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미 4.3성(성담)
위미리는 4·3 당시 무장대로부터 두 차례의 습격이 있었다.
4.3의 광풍이 절정으로 치닫던 1948년 11월 28일 새벽에 산속의 무장대는 평온했던 위미마을을 습격한다.
당시 폭도로 불리던 무장대는 군경의 토벌작전이 심해지면서 식량 등 물자부족에 시달렸다. 겨울을 앞두고 물자를 조달하기 위해 위미마을을 습격하여 무차별적으로 가옥에 불을 지르고 약탈을 자행했다. 이로 인해 이날 어린이를 포함한 위미리 주민 22명이 무장대에 의해 목숨을 잃고 수많은 부상자가 발생했다.
또한 방화로 당시 위미리 가옥 350여채 중 10여호를 제외하고 모두 불타버렸다.
집도 옷도 식량도 모두 불타버린 마을 주민들은 겨울을 앞두고 이루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어야만 했다.
마을 위 중산간 가까이에 있었던 대성동과 종남밭, 종정동, 웃뙤미, 망앞 등의 마을 주민들도 본 마을 석성 안으로 소개되었고 종남밭 주민들은 4.3이후에도 마을로 돌아가지 않아 잃어버린 마을이 되었다.
북촌이 토벌대에 의해 엄청난 희생이 있던 마을이었다면 위미는 무장대에 의한 희생이 컸던 곳이다.
그해 12월 31일에 무장대는 다시 위미마을을 습격한다.
위미 마을주민들은 1차습격 이후 민보단을 조직하여 경찰지서의 지시에 의해 대규모 성을 쌓아 무장대의 습격에 대비하였다.
4·3성 축성 사업에는 마을의 모든 남녀노소가 참여했다. 성곽은 위미1리 전포교 앞에서부터 '밍금'까지 이어졌고 위미초등학교 뒤쪽에서부터 동쪽으로 서광사 '마메기' 앞 '흙통폭낭' 뒤쪽을 거쳐 위미2리사무소와 '벌러니 코지'까지 2.7km정도 이어졌다고 한다. 이 성곽은 당시 2개월의 대역사 끝에 이루어졌으나 지금은 과수원의 밭담으로 되돌아가 거의 사라져 버렸다.
현재는 위미초등학교 뒷담으로 이용되고 있는 300여m의 4·3성이 남아있다.
4.3으로 인해 위미리 주민 60여명이 희생됐다. 이로인해 산간부락과 위미 본 마을 사람들간에 불신의 골이 깊게 되었다고 한다. 어떤 이유로든 4.3은 엄청난 시련과 희생을 남기고 깊은 상처를 주었다.
아직도 정명이 되지않은 4.3추모공원의 백비가 말해주 듯 4.3의 아픔은 완전히 아물지 않은 채로 진행형이다. 그나마 많은 이들의 노력으로 화해와 상생의 이름으로 억울했던 희생자들의 명예회복이 이루어져 다행이다.
새로 난 길 틈새로 옛길이 이어져 있다. 걸어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위미 마을에선 어디서나 집 담벼락에 기대어 선 귤나무가 가을 정취를 단장하고 있다.
돌담을 쌓는 형태에 따라 담장의 명칭이 있다.
그 중 사진에서 보이는 것처럼 하부에 작은 돌을 쌓고 그 위에 큰돌을 쌓은 것을 잣굽담이라 한다. 배수기능을 좋게 하기 위해서라는데 납득이 잘 안간다. 아마도 고르지 않은 바닥 때문에 큰돌을 쌓기위해 작은(작지, 작, 잣) 돌을 먼저 깔아 기초를 쌓은 것이라고 추측해 본다.
4월 초면 제주의 봄에는 만개한 왕벚꽃의 향연이 일품이다. 제주시의 전농로 못지 않게 위미리 마을을 지나는 일주도로변 벚꽃길도 봄에는 장관을 연출한다.
어느덧 출발지인 동백나무 군락지가 보인다. 10km정도의 여정이다. 위미리의 마을길은 봄에는 귤꽃향과 더불어 또다른 색으로 나그네들을 반길 것이다.
위미리 마을길 꼭 한번 걸어보길 권하며 행복했던 위미리 여정을 마친다. <끝>
** 지금까지 김승욱의 '답사기행-제주역사나들이'를 애독해주신 독자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김승욱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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