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룩물, 엉물 조천은 삼양, 신촌과 더불어 마을 곳곳에 용천수(산물)가 풍부하다. 삼양에 선사인의 집단주거지 유적지가 발견되듯이 오래전부터 용천수가 풍부한 곳에는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촌락을 이루어 살았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물이 귀했던 우리 제주에서는 용천수 즉 산물이 곧 삶의 물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 자식을 점지해달라는 마음이 담긴 수룩물(수덕물) ▲ 엉물 남탕 ㅡ엉(엉덕)은 제주어로 큰바위를 의미 엉물은 지금도 맑고 수량이 풍부해 한여름에 꼭 몸을 담그고픈 마음이 가득하다. 동네마다의 용천수(산물)를 볼 때마다 알 수 있는 공통점은 거의 남녀용이 구분되어져 있고(당연하지만), 보다 수량이 풍부한 큰물이 여자용이고 또한 식수원으로도 사용했다는 사실이다. ■조천의 김해김씨집안 ▲ 김승욱 조천포구는 예로부터 화북포구와 더불어 제주와 육지를 잇는 관문이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해상무역을 통하여 상당한 부를 축적한 집안도 나타났다고 한다. 또한 이 포구를 오가는 관리들이나 유배객을 통해서 육지의 성
제주역사나들이 4차 탐방코스입니다. (신촌ㅡ조천)을 걸으면서 제주의 살아있는 역사와 아름다운 풍광을 느낄 수 있는 코스입니다. 신촌대섬(죽도)ㅡ조천마을입구ㅡ절간물ㅡ수룩물ㅡ엉물ㅡ김연배생가ㅡ황씨종손가옥ㅡ전통초가및골목길ㅡ드라마'맨도롱또똣'촬영지ㅡ도릿물ㅡ양진사ㅡ이기풍목사집(?)터ㅡ조천비석거리ㅡ조천야학당터ㅡ황진식생가터ㅡ조천관ㅡ금대ㅡ연북정(조천진성)ㅡ돈지물ㅡ조천연대ㅡ왜포연대ㅡ관곶ㅡ해녀불턱ㅡ신흥리방사탑ㅡ제주항일기념관ㅡ조천극장ㅡ조천지서ㅡ조천중학원터로 이어지는 코스입니다. ▲ 탐라순력도의 조천조점 ■ 신촌 대섬(죽도竹島) 조천과 신촌리의 경계에 있는 대섬은 ‘점성이 낮아 넓은 지역으로 퍼지면서 흘러내린 용암류(파호이호이용암류)가 표면만 살짝 굳어져 평평하게(투뮬러스) 만들어진 지형이 특징으로 제주도 내에서 지질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라 써놓았다. 섬 때문에 막힌 바다가 호수처럼 보이고, 그 속에 파래 같은 해초가 번성해 지저분해 보인다.(제주일보 김창집) ▲ 대섬으로 들어가는 입구. 몇년 전만해도 섬으로 이어지는
■원당봉 ▲ 원당봉 입구 원당봉은 봉우리가 일곱개가 있어 삼첩칠봉으로 불리기도 했다. 원당봉 내에는 원당사(태고종), 불탑사(조계종), 문강사(천태종) 세 사찰이 자리하고 있다. ▲ 원당봉 전망대에서 바라본 삼양일대 제주에는 과거 25개의 봉수대와 38개의 연대가 있었다. 이 곳 원당봉에도 봉수대가 있었다고 하는데 제주의 360여개 오름 중 해안가를 따라서 25개의 봉수대와 그 사이를 잇는 하위개념의 연대가 38개소가 있었던 것이다. 대부분의 오름 중에서 '봉'이라고 이름이 붙은 오름은 대부분 봉수대가 있었던 오름이라 보면 된다. ▲ 원당봉 둘레길에서 본 신촌 일대 근처 주민들이 운동 삼아 산책을 하러 많이 찾는 곳이다. 원당봉 둘레길은 약 1Km정도 되는데 관심있으신 분들은 한번쯤 둘러보는것도 괜찮을 듯하다. ■문강사 ▲ 문강사 전경 문강사는 대한 불교 천태종 제주교구 사찰이다. 1973년 김용운이라는 분이 1500여평의 사찰부지와 7평의 영문각을 천태종 제주지역 신도회관으로 시주
■ 강운봉 가옥 ▲ 강운봉가옥 올레에서 이문간을 거쳐 안커리 밖커리로 구성되어지는 제주의 전통 초가와는 달리 올레에서 바로 마당으로 이어져 안커리와 밖거리가 마주보고 있는 형태의 초가이다. 19세기말에 지어졌고 다소 변형된 제주초가의 모습을 보여준다. 네칸의 가옥구성은 당시 지역의 부유한 집안임을 알 수 있고 통시 뒤의 오래된 팽나무와 돌로된 자그마한 계단은 이 가옥의 고즈넉한 운치를 더해 주며 제주초가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 삼양2동 해변 ■ 삼양수원지 삼양은 예로부터 삼양해수욕장을 중심으로 용천수가 풍부하게 나오던 동네였다. ▲ 김승욱 이 풍부한 용천수로 인해 삼양동 선사유적지에서 보듯이 오래 전부터 집단 주거지가 형성되었을 것이다. 제주시에서는 도시의 확장에 따라 부족한 식수원을 확보하기 위해 삼양해수욕장에 1960년대부터 제1, 제2수원지를 조성하였다. 그러나 상부지역의 급속한 확장(삼화지구 아파트단지 등)
삼양동 선사유적지에서 출발해 강운봉가옥-삼양해수욕장-가름포구-문강사-불탑사-닥모루-신촌포구-신촌큰물-신촌향사-조규창가옥-신촌초등학교 앞으로 이어지는 코스다. ■ 삼양동 선사유적지 ▲ 삼양동 선사유적지 입구 제주시 삼양동에 위치한 선사유적지다. '청동기~초기 철기시대의 해안마을. 평탄한 대지위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았던 마을유적으로, 한반도의 대표적인 청동기시대 후기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유적인 동시에 제주지역 송국리형 주거문화 수용단계(기원전5~1세기)의 취락 흐름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는 유적임이 인정돼 지난 1999년 11월 15일 사적 제416호로 지정되었다'라고 소개돼 있다. ▲ 선사유적지 복원된 움집 ㅡ 출처 네이버블로그 유적지 입구 안내판에는 '기원전.후 1세기경을 중심으로 한 시기의 집자리 230여기가 확인된 대단위 마을 유적이다'라고 안내하고 있다. ▲ 집터ㅡ 출처 네이버 블로그 일반적으로 고고학에서는 유물, 유구, 유적이라는 용어로 과거의 흔적들을 구분한다. 유
■ 금돈지 ▲ 금돈지 전경 ㅡ화북진이 둘러싸고 있는 마을 안쪽포구를 '금돈지'라고 불렀다. 화북촌의 포구는 그 안에 두개의 포구가 있었는데 서쪽은 금돈지 또는 새성창이고, 동쪽의 것은 엉물 머릿개 또는 묵은 성창이다. 제주어로 포구는 '개', '성창', '돈지' 등으로 불렀다. 이중 성창은 선창의 표음인듯 하다. '돈지'는 군대가 주둔한 곳의 의미인 '둔지'에서 나왔다는 설이 있고, 제주어로 바다에 면한 땅의 의미인 '돈지' 그대로 쓴거라는 설이 있다. 나는 후자가 맞다고 보는데, 위미쪽에 돈지할망당이 있고 제주항에 돈지머리포구라는 지명이 있는 것을 그 근거로 본다. ■김석윤가옥 ▲ 청풍대에서 바라 본 김석윤가옥 전경. 1913년도에 지어진 것으로 알려진 김석윤가옥은 안커리(안채)와 이문간(대문이 달린 바깥채)은 기와 지붕으로, 밖커리(바깥채)와 목커리(별채)는 초가 지붕의 독특한 양식으로 지어진 가옥이다. 필자가 어릴때 살던 집도 안채는 기와집, 바깥채는 초가 형태였다. 197
■애기 업은 돌 ▲ 애기업은 돌 바위형상이 애기를 업은것처럼 보인다. 흔히 사자바위등 바위를 동물 형상에 빗대는 경우가 많은데 애기업은돌이라 이름지은 것은 그만큼 우리 제주인의 정서가 녹아든게 아닌가 생각해 본다. 이 바위에서 바다쪽으로 30미터정도에 솟아 있는 바위가 그 유명한 자살바위이다. (예전엔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라는 문구가 써 있었다고 한다) 애기업은돌은 나를 업고 키운 어머니 또는 업고 키우는 자식을 생각해서라도 극단적 선택은 안된다고 암시하고 서 있는건 아닐까. 무언의 메신저로서 삶을 포기하려 이곳까지 온 많은 이들의 생명을 구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 곤을동으로 가는 길 입구 사진에 보이는 가로등 좌측으로 난 샛길로 가야 곤을동으로 이어진다. 무턱대고 올레길 리본만 따라가면 오현고 뒷길로 이어진다. 이정표 하나라도 제대로 세워주는 행정을 기대해본다. ▲ 곤을동으로 이어지는 내리막 샛길. 비올땐 조심 ▲ 곤을동 초입에 조성된 돌포장길 ■곤을동
▲ 탐방 코스 국립제주박물관에서 주차하고 출발하면 된다. 코스는 국립제주박물관ㅡ모충사ㅡ칠머리당ㅡ애기업은돌ㅡ곤을동ㅡ화북비석거리ㅡ김석윤가옥ㅡ청풍대ㅡ화북진성ㅡ해신사ㅡ별도연대ㅡ환해장성ㅡ삼사석이다. 삼사석에서 출발지인 제주박물관까지는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된다. ■화북동(화북리) ▲ 현재 화북동 일대 및 옛길 (빨간점선은 탐방로) 화북포는 별도포라고도 하는데 1601년 김상의 남양록에는 별도포 1653년 효종4년에는 화북 1843년 중좌면 별도리 1879~1904년 공북리라고 불리다가 그 이후 1914년 화북리로 다시 개칭한다. 화북포라는 명칭은 북쪽에서 쌀을 실어오는 포구라는 의미라는게 맞는 듯 하며, 별도포는 벨돗개,벨뒷개라고 불리던 지명을 한자로 차음한 것이라는 설이 설득력 있어 보인다. 제주읍내와 마찬가지로 화북 원마을 내에는 옛 길과 오래된 초가, 옛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어 우리 제주의 옛 정취를 한껏 보여준다. ▲ 1914년 화북리 일대 지적도 및 주요 옛길 ▲ 김승욱 비록 일제가 19
□제주향교 제주향교는 조선 태조 원년인 1392년 창건되었다. 정확히는 성균관이 세워진 것이며 교육기능을 겸비한 향교로서의 설립은 1394년 태조 3년 때이다. 애초에 교동(지금의 중앙로터리 근처)에 세워졌으나 이후 풍수해 등을 이유로 5차례 자리를 옮겼고, 1827년(순조27년) 현재의 위치에 자리 잡았다. 제주도지정 유형문화재 2호였던 제주향교 대성전은 2016년 6월13일 국가지정 보물 제1902호로 격상됐다. 대성전은 문묘(文廟)인데 그 안에 공자(大成至聖文宣王)의 위패를 중심으로 복성공 안자(顔子, )·종성공 증자(曾子)·술성공 자사(子思)·아성공 맹자(孟子) 등의 오성(五聖)과 공문십철(孔門十哲), 송조6현, 고려양현(高麗兩賢), 조선14현(朝鮮十四賢 ; 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김인후·이이·성혼·김장생·조헌·김집·송시열·송준길·박세채)을 봉안하고 있다고 한다. ▲ 현재의 향교정문 앞서 말했던 것처럼
□구름다리 ▲ 용연 구름다리 입구 다소 위험하게 출렁이던 용연의 작은 구름다리를 철거하고 새로 만든 구름다리다. 출렁이는 정도가 스릴 넘치던 예전만 못하나 더 안전해 보인다. ▲ 예전의 구름다리 (1967~1985)-출처. 사진으로보는 제주 옛모습,제주시 야간엔 조명시설을 해 놓아 꽤 볼만하다. 입구엔 연인들의 사랑의 징표로 유행이던 자물쇠를 걸어둘 수 있는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다. 자물쇠를 걸어둔 연인 중에 백년해로 할 커플이 과연 몇 프로가 될지 궁금하다. 괜한 심술을 부리면서 구름다리 입구에 자물쇠 자판기나 하나 설치하면 잘 팔릴까하는 마음이 먼저 든다. 중년에게 더 이상 낭만은 사치인지 헛 웃음만 나온다. □부러리마을 ▲ 향교와 부러리마을 일대 옛길 무근성에서 배고픈 다리를 건너면 용담에서 꽤 큰 마을인 부러리와 이어진다. ▲ 병문천을 지나 부러리로 가는 길 입구 ▲ 부러리 일대-부러릿동산엔 아파트가 서있다 ▲
■용담동(龍潭洞) 용이 있는 못(용연龍淵)이 있다고 해서 이름 지어진 마을이다. 용연은 한천 하류에 수심이 깊고 좌우 절벽이 절경을 이루었기 때문에 영주 십이경중의 하나인 명소이다. 현재 용담 1.2.3동으로 행정구분되어 있다. 용담1동은 '부러리', '새과양', '궤가슬', '한두기'마을을 아우른다. ▲ 배고픈다리 자리 ▲ 김승욱 무근성에서 용담으로 갈 때 병문내에 배고픈다리가 있었다. 지금은 병문천 일대가 복개되어 기억속에만 남아 있다. 복개된 도로 밑엔 그 흔적이 있을지도 모른다. 배고픈다리는 무근성에서 동한두기와 부러리를 잇는 유일한 길이었다. 병문천 일대의 복개공사는 탑동매립 사업자 '범양'이 매립으로 인한 수익을 제주시민에게 돌려주어야한다는 요구에 금전적 환원대신 병문천 복개공사를 한 것이라 한다. 아마도 매립지 진입도로 확충도하면서 생색도 내는 꼼수였을거라 생각한다. 그런 시절이었다. □한두기 한천하류 용연에서 동쪽은 동한두기, 서쪽은 서한두기 마을이다. 동한두기
□무근성길 ▲ 해자길이 이어진 골목길- 좌우로 만나는 길이 탑아래(탑동)으로 이어진 옛길(현재 무근성길) ▲ 무근성길 탑동(탑아래)으로 이어지는 무근성길(도로명)이다. 옛날 서문에서 해자길을 거쳐 탑아래 바닷가로 가는 주요 도로였다. 지금은 확장되어 옛길의 정취를 느끼긴 어렵다. 구린질과 만난다. □조관집터 ▲ 창성이용원-주인은 여러번 바뀌었으나 수십년간 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창성이용원 서쪽 일대가 조정에서 파견된 관리들이 많이 거주하였던 조관(朝官)집터다. 조관집터 서쪽에서 병문천 사이 일대가 제주의 부호인 고만호 집안의 집터이다. ▲ 조관집터 앞을지나는 옛길 창성이용원 길 맞은편에는 강만호 집안의 집터이다. ▲ 강만호 집안 집터로 추정되는 곳-이곳 동쪽에 연못이 있었다고 한다. 만호(萬戶)라는 명칭은 고려 때 몽골식 직제로서 다스리는 호수(戶)에 의한 관리 직제였으나 점차 후대로 오면서 다스리는 가옥의 수가 아닌 직급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주로 변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