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2.31 (화)

  • 맑음동두천 1.1℃
  • 구름많음강릉 6.2℃
  • 맑음서울 2.9℃
  • 맑음대전 5.7℃
  • 구름많음대구 4.7℃
  • 구름많음울산 7.0℃
  • 구름많음광주 5.5℃
  • 구름많음부산 8.0℃
  • 맑음고창 5.7℃
  • 맑음제주 10.2℃
  • 맑음강화 1.7℃
  • 맑음보은 4.5℃
  • 맑음금산 5.9℃
  • 맑음강진군 7.7℃
  • 구름많음경주시 5.5℃
  • 구름조금거제 7.3℃
기상청 제공
검색창 열기

[기획연재소설] 라이브 카페, 나는 서툴다 고로 존재한다(14)

14. 일기

 

나는
그 아침
밉지만은 않아

 

‘아, 아, 음~~음, 디, 비 마이너, 이 마이너, 이 마이너 세븐, 에이 세븐, 다시 디이’

 

손님이 다 빠진 늦은 밤, 아니다, 이른 새벽, 나는 귀가를 서두르고 있는데 아버지는 기타를 잡고 게으름을 피운다. 내일 부를 노래를 준비하고 있나 싶어,

 

“집에 안 가?”

 

냅다 소리를 질렀더니, 들어 볼래 한다. 들을 건지 안 들을 건지 내 의사가 전달되기도 전에 이미 기타와 노래가 동시에 울려왔다. 아버지의 임의생각은 빛의 속도 초속 30만 km보다 빠르다. 생각과 동시에 말이 나오고 이내 행동으로 옮겨진다. 손님이 없어서인지 정말이지 아련히, 아득하게 카페 안에서 울려 퍼지고 있었다. 어차피, 포기하고 가운데 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혼자라서 공간은 썰렁했지만 공기는 전혀 그 반대였다. 마치 아버지가 나를 안아줄 때의 감촉을 느낄 수 있었다. 이 감촉도 아버지의 임의생각만큼이나 빠르다. 아버지는 가없이 조용하게, 더없이 얌전하게, 한없이 구슬프게 내 귀에 속삭이고 있었다. 아주 오래 전에 아버지 무릎을 베개 삼아 내 머리를 얹고 누워 귀로 아버지의 손길이 전해 왔던 그 간지러움, 그 때인 양 졸음이 살살 왔다.

 

 

“시원하지?”

 

내 귓구멍을 뒤지면서 아버지는 나를 재웠다.

 

“응, 으응”

 

그리고 잠들었던 것 같다.

 

나는 두 발을 앞으로 쭉 내밀며 몸을 뉘었다.

「물소리 까만 밤 반딧불 무리
그 날이 생각 나 눈 감아버렸다
검은 머리 아침 이슬 흠뻑 받으며
아스라이 멀 때까지 달려가던 사람
나도 같이 따라 가면 안 될 길인가
나도 같이 ......」

 

그리고 그 때처럼 잠이 들었나 보다. 내가 눈을 떴을 때는 아버지의 노래는 들리지 않았고 내 앞이 아닌 내 곁에 아버지가 누워 있었다. ‘크어 크어’ 코 고는 소리를 내며 방금 전 나처럼 잠들어 있었다. 아버지를 깨우지 않으려고 가만히 있었다. 아버지의 얼굴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본 적이 참으로 오래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귀를 흰 머리로 덮고 사는 중년의 남자, 골지 않던 코를 골고 나이를 씹어가며 사는 초로의 남자. 그러나 가엾다는 서글픔보다는 자랑스럽다는 뿌듯함이 늘 들게 하는 한 인간으로서의 아버지를 보고 있자니, 화가 다빈치의 ‘사는 법을 배운다고 생각했는데 죽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란 말이 문득 떠오른다.

 

‘아버지도 늙는구나.’

 

아버지는 나이는 먹어도 늙을 줄은 몰랐다. 누구나 자식이면 이런 착각을 하고 살겠지만, 유난히 아버지는 나이로 바라보게 하지 않았다. 내가 입다 싫증나 버린 내 청바지를 입었고 빛에 바라고 때로 얼룩진 내 남방을 물려 입기도 해서지만 나와의 동행자로서의 아버지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버지는 명령하지 않고 항상 청유했다. ‘~하라’ 하지 않고 ‘~하자’ 또는 ‘~하자꾸나’ 하며 동행의 손을 늘 내게 내밀었다. 이러니 친구 같은 아버지랑은 내 친구하고 그렇듯이 자주 싸우고 종종 토라지곤 했다, 둘 다 서로. 늘 내 앞에선 나보다 더 어린애 같이 깝쭉 웃어대고 더 말이 많은데다가 어린애 동작처럼 과도한 액션을 보이는 아버지가 때로는 부끄러운 적도 많았다. 남들 아버지 같이 점잖지 못할까, 하며.

 

나는 아버지가 등으로 우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괌으로 떠나는 날, 출발 시간이 저녁이라 우리는 전에 살던 연립주택 뒤의 형제 바위에 올라갔다. 형제바위는, 하나는 크고 다른 하나는 그보다 작아서 꼭 형제가 나란히 서 있는 듯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늘 이렇게 마주 보고만 있는 이 형제바위에 올라올 때마다 아빠는 함께 하면서도 같이 하지 못하는 이 형제의 아픔을 여기서 느낀단다. 늘 붙어 있는 것 같지만 그 정도의 거리로 떨어져 있는 이들이 항상 안타까웠단다.”

 

나는 생각나는 곳이 있어 대답했다.

 

“제주도 남쪽 송악산에서 마라도 방향 바다를 보면 그 사이에도 형제암이 있지 아마? 육지에서 볼 때는 붙어 있는 것 같은데 배 타고 바다로 나가 보니 제법 떨어져 있더라.”

 

아버지는 나를 보고 ‘그렇지?’ 했다.

 

“몸은 비록 떨어져 있어도 우리 마음은 떼어 놓지 말고 살자꾸나.”

 

우리는 가지고 간 캔 커피로 바위 위에서 건배를 했다.

 

“아빠, 나 너무 염려 마. 아빠보다 이젠 키도 더 크고 ...... 잘 할게. 내 생각만 하다가 밥도 제대로 챙겨 먹지 않고 그러지 마. 나도 잘 먹고 공부도 열심히 할게. 에구, 울보 아빠가 나보다도 난 더 걱정되는 걸? 우리 힘내자, 파이팅!”

 

이렇게 건배를 했었다. 발 아랫동네를 내려다보고 있는 우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무심히 그저 내려다만 보고 있었다. 멀리서 보면 움직이는 것은 없었다. 모두가 정지돼 있다. 우리도 잠깐 모든 것을 멈춘 그대로 있었다. 잠시 뒤,

 

“크기로 봐서 형일 것 같은 저 바위에 갔다 올 테니까 아빤 여기서 쉬고 있어. 내가 다녀오면 이 바위들은 이제 부자바위가 되는 거다, 우리에게는.”

 

 

십여 분쯤 올라가 형바위에서 아래로 앉아 있는, 등을 지고 앉아 있는 아버지가 보였다. 더 왜소해 보였고 이래서 더 쓸쓸해보였다. 아버지를 부르려고 두 손을 모았지만 아빠, 라고 부르지는 못했다. 아버지가 등을 떨고 있는 것 같아서였다. 내가 소리 내지 않고 울먹거릴 때처럼 아버지 등이 미동하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를 부르지도 못하고 뛰어내려 왔고 나도 내려오는 내내 울고 있었다. 더 멋진 미래를 위해서라 해도 헤어짐은 언제나 서럽고, 더 멋들어진 재회를 꿈꾸더라도 이별은 아팠다. 동생바위로 내려와 울고 있었을 아버지를 안기 전에 내 얼굴의 눈물을 훔쳐내고 웃음으로 바꿔치기 했다.

 

“아빠”

 

나는 메아리로 돌아올 외침 대신 품고 있던 속삭임으로 아버지를 뒤에서 안았다. 아버지 가슴 앞에 모아진 내 두 손 위로 아버지의 손이 포개졌다. 손은 떨고 있었고 촉촉했다. 손도 운다는 것을, 손도 눈물을 흘린다는 것을 그 때 처음 알았다.

 

“언제 깼니? 내 노래가 자장가로 들리든? 바로 자더라. 가수 힘 빠지게! 가만, 왜 그러니? 울었니? ... 요즘 힘들지? 군대 가기 전에 친구들이랑 놀러 다녀야 하는데 아빠가 이렇게 붙들어 놓고......”
아버지가 알아차릴지 몰라 아버지 등을 안지도, 아버지 손을 잡지도 못했다.

 

“아빠, 아까 부른 노래, 거, <일기>지? 이번엔 내가 불러줄까?”

 

나는 틈나는 대로 만져뒀던 기타를 내 가슴 앞으로 당겨왔다.

 

“기타를 치며 부르려고? 언제 배웠니?”

 

“좀 쳐보니까 아빠 수준을 알겠더라. 이 정도 노래는 몇 번만 부르다 보면 코드도 가사도 자연히 외워지겠던데. 아빠는 왜 그게 안 되지?”

 

다행히 어렸을 적 피아노를 친 적이 있어 음정이나 음계, 박자 모두 수월했다. 이러니까 대중가요라 하겠지만 가요는 식은 죽 먹기였다. 식은 죽은 먹어보지 않아 먹기 얼마나 쉬운지 모르나 따뜻한 죽도 밥보다는 먹기가 아주 편했다. 호호만 몇 번 불면 씹지 않아도 술술 잘 넘어 갔다. 어찌됐든 가요는 죽 먹기만큼 쉬었다. 적어도 아버지가 부르는 가요 정도는, 더욱이 <일기>는 잡기 쉬운 너더댓 개의 코드만 알면 되었다.

 

“부른다!”

「물소리 까만 밤 반딧불 무리
...... ......
...... ......
은하수 한편에 그려지는 얼굴
차라리 잊으려 눈 감아버렸다
싸늘한 새벽바람 흔들리던 잎새
그 사람 가는 길에 대신해 준 손」

 

아버지가 나와 따라 불렀다.

「나도 같이 따라 가면 안 될 길인가
나도 같이 따라 가면 안 될 길인가
오늘 밤 일기에는 이렇게 쓴다
아직도 그 아침이 믿기만 하다고.
아직도 그 아침이 믿기만 하다고」

 

아버지가 뒤에서 내 등을 감싸 안았다.

 

“언제 쳐 봤니? 대단하네. 내 아들! 오늘부터 밖에다 현수막 하나 걸어야겠는 걸? ‘얼짱몸짱, 전혀 늙지 않은 진짜 젊은 가수 특별초청 공연’ 어때?”

 

새벽 다섯 시를 우린 이렇게 넘기고 있었다. 이번엔 아버지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냉장고에서 맥주 두 병을 꺼내왔다.

 

“내가 쏜다. 내 알바비에서 까아. 아빠! 우리, 부라보 하자!”
“뭘로? 부자가수 탄생을 자축하기 위해서?”
“그것도 좋고, 우리가 다시 만난 것을 뒤늦게 기념하는 것으로도 좋고, 하여튼 부라보!”

 

건배를 서너 차례 했을까, 맥주 두 병은 다 바닥이 드러나고 그제야 우리는 귀가하기로 했다. 마당에 나오니 해는 나와 있지 않지만 이미 세상은 밝아 있었다. 아버지는 차로 갔고 헤드라이트가 켜지자 나는 느티나무 아래에서 무엇인가 반짝이는 작은 물체를 언뜻 보았다. 가서 수그려 찾아보았다. 이슬이었다. 풀잎 끝에 대롱 달린 이슬방울이었다. 자동차 빛에 더 영롱했다. 아버지를 불렀다.

 

“끄지 말고, 불 켜놓고 와 봐!”

 

나는 서둘렀다. 곧 사라질 것만 같은, 너무나 미약해 보이는 작은 이슬방울을 아버지한테 빨리 보여주고 싶었다. 새벽에 느티나무 아래에 모여 쪼그리고 앉아 풀끝의 작은 이슬방울에 아버지도 나도 감탄하고 말았다. 말소리에 떨어질지 모른다며 속닥거리면서.

 

“일기, 아직도 쓰니? 아빠는 못 쓰고 있는데. 아주 간략히 하루 열 자나 쓰나?”

 

2·3·6 구의 싯귀 같은 일기를 말하는 것이었다. 아버지의 일기는 아마 세상에서 가장 짧은, 게으른 일기가 아닐까.

 

“그럼. 서툰 영어로 걔네들 따라가야지, 과제물 매일 내야지, 정신없어서 간단히 쓸 때도 많아. 하지만 빼먹지 않으려고 명심은 해.”

 

 

그리 약하지만도 않은 새벽바람이 그 작은 이슬방울을 흔들었지만 바람은 이슬을 떨어트리진 못했다. 이슬을 안은 들꽃 잎새가 바람을 안아 바람에 맞춰 함께 너울거려주기 때문일 게다.

 

“일기를 두고 갔더라. 7년 전인가 8년 전인가. 초등학생 때 쓴 일기인 것 같던데, 한 권을 우연히 봤단다.”

 

“남의 일기, 사생활을 훔쳐보다니. 내 아빠가 이렇게 무지한 사람인 줄이야...... 하긴 나도 아빠 꺼 몰래 훔쳐본 적 있지. 아빠 대학생 때 쓴 일기랑, 요즘 쓰고 있는 그 짧은 시 같은 일기도 봤고. 부자간 무지 수준이 서로 무지 쌤쌤이네. 무지렁이 부자!”

 

아버지는 하나씩만, 지난 일기 중에 하루치만 자기 일기를 읽어주기 할까? 했고 잠깐 눈을 부친 뒤 다시 카페로 나와 아버지는 나의 초등학생 때의 하루를, 나는 아버지의 대학생 때의 하루를 서로 바꿔 들을 수 있었다.

 

××년 5월 21일, 토요일

 

제목; 오랜만에 집에서 고기를 구워 먹다

나는 우리 집 옥상에서 저녁을 먹었다. 오랜만에 고기를 구워 먹었다. 엄마와 함께 먹어서 더 좋았고, 온 가족이 모일 수 있어서 더 즐거웠다. 우리는 두 시간 동안 좋은 시간을 가졌다. 나는 자주 이런 시간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했다.

 

오래간만에, 거의 1년 만에 옥상에서 고기를 구워 먹었다. 어디서 먹으나 맛있지만 집에서 구워 먹으면 좀 성가셔서 그렇지 훨씬 더 맛있고, 더 많이 먹게 되고, 기분도 다르다. 밖에서 먹으면 똑같이 즐겁지만 그냥 즐거운 걸로 끝이다. 하지만 집에서 직접 구워 먹으면 즐거우면서도 우리 세 명이 다정다감한 느낌, 평온한 느낌이 든다. 그래서 난 좀 성가셔도 기분도 훨씬 좋고 돈도 아끼고 많이 먹게 돼서 집에서 고기를 구워 먹는 게 제일 좋다. 하지만 이런 느낌은 또 집안에서는 못 느낀다. 오직 옥상, 마당 등 야외에서만 느낄 수 있는 감정이다.

 

우린 언제나 그런 감정을 느낄 수 있어 기쁘다. 내일도 오전엔 열심히 공부하고 오후에 셋이 신나게 보냈슴 좋겠다.

 

××, 12, 22, 목

 

실컷 마셨다.

 

「선비촌」이라 하는 세종문화회관 뒤의 민속주막에서 쌀약주를 셋이서 두 되를 마셨다. 그네들이 두 잔씩 하고 모두 내가 마셨다. 잘 들이켜지기도 했지만, 왠지 퍼 넣고 싶었다. 아니면, 담배를 안 피우기 위해서 일단 그러했는지도 모른다. 요즘 토종꿀을 몇 번 먹고 나서 그러한지 쉽게 술의 기운이 몸에 퍼지는 것 같다.
취기가 기분 좋은 대로 올랐을 때, 거짓 얘기부터 그들과 시작했다. 거짓이 아닌 마음의 우회적인 표현인지도 모르지. 내가 좌우지 못하는 성격 탓으로 돌려야 하는 나의 행동에 대해 나를 병신으로 취급하며 자기비하 또는 합리화한다는 긴 얘기들이었다. 주로 여자 얘기였었고 처음 생각과는 달리 담배도 몇 대 피우고 다방으로 옮기고 나서도 나는 얘기가 많았다.

 

친해진 나이 어린 친구들이지만, 함께 다니기에는 답답한 구석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렇기에 여느 고등학교 친구들처럼 나의 주장을 얘기하고 싶지는 않다. 늘 그래 왔었다는 얘기다. 친구가 되기는 좀 힘들지 않겠는가 하는 오랜 마음의 구석을 덜려고 그들 앞에서 취한 척을 했었지. 여자 얘기도, 그들과의 얘기도 다 ‘되는 대로 되어라’ 하고 마음을 정했다. 아주 간단한 귀결인 데도 복잡한 것은, ‘되는 대로 되어라’에 대한 의식적 거부에서 였지만, 내 삶을 내버려두는 것처럼 ‘병신’스럽다고 느끼게 할 것은 더 없을 것이다.
취기와 취내를 없애려고, 그리고 정신 차리려고 뜀박질하고 방에서는 쪼그려 뛰기 200회를 하고 기타 좀 치고 잔다.

 

“아빠는 그 때 정말 많이 취했나보다. 글이 앞뒤가 안 맞고 많이 엉망이네, 히히. 그래도 술 마시고 들어오면 바로 잠부터 자려할 텐데 일기를 쓰고 잤다니...... 그리고 무척 우울했었나봐. 담배, 그 땐 피웠었구나?”
“이구, 다 들통 났네. 아빠 일기는 글씨체부터 엉망이네. 대학생 때 다들 그랬겠지만 별 거 아닌 것 가지고도 고민 많이 하고 그랬던 적이라, 술을 마시고 난 날은 집에 들어와서 꼭 일기를 쓰자고 약속했거든. 일기가 아니라 ‘주기’라고 일기장 앞에 써 놓고 말야. 돌이켜보면 마음 흔들리지 않으려고 평상시에는 안 쓰던 일기를 술 마시고 나면 썼던 것 같아. 아빠가 그 때 많이 우왕좌왕 했거든. 이래서 술 마시는 일도 잦았고.”
“담배도 피우고 술도 많이 마셨다 이거지? 지금은 담배도 안 피우고 술도 많이 마시는 건 아니잖아?”

 

아버지는 또 피식 웃기만 했다.

 

“근데, 난 글 쓰는 게 왜 그렇게 유치하지? 고기 먹지 못해 안달난 놈 마냥. 지금 와서 읽으니 무진장 창피한데, 이거!”

 

아버지는 이젠 해쓱 웃더니,

 

“난, 내 아들 일기 읽으면서 까뮈의 <이방인>보다 더 잘 썼다고 했는걸. 고기 먹는 얘기지만 식당보다는 집에서, 집 안에서 보다는 야외에서 먹는 게 좋고, 가족 모두 모여...... 가족? 미안하다, 늘.(이 대목에서 정말 내게 미안한가 보다) 담담하면서도 가식도 전혀 없고, 이게 바로 실존이고 부조리의 적절한 이해이며 그 온전한 행위이고...... 제대로 글쓰기하고 있었는데 뭘. 실존주의니 뭐 하는 따위, 따로 배우지 않고도.”

 

“뭐? 실존? 부조리?”

 

아버지는 이제 머쓱하게 웃었다.

 

“아직 안 읽어봤니? <이방인> 말이다. 안 읽어봤다면 꼭 읽어보렴. 군대 가지 전에. 젊어서 읽을 때와 나이 들어 읽을 때, 느낌이 사뭇 다르더구나. 일기도 그랬지? 하기야, 까뮈도 나이가 들어가면서 반항보다는 이의 극복으로 변해간 것 같기도 하고, 전환기에 돌연 사망을 했지만... 한번 읽어보거라.”

 

몇 시간 전에 봤던 이슬방울이 다시 보고 싶었다. 햇볕이 벌써 진해져서 이미 사라졌을 지도 몰랐다. 정말 그랬다. 풀잎만 있을 뿐 그 끝, 새벽 찬 바람에도 떨어지지 않던 이슬은 따듯한 햇빛에 녹았다.

 

“이슬방울이 일기 같구나. 아까 다시 들춰본 오래 전 일기처럼. 그 일기 안의 일들 다 기억 나니?”
“옥상에서 고기 구워 먹은 건 생생하게 기억 나.”
“그래? 엄마가 생각나는 거구나? 미안하다. 아빠는 주막이라는 술집조차 생각이 안 나는데. 누구하고 함께 했는지는 일기에 쓰여 있지 않았지만 읽다 보니 그리고 쓴 날짜로 더듬어보니 누군지는 알 것 같구.”
“근데, 왜 일기가 이슬방울이야? 이슬방울이 일기라고 했나?”

 

잠시 생각하더니 아버지는 조금 우울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사라져도 가물가물하게 남아 있잖아.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느껴질듯, 사라졌다 또 다음 날이면 나오고... 그리워서 같은가? 결코 사라지지 않아서 같은 걸까? 이슬방울이나 일기나 이래서 같게 봤나봐.”

 

난 알듯 말듯 할 만큼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노래 있잖아, <일기>의 마지막 가사를 우리는 바꾸자. ‘아직도 그 아침이 밉기만 하다고’ 일기에 쓴다고 했잖아? 우린 아닌데. 오늘 본 이슬방울, 그리고 사라지긴 했지만 아빠와 나에게 옛날 일기를 꺼내보게 하고... 아빠, 지난 일이 떠올려져서 싫었어? 아빠가 무언가 모르지만 고민했었을 대학생 때, 그러니까 지금 내 나이였을 거 아냐. 난 아빠의 그 대학생을 조금은 이해하겠던데. 나도 이러구 헤헤 웃고 살지만 고민 많거든. 30년의 나이 차이가 있지만 아빠와 내가 동시대인이 돼 있다는 공감대를 느낄 수 있어서 좋다고 할까. 아무튼 나는 오늘밤에 일기를 이렇게 쓸 거야. ‘아직도 이 아침이 기쁘기만 하다’ 라고.”
>>> 글.그림=오동명/  다음 주 이 시간에 계속

 

 

 

 

오동명은? =서울 출생.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뒤 사진에 천착, 20년 가까이 광고회사인 제일기획을 거쳐 국민일보·중앙일보에서 사진기자 생활을 했다. 1998년 한국기자상과 99년 민주시민언론상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사진으로 세상읽기』,『당신 기자 맞아?』, 『신문소 습격사건』, 『자전거에 텐트 싣고 규슈 한 바퀴』,『부모로 산다는 것』,『아빠는 언제나 네 편이야』,『울지 마라, 이것도 내 인생이다』와 소설 『바늘구멍 사진기』, 『설마 침팬지보다 못 찍을까』 등을 냈다. 3년여 전 제주에 정착, 현재 제주의 한 시골마을에서 자연과 인간의 만남을 주제로 카메라와 펜, 또는 붓을 들고 있다. 더불어 한라산학교에서 ‘옛날감성 흑백사진’을, 제주대 언론홍보학과에서 신문학 원론을 강의하고 있다.

 

 

 

추천 반대
추천
0명
0%
반대
0명
0%

총 0명 참여


배너

관련기사

더보기

배너
배너

제이누리 데스크칼럼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실시간 댓글


제이누리 칼럼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