 유럽의 온갖 부랑아들은 답답한 현실을 도피해 일확천금하거나 신분을 세탁하기 위해 축제처럼 참전했다.
홍수가 났을 때 마음 놓고 폐수를 강으로 방류해 버리는 공장들 같은 꼴이었다고 한다. 발리앙과 같이 속죄를 위한 참전자들도 있기는 했으나 다수는 아니었던 듯하다. 그렇게 불순하게 진행된 성전聖戰이 제대로 수행될 리 없다. 온갖 권모술수, 야합, 야만과 살육, 그리고 부패가 만연한 십자군 전쟁은 200여년 계속됐다.
자살한 아내를 지옥에서 구하겠다는 순수한 종교적 열정으로 참전한 발리앙에게 어떤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영화를 끝까지 보지 않아도 대략 미뤄 짐작할 수 있다. 권력에만 눈이 뒤집힌 영주들과 기사들, 오합지졸의 병사들과 함께 이슬람의 위대한 전사 살라딘이 이끄는 2만 대군을 격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발리앙은 ‘성지 수호’라는 대의명분보다는 다분히 자살한 아내의 영혼을 지옥에서 구해내기 위해 살라딘의 대군을 맞이해 야차(사람을 괴롭히거나 해친다는 사나운 귀신)와 같은 살육전을 벌인다. 참으로 딱하다. 세상에 어느 신이 신의 창조물인 인간을 도륙질하는 것도 기꺼워 그가 저지른 모든 죄와 자살한 아내의 죄까지 사면해 준단 말인가.
예루살렘 성이 마침내 살라딘에게 함락되고, 발리앙과 살라딘이 마주한다. 발리앙과 살라딘 사이에 ‘종전 회담’이 열린다. 발리앙은 예루살렘 성에 살아남은 기독교도들을 죽이지 않고 보내주는 조건으로 성을 살라딘에게 넘긴다. 종전 협상이 끝나고 발리앙이 살라딘에게 묻는다. “당신에게 예루살렘은 무엇인가?” 살라딘이 빙긋이 웃으며 대답한다.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다(Nothing and Everything).”
우리는 오늘도 ‘아무것도 아닌 것’이 ‘모든 것’인 양 목숨을 내놓고, 혹은 모든 것을 희생하거나 인간이기를 포기하고서라도 죽기 살기로 싸운다. 우리가 다투고 투쟁하는 모든 것은 어쩌면 살라딘의 말처럼 ‘사실은 아무것도 아닌데 모든 것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고, ‘모든 것이지만 결국은 아무것도 아닌 것’일지도 모르겠다. [본사 제휴 The Scoop=김상회 정치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