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몇 가지 이야기도 격장지계의 지모를 응용한 것이다.
초(楚) 성왕(成王)은 이미 상신(商臣)1을 태자에 앉혔지만 나중에는 작은아들 공자 직(職)을 앉히려고 생각하였다. 상신은 그 말을 듣고 진짜인지 거짓인지 알 길이 없어, 자기 사부인 반숭(潘崇)에게 물었다.
“어떻게 해야만 이 일이 사실인지 정확히 알 수 있겠습니까?”
반숭이 말했다.
“태자께서 주연을 베푼 후 초성왕의 누이동생 강천(江芊)을 초대하십시오. 강천과 초성왕은 사이가 좋으니 틀림없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연회 중에 고의로 강천을 푸대접하십시오. 그러면 진상을 알아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상신은 반숭의 의견대로 행동하니 강천이 실제 노기충천해 말했다.
“허! 너, 이 비천한 놈! 어쩐지 그래서 대왕께서 네 태자 자리를 폐하려 하는 거였구나!”
이것이 고의로 상대방을 화나게 만들어 진실을 탐색하는 지략이다.
은산군(陽山君)이 위(衛)나라 재상 자리에 있었을 때였다. 그는 위나라 국군이 자신을 의심한다는 말을 듣고는 일부러 위나라 국군이 총애하는 규수(樛竪)를 비평해 규수의 반응으로 자기에 대한 위나라 국군의 태도를 탐색하였다. 그가 쓴 방법 또한 위에서 말한 예와 같다.(『韓非子·内儲說上七術』)
전국시대 때 제(齊)나라 국군의 부인이 죽었다. 제나라 왕에게는 첩이 7명 있었다. 모두 제나라 국군과 사이가 좋았다. 설공(薛公)2은 국군이 첩 7명 중에서 누구를 부인으로 고를지 알고 싶었다. 7개의 귀고리를 준비한 후 국군에게 건네면서 7명의 첩에게 선물로 주라고 했다. 그중 하나는 유난히 아름다운 귀고리였다.
이튿날 설공이 제나라 국군을 배알할 때 누가 가장 아름다운 귀고리를 꼈는지 유심히 살폈다. 그런 후에 국군에게 가장 아름다운 귀고리를 하고 있는 첩을 부인으로 삼으라고 권했다.
이것이 선물을 가지고 탐색하는 지모다. 한 마디 말도 하지 않고 제나라 국군의 심사를 불 보듯 분명하게 알아내었다.
다른 이야기도 있다.
선언소(宣彦昭)는 원(元) 왕조에서 평양주(平陽州) 판관을 역임하고 있었다. 하루는 큰 비가 내렸다. 상인 한 명과 군인 한 명이 한 여관에 머물다가 아침이 되어 출발하려 할 때, 우산이 하나밖에 남아있지 않았는데 각자 자기 것이라 우겼다. 두 사람이 잡아당기다가 우산이 망가졌다. 결국 서로 고발해 선언소 앞에 서게 됐다.
이유를 다 들은 선언소는 곧바로 우산을 몰수해 공유화한다고 명령을 내린 후 두 사람을 문 밖으로 쫓아냈다. 그러고는 하급 관리를 시켜 몰래 그들을 뒤따르게 했다. 문 밖으로 쫓겨난 군인은 대단히 화가 나 상인에게 자기 우산을 훔쳐간 죽일 놈이라고 욕을 해댔다. 반면 상인은 남의 재앙을 고소하게 생각하는 듯이 말했다.
“당신이 우산을 잃어버린 것이 나와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이요?”
하급 관리가 그 말을 듣고 돌아와 선언소에게 보고하였다. 선언소는 곧바로 사람을 시켜 상인을 잡아오라고 명한 뒤 곤장으로 처벌하고 새로운 우산을 사서 군인에게 배상하라고 명했다.
『귀곡자(鬼谷子)』에서는 격장지계를 이용해 탐색하는 지모를 계통적으로 심도 있게 묘사하고 있다. ‘패합(捭闔)’3이 그것이다. 반복해 세심하게 따져보고 실습해보면 분명 얻는 바가 있을 것이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1) 초(楚) 목왕(穆王, ?~BC614), 성은 미(芈), 웅(熊) 씨, 이름은 상신(商臣), 초성왕(楚成王)의 맏아들로 춘추시대 초(楚)나라 국군(國君, BC625~614 재위)이다. 초성왕 때 태자가 됐으나 BC626년에 부친이 태자자리를 왕자 직(職)에게 넘겨준다는 소식을 듣고 군대를 동원해 왕궁을 포위한 후 성왕을 목메어 죽게 하고 스스로 국군이 됐다. 초목왕(楚穆王)이 죽자 그의 아들 자왕(莊王)이 계위하였다.
2) 설공(薛公), 작위(爵位), 설국(薛國)의 국왕으로 춘추전국시대 이전에 설후(薛侯)라 불렀다. 옛날 설국은 산동성 남부에 위치해 있었다. 수도 설성(薛城)은 산동성 등주(滕州)시 관교진(官橋鎭)과 장왕진(張汪鎭) 사이에 있었다. 춘추전국시대 이후 설국(薛國)은 제(齊)나라에게 멸망당했다. 제나라 왕은 정곽군(靖郭君) 전영(田嬰)을 설국에 봉하니 정곽군 전영이 ‘설공(薛公)’이 되었다. 나중에 전영이 죽자 맹상군(孟嘗君) 전문(田文)이 설국을 계승하니 또한 ‘설공’이라 불렀다.
3) ‘패합’(捭闔 : 捭, 칠 패, 열 벽 ; 열다 뜻일 때는 벽이라 읽어야 하는데 일반적으로 패합이라 하는 것을 따랐다), ‘패(捭)’와 ‘합(闔)’은 어둡고 밝음, 열리고 닫힘을 가리키는 단어다. 계략으로 활용될 때 분화(分化)와 결탁(結託)이라는 두 가지 수단을 가리킨다. 귀곡자(鬼谷子)가 편찬했다하는 『귀곡자』 「패합편(捭闔篇)」에 보면 “패는 열림, 말함, 밝음이다. 합은 닫힘, 침묵, 어둠이다”, “패합은 도의 큰 변화이자 말의 변화다. 따라서 그 변화를 미리 살피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천지 음양의 도는 사람에게 유세하는 법이기도 하다”라는 구절이 있다. 훗날 사람들은 전국시대 종횡가의 유세술을 가리켜 전체적으로 ‘패합’이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