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담동(龍潭洞)
용이 있는 못(용연龍淵)이 있다고 해서 이름 지어진 마을이다. 용연은 한천 하류에 수심이 깊고 좌우 절벽이 절경을 이루었기 때문에 영주 십이경중의 하나인 명소이다. 현재 용담 1.2.3동으로 행정구분되어 있다. 용담1동은 '부러리', '새과양', '궤가슬', '한두기'마을을 아우른다.
무근성에서 용담으로 갈 때 병문내에 배고픈다리가 있었다. 지금은 병문천 일대가 복개되어 기억속에만 남아 있다. 복개된 도로 밑엔 그 흔적이 있을지도 모른다. 배고픈다리는 무근성에서 동한두기와 부러리를 잇는 유일한 길이었다.
병문천 일대의 복개공사는 탑동매립 사업자 '범양'이 매립으로 인한 수익을 제주시민에게 돌려주어야한다는 요구에 금전적 환원대신 병문천 복개공사를 한 것이라 한다. 아마도 매립지 진입도로 확충도하면서 생색도 내는 꼼수였을거라 생각한다. 그런 시절이었다.
□한두기
한천하류 용연에서 동쪽은 동한두기, 서쪽은 서한두기 마을이다.
동한두기 마을이 좀 더 규모가 크다.
한두기는 큰둑(한둑)이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아마도 용연 좌우의 높은 절벽을 둑으로 여겼으리라 짐작해 본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둑을 쌓을만한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독포( 大凟浦)는 한둑의 한자 차음일 것이다.
□서자복
동한두기 마을에 용화사라는 절 경내에 있다. 원래 해륜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18세기 중반에 없어졌다고 한다. 그 자리에 1910년에 지어진 지금의 용화사가 있고 경내에 서자복이 서 있다.
복신미륵’, ‘자복신’, ‘자복미륵’, ‘미륵불’, ‘큰어른’ 등의 이름으로 불리며, 동한두기의 절동산(용화사 일대 옛지명)에 서 있다. 지금처럼 고층건물이 들어서기 전에는 동쪽의 동자복과 더불어 제주읍내를 부릅뜬 눈으로 지켰을 것이다.
'향토문화전자대전'에서는 '제작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고려 후기의 불상이 토속적으로 변모하는 과정 중의 한 양상인 것으로 보아 고려 후기로 추정되며, 머리에 씌워진 대패랭이와 비슷한 모양의 벙거지는 조선 후기에 새롭게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씌여 있다.
풍어와 안전을 기원하는 토속신앙과 불교가 융합된 복합신앙의 성격을 띄며, 서자복 옆엔 득남을 기원하는 남근석이 있다.
90년대 말까지만 해도 서자복을 보호하기 위한 용왕각이 있었다고 하는데(윗 사진 참조) 무슨 연유인지 철거되고 없다.
□가시락당(고시락당)
제주에선 가정의 행복이나 기타 소원을 비는 당이 곳곳에 있다. 지금도 해안가 바위나 마을 곳곳에 당이 산재한다. 고단한 삶을 살았던 제주인들은 당을 찾아 절절한 소망을 빌었다. 이곳도 그런 곳인데 아마도 용연에 살고 있는 용에 의지 하고픈 마음 간절하지 않았을까.
발밑에 바로 보이는 용연에서 탐라순력도의 '병담범주'에 묘사된 것처럼 양반네들이 기생들 끼고 희희낙낙하고 있을 때 용이라도 물 속에서 휙 나타나 저 배를 뒤집었으면 하는 심경도 가지면서 말이다. 그냥 상상이다.
지금도 누군가 어떤 사연인지 치성을 드린 흔적이 역력하다.
□용연
한천하류에 양쪽으로 바위 절벽이 절경을 이루는 곳이다. 용이 산다는 전설이 있는 만큼 수심도 깊고 맑다. 한천이 건천이니 용연의 물은 바닷물일 것이다.
어릴 적에는 동네 꼬마들의 놀이터이자 담력시험장이었다. 바위 높이에 따라 단수가 있어 높은 단수에서 다이빙할 수록 존경(?)을 받았다. 물론 지금은 아무도 담력을 시험하진 않는다. 그러나 해보고 싶다.
탐라순력도 병담범주에선 취병담(翠屛潭)이라 써 있다. 임제(1549∼1587)가 『남명소승』에서 이곳 용연을 취병담이라고 한데서 유래한다. 절벽의 울창한 푸른 숲이 절벽과 어우러져 물가에 짙푸른 색으로 비쳐 아름답다고 생각한 것이다. 내 생각도 그렇다.
절벽에는 취병담(翠屛潭), 선유담(仙遊潭) 등의 마애명도 있다고 하는데 기회가 되면 배타고 찾아보고 싶다.
보름달 뜨는 날이면 배를 띄워 풍류를 즐겼다는데, 그 풍치를 ‘용연야범(龍淵夜泛)’이라 하여 ‘영주12경’의 하나로 쳤다고 한다.
과연 굳이 밤에 배타고 놀이를 즐겼을까. 배타러 가는 길도 험했을 텐데. 그냥 그랬으면 멋있겠다는 상상에서 나온 소리가 아닌지 괜히 딴지를 걸어본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김승욱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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