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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인터넷신문기자협회 공동기획]② 유족사례 중심으로 짚어본 4·3 과제
가족 10명 중 8명이 희생된 5개월 간의 피신생활을 그림으로 남긴 현상지 옹

지난해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전부 개정되면서 정부의 희생자 보상을 눈앞에 두고 있다. 70여년만에 희생자 명예회복을 위한 물꼬가 트였다고 하지만 가족관계 불일치, 일반재판 수형 희생자 등 여전히 풀어야 할 과제들은 쌓여있다. 제주도인터넷신문기자협회(미디어제주·제이누리·제주의소리·제주투데이·헤드라인제주)는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와 함께 희생자의 유족 인터뷰를 통해 명예회복의 현주소를 짚어본다. /편집자주

 

 

“나는 맨날 괴로워. 맨날 불쌍해. 2살 난 아이, 4살 난 아이, 80이 넘은 할아방 ... 그 생각만 하면 보상이고 뭐고 문제가 아니야. 생명이 제일 중요한데 그걸 그냥 그 죽여버린다는 거 금수만도 못하지. 70몇년이 넘어도 매일매일 가슴 아파서, 그 생각 뿐이야.”

 

노인의 가슴은 이미 다 타버린지 오래다. 살아도 산 것 같지 않은 세월이다. 이 무슨 기구한 운명이란 말인가?

 

현상지(92) 옹.

 

어르신은 4·3의 광풍이 몰아친 70여년 전 자신과 어머니를 제외한 모든 가족을 잃었다. 82살 할아버지, 55살 아버지, 27살 큰형, 22살 샛형, 어머니와 형수, 12살 동생과 2살, 4살 조카. 당시 18살이었던 자신까지 모두 10명의 대가족이었지만 혼자만 남았다. 

 

현상지 어르신은 제주시 노형동 방일동산 남쪽 아래에 있는 ‘개진이 마을’에서 나고 자랐다. 18살이던 1948년 여름, 방일동산에서 총소리가 들려왔다. 그 이후 방일동산 꼭대기에는 깃발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깃발이 꽂혀있으면 ‘평화다’, 깃발이 내려가 있으면 ‘경찰이 올라오고 있으니 피하라’라는 신호였다. 깃발이 계속 내려지던 그 해 가을, 노형리 전체가 불탔다. 

 

아버지가 “우린 어디 가면 삽니까?” 하고 묻자 “바닷가로 내려가시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가장 가까운 이호리 오도봉으로 피신했다. 식구 10명이 방 한 칸을 겨우 빌린 이튿날 확성기로 “소개민 젊은이들은 전봇대 세우러 호병밧으로 나와라”는 소리가 퍼졌다.

 

큰형과 샛형이 그 말대로 나간 지 20분만에 총소리가 울렸다. 총소리가 울린 곳에서 발견된 것은 다른 청년 대여섯명과 밧줄에 묶인 채 숨진 큰형이었다. 샛형은 온데간데 없었다. 

 

 

다음날 “소개민들은 바닷가로 더 내려가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남은 가족들은 이호리 큰가름으로 내려갔다. 그곳에서는 마을주민 집단학살을 눈앞에서 목격했다. , 여자, 노인, 청년, 어린아이 할 것 없이 밭에 모여 총살됐다. 

 

겨울로 접어들자 가족 중 도피자가 있으면 몰살시킨다는 소문이 돌았다. 샛형이 행방불명됐으니 도피자 가족이나 다름없었다. 남은 여덟 식구는 ‘불칸 터’로 올라가 냇가 소낭밭에 나뭇가지를 엮어 임시 움막을 만들었다.

 

하지만 사흘째 새벽, 그 아침에 다시 총성이 울렸다. “포위했으니 다 나와라!”는 고성이 울리자 가족들은 살기 위해 뿔뿔히 흩어졌다. 한참을 뛰다 보니 종새동산까지 닿았다. 하지만 따라온 가족은 없었다. 나중에 토벌대가 붙잡은 노인들을 5~6m 높이의 베염나리 낭떠러지 아래로 밀어버렸다는 말을 들었다. 과연 할아버지, 아버지 시신이 베염나리 냇바닥에서 발견됐다. 

 

어머니는 밥 짓던 걸 챙기느라 뒤늦게 도망치다 엉겁결에 베염나리 냇바닥에 있던 큰 돌 아래 쭈구려 앉았다고 한다. 숨은 바위 옆으로 며느리와 막내아들이 어린 손주를 하나씩 업은 채 끌려가는 모습을 봤다고 한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그날, 어머니는 그날이 평생 한이 됐다.

 

나중에 눈오름에서 찾게 된 동생과 조카들의 시신은 너무나 참혹했다. 어린 조카들은 철창에 찔려 죽은 뒤였다. 12살 동생은 내장이 몸 밖으로 흘러나온 채 죽어가고 있었다. 동생을 업고 불칸 터로 내려왔지만 2시간 만에 결국 숨졌다. 조카와 함께 끌려간 형수님은 간 곳을 몰랐다. 그렇게 10명의 가족 중 어머니와 18세 소년, 단 둘만 남았다. 1948년 11월부터 1949년 1월까지, 단 두달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피난생활은 그러고도 3개월 더 이어졌다. 토벌대에 쫓겨다니느라 굽은동산, 겉시오름, 쳇망궤, 큰두레왓, 영덕궤, 족은두레왓, 청산이도 등 산속의 동굴과 움막에서 추위와 배고픔을 견뎌야 했다. 족은두레왓 꼭대기에서는 보초를 서기도 했다.

 

보초를 서던 어느 날 지금의 어리목 매표소로 토벌대들이 밀려오는 광경을 목격했다. 머리 위에서는 미군의 정찰기가 날았다. ‘독안에 든 쥐’였다. 미친 듯이 뛰었다. 

 

이때 헤어진 어머니와는 나중에 동네사람 너댓명과 함께 백기를 들고 하산한 뒤 재회했다. 주정공장에서 처음으로 취조를 받던 중이었다. 다시 만난 어머니와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산에서 살았다는 이유로 ‘폭도’ 취급을 받았다.

 

“나중에 6.25 전쟁이 터졌다고 군 징집을 하던데, 나보고 참전을 하라는 겁니다. 죄 없는 우리 가족을 여덟 명이나 죽여놓고 무슨 애국을 하라는 건지. 그렇게 모슬포 훈련소에 갔는데, 훈련대장이 ‘귀순자 나와라!’하는 겁니다. 거기서 ‘선서’를 또 해야했어요. 우리는 살기 위해 산에 간 피난민일 뿐입니다. ‘저기로 가면 산다’고 해서 바다로 가고 산으로 갔을 뿐입니다.”

 

그는 여든 줄에 들어선 10년 전 ‘그날’들을 떠올리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한 장면, 한 장면으로 남아있는 기억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더 선명해졌기 때문이다.

 

10년간 수 없이 그렸지만 아직 그려내지 못한 그림이 많다. 너무 끔찍해서 차마 그릴 수 없는 기억들도 많다. 그는 생존에 필사적이었던 ‘그날’을 모아 지난해 11월 ‘4·3기억 그림전-청산이도의 기억’ 전시회를 열었다. 

 

그림으로 덜어내고, 말로 덜어냈으니 마음의 짐도 조금이나마 덜어졌을까.

 

“그때 가족 10명 중 8명이 죽고 (어머니도 나중에 돌아가셔서) 지금은 나만 살아있어요. 내 앞에서 죽어간 동생 생각만 하면 아직도 미안해요. 나만 살아있다는 게 참... 그렇습니다. 보상금이요? 사람이 죽었어요. 가족 대부분이 죽었어요. 억만금을 줘도 생명은 되돌릴 수 없습니다. 4.3은 그런 겁니다. 그래도 위안을 받았던 한 마디가 있어요. 이 말을 왜 우리나라 사람이 아닌 외국사람한테서 들을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그 한 마디만 인정해준다면 그래도 감사할 것 같습니다.”

 

댄 스미스(Dan Smith) 스웨덴 스톡홀름 국제평화연구소장은 지난해 제주4·3의 평화 정신을 기리는 '제4회 제주4·3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그는 같은해 시상식에서 수상소감을 통해 이렇게 말했다. 

 

“제주4·3 당시 벌어진 학살은 당시 어떠한 압력이 있었던지, 한국과 세계의 정치상황은 어떠했던지, 어떤 두려움과 불안감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노인의 눈이 어느덧 빨갛게 물들어갔다. [제이누리=이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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