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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소설] 라이브 카페, 나는 서툴다 고로 존재한다(8)

8. 찔레꽃

 

네겐
어릴 적
한 번 더 남았네

 

“아빠, 정말 의외거든? 아빠가 이런 카페를 차린다는 게, 차렸다는 사실이 아직도 믿기질 않아. 아빠는 장사나 사업에는 절대 적성이 맞지 않는다고 나는 장담하는데. 그렇잖아. 아빠는 자기의 작은 이익은 남들의 손해로 인해 얻는 것이라고 믿고 있잖아. 아빠가 어릴 적부터 나한테, ‘내게 이익이 되는 일은 남에게 해를 끼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늘 잊지 말고 명심하라’고 얼마나 얘기했어. 그런데 고등학교 때 배운 경제학에선 다르더라. 기업은 이윤추구가 목적이고 이윤추구로 인해 사회전체의 경제도 더불어 발전하게 된다는 거지. 하지만, 아빠는 이와는 반대생각이잖아. 내가 덜 먹더라도 남엣것을 내 것으로 할 순 없다, 이게 아빠의 경제학지론 아닌가? 아무튼, 아빠가 이런 걸 차렸다는 게 지금도 내 머리를 갸우뚱하게 한단 말야. 그리고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지켜봤는데, 또 하나 의외는, 여전히 아빠는 돈 버는 데는 거의 연연하지 않더라. 이러면서도 손해 안 보고 4년 넘게 이걸 유지하고 있는 걸 보면 신기함을 넘어 신비할 정도라니까. 내 아빠한테 내가 모르는 이런 점이 있었던가 하고 입이 절로 쩌억 벌어지곤 하지. 하여튼 놀고 있는 아빠보단 훨씬 나아. 내 아빠, 짱!”

 

아버지는 피식 웃으면서 또 딴청이다.

 

“어서 먹자. 곧 손님 들어올 텐데.”

 

 

아버지가 할 수 있는 요리 몇 가지 중 볶음밥 하나는 정말 끝내주게 맛있다. 이것저것 섞어, 마치 비빔밥의 유래처럼 남은 음식 처분하듯이 보이지만 만들어 놓고 나면 주황, 노랑, 초록, 때로는 검정, 색색이 섞여 보기에도 먹음직스럽고 먹어보면 더 침 돌게 만든다. 누구나 다 재주 하나쯤은 타고난다는 말은 아버지의 볶음밥으로 확증된다. 아버지와 나는 지금 아버지의 그 볶음밥을 먹고 있다.

 

“우리 낮술이긴 하지만 맥주 한 병씩만 딸까?”

 

아마도 아버지는 내게 무슨 말인가 하고 싶은 게다. 그렇지 않고서야 낮술이 가능하기나 한가.

 

“조오치!”

 

고등학생 때 북유럽 여행에서 사온 투박한 사기그릇의 맥주 조끼를 두 개 꺼내 맥주를 따랐다.

 

“이 무겁고 깨지기 쉬운 거, 두 개나 왜 내가 사온 건지 알아?”

 

또 피식 웃는다. 그 때 그러니까 내가 괌에 간 첫 해에 아버지에게 애인이 생겼더랬다. 내가 진심으로 엄마라고 불렀던.

 

“응? 친구하고 마시라고 사다줬지? 그래, 내 아들이 지금은 친구잖니. 친구끼리 건배 한번 할까?”

 

아버지는 이렇게 4년 넘게 잊어가고 있었다. 그 인연을 덜어내려고 애써 피했다. 내게 늘 미안하다고 했다. 엄마 없이 자라게 했다는 것이 아버지의 아들에 대한 미안함이다. 나는 이제 부모 양쪽 없이도 아버지만으로 족한데, 아버지는 언제나 이게 걸렸던 게다. ‘아무리 너랑 가까워도 아버지는 아버지다.’ 이런 아버지에게서 오히려 엄마 같은 면을 더 많이 기억한다. 잔정 많은 것, 이래서 잘 우는 것, 동화책을 읽어주며, 동시를 서로 외우며, 공기놀이, 퍼즐게임... 고무줄놀이까지. 아버지와 함께 했던 어린 시간은 모두 다른 친구 엄마의 그것들이었다.

 

어릴 적을 떠올리며 눈을 감을라치면 바로 떠오르는 아버지는 앞치마 입은 모습이다. 앞치마를 입은 채로 우체부 아저씨에게서 등기우편물을 받고, 앞치마를 걸친 그대로 우유배달 아줌마에게서 우유를 받는 게 꺼릴 것 없어 천연덕스러웠던 아버지. 초라떼지나 않을까 내가 더 안절부절 몰라 했다. 아마도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쯤의 무더웠던 여름 날, 아버지의 생일은 꼭 더운 날에만 매년 찾아왔고 그 때 생일선물로 앞치마를 사드렸던 적도 있다. 받으면서 평생 입어야지 했던 아버지이다. 실밥도 나가고 가장자리를 헝겊으로 덧대 여러 번 때운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추접스러워진 그걸 이 카페에서 아직도 입고 손님을 맞는다. 남우세스럽기도 해서 바꿀 때도 됐다 하고, 새 걸 사 주겠다고 하면 또 피식 웃으며,

 

“내 평생은 아직 오래 남았는걸.”

 

 

술잔을 들어 대답을 피한다. 우린 술잔을 부딪치며 부라보를 했다. 볶음밥 속의 소시지를 안주로 골라 입 안에 넣어 오물오물 씹었다. 아버지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살면서 한 번은 꼭 하고 싶은 일을 해보겠다며 이 가게를 시작할 때 1년만 딱, 꼭 1년만 하자 했지만 계산해보니 적어도 천여만 원은 없어지겠더라구. 이 집 고치는 데만도 여간만 돈이 솔솔 들어야지. 아무리 중고라지만 소파, 탁자도 들여놔야지 냉장고, 환풍기 ... 뭐 이리도 살게 많은지. 수도 끌어들이느라 아주 큰 돈을 몽땅 들일 수밖에 없었고. 에어컨? 그건 엄두도 낼 수 없었고, 줄이고 줄여도 그 돈은 들겠더라구. 천여만 원이면 내 아들, 1년 어치 공부비용인데. 겁나더라. 포기할까도 여러 번 했지. 마침 사업하는 친구 중에 2천만 원 투자하면 매달 5십만 원을 통장에 또박또박 넣어주겠다는 제안이 그 때쯤은 내겐 유혹으로 다가왔고. 그리고 워낙 아빠가 주변머리가 없잖냐. 뭘 내 주제에 이런 걸 하나? 하고는 거의 체념단계까지 접어들 무렵 아직 헌 집 그대로였던 여기서 어깨 축 늘어트리고 마당을 힘없이 내다보고 있었지. 무지 착잡했었단다. 1년만, 내가 하고 싶었던 일 한번만 하자 하면서도 또 못하고 마는구나 싶더라. 딱 1년만이란 게 말이 쉽지 그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더라. 팔십 년을 살면서 그까짓 1년을 자기에게 할애해주지 못하다니... 이런 심정으로 마당을 무심히 내다보고 있는데 아이들, 대여섯 명이나 됐나? 아이들이 마당으로 불쑥 뛰어 들어와 자기들끼리 뭔 소린가 지르면서 놀이하며 놀고 있는 거야. 아빠는 걔네들이 내는 소리가 그 땐 휘파람새가 지저귀는 것 같이 조잘조잘 아름답게 들려왔고, 걔네들이 어울려 뛰노는 모습은 마치 홍학들의 율동, 춤 같이 너울너울 사랑스럽게 보였단다. 무척 아리따웠어. 그러면서 아빠 머리 속이 별안간 몽롱해지는 거야. 아득하다고 할까? 아늑하기도 했고. 아빠는 잠이 들것만 같았어. 그 평화로움, 그 평온함에 도취해버린 거지. 문득, 이젠 못 만나고 사는 초등학교 어릴 적 친구들과 놀았던 골목과 학교 운동장이 눈앞에 나타났어.”
“그 학교? 아빠가 다녔다는 광희초등학교지? 저번에 같이 보고 왔잖아. 이 앞마당이 그 학교 운동장 같이 보였는가보구나?”

 

아버지는 한 군데 초등학교를 6년 동안 다녔지만 나는 아버지의 이직으로 두 군데를 나눠 다녀야 했다. 불현듯 나도 내 모교들의 운동장이 보고 싶어졌다. 바뀌었을까? 바뀌었다면 얼마나? 내가 기억할 수 있는 것들은 남겨뒀을까? 아버지 모교로 동행했을 때 아버지는 건물들이며 학교 주변이 많이 변했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기억은 그대로라며, 여기선 찜뽕놀이하고 놀았고, 다방구 하고 놀았고, 저기가 칠면조가 있던 작은 동물원이었고, 저 운동장에서 방과 후 거의 매일 축구를 했었다며 바뀌지 않은, 바뀔 수 없는 추억을 더듬어 내게 들려줬었다. 단단한 건물은 바뀌어도 말랑한 추억은 그대로라면서.

 

“유년기, 어릴 적은 변하지 않고 고스란히 남는가 보다. 그것도 다 아름다움으로. 보이는 것은 사라졌어도 소리는 남아서 지금도 들리는 것 같아. 평생 살면서 가장 아름다운 시절이 그 유년기, 어렸을 적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사람은 그 유년기를 두 번 맞이한단다. 두 번!”

 

“어떻게 어릴 적이 두 번일 수가 있지?”

 

아버지는 한 잔을 들이킨 뒤 안주를 집어야 할 그 손가락으로 내 이마에 군밤을 주면서,

 

“요 놈 때문에, 그래 이 귀여운 내 이 놈 때문에 한 번 더 어릴 적을 갖게 되었지.”
“그건 내 기억이고 내 추억이지, 어째서 아빠 유년기야?”

 

아버지는 또 피식 웃었다. 이 때 손님이 들어왔다.

 

“에이구, 이런. 아빠가 아들을 앞에 두고 게으름을 피워댔구나. 어서 치우자. 먹다 남은 건 주방 들어가서 요령껏 먹기로 하고.”

 

“지금 다 못한 얘기는 후에 마저 더 듣기로 하고?”

 

나는 이렇게 응수하며 손님에게로 달려갔다. ‘어섭쇼’ 속으로지만.

 

하루 내내 손님 시중 사이사이 나의 어릴 적이 자꾸만 떠올려졌다. 학교가 가고 싶었다. 초등학교도 중학교도, 그리고 괌에 있는 고등학교도. 모두들 선명하게 떠올랐다. 정말 그 때 지르고 놀던 소리도 들리는 것 같았다.

 

내 과거로 정신없이 부산하던 그 날은 유난히 손님이 더 많았다. 현재는 호락호락 과거를 내주지 않았다.

 

“오늘은 우리 같은 이불 덮고 잘까? 그래도 되겠니?”
“무울론 조오치.”

 

우리 부자는 목욕탕도 함께 다닌다. 다른 친구들은 이미 중학교 때부터 아버지와의 목욕탕 동행을 거부했다고 들었다. 이유는 쑥스러워서. 다 컸으니까. ‘뭐가?’ 하며 나도 아버지 비슷하게 피죽 웃었다.

 

“아빠한테로 올래? 내가 갈까?”

 

함께 누웠다. 아버지와의 동침. 더불어 같은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로 이런 거란다. 아빠 나이가 쉰 하고도 넷이지? 다섯인가? 내 아들 나이는 스물 하고도 둘이고. 이렇게 아들과 드러누우니 아빠 나이가 스물 둘이 되는 거구.”

 

 

손을 잡더니 다리 하나를 내 배 위에 덥석 올려놓는다. 어렸을 적에도 늘 이렇게 장난을 쳐왔었는데. 나는 머리를 들어 아버지의 팔을 내 머리 아래 넣었다. 이내 자세를 바꿔 내 팔을 아버지 머리 밑에 넣었다. 팔베개가 오락가락했다. 팔을 바꾸면서 우리 몸은 엎치락뒤치락했다. 바뀐 것은 아버지의 흰머리였다. 그게 보였다.

 

“그럼 난 쉰 둘이 되고? 이거 불공평하다. 난 더 늙기 싫단 말야. 지금도 나이가 너무 들어버린 것 같은데잉.”

 

아버지는 손을 들어 방 안 공기에 무언가를 썼다. 그리고 입으로 후우 하고 불었다. 쓰고 지우듯이. 피카소가 허공에 황소를 그렸듯이. 이내 사라져버릴 것들을.

 

“뭘 썼어? 그렸나? 하기야 아빠 글씨는 그림인지 글자인지 분간하기 힘드니까.”
“뭐라 쓴 거 같니?”

 

곰곰 생각해봐도 알 수 없는, 이미 허공에서 사라지고만 글씨들. 다시 써달라고 했다. 이젠 알 것 같았다. ‘버스’ 라는 두 글자와 그림 버스였다.

 

“아빠는 지금 내 어릴 적 꿈을 생각하고 있구나? 버스운전아저씨가 되는 게 내 꿈이었었지? 그것도 연두버스운전기사.”

 

멀리 출장을 가서도 으레 아버지는 전화로 그곳 지방의 버스번호를 내게 불러줬었고 그 버스가 어디서 어디까지 가는지를 일러주었다. 그러면 나는 그것을 작은 종이에 받아 적어 두 발로 밀면 달릴 수 있는 내 플라스틱 자가용 앞에 붙여 놓았더랬다. 그 뒤 내 플라스틱 자가용은 시골버스가 되었다. 지방출장만이 아니다. 일본이나 다른 나라로 출장을 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내 전용 자가용은 서울버스에서 시골버스로, 그리고 국제버스가 되기도 했고, 시내버스에서 좌석버스 또는 시외버스에서 고속버스가 되기도 했다. 비행기도 되어줬다. 아버지는 내 나이에 맞춰 놀아줬고 내 꿈에 맞춰 현실을 꿈으로 채워주기도 했던 것이다. 아버지의 유년기는 나로 인해 한 번 더 가질 수 있었다는 것을 이미 허공에서 사라지고 없는 ‘버스’라는 두 글자로 알게 했다. 사라지고 없어도, 형상은 지워져도 남는 잔상들, 기억들, 추억들. 그 잊을 수 없는 시간들.

 

“꼬마들은 마당에서 얼마나 놀다가 갔어?”

 

우리가 그랬듯이, 아마 아버지의 유년도 그랬듯이 무언가의 놀이를 만들고 또 만들어 해가 저물 무렵까지, 엄마가 저녁밥 먹으라고 부를 때까지 놀다 갔을 것이다. 지금 떠올리면 손에 쥔 게 하나 없으니 놀거리가 거의 없을 것 같건만, 그 땐 한 가지로도 하루 진종일 놀 수 있었고, 누군가의 제안으로 놀이는 그 작은 굴레 안에서도 여러 가지로 다양하게 창조되었다. 유년기, 어릴 적은 나에게도 아버지에게도 실재처럼, 현실처럼 남아 있었다.

 

“내 어렸을 적보다는 아들과 논 시간이 최근이어서 그런지 내 아들과 어울렸던 어릴 적이 더 많이 많이 기억나더라.”

 

아버지의 유년기는 이래서 둘이고 나는 아직 내 것, 하나밖에 없다.

 

마당에서 뛰놀다가도 또 마당 땅바닥에 바싹 엎드려 무언가를 관찰하는 동네 꼬마녀석들을 창가에서 바라보고 있던 아버지는 기타를 꺼내 아이들이 노는 마당으로 나왔다. 그리고 노래를 불렀고 아이들이 그 앞으로 모였고 아이들도 노래를 따라 불렀다. 아버지처럼 가사를 모르거나 외우지 못하는 꼬마들을 위해 한 소절씩 나눠 따라 부르게도 했다.

동네 꼬마 녀석들
추운 줄도 모르고
......
동네 꼬마 녀석들
추운 줄도 모르고」

 

한 녀석이,
“녀석이 뭐예요? 동네 꼬마 신사들이라고 불러요, 우리.”
이랬고 그래서,

「동네 꼬마 신사들
추운 줄도 모르고」

 

바꿔 깔깔깔 질러 대며 정말 추운 줄도 몰랐고, 아버지의 기타줄은 더 신이 나서 퉁탕퉁탕 어쩔 줄을 몰랐을 것이다.

꼬마야 꽃신 신고 강가에나 나가보렴
오늘 밤엔 민들레 달빛 춤출 텐데」

 

“나 이 노래 알아요.”
해서 이 놈은 혼자서 끝까지 다 불러재꼈다.

「너는 들리니 바람에 묻어오는
고향빛 노래소리 그건 아마도
불빛처럼 예쁜 마음일 거야.」

 

처음 듣는다는 꼬마들도 쉽게 쫓아 불렀다.

「그건 아마도 불빛처럼 예쁜 마음일 거야」

 

“아저씨도 하나 불러주세요. 박수!”
그래서, 아버지도 이들 어린애처럼,

「굽이 굽이 고갯길을 다 지나서
돌다리를 쉬지 않고 다 지나서
행여나 잠들었을 돌이 생각에
눈앞에 고무신을 다시 보았지」

 

분명히 아버지는 아이들 앞에서라 해도 또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이 노래를 부르면서 안 운 적이 없다. 더욱이 나랑 떨어진 지 불과 몇 달 안 된 뒤였으니까 눈물이 더 했을 게다.<얼룩고무신>, 이 노래는 아버지가 나와 떨어져 있을 때 가장 많이 부르던 노래였다. 국제전화로 이 노래를 불러주면서도 아버지는 목소리를 적셨다. 노래 가사 중에 ‘돌이’는 바로 나였다.

어 허 우리 돌이 우리 돌이 얼룩고무신
어허어허 우리 돌이 우리 돌이 얼룩고무신」

 

<에델바이스>도 불러줬고, <오빠생각>은 꼬마들과 같이 불렀다. 뉘엿뉘엿 해가 저물고 있었고 꼬마들은 길 따라 마을로 내려갔다.

 

“아저씨, 우리 내일 또 와도 되죠?”

 

대답도 듣기 전에 다른 하나가,

 

“올래요!”

 

하며 아이들은 재잘거리며 갔다. 그 다음날은 어제보다 더 빨리 마당에 모였다. 아이들의 숫자도 더 늘었다. 어제와 같이 같은 레퍼토리로 불렀을 것이고(아버지가 알고 있는 노래의 한계 상) 그래도 아이들은 어제처럼 즐거웠다. 그 날 또 해가 기울 무렵 꼬마들이 내려가고 있는 길을 향해, 꼬마들의 등에 대고 아버지는 기타줄을 뜯었다. 모아 놓으면 항상 튀는 놈이 하나 있게 마련, 아이들 중 한 놈이 돌아서더니,

 

“내일, 그 노래 가르쳐줘요.”

 

이렇게 일방적으로 예약을 하고 아이들은 달아났다. 이미 아이들의 등은 사라졌지만 아버지는 내일 가르쳐달라던 <찔레꽃>을 마저 불렀다. 여운처럼 마당에, 연기처럼 아이들 등 위로 하얀 찔레꽃이 내려앉고 있었다.

「엄마길 가는 데에 하얀 찔레꽃
찔레꽃 하얀 잎은 맛도 좋지
배고픈 날 가만히 따 먹었다오
엄마 엄마 부르며 따 먹었다오.

가을밤 외로운 밤 벌레 우는 밤
초가집 뒷산 길 어두워질 때
엄마 품이 그리워 눈물 나오면
마루 끝에 나와 앉아 별만 헵니다.」

 

꼬마들은 방학이 다가도록 마당에 올라왔고 아버지의 뜻밖의 마당공연은 계속 되었다.

 

“그래, 하자. 1년인데 뭘. 이런 기쁨은 돈 천만 원과 충분히 바꿀 수 있는 거지, 뭐. 그러자, 1년인데 뭘. 이렇게 해서 이 카페를 열기로 완전 결심을 굳혔단다. 꼬마들의 힘이랄까.”

 

역시 아버지답다고 말하고 있는 나를 아버지가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그 앳된 얼굴이 이젠 어른 다 됐네. 수염도 제법 넓게 피고. 내 아들도 좋은 시절 다 가고 있네. 에이구 내 아들, 아빠랑 같이 나이 먹어가는 불쌍한 내 아들.”

 

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직 나의 유년기는 적어도 한번은 더 남았는 걸? 결혼해서 딸도 낳고 아들도 낳으면 내겐 두 번 더 유년기가 생기는 걸 거구.”

 

아버지는 고개를 세로 끄덕였다.

 

“그렇구나. 내 아들은 한번 더가 아니라 두 번 더 어릴 적을 가질 수 있으면 좋겠구나. 그러고 보니 이 아빠도 아들 덕에 덩달아 또 유년기를 맞게 되겠는데? 내 손녀 손자 안고 말이다. 세 번 네 번의 유년기라, 아무리 많아도 좋은 세월이지, 유년이란.”

 

나는 이불 속에서 아버지 손을 꼬옥 잡아 쥐었다. ‘그러니까 오래 오래 사셔야 해요, 아빠.’ 마음으로만 말했다.  (다음 주 이 시간에)
 

 

 

 

오동명은? =서울 출생.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뒤 사진에 천착, 20년 가까이 광고회사인 제일기획을 거쳐 국민일보·중앙일보에서 사진기자 생활을 했다. 1998년 한국기자상과 99년 민주시민언론상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사진으로 세상읽기』,『당신 기자 맞아?』, 『신문소 습격사건』, 『자전거에 텐트 싣고 규슈 한 바퀴』,『부모로 산다는 것』,『아빠는 언제나 네 편이야』,『울지 마라, 이것도 내 인생이다』와 소설 『바늘구멍 사진기』, 『설마 침팬지보다 못 찍을까』 등을 냈다. 3년여 전 제주에 정착, 현재 제주의 한 시골마을에서 자연과 인간의 만남을 주제로 카메라와 펜, 또는 붓을 들고 있다. 더불어 한라산학교에서 ‘옛날감성 흑백사진’을, 제주대 언론홍보학과에서 신문학 원론을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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