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근성길
탑동(탑아래)으로 이어지는 무근성길(도로명)이다. 옛날 서문에서 해자길을 거쳐 탑아래 바닷가로 가는 주요 도로였다.
지금은 확장되어 옛길의 정취를 느끼긴 어렵다. 구린질과 만난다.
□조관집터
창성이용원 서쪽 일대가 조정에서 파견된 관리들이 많이 거주하였던 조관(朝官)집터다. 조관집터 서쪽에서 병문천 사이 일대가 제주의 부호인 고만호 집안의 집터이다.
창성이용원 길 맞은편에는 강만호 집안의 집터이다.
만호(萬戶)라는 명칭은 고려 때 몽골식 직제로서 다스리는 호수(戶)에 의한 관리 직제였으나 점차 후대로 오면서 다스리는 가옥의 수가 아닌 직급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주로 변방의 요지를 담당하는 무장에게 주어진 직급이다.
일반 고을에서는 수령이 행정과 군사를 담당하였으나 변방등 군사적 요충지에는 별도로 만호 계급의 무장이 파견되었다.
과거 어느 때인가 고씨성을 가진 만호와 강씨성을 가진 만호가 이 지역에 거주하면서 부를 축적하고 세력을 형성하였을 것이다.
□구린질(구린길)
구린질(길)은 무근성 북측을 지나는 지금의 북성로 서측 구간이다.
이 길을 경계로 북쪽은 탑아래(탑바리,탑동), 남쪽은 무근성 동네이다. 일제 이전엔 구린질 북쪽은 민가는 없었고 주로 밭이었다.
위에서 언급한 조관집터와 고만호, 강만호 집터 사이에 S자로 생긴 길이 있으나, 일반 평민들이 이 길을 통행하지 못하도록 그 지역 지주들이 땅을 내어 만든 길이라고 한다. 일반 백성들은 이 구린질을 통하여 병문내 일대 물통에서 물을 길어다 썼고, 배고픈 다리를 건너 부러리 마을과 한두기로 다녔다.
□삼도동 포제단
삼도동에서 마을 포제를 지내던 곳이다.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복개되기전 병문냇가에 시원스런 팽나무를 이고 정취를 자아내며 동네아이들의 놀이터도 되어 주었던 포제단이다. 일년에 한두번 지내는 제를 지낼 때 추워서였을까. 알 도리가 없이 그저 탄식만 나온다. 다 이유가 있었겠지만.
■탑동(탑알,탑아래,탑바리)
무근성에 청상과부가 많이 나오는 등 마을에 안좋은 일이 많이 생기자 액운을 막는 방사탑을 두 곳에 설치했는데 그 아래 지역을 탑아래(탑바리)라고 했다. 세찬 바닷바람만이 황량하던 이곳에 민가는 드물었고 척박한 밭들만 펼쳐져 있었다.
위 사진의 방파제 너머 바다는 매립되어 호텔과 이마트등이 들어서 있어 과거의 모습을 찾을 길 없다. 흑백사진에서 보듯 바닷바람에 실려온 미역내음과 짠내가 옛 기억을 소환한다.
어릴 적 놀이터였던 탑아래 바닷가의 끝없이 펼쳐진 먹돌밭은 이젠 잃어버린 과거다. 울컥해진다.
□무선국밭
일제 때 찍은 위 사진이 당시 탑동의 황량한 풍경을 잘 보여준다. 지금의 오리엔탈호텔 자리로서 무선국밭이라고 불리던 곳이다. 무선국은 이곳과 측후소 밑 두 곳에 있었다.
□사직단 터(사직이 터)
제주고을의 사직단터로 조선 숙종 45년(1718)에 목사 정석빈이 이곳으로 옮겼다. '사직이'로 불렀다.
토지신인 국사신(國社神)과 곡물신인 국직신(國稷神) 두 신에게 제사를 드리기 위해 단을 쌓고 봉사하는 곳으로 사직단이라고 했다.
역시 흔적을 찾을 길 없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김승욱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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