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이 후임 장관 내정자가 발표된 후 정치활동 재개 첫 행선지로 전광훈 목사가 주도하는 보수 기독교 집회를 찾았다.
하지만 간증을 하는 과정에서 한라산 산신제를 '신사참배'에 빗대어 논란이 예상된다.
원 장관은 지난 4일 경북 경주의 한 호텔에서 이뤄진 '경북·대구 장로총연합 지도자대회'에 참석해 약 40분간 간증을 이어나갔다.
원 장관은 "국토부 첫 장관으로서 임기를 마치는 발표를 받고 여러분을 뵈러 온 게 처음 일정"이라면서 "앞으로 제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여러분과 손잡고 기도하며 함께 가겠다"고 말했다.
이어 "저는 유산을 많이 물려받았다. 돈은 아니고 신앙을 물려받았다"면서 "36살에 한나라당으로 국회의원을 시작했는데 선거할 떄마다 탄핵 등 사건이 일어나면서 선거 때마다 힘들었다. 그럴 때마다 교회 새벽기도를 나갔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그러다가 2014년 제주도지사로 취임하면서 큰 시험이 닥쳤다. 제주도의회 조례로 한라산 산신제를 제주도지사가 제관이 돼서 도복을 다 입고 제사를 직접 지내도록 하는 법이 있었다"면서 "제가 이기풍 선교사가 세운 교회 장로의 둘째 아들이다. 몰래 살짝 어떻게 모면하려고 해도 전국에 방송이 되는 것이라 너무 어려웠다"고 토로했다.
이어 "그래서 장로님들한테 여쭤봤다. '그것은 신앙이 아닌 문화다. 제주도민들을 편안하게 해주는 게 좋다'는 분도 계셨고, '안 그래도 제주도가 미신과 우상이 많은 곳인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원 장로의 둘째 아들이 교회에서 밀어줘서 도지사가 됐는데 맨 앞부터 쓰러지면 어떡하느냐'고 하신 분도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와 관련해 "일제시대 때도 똑같은 일이 있었다. 신사 참배가 '국가의 행사지 신앙과 관계없다'는 말이 있었다. 당시 (신사참배 거부로) 주기철 목사님께서 순교를 하셨다"면서 "산신제 절하는 것을 생각해보니 '도지사 안 하고 말지 뭐'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주도민들이 '도지사 그만하라'그러면 도지사 그만할 각오를 했다"고 강조했다.
또 "'나는 신앙인이니 못한다'고 해서 천막에서 예의를 지키면서 구경했고, 부지사가 다 했다. 하지만 고약한 언론에서 저를 비난하려고 대문짝만하게 신문 1면으로 냈다"면서 "'고집불통 도지사', '자기 잘난 독선 도지사'라고 비난을 받았지만 전국의 목사들로부터 격려를 받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설사 손해가 되고, 나한테 어려움이 있고 내 계획에 지장이 오는 한이 있더라도 복음은 부끄러워하지 않겠다"면서 "공산화를 막고 자유 대한민국, 잘 사는 대한민국을 만들고 싶다. 자유, 복음, 통일이라는 기치로 우리 사회의 국민통합, 전 세계에서 가장 앞장서는 제사장 나라로서 빛을 발할 때가 왔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이젠 정치 영역에서든 내면의 영역에서든 여러분들처럼 손잡고 함께 하나님의 주권을 세워나가는 일에 앞장서고 헌신하겠다"며 "눈물로 기도해 달라. 여러분들과 함께 하겠다"며 간증을 맺었다.
이어 '원 장관님이 앞으로 대한민국을 위해 어떤 일을 하면 좋겠습니까'라는 질문에는 "저는 앞으로 다가오는 국가의 운명이 걸린 일에서 제가 해야 할 일을 하겠다"며 사실상 총선 출마 의지를 밝혔다.
그러면서 "자꾸 어디 나가느냐 묻는데, 딱 한 사람을 붙들어야 한다. 우리 대한민국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는 걸림돌을 붙잡고 제가 헌신하고 희생하겠다"고 말해 '그 한사람'이 누구인지 의구심을 자아냈다. 야당 이재명 대표를 겨냥한 발언이란 해석이 지배적이다. [제이누리=이주영 기자]
☞한라산신제 = 탐라국에서 비롯된 한라산신제는 탐라국이 해체되는 고려 숙종 10년(1105)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한라산신제 장소는 제사를 지내는 데 온갖 어려움이 있었지만 한라산 정상 북벽이었다. 고려 고종 40년(1253) 10월 무신(戊申)에 국내 명산과 탐라의 신(神)에게 각각 제민(濟民)의 호를 내리고 춘추로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기원하는 산신제를 올리게 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한라산신제는 일 년에 봄과 가을 두 차례 제사를 지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태종 18년(1418) 4월 11일 신묘(辛卯)에 예조에서 제주의 문선왕 석전제 의식과 함께 한라산제를 지냈다. 한라산제는 전라도 나주 금성산의 예에 따라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냈다. 성종 원년(1470)에는 이약동(李約東, 1416~1493) 제주목사(濟州牧使)가 한라산신제 장소를 한라산 정상에서 산천단(山川壇)으로 옮겨 거행하였다. 봄과 가을로 한라산 정상에서 제사를 거행할 때마다 제사를 올리러 간 제주도민들 가운데 얼어 죽는 폐단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 이후 선조 34년(1601)에는 청음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이 선조의 명을 받아 한라산신제를 거행하였다.
숙종 29년(1703)에는 이형상(李衡祥, 1653~1733) 제주목사의 치계를 바탕으로 한라산신제를 의논하였는데, 치계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오례의』를 살펴보니 주현(州縣)에서는 사직 문선왕 포제(酺祭), 여제(厲祭), 영제(禜祭)만 제사한다 했습니다. 주현에서 풍운뇌우의 제사를 하지 않는 것은 장계에 얘기한 대로입니다.” 성종 5년(1474)에는 『오례의(五禮儀)』를 찬성(纂成)하며 한라산신제가 사전에 기록도 하지 않은 것은 잘못이며, 더욱이 명산대천에 제사하지 않은 것은 큰 잘못이니 지금이라도 사전에 등록하고 치악산·계룡산의 제례와 축문식에 따라 정월·이월·칠월에 제사토록 하였다. 그러나 한라산신제는 사전에 등록되지 않았지만 계속 거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1908년 한라산신제는 일제에 의해 폐지되었다. 광복 이후 산천단 마을 주민에 의해 부활돼 유지돼 오다 2009년부터 아라동 차원에서 한라산신제를 계승해 봉행하고 있다. 제주시 아라동 산천단 안에는 1964년 1월 31일에 ‘천연기념물 제160호’로 지정된 곰솔(黑松)나무와 함께 그 부근의 지명이 되어 불리는 산천단이 있다. 이곳에는 한라산신제의 제단이 있다. 산천단은 한라산신제 외에도 산천제, 포신제(酺神祭), 기우제 등 오랜 시대에 걸친 제사 터로 알려져 있다. 한라산신고선비(漢拏山神古墠碑), 이약동 목사 한라산신단 기적비(紀蹟碑) 등이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