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Time
time oh
good good time
in my heart in your heart
처음 카페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그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는 손님들이 많다. 덥수룩한 수염에 등 뒤에 짊어진 일반 배낭과는 다른 아주 큰 가방-나중에 알았지만 그것은 낚시가방이었다-때문이었다. 그리고 또 냄새도 그 기억에 보탰다. 비릿한 생선 냄새와 땀에 전 냄새가 뒤섞인, 절로 코로 손이 가게 만들만큼 지독했다. 그는 낚시꾼이었다. 커피를 마셨고 줄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여기 금연인가요?”
그가 아버지에게 물었다.「나는 서툴다 고로 존재한다」카페는 금연을 규정하지 않고 있지만 이상하게도 담배 피우는 손님은 거의 없었다.
“상관없지만...... 아니 피워도 괜찮습니다.”
담배가 더 낫겠다 싶어 황급히 대답했다. 그가 몰고 온 비릿한 냄새는 정말이지 참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다른 냄새로라도 씻어내야 했다.
“노래도 하는군요?”
그가 들어온 지 두 시간쯤 지났을까. 미안하다며 화장실이 어디냐고 물었고 밖 화장실로 나가면서 들고 왔던 낚시가방을 집었다. 가는가 했더니 마당에 두기 위해서였다. 돌아온 그가 손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냄새가...... 이거 정말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손질 안한 수염 속에서 머쓱한 미소를 간신히 얻어 볼 수가 있었다. 낚싯대를 드리우고 앉아 있다 보면 코가 무뎌진다고 했다. 시각이나 청각에 온 정신을 몰아놓고 있어서인지 후각 기능이 상실되는가 보다는 농담 섞인 말도 하게 되었다.
“커피가 참 다네요.”
그가 시킨 커피는 원두만 갈아서 낸 커피라 달 리가 없었다. 한 잔을 더 갖다 줬고 그는 아버지한테 글렌 캠벨의 <타임>을 불러줄 수 있냐고 했다. 즐겨 부르진 않았지만 더러 불러보곤 하던 팝송이라 그러겠다고 하고 기타를 잡았다. 하지만, 부를 순 있었는데, 그리고 기타를 따라 잡기가 그리 힘들 건 없었는데 다른 노래와 달리 문제는 발음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 박자에 맞춰 영어를 따라갈 수 있을까, 이게 걱정이 됐다. 속으로 가름해 보았다.
「some people run, some people crawl
some people don't even move at all」
영어울렁증을 넘어 영어기피증을 가지고 있는 아버지이다. 그러나, 이 정도면 별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부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되돌이표의 지시대로 다시 불러야 하는 가사는 앞에 가사처럼 만만하지만은 않았다.
「some roads lead forward, some roads lead back
some roads are bathed in white, some wrapped in black」
roads의 복수형 ‘s’를 다 발음하려 하니, 또 과거형 ‘ed’마저 다 발음하지 않고서는 다음으로 넘어가지 못하는 습관으로 박자를 따라 잡을 수가 없었다. 영국식 영어학습의 결과? 얼버무려도 봤지만 노래를 중도포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늘 그래왔듯이 아버지의 든든한 배후세력이자 종종 뒤를 책임져주는 손님을 찾았다. 이 노래, 부를 수 있는 사람, 손 들어봐, 뭐 이런 식으로. 그날의 사정은 다른 날과 달랐다. 팝송이었기에 더 몸을 사리는 듯했다. 지원병이 없었다. 아버지는 노래를 신청한 낚시꾼에게 불러볼 수 없느냐고 오히려 청했지만 그는 두 손을 다 들고 저어댔다. 아버지는 순간, 아이디어를 짜냈다. 상황모면이나 임기응변이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온 깜짝 대안이었다.
“오랜만에 부르는 노래라...... 죄송합니다. 다음 주까지 많이 연습해서 꼭 불러드리면 안 되겠습니까? 그 때는 캠벨 수준으로 정말 멋지게 불러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 안 될까요? 허락하신다면 이 약속 꼭 지키겠습니다.”
낚시꾼은 물론, 다른 손님들까지 가세해 그 노랠 들으려고 다음 주에도 또 여길 와야 하느냐, 장삿속이 훤히 보인다 며 웃음의 항의가 빗발치기는 했지만 모두들 ‘다음 주 이 시간에’를 기대한다며 박수로 호응해왔다.
그 날, 집에 돌아와서 한동안 관심을 끊었던 LP판을 뒤적였다. 바다를 배경으로 글렌 캠벨의 얼굴이 실린 낡은 LP판을 찾아냈다. 두꺼운 표지가 누렇게 변하고 표지 모서리가 흐드러진 종이케이스 안에서 판을 꺼내려고 뒤집자 판보다 먼저 편지, 역시 누렇게 바랜 편지가 빠져나왔다. 아버지의 이름과 이미 오래 전에 살았던 서울 주소가 다른 이의 글씨체로 쓰여 있는 편지 겉봉. 뒷면에는 지리산 구례 화엄사라는 발신자의 주소가 인쇄로 박혀 있었고 그 옆에 손수 쓴 ‘각인 합장’이 적혀 있었다. 지금도 가끔 생각나는 사람이었다. ‘어떻게 하고 살고 있을까? 아직 절에 있는 걸까?’ 열어보았다. 여느 편지지와 달리 긴 화선지에 펜글씨로 써내려간 참으로 정갈한 서신이었다.
대학 3학년 겨울 방학, 아버지는 그를 처음 지리산 구례 화엄사에서 만났었다. 산사의 조영 안으로 걸어 들어오던 그의 모습도 아직 생생했다. 글씨를 보니 단아했던 그의 선방이 떠올랐다. 대나무를 옷걸이 삼아 걸어뒀던 얌전한 승복이며, 두터운 나무둥지 위에 놓여 있던 가지런한 책 몇 권. 그의 글씨와 같이 단정했다. 아버지는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는 겨울, 졸업기념 가족여행으로 화엄사로 함께 떠나기 전 그의 편지를 꺼내 보여줬던 적이 있었다.
“세월이 이렇게 흐르고 사람은 만날 수 없지만 흔적은 남아 여기 그대로구나. 이 흔적은 시간을 정지시키고 세월을 멈추기도 하고. 이 분, 잠깐 환속한 적이 있는데...... 보고 싶네, 어떻게 살고 계신지.”
생생히 기억난다, 아버지가 그 때 했던 말이.
아버지는 돌고 도는 LP판에 바늘을 다시 <타임>의 처음에 올려놓고 올려놓으며 또 듣고 들었다. 노래를 익히기 위해서, 발음을 익히기 위해서지만, 이보다는 지난 세월을 더듬고 떠올리는 일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 편지는 아버지가 결혼을 결정할 즈음, 가장 먼저 화엄사로 소식을 전했고, 아버지의 편지에는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리게 될 것이니 더욱 스님이 꼭 참석해야 한다.’고 적어 보냈다고 했다. 그러나 아버지와 또래인 스님은 ‘결혼’이라는 말 한 마디에 심적 동요를 일으켰던 게다. 축하한다면서도. 스님은 아버지의 결혼 소식을 듣고 더 오래 전 그의 쓰라린 과거로 다시 혼란했고 결국 몸살을 앓게 되었던 것이라고 했다. 스님은 출가 전 결혼을 약속했던 여자가 있었으나 헤어지고-그 이유는 끝내 듣지 못했다고 했다-방황하다가 우연히 큰 스님을 만나 그 아픔을 누를 수가 있었다고만 했다.
아직 나이가 어린 나는 아버지와 같은 또는 그 스님과 같은 심정으로 시간에 대해서, 세월에 대해서 말할 순 없겠지만 노래처럼 그럴 것이라는 어렴풋한 긍정을 하곤 한다. 어렴풋하게나마, 막연하게나마. 설핏하게나마.
「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기어가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네
앞으로 향한 길이 있고 뒤로 난 길이 있고
하얗게 포장된 길이 있고 검게 뒤덮인 길이 있네
결코 얻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결코 주지 못하는 사람도 있네
죽지 못해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살지 못해 사는 사람도 있네
나를 성가시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고
나에게 친절한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 제 갈 길로 갈뿐 나에게 마음을 주지 않는다네
세월이여, 좋고 좋았던 시간이여, 너는 어디로 갔느냐
세월이여, 더 없이 좋던 시간이여, 너는 어디로 갔느냐
때로 나는 만족스럽고 때로 그렇지 못한 때가 있네
더러 내 얼굴은 쌀쌀하고 더러 내 얼굴이 뜨거워질 때가 있네
해질녘 나는 웃고 해뜰녘 나는 울고
나는 왜일까 생각하며 웃기도 울기도 한다네
세월이여, 좋고 좋았던 시간이여, 너는 어디로 갔느냐
세월이여, 더 없이 좋던 시간이여, 너는 어디로 갔느냐」
후렴구를 따라 부르다보면 이 짧은 스무 성상에도 아쉬운 기억도 있고 안타까운 추억도 있다. 즐거우면 즐거울수록 더 아쉽고 더 안타까웠고, 아픈 기억 역시 더 아쉽고 더 안타까웠다. 이래서인가.
「time, oh oh, good good time, where did you go
time, oh oh, good good time, where did you go」
나의 지나간 시간을 붙잡을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다.
일주일 동안 아버지는 손님과 약속한 대로 글렌 캠벨을 능가할 수 있도록 정말 열심히 연습했다. 하지만 애초 어디 이게 가능한 일인가.
「song, oh oh, good good song, where did you go」
일주일이 다가올수록 아버지는 가사처럼 아마 이랬을 게다.
<타임>을 신청했던 낚시꾼도 일주일 후 약속을 지켰다. 그 때는 낚시가방도 없었고 냄새도 끌고 오지 않았다. 대신 한 여자와 동행했다. 그의 아내였다. 부부는 상당히 경직된 얼굴로 마주 앉아 있었고 말도 없었다. 카페를 들어설 때 아내에게,
“이 분이 우리를 위해 들려줄 노래를 준비해뒀을 거야.”
아버지를 이렇게 소개했다. 아내는 인사치레도 없이 먼저 자리를 잡았다.
“기껏 날 데려온 곳이 고작 이 좁아터진 곳이란 말야?”
아버지도 들었지만 이 비슷한 말은 하도 들어서 이력으로 간주 않고 있었다. 하기야, 카페 사장인 아버지도 부인할 수도 없고. 어쩌란 말이냐, 크게 차릴 돈이 없어 안쓰러운 이 마음을......
“고맙습니다. 지난 주 제게 신청한 노래를 듣기 위해 손님께선 더욱이 부부동반하셨으니 제가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저는 이제 부를 <타임>이란 팝송을 일주일 전에 신청을 받고는 제대로 부르지 못하는 무례를 손님들에게 범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일주일만 시간을 달라고 했고 그 빚을 갚고자 여기 다시 나왔습니다. <타임>, 저는 이 노래를 익히기 위해 오래된 레코드판을 꺼내야 했답니다. 그런데 20여 년 전, 정확히는 25년 전, 무심코 넣어두고 잊고 살았던 편지 한 장을 그 안에서 발견했지요. 당시 지리산 화엄사에 계시던 제 나이 또래의 스님에게서 받은 편지였습니다. 읽어봐도 될까요? 지나간, 잊어 사라진 줄 알았던 시간들이 되살아나더군요. 여러분들도 10년 전, 20년 전, 또는 더 길게 어렸을 적을 떠올리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럼...”
동×,
청명한 바람소리가 들려옵니다.
천년 댓숲을 흔들어 잠 깨우고 허공을 가르며 영겁의 저 너머로 흘러가던 바람은 희고 가 느다란 손을 흔들어 산승의 방문살을 가만가만 두드립니다. 적적한 마음으로 산방 툇마루에 나와 홀로 말 없이 앉아보았습니다. 헤아릴 수조차 없는 밤의 잔별들은 손짓 한 번만 으로도 금세 쏟아져 내릴 것만 같습니다. 감나무 가지 끝에 매달려 있는 초이레 달이 오 늘 따라 더욱 서럽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동×,
밤은 어둠으로 하여 찬란해지는 것인지요? 아직 호구조사를 해보지 못한 지리산 속의 모 든 식구들, 목탁새, 두견새, 휘파람새, 그리고 솔바람소리, 심지어 마음 약한 이들의 마음 속에 살고 있다는 처녀귀신의 넋까지 그 이름조차도 다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랑하는 나 의 형제들이 고운 노래를 합창하는 밤의 향연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오늘 아름다운 이 합창을 비록 찬란함은 없으나 소박하게 나의 글로 고이 포장하여 삶의 먼지에 휩싸인 채 오 늘도 저자거리에서 어우렁져 살아가는 동×에게 보내고 싶습니다.
동×,
진실로 외로움을 사랑하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때로 어느 조그마한 순간에는 소슬한 바람이 조용히 불어댄 적도 있습니다. 어느 고승인들 단 한번만이라도 아름다운 정신적 사랑을 경험해보지 않은 이는 없다고 하지만, 왠지 어린 아이들 같은 제게도 때로는 무한으로 이어줄 유한한 임이, 언제까지나 티 하나 묻힘 없이 아름다우실 이상적인 임이 계셨으면 하는 생각이 문득문득 들곤 합니다. 완전히 깨달음을 성취하지 못한 미욱한 탓이겠지 요.
욕심과 노여움, 어리석음으로 갈 길을 잃고 번뇌로부터 헤어나질 못해 진한 정신적 갈등 으로 해서 나날이 초라한 몰골이 더욱 여위는 것 같습니다.
동×,
결혼식 때는 저도 꼭 참석하고 싶어요. 밝은 모습으로 행복하게 새 인생을 출발할 의젓한 모습의 동×을 먼발치에서나마 진심으로 축하해드리고 싶어요.
이제 깊은, 산중의 깊은 이 밤,
오늘 밤도 경건한 마음으로 향으로 사뤄 합장하렵니다. 항시 건강하기를 빌며 줄입니다.
지리산 산방에서 각인 합장
아버지는 스님의 편지를 읽어나갔고 좌중은 숙연해지기까지 했다. 낚시꾼 부부도 다르지 않았다. 고개를 떨군 채 커피잔만 잡고 그것만 바라보고 있던 아내는 편지낭송 중인 아버지를 힐끔 쳐다보기도 했다. 낭송도 역시 서툴고 어설프지만 오래 전 나에게 읽어주듯 꾸밈없는 아버지의 목소리는 모두를 감동시켰다. 아마도 세월, 누구나 품고 있는 이미 지나간 시간에 대한 향수에 젖을 수 있었기에 감동은 더 컸을 것이었다. 낭송이 끝나자 손님들은 잠시 아무 반응이 없었다. 긴 침묵 뒤, 우레와 같은 박수 또는 기립박수로 찬사를 보냈다. 좁아터진 곳이기에 그 반응은 더 요란했고 더 열렬하게 들떴다. 더 뜨거웠고 더 뭉클할 수 있었다. 역시 좁아터진 곳이기에.
아버지는 그 기분을「나는 서툴다 고로 존재한다」카페 속에 그대로 더 남겨두고 싶어 노래를 부르지 않고 고개를 숙인 채로 앉아 있었다. 아버지는 눈언저리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가슴에서 올라온 울컥한 뜨거움으로 죄어오던 목이 순간 막히는 듯 숨이 가빠졌다. 이렇게 과거는 간절하게 현실이기도 한 것이다. 다시 조용해지자 아버지는 그제야 <Time>을 부르기 시작했다.
“거, 정말 연습 많이 하셨군요. 손님 끌기 위해 허투로 하는 말이지 하며 반신반의하고 왔는데, 오늘 안 왔더라면 큰 실수가 될 뻔했습니다.”
낚시꾼은 아내를 쳐다보았다. 아내는 죄송하다는 말을 몇 번이나 했다. 좁아터진 곳이라고 불평한 소리를 아버지가 들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가 보다.
“제가 신청한 날 바로 들려드리지 못해 죄송하지요. 이렇게 두 번 걸음하게 했구요. 그 벌로 제가 두 분께 맥주 한 잔씩 따라드려도 될런지요?”
표선에 살고 있다는 부부는 그 날 늦게까지 더 술을 마셨고 몰고 온 차를 두고 가거나 대리운전을 불러야 할 판이었다.
“명도암은 가보셨어요? 오늘 밤, 명도암에서 쉬시고 내일이 마침 일요일이고 하니 근처 숲도 돌아보시고 그 뒤 집으로 가시면 좋을 것 같은데요. 제가 제 차로 명도암으로 모셔다드릴게요. 그곳에 제가 아는 후배가 작은 민박을 하고 있거든요. 별을 많이 볼 수 있어 참 아름다운 곳이더군요.”
그 후, 낚시꾼 부부는 카페에 부부동반하여 자주 들렸고, 낚시꾼의 어깨엔 낚시가방이 짊어져 있질 않았다. 뒤에 이혼위기의 그들이 아버지에게 들려준 이야기,
“이 카페를 다녀온 날, 이 이가 결혼 전에 보냈던 편지를 꺼내봤어요. 결혼 후 처음... 일 겁니다. 오랜만이었죠. 그리고 이 이가 낚시는 당분간 끊기로 했고요. 어쩜 저도 낚시터에 이 이와 함께 갈지도 몰라요, 호호.”
첫날 마주 앉아 서먹했던 커플은 그 뒤 나란히 앉아 <Time> 말고도 <Today> 등 아버지의 어눌한 노래를 관심 있게 들어줬다. 그의 아내가 어느 날,
“선생님 노래, 녹음 좀 해주실 수 없나요? 집에서도 들을 수 있게요. 아세요? 선생님 노래가 얼마나 간드러진 멋이 담겨 있는지요?”
아버지는 수도 없이 손사래를 쳤지만, 그들이 카페를 다시 방문하던 날, 가로저었던 손으로 녹음테이프 하나를 부부의 손에 쥐어주었다. 테이프에는 메모 한 장도 넣었다.
‘Time, oh oh, good good Time, where did you go?
Time, oh oh, good good Time, in my heart in your heart’
다음 주 이 시간에>>>
☞오동명은? =서울 출생.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뒤 사진에 천착, 20년 가까이 광고회사인 제일기획을 거쳐 국민일보·중앙일보에서 사진기자 생활을 했다. 1998년 한국기자상과 99년 민주시민언론상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사진으로 세상읽기』,『당신 기자 맞아?』, 『신문소 습격사건』, 『자전거에 텐트 싣고 규슈 한 바퀴』,『부모로 산다는 것』,『아빠는 언제나 네 편이야』,『울지 마라, 이것도 내 인생이다』와 소설 『바늘구멍 사진기』, 『설마 침팬지보다 못 찍을까』 등을 냈다. 3년여 전 제주에 정착, 현재 제주의 한 시골마을에서 자연과 인간의 만남을 주제로 카메라와 펜, 또는 붓을 들고 있다. 더불어 한라산학교에서 ‘옛날감성 흑백사진’을, 제주대 언론홍보학과에서 신문학 원론을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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