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중학생이던 시절이다. 마당극 '좀녀풀이'. 제주의 마당극을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는 그 공연을 봤다. 주연으로 등장한 건 그의 큰형 김수범(50)씨. 미술학도인 형은 극단 '수눌음'의 멤버로 신명나는 탈춤을 선보였다. 마당극이란 걸 처음 봤다. 너무 웃기고 재미있었다. 하지만 그 시절 그는 먼 훗날 자신이 그 공간에 설 것이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다.
10여년이 흐른 뒤인 1994년. 그는 큰 형이 탈춤을 췄던 그 마당극에서 큰 형의 역할을 맡았다. 그게 시작이었다. 그 뒤로 그는 마당극, 음악, 연극 공간을 누비며 열정적인 무대공연을 펼치고 있다.
그가 악기를 두드리면 신명난다. 연기를 할 때에는 장면 속으로 빨려든다. 춤을 출 때면 신들린 듯하다. 딱히 직업이 뭐라고 부를 수 없지만 자신을 공연 예술계의 ‘멀티플레이어’라고 불러달라는 김수보(45)씨.
고향을 떠나 서울에 터잡고 산지 어언 26년. 그는 평범한 제주출신 대학생이었다. 고3 진학상담을 할 때에는 평범한 회사원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 성균관대 경영학과에 진학했다. 그것도 어엿하게 장학금을 받고 입학한 장학생이었다. 다만 대학 문턱에 들어서자 낭만적인 ‘동아리’ 활동도 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큰 형이 탈춤을 춘 기억이 떠올라 ‘탈춤’반을 노크했다. 하지만 시국이 시국인지라 탈춤은 1주일에 1번밖에 배울 수 없었다. 나머지는 반독재 민주화를 외치고자 정신교육(?) 차원의 ‘사회과학’ 토론과 세미나였다.
대학에 들어가면서 생각했던 낭만과는 너무 달라 금방 그만뒀다. 하지만 그에게는 그게 운명이었을까? 경영학은 아무래도 체질이 아니었다. F학점이 밥먹듯 따라다녔다. 그는 2학년이 되면서 다시 ‘탈춤’반에 발을 들여놓았다. 늦게 배운 놈이 무섭다고. 무섭게 탈춤과 마당극에 빠져들었다. 공연에 대한 고민을 하다 보니 연극과 장단에 대해서도 자연스럽게 접하게 됐다. 하지만 그에게 그것은 즐거움 그 자체였다.
“지금 생각하면 당시 탈춤서클에서 밥벌이를 염두에 뒀다면 지금의 연예지망생들처럼 치열하게 고민하겠죠. 솔직히 토로하자만 아주 치열하게 ‘연기를 얼마나 더 잘해야 할 것인가’, ‘작품을 얼마나 더 잘 짜야할 것인가’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젊은 시절에 그냥 낭만적으로 갔던 것 같아요. 동기들에게 지적질도 당했죠. 데모를 열심히 한 것도 아니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내 업이 이것으로 갈 줄 알았으면 좀 더 연마해둘 걸 하는 생각도 해요”
군대생활을 마치고 복학한 그는 열심히 공부해 고3시절 꿈(?)이었던 '평범한 회사원'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탈춤은 그에게 떼려야 뗄 수 없는 운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복학생인 그에게 붕괴위기의 탈춤반 후배는 SOS를 쳤다. 뿌리칠 수 없었다. 다시 탈춤반으로 가서 후배들을 돕고 지도했다. 물론 학업과 취업준비도 해야 했다. 졸업하고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 당당히 취업지원서를 내밀었지만 떨어졌다.
“시간을 쪼개서 복학생활도 했죠. 졸업하면서 실제로 입사지원서도 냈어요. 1차에도 합격했어요. 그런데 면접을 보지 못한 거예요. 이건 솔직히 말하기 창피한데 전날 술을 너무 많이 마셔 늦게 일어나버렸지 뭐예요. 고3 때의 꿈을 성취할 수 있는 기회였는데 보기 좋게 날려버린 거죠(웃음)”
그래도 먹고살아야 하기에 복학 때부터 해오던 문화센터 탈춤반 강사생활을 이어갔다. 그러던 중 그의 운명을 좌우할 만한 사건이 일어났다. 큰 형이 대학생 시절 가입해 활동하던 제주지역 놀이패 ‘한라산’에서 공연제안이 왔다. 그가 처음 본 마당극 ‘좀녀풀이’에 참여해달라는 것이었다. 그것도 큰 형이 10여 년 전 맡았던 그 역할이었다.
“당시 서울의 놀이패 ‘한두레’와 함께 ‘봉산탈춤’을 인간문화재 김선봉(작고) 선생님한테 전수를 받아서 발표회를 진행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대학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한라산’으로부터 10여 년 전 제가 처음 봤던 마당극 ‘좀녀풀이’를 리메이크 한다는 연락을 받았죠. 배역도 큰 형이 했던 역할이었어요. 어쩔 줄 몰라 하는데 다행히 봉산탈춤 발표회가 취소됐어요. 그래서 ‘좀녀풀이’에 참가하기로 했죠. 문제가 풀리는 듯싶었는데 또 문제가 생긴 거죠. 다시 ‘한두레’가 ‘동학 100주년 프로젝트’로 춤꾼들을 모아서 ‘칼노래 칼춤’ 공연을 준비한다는 것이었어요. 둘 다 놓치기 싫었어요. 다행히 두 연출자와 대표가 모두 친한 분들이어서 저를 두고 협상을 했죠. 결국 저는 ‘좀녀풀이’를 하게 됐어요. 학교를 떠나서 공연활동 첫 데뷔를 제주에서 하게 된 것이죠. ‘좀녀풀이’를 끝내고 나니 서울의 놀이패 ‘춤패’가 고은(시인) 선생의 ‘백두산’을 춤극으로 하는데 춤꾼들을 모으고 있다고 해서 같이 하게 됐어요. 2시간 30분짜리 장편이었어요. 당시 5.18 기념 마당극 ‘일어서는 사람들’을 준비하던 연출가 선생님이 공연을 보러왔다가 저를 낙점해서 ‘백두산’이 끝나고 바로 ‘일어서는 사람들’에 뛰어들었죠. 그렇게 연속해서 시간가는 줄 모르게 1년 동안 작품 8개를 뚝딱 해버렸죠. 그 시간 동안 취업생각은 머릿속에서 까앟게 사라졌죠.”
그가 움직이는 반경은 탈춤만이 아니다. ‘백두산’에서는 ‘춤’을, ‘일어서는 사람들’에서는 ‘병신춤과 연기’를, 마당극 ‘밥’에서는 ‘악사’를 했다. ‘무용반주’를 하는 등 그가 무대에 오를 때마다 '전문영역'은 수시로 변신한다. 그러다보니 멀티플레이어가 됐다. 그의 분야는 이게 끝이 아니었다. 그는 영화에도 출연했다. 임권택 감독의 ‘천년학(2007)’에 창극단원으로 출연해 한번에 OK사인을 받기도 했다. 최근에도 다른 영화작품 출연제의를 받아 곧 촬영에 들어간다.
그는 외국에서도 많은 공연을 펼쳐 우리 문화를 널리 알리기도 했다. 무용단체인 ‘창무회’에서는 사물놀이 반주로 참여했다. 창무회는 문화사절단으로 외국공연을 많이 나간다. 그의 소리를 들은 외국인들은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97년 APEC정상회담 기념 문화사절단으로 캐나다 4개 도시에 공연을 갔을 당시에 현지 언론들은 ‘에너지가 느껴지는 리듬이 인상적이었다’는 찬사를 보냈다. 물론 기립박수는 가는 곳마다 필수였다. 그 외에도 98년에는 북경 아시아예술제에 참가했고 2000년 시드니올림픽 문화축전에서는 오페라하우스에서 공연을 했다. 같은 해 프랑스 댄스비엔날레 초청공연, 2003년 미국 L.A 위스콘신 초청공연에도 나섰다. 그는 2004년 가극 ‘금강’으로 6.15남북공동선언기념 방북초청 평양공연을 준비했지만 잘 풀리지 않아 이듬해인 2005년 6월 평양 봉화예술 극장에서 공연했다. 당시 같이 출연했던 극단계의 큰 어른이자 이북이 고향인 장민호 선생은 얼마 전 고인이 돼 그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다.
그의 공연은 짧으면 1시간, 길면 2시간 30분이다. 정기공연을 하게 되면 체력적으로 힘들다. 지방공연에서는 하루 2차례 공연해야 하기 때문에 체력을 충전하는 것이 우선이다. 하지만 체력적 한계는 그의 정신력을 무너뜨리지 못한다.
“장기간 공연을 하게 되면 체력이 무엇보다도 중요하죠. 하지만 그런 일이 익숙해지면 큰 문제는 되지 않죠. 그래도 지방공연을 하게 되면 체력보충이 중요해서 틈나는 데로 쉬었다가 다시 공연을 하죠”
하지만 그도 어쩔 수 없이 배고픈 예술가다. 먹고살아야 하기 때문에 돈이 필요하다.
“사실 부모님의 반대가 엄청났죠. 부모님은 큰 형을 나무랐어요. ‘동생을 버려놨다’고요. 그도 그럴 것이 삼형제 중 큰 형과 제가 다 배고픈 예술계통으로 가버렸거든요(탈춤을 추던 그의 큰 형은 현재 미술교사다). 부모님은 한 1년 동안 한 뒤 그만 둘 줄 알았는데 계속해서 문화예술판에서 살자 지금은 포기한 상태에요. 그래도 위안이 된 것은 작은형이에요. 작은 형은 공부를 워낙에 잘해 서울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경희대 한의대까지 졸업해 지금은 한의사를 하고 있어서 부모님은 위안을 삼죠.(그의 작은형은 최근 제주에서 한의원을 개원했다) 큰 형은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했죠. 작은 형도 응원을 해줘요. 그 동안 형들이 다 육지에 있을 때는 제가 내려오면 부모님 사랑을 독차지 했지만 지금은 형들이 다 내려와 살고 있어서 찬밥신세를 겪을 때가 많아요(웃음). 배고픈 직업이기에 작품을 고를 때에는 재정적인 면도 볼 수밖에 없어요. 대가가 떨어져도 작품성이 좋으면 참여하지만 대가가 좋지만 작품성이 나쁘면 참여하지 않아요. 맞지 않은 작품을 하게 되면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죠. 그래도 대가가 좋고 작품도 그렇게 떨어지지 않는다면 돈을 벌기 위해 참여해야 되지 않을까요?(웃음)”
그는 프리랜서로 활동하고 있지만 5년 전 창단한 창작국악실내악단 ‘앙상블 뒷돌’에 타악 연주자로 참가하고 있다. 처음 시도된 국악뮤지컬 ‘천상시계(장영실 이야기)’가 뒷돌 창단의 모태가 됐다. 이후 ‘뒷돌’은 2008년 첫 번째 콘서트로 ‘추억 그리고 시작’을 했고, 4대강 개발을 풍자한 탈놀이극 ‘물은 산을 넘지’도 무대에 올렸다. 그는 국립극단의 계약직 단원이기도 하다. ‘뒷돌’은 현재 70~80년대 요정정치의 산실로 대표되던 삼청각(현재는 전통문화공연장)에서 매주 금요일마다 상설공연을 하고 있다.
“아직 할 일이 많아요. 의욕이 넘쳐나고 있어요. 현재진행형이죠. 모자란 부분을 채우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배우는 과정이기 때문에 계속적으로 연마하고 익히고 있죠. 전에 것은 비우고 새로운 것으로 채워야죠. 나중에 ‘김수보 스타일’이라는 예술장르를 만들고 싶어요." 제주출신 광대 김수보의 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