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향교
제주향교는 조선 태조 원년인 1392년 창건되었다. 정확히는 성균관이 세워진 것이며 교육기능을 겸비한 향교로서의 설립은 1394년 태조 3년 때이다.
애초에 교동(지금의 중앙로터리 근처)에 세워졌으나 이후 풍수해 등을 이유로 5차례 자리를 옮겼고, 1827년(순조27년) 현재의 위치에 자리 잡았다.
제주도지정 유형문화재 2호였던 제주향교 대성전은 2016년 6월13일 국가지정 보물 제1902호로 격상됐다.
대성전은 문묘(文廟)인데 그 안에 공자(大成至聖文宣王)의 위패를 중심으로 복성공 안자(顔子, )·종성공 증자(曾子)·술성공 자사(子思)·아성공 맹자(孟子) 등의 오성(五聖)과 공문십철(孔門十哲), 송조6현, 고려양현(高麗兩賢), 조선14현(朝鮮十四賢 ; 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김인후·이이·성혼·김장생·조헌·김집·송시열·송준길·박세채)을 봉안하고 있다고 한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향교의 정문은 제주중 동쪽 담벼락에 있었다. 그때의 정문을 해체해서 여기로 옮긴 것인지 새로 지은 것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하마비가 있는걸로 봐서 해체 후 옮긴 것이라고 믿고 싶다.
향교의 하마비엔 '대소인하마비(大小人下馬碑)'라 써있고 목관아의 하마비엔 '수령이하개하마(守令以下皆下馬)'라 쓰여있다.
향교에서는 대소인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모두 말에서 내리라는 뜻이고, 목관아에서는 수령이하는 다(皆-다 개) 말에서 내리라는 의미다.
공자를 모시는 향교에선 수령도 말에서 내리라는 것이니 향교의 권위를 말해주고 있다.
국가문화재로 지정된 이 후 보수작업 중이다.
국가보물로 지정되어 도지사가 참석한 가운데 경축행사도 열렸었다. 그러나 최근 정작 인근 주민들은 보물지정 취소를 해달라고 아우성이다. 국가지정 문화재가 되면 인근 건축물의 건축에 제한사항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주민들의 요구가 이해는 간다. 일률적인 법 적용에서 과감한 유연성을 기대하긴 어려울 것이다. 어느 편을 들지는 판단이 안 선다. 남아 있는 문화재의 현 주소이다. 보존과 개발의 선상에서 결과가 어떤지는 우리는 알고있다. 현명한 해결을 기대한다.
공자를 비롯한 5성을 모시는 대성전을 문묘라고도.한다. 서울의 성균관대학교 내의 대성전을 필두로 1918년 당시 전국의 향교 수는 335개소에 이르렀다. 향교는 공자등 5성과 기타성인에 대한 제사기능과 관학으로서의 교육기관의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1984년 갑오개혁으로 과거제도가 폐지되면서 교육기능은 사라지고 향교는 이름만 남아 문묘를 향사(享祀)하는 기능만 남게 되었다.
계성사는 5성의 아버지들을 모시는 사당이다. 5성의 아버지까지 왜 모시는지 지금 나의 짧은 시각으론 의문이다. 모두 기원전 2~5세기 중국 인물들이다. 암튼 자식 잘 두고 볼일이다. 이천년이 넘도록 물건너 땅에서조차 잿밥을 챙길 수 있으니 말이다.
위 사진 인물들 너머로 보이는 1960년대 대성전 편액과 현재 편액을 비교하니 그때의 것과 일치한다. 제주 향교의 대성전은 1976년도에 대대적으로 중수하였으니 편액에 변화가 있는지 확인해 본 것이다.
우연하게도 전국에 산재한 대성전 편액을 살펴보았다. 놀라웠다. 글씨체가 한결 같았다. 대정향교의 편액 글씨체도 마찬가지이다. 검색한 바로는 전주향교 편액의 글씨체만 달랐다.
강릉향교, 나주향교,여주향교등 숱한 향교들이 대성전 편액이 한석봉 작품이라고 자랑한다.
서울 성균관에 있는 대성전 편액이 한석봉의 글씨라고 한다. 언제 어느 땐가 한양의 성균관 대성전 글씨를 모태로 유행처럼 번진 것인가.
그 연유가 몹시 궁금하다.
대성전 앞엔 좌우로 제사를 준비하는 건물인 동무와 서무가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최근 동무와 서무가 있었던 기단석등 흔적이 발굴됨에 따라 복원작업을 시도하고 있다.
위에서 보 듯 60년대 사진에서는 서무의 끝 모습이 살짝 보인다. 60년대까지는 동무와 서무, 적어도 서무는 있었다.
단청유감.
단청은 기능적으로는 나무를 비바람과 병충해로부터 보호하는 칠공사의 결과물이다.
건물의 격과 쓰임에 따라 단청의 내용을 달리했다. 단청의 종류는 격에 따라 가칠, 긋기, 모로, 금단청 순이다. 뒤로 갈수록 화려한 단청이다. 단청을 칠하지 않은 일반집은 백골집이라고 하였다.
검소함을 표방하는 향교나 서원에서는 주로 단순한 긋기 단청을 사용했다. 성균관 대성전의 단청과 비교하면 제주 향교의 단청은 모로 단청으로 지나치게 화려하다. 건물의 격에 어울리지 않은 단청을 입힌 것이다. 문화재 복원의 기준이 있겠지만 문외한인 나로서는 가급적 옛날 그대로의 모습으로 살리는게 맞지 않나 싶다. 성형하거나 짙은 화장없이 자연스런 그모습 그대로.
□생깃동산
지금의 향교 앞을 지나 용담사거리까지의 언덕을 생깃(향교)동산이라 불렀다. 신작로가 생기기 전에는 일대가 밭이었다.
□소로기동산
솔개가 많이 날아와 앉는 곳이라고 해서 소로기(솔개) 동산이다. 소로기동산 노인당 남쪽에는 용담2동 포제터가 있다.시내 5개동 중 포제단에서 제를 지내는 곳은 삼도2동과 용담2동 뿐이라고 한다.
□제2한천교
제2한천교 자리는 예전에 서쪽에서 이어진 길을 구한질과 연결하는 다리가 있었던 곳이다. 여기도 배고픈다리가 있었을거라 짐작해 보았다.
혹시나해서 복개된 다리 밑을 살펴보니 배고픈 다리의 흔적이 역력하다. 콘크리트가 나오기 이전엔 돌로 다진 길이었을 것이다.
□진테왓
지금은 택지 개발로 주택단지가 들어서 있어 옛날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지명에서 알 수 있듯 군사들이 진(陣)을 쳤던 곳에서 유래한다. 이재수의 민병들이 제주읍성에 들어가기전 머물렀던 곳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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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도심은 낙후된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개발을 하려하고 재생사업을 진행하려 한다. 사람이 사는 공간인지라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언제까지고 옛것만 주장하는 것도 옳지 않다고 본다.
그러나 옛 것을 알아야 한다. 그 소중함을 모르니 무조건 파헤치려고 드는 것이다. 많이 알 수록 그 가치를 소중하게 여기게 되고, 그에 맞는 개발이든 재생이든 진행할 수 있을 것이다.
제주 원도심은 비록 불편하고 때론 보기 흉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주장한다. 길에 답이 있다고. 걷는 발길에서 느껴지는 역사의 숨결을 호흡할 때 그 가치의 무한함을 깨닫게 된다.
제주 원도심은 다행히도 도시 전체가 옛길이 살아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국 어디를 가봐도 이런 사례는 드물다. 건물은 수명이 있어 생물처럼 나고 자라고 때가 되면 낡아 없어지지만 길은 남아서 역사를 물려준다. 인간이 개발의 명목으로 파괴하지만 않는다면.
원도심의 개발이나 재생은 옛길을 보존하는데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이유이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김승욱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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