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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왝 더 독(Wag the Dog) (3) 스스로 안 내려오는 권력의 자리
프레임 전쟁은 곧 기억의 전쟁 ... 사실史實 사실事實 되진 않아

영화 ‘왝 더 독’의 한 장면. 미국 대통령 선거를 불과 2주 앞둔 어느 날, 재선을 노리는 현직 미국 대통령이 백악관 견학을 온 걸스카우트 소녀를 성추행하는 상상을 초월하는 초대형 사고를 친다. 임기 반환점을 돈 대통령이 느닷없이 비상계엄을 선포해 버리는 것만큼이나 초대형사고다.

 

 

4년 중임제인 미국 대통령은 사실상 임기를 8년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현직 대통령의 재선 가능성이 높다. 허버트 후버(대공황), 존 F. 케네디(암살), 제럴드 포드(닉슨 사면), 지미 카터(이란 인질구출 실패), 조지 부시(경제 불황·공약 번복), 조 바이든(고령 논란) 등 대형사고나 악재에 휘말린 극소수 경우를 제외하면 웬만하면 재선에 성공한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현직 미국 대통령도 재선이 당연해 보이는 상황에서 14살짜리 걸스카우트 소녀 성추행이라는 초대형 사고를 친다. 이 정도 사고라면 스스로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대선 후보직에서도 사퇴하는 것이 순리다. 

그러나 정치란 그렇게 순리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우리의 전 대통령도 아닌 밤중에 홍두깨 같은 ‘비상계엄’을 질러놓고도 스스로 ‘사임’하지 않고 갈 데까지 가보다가 ‘파면’된 걸 보면 권력의 자리란 끌려 내려오는 곳이지 스스로 걸어 내려오는 곳이 아님이 분명하다.

사임 아니면 파면의 위기에 몰린 ‘소녀 성추행 대통령’은 곧바로 ‘알바니아’라는 나라와 있지도 않은 황당한 전쟁을 조작하고 ‘프레임 전쟁’에 나선다. 지금 미국이 주목해야 할 것은 대통령의 걸스카우트 소녀 성추행 ‘따위’의 소소한 문제가 아니라 알바니아와의 중차대한 전쟁이라고 국면전환을 시도한다. 

‘대외 전쟁’만큼 국민들을 지도자를 중심으로 단결시키는 소재는 딱히 없다. 12·3 비상계엄 세력도 난데없이 우리나라가 지금 중국과 ‘하이브리드 전쟁’ 중이라고 들고 나온 것과 판박이의 ‘프레임 전쟁’이다. 만에 하나 중국과의 전쟁이라는 엄중한 현실이 사실이라면 대통령의 비상계엄이 위법이었는지 탈법이었는지 따위는 사소한 문제에 불과할 수도 있다.

프레임 전쟁은 ‘기억의 전쟁’이기도 하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으로부터 진주만 기습공격을 당한 루스벨트 대통령은 바로 다음날 의회에 나가 일본과의 전쟁을 의회가 승인해 줄 것을 요청하는 연설을 한다. 미국 역사상 가장 ‘임팩트’ 강했던 연설로 기록된다.

루스벨트는 그 연설을 ‘치욕의 연설(Speech of Infamy)’이라고 명명하고 제2차 세계대전 내내 “진주만을 기억하라(Rem ember Pearl Harbor)”고 외친다. ‘진주만에서 당한 치욕을 기억하라’는 의미다. 전쟁 내내 찢어진 성조기 아래 ‘Remember December 7th!’ 문구를 새긴 강렬한 포스터가 미국을 도배한다.  
 

 

전쟁은 누구에게나 고통스러운 것이다. 전장으로 떠난 수많은 누군가의 아버지들과 형제들, 그리고 또 누군가의 아들들이 매일매일 시신으로 돌아온다. 시신조차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기도 한다. 그 슬픔과 고통을 잊고 ‘진주만에서 당한 치욕을 기억’해야만 전쟁을 수행할 수 있다. 국내적으로는 그렇게 프레임 전쟁과 기억의 전쟁을 수행한다.

14살짜리 걸스카우트 소녀를 추행한 대통령과 백악관은 ‘알바니아를 기억하라!’고 외치고, 야당은 ‘성추행당한 소녀를 기억하라!’고 기억의 전쟁을 벌인다. 우리도 지난 대통령 선거 내내 기억의 전쟁을 벌였다. 한쪽에서는 ‘무도한 비상계엄을 기억하라!’고 외치고, 다른 한쪽은 ‘전과 4범이라는 것을 기억하라!’고 맞섰던 기억의 전쟁이었다.

「기억의 장소(Les Lieux de Memoire: Sites of Memory)·1984~1992」는 ‘역사학의 혁명’이라고까지 평가받는 프랑스 사회과학원 역사주임교수 피에르 노라(Pierre Nora)의 주도하에 120여명의 역사학자들이 참여해서 완성한 역사기획의 산물이다. 

한 나라의 역사와 그 정체성이란 결국 그 공동체 구성원이 기억의 전쟁을 걸쳐서 최종적으로, 혹은 잠정적으로 공유한 기억의 산물이다. 기억 전쟁을 통해 ‘기억해야 할 것들(Sites of Memory)’과 ‘잊어야 할 것들(혹은 잊어도 좋은 것들·Sites of Forgett ing)’이 결정된다. 국기, 국가, 박물관의 전시물, 동상, 각종 국가기념일, 화폐 도안 인물 등은 공동체가 ‘기억해야 할 것들(Site of Memory)’이다.

그 기억의 공유가 곧 국가의 정체성이며, 정체성이란 ‘우리는 어디에서 왔으며, 또한 어디로 향해야 한다’는 한 국가의 로드맵과도 같은 것이다. 기억의 전쟁은 ‘사실(truth)의 전쟁’이기도 하다. 영어 Truth의 라틴어 기원은 ‘베리타스(Veritas)’이고, 그리스어 기원은 ‘알레테이아(aletheia)’인데, 그 의미가 조금씩 다르다. 시대마다 ‘사실’이라는 말의 의미가 조금씩 다르게 사용됐던 모양이다. 

베리타스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아무도 볼 수 없는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Truth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알레테이아의 의미가 퍽 흥미롭다. 알레테이아는 ‘은폐되지 않은 것, 망각되지 않고, 기억되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사실(史實)’이라고 모두 ‘사실(事實)’이 되지 않는다. 존재했던 사실도 잊히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된다. 대통령의 걸스카우트 소녀 성추행 사건은 알바니아 전쟁으로 덮어버리고 모두 잊어버린다. 덮어버리고 잊어버린 ‘사실(史實)’은 ‘사실(事實)’이 되지 못한다.
 

 

‘리박 스쿨’이라는 생소한 단체의 이름이 뉴스에 오르내린다. 아마도 우리 현대사에서 ‘이승만과 박정희만 기억하자’는 새로운 기억 전쟁의 전사들의 모임인 모양이다. 이승만과 박정희의 반공정신을 ‘기억의 장소’에 모시고, 김구나 홍범도 같은 항일투사는 ‘망각의 장소’에 폐기처분해서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던 인물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은 듯하다.

국가기념일 ‘광복절’도 ‘건국절’로 그 명칭을 바꿔야 한다는 주장도 집요하다. 전임 대구시장의 강력한 추진력으로 대구역 광장에 세웠다는 박정희 동상을 둘러싼 논쟁도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기억의 전쟁이 여전히 어지럽다.

우리가 지금 기억해야 할 것들을 제대로 기억하고, 잊어야 마땅한 것들만 제대로 골라 잊어버리고 있는 것인지…. 이 기억 전쟁의 승자가 누가 되고, 그에 따라 우리나라의 정체성이 어떻게 규정돼 어떤 미래가 펼쳐질지 조금은 불안하다. [본사 제휴 The Scoop=김상회 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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