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의 현장-남기고 싶은 이야기]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 편이 지난 주인 21일 1부의 막을 내렸습니다. 1부는 신 전 지사의 '꿈과 도전'이 주제였습니다. <제이누리>는 1부를 요약, 정리하는 격이 될 신 전 지사의 육성강연록을 준비했습니다. 1997년 행정자치부 지방행정연수원에서 그가 한 특강 내용입니다. 행정고시에 패스, 전국에서 근무중인 사무관 시보 등을 대상으로 2시간여 진행한 강연입니다. 이 강연에서 그는 <21세기를 대비하는 자치단체, 제주도의 비전>을 주제로 그의 포부를 밝힙니다. 그 해 이 강연은 강연에 나선 광역자치단체장 중 유일하게 연수원이 뽑은 명강의로 선정됐습니다. 2회에 걸쳐 강연을 소개한 뒤 9월11일부터는 '신 전지사의 회고록 2부-새로운 도전, 그리고 좌절과 시련'으로 연재를 이어가겠습니다. 변함 없는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 편집자 주 여러분, 정말 반갑습니다. 교육받느라고 힘드시죠. 저도 교육받은 경험이 많아 피교육생이 얼마나 힘든가를 잘 알기에 여러분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제주도지사 신구범입니다. 석영철 (지방행정연수원) 원장님은 개인적으로 보면, 행정고시 선배시고 특히 제가 정부임
오키나와를 만난 건 행운이었다. 제주도가 판을 벌인 섬관광정책(ITOP) 포럼에 오키나와를 끌어들이려는 게 내 목표였지만 오키나와를 만난 뒤 새로운 비전이 생겼다. 1996년 4월 비공식 일정으로 오키나와를 찾았던 나는 방문 첫날 오타 마사히데 지사와의 협의가 순조롭게 마무리되자 이튿날 오후 홀가분한 마음으로 아내와 관광길에 올랐다. 오키나와가 자랑하는 나하시의 수리성(首里城)과 이토만시의 평화공원, 옥천동굴 등을 둘러보았다. 그 중에서 난 수리성에 큰 충격을 받았다. ▲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 부부가 지사재직 시절인 1996년 오키나와 나하시의 수리성을 방문, 현장을 살펴보고 있다. 오키나와에 있었던 유구왕국(流球王國)은 14세기 초부터 중국·일본으로부터 동남아시아를 연결하는 광대한 교역로를 구축, 대외교역이 활발했던 곳이다. 오키나와의 본 섬인 수리를 근거지로 화려한 해양문화를 꽃피운 국가다. 그 본영인 수리성은 슈레이몬, 간카이몬, 벤자이텐도, 엔카쿠지 총문, 수리성 정전 등으로 구성돼 있다. 물론 수리성이 그중 가장 중요한 건축물이다. 유구왕국에서 국왕의 정무(政務)와 예식에 사용된 오키나와 최고의 목조건축물이 그곳이다. 우리가 본 건 19
1998년 11월 어느 날. 조간신문을 집어 든 난 한동안 회상에 잠겼다. 안타까운 마음이었다. 일본 오키나와 지사 선거에서 오타 마사히데(大田昌秀) 현 지사가 낙선했다는 기사가 실려 있었다. 그는 내가 1998년 6·4지방선거에서 낙선했다는 소식을 듣고 “답답하고 서운하다”는 말을 전해온 인물이다. 그 일이 있기 2년여 전인 1996년 나는 그를 처음 만났다. 71세의 노(老) 지방정객이었다. 작은 키와 탄탄한 체구에 남방계 특유의 고집스런 인상을 가지고 있는 그는 일본 와세다 대학 영문과를 졸업한 후 미국 시라큐스 대학에서 언론전공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사람이다. 고향 오키나와로 돌아와 평생 오키나와대 교수로 봉직하다 1990년 연합공천 형식으로 오키나와현 지사 선거에 무소속 후보로 출마해 당선됐다. 11월의 선거에서 그는 3선 고지를 노리다가 이나미네 게이치 자민당 후보를 만나 패배한 것이다. 그는 오키나와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의 철수를 주장하면서 오키나와의 자존·자립의 꿈을 실현하려고 했던 이상주의자다. 1997년엔 오키나와의 미군기지 사용연장에 대해 서명을 거부해 일본 대심원으로부터 그의 거부권 행사가
선거 얘기를 2회에 걸쳐 말씀드렸다. 1995년 첫 민선지방선거인 6·27 선거 전후의 얘기였다. 내 인생사에서 중요국면이 그것이었지만 오늘은 좀 다른, 특이했던 선거 얘기를 전하려 한다. 내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이 후보로 출마한 국제무대에서의 선거 경험이다. 물론 그 시절 외국 땅을 밟고 생활을 하던 사람의 형편도 곁들여 말하고 싶다. 그곳에서 만난 남북의 문제도 짚어보려 한다. 4년여 세월을 보냈던 이탈리아 로마에서의 얘기다. 내 조국의 현실을 돌아본 계기가 됐던 일이기에 이 자리에 기록으로 남겨두고자 한다. 농림부의 국장급인 농업교육원 교수부장이 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주(駐)이태리 대사관 농무관 발령을 받았다. 느닷없이 나온 외교관 발령이어서 경황이 없었다. 1984년 9월 말의 일이다. 그런 경험도 없었거니와 과거의 전례로 놓고 봐도 고달픈 생활일 것이란 짐작이 갔다. 더욱이 마침 그 때는 큰 아들이 대입을 목전에 둔 고3 시절이어서 마뜩치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것 저것 챙기고 이태리행 비행기에 몸을 실을 수 밖에 없었다. 대입 학력고사를 치를 큰 아이는 물론 옆에서 식사라도 챙겨야 했기에
1995년 3월 말. 도지사를 사퇴했지만 외롭지 않았다. 나는 검찰의 비열한 처사에 이어 청와대 경호실에 의해 도지사 공관에서 강제퇴거(?) 당하는 수모까지 겪으면서 분노 속에서 도지사 직을 사퇴했다. 하지만 그저 담담한 마음으로 선거를 치를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진실과 진심으로 선거를 치를 심산이었다. 진정성은 통했다. 검찰로부터 불의의 일격을 당했지만 그건 화(禍)가 아니라 천군만마 우군의 지원을 얻는 명분이 됐다. 여러 언론이 중앙정부가 지방선거에 개입하고 있다는 의혹을 제기했고, 난 민선 1기 지방선거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행운을 거머쥐는 상황으로 국면이 뒤바뀌고 있었다. 그러나 여당인 민자당 도지사 후보로서 당의 조직과 지원으로 선거를 치르려고 계획했던 나로서는 당연히 조직도 돈도 없었거니와 내가 여당 후보가 될 것으로 예견하고 협력과 지원을 약속했던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했다. 태양이 구름에 가리우면 사라져버리는 그림자처럼 나에게서 떠나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선거기획은 고사하고 일정관리조차 여의치 않았다. 더욱이 자신의 선거경험은 물론 다른 사람의 선거를 도와본 적도 없는 나는 바람 같은 선거를 치러야할 판이었다. 그러나 사람은 그냥 죽으라는 법은
이제 선거 얘기를 하려 한다. 영광도 있었지만 좌절도 있었다. 선거에서 단 한번 이겼고, 두 번이나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그런 마당에 “한참이나 지난 과거의 일을 다시 들춰서 무엇 하려는가”라고 반문할 분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짚고 넘어가야할 일들이 있다. 물론 지난 날 내가 두 번씩이나 낙선한 것은 나의 정치적 미숙, 과오·오만 등에 그 원인이 있었음을 자인한다. 그러나 이러한 많은 결점과 부족함에도 공인으로서 타락선거문화와 타협하기를 거부했던 나로서는 제주선거문화에서 20년 전 진작 도려냈어야할 썩은 부위가 아직도 왕성하게 살아 있어서 공작과 거짓으로 일관하는 세력들의 거점이요 서식처가 되어 있다는 걸 좌시할 수 없다. 우리가 추구해야할 새로운 선거문화 정착을 위해 나의 경험을 기록하는 것은 아직 유효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가 재임중인 1995년 3월29일 도청 기자실에서 이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1993년 말 제주도지사로 부임하고 도정을 점검하기 시작했다. 인사, 예산집행, 인·허가 등 많은 부문에서 전임 도지사가 다가올 지방선거에 대비하려고 했던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었
나에게도 괴롭고 험난했던 가족사가 있다. 그 어려웠던 시절 그런 어려움을 겪은 도민들이 어디 나뿐이겠는가? 내가 어려서 세상을 모를 때에는 아버지를 원망하거나 미워해본 적은 없지만 적어도 서운해 한 적은 많았다. 그러나 나는 세상을 익혀가면서 아버지에 대한 서운한 마음을 버렸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 비친 아버지와는 전혀 다른, 당신의 삶에서 원칙과 가치의 끈을 결코 놓지 않으려고 하던 나의 아버지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느덧 나도 아버지가 추구하던 그 길을 가고 있었음을 알았기에 이를 다만 이 자리에서 고백하고 싶을 따름이다. “다이아몬드인 줄 알았는데 고작 연탄재 같은 놈이었단 말이냐? 형편 없는 자식!” 육사에 입교한 뒤 그렇게 나를 자랑스러워 하시던 아버님은 그만 내가 사관학교 4년 중퇴의 몰골로 고향 제주로 내려오자 이렇게 말했다. 그 분의 실망은 컸다.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 신구범 전 지사의 육사 생도시절 사진. 동료들과 훈련을 마치고 촬영한 기념사진이다. 난 1965년 늦은 봄 육사에서 자퇴했다. 젊은 시절의 열정 탓이었다. 고교를 마친 난 솔직히 서울법대로 진학하고 싶었다. 우수한 인재들이 갈 곳은 그곳이라고
나에겐 1611평의 감귤밭이 있었다. 1992년 돌아가신 어머니가 애지중지 아끼시던 감귤밭이다. 그 밭은 1980년대 중반부터 어머니가 손수 돌보시던 밭이다. 어머니가 가꾸시던 그 밭은 나에게 애틋한 사연이 있다. 1982년 경제부처가 신도시 과천으로 이전하게 되자 정부에선 과천 이전 공무원에게 그 지역 주공아파트를 특별분양했고, 나도 31평 아파트 한 채를 분양받았다. 서울 종로구 신교동을 거쳐 옥인동에서 살던 나는 경복고, 청운중에 다니던 세 아들을 과천과 안양에 있는 중·고등학교로 전학시키고 서울 집도 팔았다. 서울 집을 판 돈으로 아파트 대금을 내고 나니 2000만원이 남았다. 그 돈을 평생 고생만 하신 부모임이 쓰시도록 드리자고 아내가 제안했다. 너무도 고마웠다. 아내의 제안에 따라 우리 부부는 부모님도 뵐 겸 고향 제주로 갔다. 안부 얘기를 묻다가 이런 얘기를 꺼내자 어머니가 물끄러미 우리를 쳐다보다 이렇게 말했다. “용인(큰 아들 이름)이 어멍아(엄마야)! 난 미깡(감귤) 밭 이신(있는) 사람이 제일 부럽나(부러워). 한번 우리 미깡 밭에 앉아 검질(김) 매여 봐시민(봤으면)···.&r
역사로 종결된 듯이 보여도 끝나지 않은 일이 있을 수 있다. 다 지난 과거의 일로 보이더라도 실상은 여전히 현실을 관통하는 큰 물줄기일 수도 있다. ‘제주의 물 문제’는 바로 그것이다. ▲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가 민선 1기 취임식을 마친 뒤 그의 재임시절 발매가 시작된 관광복권을 구입, 펼쳐 보이고 있다. 1996년 한진그룹 고 조중훈 회장과의 만남 이후 상황이 급변했다. 그해 9월 말 조 회장과의 만남 직후 며칠 지나지 않아 제동흥산(현 한진그룹 계열 (주)한국공항의 전신) 측에선 공개적인 반응이 나왔다. 유상희 제동흥산 대표 등 임원이 공개기자회견을 통해 생수시판 의도가 전혀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제주도의회에도 출석, 그 내용을 공언하기도 했다. 제주지방개발공사의 생수공장은 1996년 11월26일 착공했다. 기공식이 있던 날 날씨는 매서웠다. 칼바람이 몰아쳤다. 하지만 현지주민을 포함해 1천여명의 하객의 몰려 ‘제주삼다수’의 앞날을 축하했다. 감개무량했다. 더욱이 공장이 세워지는 조천읍 교래리 산 70번지는 법정소송까지 갔던 한진그룹의 제동목장과 마주한 곳이다. 묘한 인연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제
1995년 첫 민선 지방선거인 6·27 선거에서 초대 민선 제주도지사로 당선됐다. 진정성을 이해해 준 도민들이 무한히 고마운 것도 있지만 사실 당시의 당선은 검찰이 꽤 도와준 측면이 있다. 지금도 억울한 일이지만 그 당시 제주지검은 얼토당토 않은 사건을 엮어 사전선거운동으로 나를 기소했고, 그로 인해 오히려 도민들은 분노했다. 그런 제주도민의 감정이 오히려 나의 득표를 도운 기현상으로 뒤바뀐 것이다. 사건의 전말은 차후 다루려 한다. 그보단 취임 이후 불거진 ‘물’에 얽힌 비사(秘事)를 이제 밝히려 한다. 6·27 선거에서 당선되자마자 한진그룹의 조중훈 회장에게서 연락이 왔다. 좀 만났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그는 내가 공약으로 내세운 ‘제주공기업 발(發) 생수사업’에 신경이 쓰이는 눈치였다. 어느 날 점심 무렵 한진그룹의 소유하고 있는 제동목장 안의 별장으로 초대를 받았다. 조 회장 부부와 그의 장남 조양호(현 한진그룹 회장), 그리고 우리 부부가 서로 얼굴을 맞댔다. 당선 축하와 더불어 ‘잘해보자’는 덕담이 오고 갔다. 더욱이 그는 내가 관선지사로 재임하던 1995년
1993년 12월 29일. 제주도지사로서 첫 출근을 했다. 1974년 농림부로 가면서 제주도를 떠난 이래 근 20년만의 귀향이었다. 감회가 새로웠다. 하지만 제주의 미래를 위해 새로운 전진의 깃발을 올려야 된다는 것이 포부였다. 그만큼 마음 한 구석에 자리잡은 중압감 또한 컸다. 출근한 첫날 난 비서실에 두 가지를 지시했다. 도지사 집무실의 응접용 탁자와 의자를 전부 사무용으로 바꾸도록 했다. 더불어 도지사 집무실과 접견실을 서로 맞바꾸도록 했다. 도지사 집무실은 화장실까지 갖춘 넓은 공간인 반면 도지사를 찾아오는 도민들을 만나는 접견실은 좁고 초라했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도지사 출근시간을 오전 8시로 정하고, 결재나 보고가 필요한 직원은 오전 8시30분부터 도지사실로 와도 좋다고 말했다. 도정방침은 취임사의 내용에 맞춰 <1. 활력있는 제주산업, 2. 균형 있는 제주개발, 3. 자조하는 제주정신, 4. 헌신하는 제주행정>으로 정했다. 여기까지는 쉽게 머릿속에서 생각이 정리됐다. 그런데 도정슬로건은 무얼할까를 망설였다. 집무실 벽에 새겨진 도정 캐치프레이즈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전임 우근민 지사 시절 쓰던 슬로건을 보니 무릎을 치지 않을 수 없었
위기의 순간엔 기회도 다가온다고 했던가? ‘6공의 황태자’ 박철언에게 찍혀 미국으로 쫓겨난 내 처지는 너무도 초라했다. 하지만 그 1년의 시간은 후일 제주도정을 책임지게 된 나에게 ‘금쪽 같은’ 자양분이었다. 미국 조지타운대 객원연구원 자리를 얻은 난 아내와 함께 워싱턴 외곽 버지니아주의 펄스처치(fallschurch)란 조그만 도시에 거처를 마련했다. 허름한 원룸 아파트였다. 그곳에 살면서 난 학교를 오갔고, 아내는 집안 일을 돌봤다. 농림부 소속인 신분이기도 했지만 개인적으로도 눈길이 가서 난 조지타운대 근처에 있는 미국 농무성 산하의 경제조사연구소(ERS: Economic Research Service)를 자주 들렀다. 세계의 농업현황에 대한 자료가 풍부해 그곳에서 참 많은 자료들을 들춰 볼 수 있었다. 더욱이 제주출신이어선지 그곳에서 세계 오렌지시장 현황에 대한 자료가 유독 눈에 들어왔다. 생과와 가공용 오렌지의 원산지와 수·출입 실태를 많이 탐독했다. 제주도지사 시절 감귤정책은 이때 알게 된 정보에 근거한 것이다. 하지만 그 시절 내 머리를 감싸 쥐게 만든 건 다름 아닌 ‘물&rsq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