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이 어느덧 75년을 맞았다.
따스한 봄기운이 물씬 풍기는 4월이지만 제주는 여전히 4·3의 상처가 아물지 않고 있다.
4·3의 아픔을 온몸으로 간직한 제주.
그중에서도 한라산은 4·3의 역사를 고스란히 품고 있다.
70여년 전 이념의 충돌 속에 전쟁터로 변한 한라산의 과거와 현재를 들여다본다.
◇ 전쟁터로 변한 한라산
「오늘도 잠들지 않는 남도 한라산
그 아름다운 제주도의 신혼여행지들은 모두
우리가 묵념해야 할 학살의 장소이다.
그곳에 뜬 별들은 여전히 눈부시고
그곳에 핀 유채꽃들은 여전히 아름답다.
그러나 그 별들과 꽃들은
모두 칼날을 물고 잠들어 있다.」 (이산하 시집 '한라산' 서시 중에서)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한라산 기슭 오름마다 봉화가 붉게 타올랐다.
'남한 단독정부 수립 반대'와 '서북청년단 추방'을 외치며 남로당 제주도위원회가 주도한 무장봉기가 시작된 것이다.
350명의 무장대는 12개 경찰지서와 서북청년회(서청) 등 우익단체 단원의 집을 지목해 습격했다.
1년 전 3·1절 기념식에 참석했던 시위군중을 향해 경찰이 총을 쏜 '3·1절 발포사건', 발포한 경관의 처벌을 요구하며 벌인 '민·관 총파업', 파업주동자 색출 과정에서 벌어진 우익단체 서청의 무자비한 탄압 등 일련의 과정이 이날 4·3의 계기가 됐다.
무장대는 한라산으로 쫓겨 올라갔고, 이들을 소탕하기 위한 군 병력이 연이어 제주로 급파됐다.
해방 직후 이념의 충돌 속에 '붉은 섬'(Red island)이란 낙인이 찍힌 제주는 바람 앞 촛불처럼 위태로웠다.
그리고 이내 한라산은 무장대와 군·경 토벌대의 전쟁터로 변해버렸다.
선전포고는 1948년 10월 17일 제주도 경비사령관 송요찬이 발표한 일명 한라산 '금족령'(禁足令)이었다.
'제주 해안선으로부터 5㎞ 이상 떨어진 중산간 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의 무리로 인정해 총살하겠다'는 내용이었다.
한라산을 비롯해 중산간 일대는 철저히 고립됐고, 이때부터 토벌대의 광기어린 학살이 시작됐다.
제주도에 계엄령이 내려지면서 중산간마을을 초토화시킨 대대적인 강경 진압작전이 전개됐다.
중산간 지대뿐만 아니라 주민 대피·분산 명령인 소개령(疎開令)에 의해 해안마을로 내려간 주민들까지 무장대에 협조했다는 트집을 잡아 죽임을 당했다.
학살은 군경토벌대만 저지른 것이 아니었다.
무장대들도 해안마을을 습격해 경찰가족과 우익인사를 살해했고 그 과정에 무고한 주민들도 상당수 희생됐다.
복수가 복수를 낳았고, 피가 다시 피를 부르는 참극이 계속해서 되풀이됐다.
그 고통과 피해는 고스란히 지역 주민들이 온몸으로 떠안아야 했다.
이는 한국전쟁 뒤인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령이 해제될 때까지 7년 7개월간 이어졌다.
그동안 한라산은 무고한 희생자들이 흘린 피로 붉게 물들었다.
제주4·3사건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가 2020년까지 공식 집계한 사망자만 1만 4천532명에 달한다.
◇ 한라산에 남은 4·3의 흔적
시인 이산하는 4·3에 얽힌 한라산을 '혓바닥을 깨물 통곡 없이는 갈 수 없는 땅 / 발가락을 자를 분노 없이는 오를 수 없는 산'이라 표현한다.
한라산을 오르고 싶어도 갈 수 없고, 한라산에서 내려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사람들.
그들에게 기나긴 시간 한라산은 고통과 분노로 가득한 공간이었다.
그 속에 수많은 4·3의 흔적이 남아 있다.
대표적인 것이 '잃어버린 마을'이다.
소개령으로 사람들이 떠난 제주 중산간 마을은 토벌대에 의해 완전히 폐허로 변했다.
마을에 남은 가옥 등이 무장대의 은신처 또는 피난처가 되지 못하도록 중산간 마을 대부분을 불태워버렸기 때문이다.
4·3이 끝난 뒤 주민들이 고향으로 돌아가 마을을 재건하기도 했지만, 상당수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만 남은 채 영영 사라져버렸다.
제주4·3의 참극을 세계에 알린 영화 '지슬'의 배경이 되는 무등이왓(舞童洞)이 그렇다.
1948년 11월 토벌대의 잔인한 학살로 1949년까지 무등이왓에서 아이와 여성, 노인 등 마을 주민 100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무등이왓 주민들은 토벌대를 피해 서쪽으로 2∼3㎞ 떨어진 '큰넓궤'라는 굴에 숨어들었지만, 이내 발각돼 정방폭포 등지로 끌려가 학살됐다.
살아남은 사람이 없었기 때문일까 살아남았어도 차마 되돌아올 엄두가 나지 못했던 것일까.
마을은 재건되지 않은 채 잃어버린 마을이 됐다.
이처럼 4·3의 광풍으로 제주에서 사라진 마을은 100여곳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 마을은 현재 4·3 유적지로 주목받으며 다크투어 장소로서 해마다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무장대를 쫓았던 토벌대의 주둔지도 한라산 곳곳에 남아있다.
한라산 중턱 서귀포시 남원읍 신례리에 있는 수악주둔소를 비롯해 녹하지오름·시오름·관음사 등 곳곳에 주둔소가 남아있다.
제주 4·3 당시 제주도경찰국은 무장대와 주민들 사이의 연결을 차단하기 위해 곳곳에 주둔소를 설치했다.
현재 남아있는 주둔소 중 최대 규모인 수악주둔소는 총안(銃眼·총구멍)과 망루 흔적 등 보존상태가 양호해 지난 2018년 제주 4·3 관련 유적 가운데 처음으로 문화재로 등록됐다.
제주의 관광 명소로 유명한 교래리 사려니숲길 인근에는 속칭 무장대 사령관의 은신처 '이덕구산전'이 있다.
애초 무장대를 이끌던 김달삼이 황해도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 인민대표자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제주도를 떠나자 그의 뒤를 이어 총사령관이 됐다.
이덕구산전은 1949년 봄 이후 무장대 사령부인 이덕구 부대가 잠시 주둔했던 곳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그해 6월 7일 이덕구는 부하의 배신으로 은신처가 발각돼 토벌대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
이외에도 무등이왓 주민들이 숨었던 큰넓궤처럼 마을 사람들이 피신생활을 했던 장소들이 한라산 중턱 곳곳에 남아있다.
선흘리의 목시물굴, 어음리의 빌레못굴, 세화리의 다랑쉬굴 등이 널리 알려져있다.
이들 모두 소개령을 알지 못하고 미처 해안으로 내려가지 못한 주민들이 토벌대를 피해 숨어 있다가 발각돼 죽임을 당한 장소들이다.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된 한라산 백록담 북벽 정상에는 비석 하나가 놓여있다.
한라산개방평화기념비(漢拏山開放平和紀念碑)다.
1954년 9월 21일 제주도 경찰국장으로 있던 신상묵이 한라산 금족령을 해제하면서 세운 비석이다.
비석 뒷면에는 대부분 한자로 '영원히 빛나리라 제주도경찰국장 신상묵씨는 4·3사건으로 8년간 봉쇄되었던 한라보고를 갑오년 9월 21일 개방하였으니 영웅적 처사가 아니리오'라고 새겨져 있다.
신상묵은 일제강점기 헌병으로 활동하며 독립운동가를 고문했던 친일행적이 나중에 밝혀졌다.
친일과 영웅이 손바닥 뒤집듯 쉽게 뒤바뀌고, 애국이라는 이름으로 폭력이 자행됐던 한국 근현대사는 상처투성이다.
한라산 금족령은 풀렸지만, 한라산은 여전히 흐느낀다.
4·3을 왜곡하며 4·3으로 부모, 형제 등을 잃은 유족의 마음에 생채기를 내는 일이 7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반복되고 있다.
제주도민 상당수가 4·3 유족이며 대부분이 4·3과 직간접적인 연관을 맺고 있다.
오랜 세월 4·3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향해 힘겨운 걸음을 걸어왔던 제주에 더 이상의 논란을 제주도민은 바라지 않는다. [연합뉴스=변지철 기자]
[※ 이 기사는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한라산 이야기'(글·사진 강정효), '제주, 아름다움 너머'(강정효) 등 책자 등을 인용·참고해 제주4·3과 한라산 유적을 소개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