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목로주점~1
1인
만원은
넘지 않기로 함
아버지 가게-라이브카페라고 말하긴 아직도 계면쩍다-에서 일한 지 한 달이 되었다.
“하나 있는 아들, 부려먹기만 했는데 오늘 우리도 한 잔 할까?”
언제나 이 말이 나오나 했는데, 한 달이라니. 사실 바쁘긴 했다. 비비대기칠 정도는 아니지만, 그 동안 손님이 적지만은 않다는 걸 일 주일 만에 알아챘으며 또 꾸준히 찾아주는 단골고객을 꽤 많이 확보하고 있다는 것도 보름쯤 지나면서 역시 알아차렸다. 아버지 일을 도와주면서 읽지 못한 책들, 특히 1920년대 이후의 우리나라 소설들을 일 중간에 짬 내서 읽을 요량으로 소설 한 권을 챙겨 들고 나갔지만 그게 생각처럼 여의치가 않았다. 일이 많아서다. 손님이 끊이질 않아서다. 손님도 많고 벌이가 된다는 게 도대체 믿겨지질 않는다. 내가 봐도 돈 버는 데에는 수완이라고는 동네 개구쟁이 코 밑에 묻은 코딱지만큼도 없는 아버지가 어떤 방법으로 이런 엄청난 성공을 할 수 있었을까? 사실 성공이라고 내가 말은 하지만, 적자도 감수하겠다던 시작이었기에 적자를 추월해 저축도 조금 한다고 하니 결코 실패는 아니지만 또 성공이랄 것도 없다. 그러나, 아버지 말마따나 성공이 뭐 별 건가, 남들의 그 어마어마한 성공의 기준이 아니라 아버지의 잣대, 이 기준으로 성공했다는 말이다. 하여튼 이런 재주가 내 아버지에게 있는 줄은 정말 생각지도 못했는데...... 대학등록금은 걱정 말고 좀 더 열심히 공부해보자꾸나, 아버지가 이런 생색을 낼만도 했다. 더 신기한 일은, 발길이 잦은 사람들 모두가 가족 같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오늘은 외상이유.”
하며 계산은 않고 나가지만 꼭 계산서를 챙겨 갔고 다음에 올 때 지난 계산서를 내놓고 그 돈도 내놓는다.
외상장부가 따로 없다. 필요 없다. 한 두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외상질 일은 드물다. 왜냐하면 그 이유는 음료메뉴판에 적혀 있다.
『1인 만원은 넘지 않기로 함』
많이 팔지도 않고 많이 마시거나 먹지도 못하게 하는 곳이 라이브카페「나는 서툴다 고로 존재한다」다. 1인당 소비한도 최고액을 1만 원으로 정해놓은 집. 단골은「나는 서툴다 고로 존재한다」원칙을 알고 있었다. 아버지는 내가 처음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는 날, 메뉴판을 가지고 가서 손님을 맞을 때 이 원칙을 먼저 알려야 한다고 했다. 마치 범죄혐의자에게 경찰이 수갑을 채우면서「미란다」원칙을 알려야 하는 것처럼. 무척 어색했다. 그리고 이 말을 꺼내는 순간부터 표정도 딱딱해졌다. 하지만 손님들의 반응은 의외로 웃으면서,
“웃기는 집이네. 돈 안 벌겠다는 거잖아?”
하며, 이 원칙에 따르려고 했고 더러 의외의 일이 생기긴 하지만 1인당 만 원이 초과될 경우가 발생할 조짐이 보이면 아버지가 나섰다.
“맥주 한 병은 저희가 무료로 더 드리겠습니다. 맘껏 앉아 즐기고 가셔도 됩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주문을 받도록 도와주십시오, 손님. 문 연지 4년이 넘었지만「나는 서툴다 고로 존재한다」원칙이 한 번도 깨진 적이 없었거든요. 감사합니다.”
머리 숙여 꾸벅. 허리 굽혀 굽실.
‘문 연지 석 달밖에 안 됐는데 이 원칙은 꼭 지키고 싶군요. 도와주십시오.’
전엔 이랬을 것이다.
“「나는 서툴다 고로 존재한다」원칙?”
모두 화들짝 웃고 따라줬다. 이러니 술로 취할 일도 없거니와 대체로 맥주 한 병으로도 만족하는 이런 취향의 손님들이 주로 찾아왔다. 가끔 이것을 어기며 내 돈 주고 내 술 마시겠다는데 하며 우격다짐으로 나오려는 사람들이 있긴 한데, 이 때 아버지는 아주 칼처럼 끊어버렸다.
“안 됩니다.”
했고 옆에 앉아 있던 다른 단골들이 거들어줬다. 내가 있는 동안, 한 달은 이랬다.
“아빠, 이유 있지?「나는 서툴다 고로 존재한다」원칙이 생겨나게 된 이유 말이야.”
맥주 한 컵을 단숨에 넘기더니 커~~~ 하며 따라보란다. 원래 한 번에 쭉 다 마시지 않아 아버지에겐 원샷이란 없다.
“결국 술장사잖니? 어쨌든. 처음엔 커피나 녹차, 그리고 제주도에 흔한 조릿대를 덖어 우려낸 전통차 등 몇 가지만 팔려고 했었더랬지. 근데 손님 중에, 자주 오던 손님들 중에 노래가 있어 흥은 나는데 술이 없으니까 맹숭맹숭하다는 거야. 해서 맥주쯤이야 하고 주류 중 맥주만 추가시켜놨지. 그런데......”
“그런데 뭐? 대단한 뭔 일이 터지고 말았었구나, 그지?”
또 맥주 한 컵을 공중제비하며 털어내듯 비우더니,
“그런데, 넌 안 마시냐?”
며 컵을 내게로 내민다. 아버지는 썰렁하게 하면서 웃게 만들곤 한다. 활짝 웃으면서 나도 고개 옆으로 돌려 화들짝 한 컵을 비웠다.
“술이 그거 과해지면 묘한 심술로 변하거든. 평소 그렇지 않던 사람이 술만 들어가면 전혀 딴 사람이 되기도 하고. 술이 요술을 부려서 그런 거겠지.”
“술인지 심술인지 요술인지,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데?”
카페 문을 연 첫 날, 첫맞이 손님이었던, 여자와 동행한 젊은 남자가 그 뒤 거의 두어 달 만에 이번엔 여자 말고 대신 남자 둘을 더 데리고 왔다.
“양주 좀 내오시지요. 내, 오늘 매상 좀 올려드리리다. 지난 번 일도 사과도 할 겸. 젊은 놈이 나이 지긋한 점잖으신 것 같은 분한테 애지간했지요, 그 땐?”
아버지가 더 미안해했다.
“제가 직장생활만 오래해 이런 일에 서먹하다보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날, 그렇지요, 개업 첫날, 첫 손님이었는데, 손님께 불손했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찾아주시니 제가 너무나 감사하지요. 제가 오늘 대접해드리리다. 그런데, 여기선 양주는 안 팔고 대신 맥주로 올리겠습니다.”
아버지는 당황하거나 상대를 설득해야 할 일이 있을 때 종종 말 가운데 ‘그럼에도 불구하고’라고 말하는 습관이 있는데, 성급한 성격을 말하는 중에라도 줄여보자는, 그러니까 톤을 낮추기 위한 한 방편으로 이 말,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애용한다. 말속도도 앞엣말과 달리 천천히. 그러나 이것으로 당신의 감정은 누그러트릴 순 있어도 함께 화가 나 있는 상대방에겐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일으키고 말아 약을 올리는 꼴이 돼버리곤 했다. 그 날도 그랬다.
“그·럼·에·도·불·구·하·고? 봤지? 이 양반이 요로코롬 사람을 살살 부화가 일게 한다니깐. 그 날도 넌 떠들어라 난 기타 치며 노래 제끼겄다, 이거 아녔냐구. 왕 같은 손님을 앞에 두고 가암히!”
아버지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잘 풀려가는 줄 알았는데, 하필 이런 못돼먹은 반전이 다 있냐 싶어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는 남을 대동해 걸시비를 작정하고 온 것이 확실했다.
“그게 아니고, 그게 아니고...... 또 오해를 하게 됐군요.”
아버지는 두 달 전 그와 언짢은 일이 있은 후 참자, 하지 말고 더 속으로 웃자, 하지 않았던가. 바로 피하는 게 웃는 일이요 이게 웃으면서 할 수 있는 해결책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서둘러 맥주를 내왔다.
“친구분들과 편히 쉬었다가...... 그럼...”
하지만, 맥주 세 병은 채 10분도 안 돼 비워졌고 입가심은 끝냈으니 본격적으로 마시겠다며 양주를 내오라고 막무가내였다.
“것 봐. 아빠가 이거 한다 할 때, 난 동네 껄렁한 불량배 놈들이 먼저 떠올랐었는데. 그런 놈들, 어디가나 있다고 하거든. 그 놈들은 셋이고 아빠는 혼자고, 어떻게 했어? 이 외진 곳에서. 아빤 운동이라곤 숨쉬기운동밖에 할 줄 아는 게 없잖아.”
나도 아버지를 닮아, 닮지 말아야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농담도 이런 썰렁한 농담을 하고 있었다. 숨쉬기운동이 여기서 왜 불쑥 튀어나와야 했는지, 해놓고 나도 그 이유를 모르겠다. 부전자전의 DNA, 그 이유일 것이다. 또 농담을 할 계제가 전혀 아닌, 아버지의 봉변이 예상되는 급박한 시점이 아니던가.
마침 고등학교 동창들이 개업을 축하한다며 한라산 등반을 겸할 겸 연분홍 화사한 양난 화분을 가슴에 그러안고 들어왔다. 이들도 그의 큰 소릴 들었다.
“무슨 일이야? 벌써 손님하고 실랑이 벌이고 그러냐? 술집이력 무지 빠르게 늘려나가고 있군!”
“잠깐만.”
친구들에게 빈 데 아무 데나 가서 앉으라 하고 다시 맥주 세 병을 들고 그들에게로 갔다. 입으론 양주를 내놓으라고 고래고래 소릴 지르면서 손으론 맥주를 따라 양주 내놓으라던 그 입에 맥주를 급작이 퍼붓고, 아니 쑤셔 넣고 있었다. 입가에 거품도 닦여지기도 전,
“안 보여요? 다 비운 거? 또 맥주 세 병? 이러지 마시고, 아저씨도 귀찮잖아, 왔다갔다. 우리가 나이 지긋하고 점잖은 분을 10미터 왕복 달리기 시켜서야 되겄수? 하기사 요 쬐그만한 가게가 10미터는 안 되겠지만. 양주 한 병 갖다 놓고 가면 우리도 조용히 할 거 아니우, 안 그래?”
옆 동행에게 동의를 구하고 있었다. 양 옆의 깍두기 머리들이 입가를 옆으로 늘리는 동시에 미간은 좁히며 동시에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었다. 데퉁바리에 영락없는 동네양아치였다. 아버지는 똑같은 일을 되풀이 겪고 싶지 않았다. 더더구나 궂은 일을.
“준비된 양주가 없으니 곧 사다 드릴 테니, 잠간만 기다려주십시오.”
아버지는 속으로 웃었다. 준비된 양주라고 말하며 준비된 대통령도 함께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웃자 했다. 웃고자 연 카페요, 하고 싶은 일, 한번쯤 하자 하여 연「나는 서툴다 고로 존재한다」가 아니었던가.
친구들에게는 냉장고에서 맘대로 꺼내 마시라 하고 아랫동네로 급히 차를 몰고 내려가야 했다. 양주 한 병 사러. 하기 싫은 일을 하러. 해서는 안 될 일을 하러. 아버지는 생각했다. 버릇 돼서 또 이럴 텐데. 순순히 받아줬다간 이런 일은 자주 있을 텐데. 돈도 뜯어낼 테고. 고개를 저었다. 운전대를 180도 U턴 회전시켜 다시 차를 언덕 위로 몰았다. 수돗물 끌어들이느라고 7백만 원 생돈 들였는데, 이젠 더는 안 된다. 안 돼, 안 되고 말고. 문을 닫는 한이 있더라도. 수모 견디며 인내 테스트할 일이 뭐 있어? 난 못해! 했을 것이다. 그러나 마당에 이미 차는 멈춰 섰건만 차마 시동을 끄지는 못하고 있었다. 들어가서 뭐라고 하지? 난감했다. 바보 바보, 왜 이런 쓸데없는 고민을 해야 하는가, 저 쓰잘데기 하나 없는 쓰레기보다 못한 놈들 때문에 왜 뭘 망설여야 하는가, 이 선량한, 내라면 내라 해서 군말 한 마디 않고 평생 꼬박꼬박 세금 한번 밀린 적 없이 산 난데, 이럴 때 국민의 지팡이를 당연히 불러야 하는 거 아냐? 그 지팡이들은 내가 낸 세금으로 아마도 월급 받아 지 자식들 먹이고 입히고 할 터일 것을. 핸드폰은 이미 꺼내져 왼손에 꾸욱 땀나도록 쥐고 있었고 오른손 집게손가락은,
1-1-
더 이상 누를 수가 없었다. ‘2’가 눌러지질 않았다. 안다 알어. ‘2’와 ‘3’, 그리고 ‘4’와 ‘9’가 헷갈려서가 아니다. 범죄신고는, 경찰을 부를 땐 분명 ‘11’ 다음에 ‘2’를 눌러야 하는 것쯤은 안다. 아는 데 그리 안 됐다. 얼마나 주저하고 있었을까. 그러다 자문했다.
‘양주 사러 다시 내려갈까? 아님 이대로 빈손으로...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한번 붙어봐? 지원병도 두 명이나 투입 가능하고 쪽수로도 3대 3, 불리할 것도 없잖아?’
주저주저, 어찌할 방법을 찾지 못하고 시간만 지나갔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모나게 살 필요 있어? 모난 돌, 쇠정 맞는다는데. 적당히 눈 꾹 감고 넘겨 살 줄 아는 게 지금 시대에 사는 지혜라지, 지혜야, 아무렴. 세종임금의 아버지도 그렇게 대충 얼렁뚱땅 살자 했다는데 뭘.’
...... 시간이 됐다. 양주를 사와 가지고 들어갈 시간이 얼추 됐다. 결정해야 했다. 더 망설일 시간은 없다.
‘계속 당할래? 이번으로 어떻게든 끝내고 갈래.’
이번으로 끝내고 갈 방법은 결코 떠오르지 않았지만 일단 시간이 됐으니 들어가 보기로 했다.
카페 문을 열자 기타와 노래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지? 맞다. 저 놈이 대학 때 나한테 기타를 가르쳐줬지? 요즘은 안 친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래도 아직 제법인 걸? 해야 할, 전투보다 치떨릴 고군분투를 전방에 두고 노랫소리 쪽을 향해 몸을 멈춰 세워두고는 우두커니 기타 잘 치는 친구가 부럽다는 표정으로만 쳐다보고 있었다.
“아빠, 그 아저씨지? 신문사 기자한다는. 전에 집에 와서 나한테도 기타 쳐줬잖아. 그 아저씨, 이 노래 부르고 있던 거 아냐? 그 아저씨 십팔 번.”
「멋들어진 친구 내 오랜 친구야
언제라도 그곳에서 껄껄걸 웃던
멋들어진 친구 내 오랜 친구야
언제라도 그곳으로 찾아오라던」
그랬다.「목로주점」! 그 친구의 십팔 번이, 우리의 지나가버린 시간들이 들려오고 있었다.
「가장 멋진 목소리로 기원하려마
가장 멋진 웃음으로 화답해줄게
오늘도 목로주점 흙바람 벽엔
삼십 촉 백열등이 그네를 탄다.」
하지만 계속 그네를 타며 흔들리고 있어야 할 백열등 아래에선,
“이리 와야지, 왜 글로 가시우?”
이 한 마디에 세상이 경직되고 말았다. 노래도 기타도 끊어지지 않았지만 아버지의 모든 것이, 지나버리고만 그 젊음의 호기마저도 정지되고 마는 듯했다. 현실 앞에서. 하지만 지나가버린 시간은 아직 죽지 않았다. 몸이 굳어지는 것만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느낄 수 있다는 건 살아있다는 거야, 하면서 불현듯 지난 젊음의 호기, 객기라도 좋다, 끝이 어디쯤일지는 몰라도 몸 어딘가에서 불끈 솟구치는 게 있었다. 살아있구나 내가 아직! 그들에게로 갔다. 빈손으로 그들 앞에 섰다. 너희가 젊다면 우리도 젊을 때가 있었다, 하며! 우린 너희가 갖고 있지 못한 빈손으로도 너끈했던 젊음이 있었다, 하며! 군발에 짓밟혀도 꿋꿋했던 우리였다, 하며! 이 빈 손으로 군사독재의 총부리도 꺾었던 우리였다, 하며!
글ㆍ그림=오동명 (다음 편으로 계속)
☞오동명은?
=서울 출생.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뒤 사진에 천착, 20년 가까이 광고회사인 제일기획을 거쳐 국민일보·중앙일보에서 사진기자 생활을 했다. 1998년 한국기자상과 99년 민주시민언론상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사진으로 세상읽기』,『당신 기자 맞아?』, 『신문소 습격사건』, 『자전거에 텐트 싣고 규슈 한 바퀴』,『부모로 산다는 것』,『아빠는 언제나 네 편이야』,『울지 마라, 이것도 내 인생이다』와 소설 『바늘구멍 사진기』, 『설마 침팬지보다 못 찍을까』 등을 냈다. 3년여 전 제주에 정착, 현재 제주의 한 시골마을에서 자연과 인간의 만남을 주제로 카메라와 펜, 또는 붓을 들고 있다. 더불어 한라산학교에서 ‘옛날감성 흑백사진’을, 제주대 언론홍보학과에서 신문학 원론을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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