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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현장-남기고 싶은 이야기(10)]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

1993년 12월 29일. 제주도지사로서 첫 출근을 했다. 1974년 농림부로 가면서 제주도를 떠난 이래 근 20년만의 귀향이었다. 감회가 새로웠다. 하지만 제주의 미래를 위해 새로운 전진의 깃발을 올려야 된다는 것이 포부였다. 그만큼 마음 한 구석에 자리잡은 중압감 또한 컸다.

 

 

 

출근한 첫날 난 비서실에 두 가지를 지시했다. 도지사 집무실의 응접용 탁자와 의자를 전부 사무용으로 바꾸도록 했다. 더불어 도지사 집무실과 접견실을 서로 맞바꾸도록 했다. 도지사 집무실은 화장실까지 갖춘 넓은 공간인 반면 도지사를 찾아오는 도민들을 만나는 접견실은 좁고 초라했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도지사 출근시간을 오전 8시로 정하고, 결재나 보고가 필요한 직원은 오전 8시30분부터 도지사실로 와도 좋다고 말했다.

 

 

도정방침은 취임사의 내용에 맞춰 <1. 활력있는 제주산업, 2. 균형 있는 제주개발, 3. 자조하는 제주정신, 4. 헌신하는 제주행정>으로 정했다. 여기까지는 쉽게 머릿속에서 생각이 정리됐다. 그런데 도정슬로건은 무얼할까를 망설였다. 집무실 벽에 새겨진 도정 캐치프레이즈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전임 우근민 지사 시절 쓰던 슬로건을 보니 무릎을 치지 않을 수 없었다. ‘믿음과 희망을 심는 도정’이었다. 말 그대로 도정이 믿음과 희망을 심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생각해도 잘 만든 구호라고 판단했다. 게다가 지사가 바뀌었다고 해서 전임자의 좋은 것까지 바꿀 필요가 없는데다 행정의 연속성이란 측면을 생각하다보니 굳이 도정 슬로건을 갈아치울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인사(人事)문제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능력위주의 인사를 하겠다는 게 내가 정했던 원칙이다. 하지만 지사로 부임했을 때 이미 일부 실·국장과 시장·군수의 인사가 내무부에 상신돼 있었다. 지사가 오자마자 자기 사람 심기나 하고, 과거 정해진 인사안을 마구잡이로 뒤집으면 오히려 역효과가 나리라 생각했다. 연속성의 측면이 중요하다고 봐 당시 이효계 내무부 차관에게 그대로 발령해 주도록 부탁도 했다. 그런데 고약한 일이 벌어졌다.

 

 

그 때 취임하고 며칠 지나지 않아 4급 서기관 신분이던 도 산하 모 기관장이 인사담당 국장과 함께 나를 찾아왔다. 전임 지사가 자신을 관광협회 상근부회장으로 내정했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조천읍 함덕리 출신으로 고향 선배이기도 한 사람이다. “그러냐”고 해서 얘기를 듣고는 “그럼 그대로 하라”고 지시를 했다. 그러자 그날 오후 언론인 출신인 L씨가 몹시 불쾌하다는 듯 전화를 걸어왔다. 그의 목소리는 단호했지만 크게 상처를 받은 느낌을 주고 있었다. “지사가 바뀌었다고 이래도 되나?”는 항의였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곧바로 서울로 간 전임 우 지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확인해 본 결과 그가 내정한 건 언론인 출신 L씨였던 게 맞았다.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향의 인연을 운운하면서 지사 교체시기에 인사담당 국장과 모 서기관이 짜고 한마디로 ‘꼼수’를 쓴 것이다. 서로 손발을 맞춰 허위보고를 해 지사의 눈을 가린 것이다. 우 지사가 낙점했던 바 대로 언론인 출신 L씨를 관광협회 상근부회장으로 보내도록 지시하고, 허위보고를 한 동향선배 모 서기관의 사표를 받았다. 인사담당 국장에겐 “차후 엄중 문책하겠다”고 차갑게 얘기한 뒤 경고조치를 내렸다.

 

 

 

그렇게 한 이유가 있다. 그 때 나로선 우리 제주도의 경쟁력 강화가 시급한 문제였고, 그 점에서 개혁작업이 필요했다. 나부터 사사로운 인연의 고리나, 그동안 제주에서 용인됐던 행태를 용납했다간 우리 제주도의 미래를 도저히 바꿀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궨당문화'로 불리는 친-인척 그룹의 연고주의가 때론 긍정적으로 작동하기도 하지만 오히려 폐해가 훨씬 더 크다는 점을 절감하고 있던 차였다. 그 점에서 우선 공무원들부터 경쟁력을 갖추는 게 급선무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그런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도 공무원은 물론 시·군·읍·면 공무원을 모두 순서대로 제주도공무원교육원에 모아 집합교육을 시켰다. 변화하는 시대에 맞는 경쟁력을 갖춘 의식무장을 생각한 것이다.

 

 

교육할 땐 무언가 달라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 교육이 끝나고 막상 공무원들이 현업에 복귀하면 아무리 뜯어봐도 변화의 조짐이 보이지 않았다. 그 다음엔 압박의 강도를 더 높였다. 도청의 국장실을 모두 없앴다. 국장실에 딸린 비서들도 모두 뺐다. 전 국장을 소관 과 단위 사무실에 배치했고, 전화도 직접 받아야 하는 것은 물론 차 한 잔도 손수 끓여 마시도록 했다. 그러자 조금씩 변화가 보이기 시작했다. 새로운 자세로 가자는 것이었고, 서서히 제주도 산하 공무원들의 임전태세가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런 개혁이 순탄할 리는 만무다. ‘안하무인 도지사’ · ‘독선과 오만의 도지사’ 등등. 제주의 언론으로부터 어떨 땐 집중포화도 맞았고, 경제계 기업인들과 지역유지 등으로부터 “속도를 늦추고 좀 아랫사람 얘기에 귀 기울이라”는 타박성 충고도 수차례 들었다. 많은 이의 목소리에 귀기울이지 못한 점에 대해 지금도 송구스럽다. 다만 그 시절 나로선 그게 최선을 다하는 것이었다. 그게 일부 특정인의 입김에 휘둘리지 않고, 더 많은 제주도민들의 이해를 존중하면서 그들의 미래를 책임져야 할 도지사의 책무라고 봤다는 점만 다시 말씀드린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의도하지 않았던 ‘눈물’이 있었다면 지금도 마음이 아프다. 다시 한번 그 분들에게 사과드린다.

 

 

 

다시 하던 얘기로 되돌아 간다. 도정 공직자들의 직무수행 패턴을 어느 정도 개혁하고, 이제 어느 단계에 이르렀다고 판단하자 난 그동안 제주도에 대해 품고 있던 구상을 하나씩 실현하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건 제주도종합개발계획을 확정하는 것과 마음 속에 품고 있던 ‘제주 물 자원화’ 구상을 실현하는 것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제주 물’ 구상은 계획했던 것보다 훨씬 더 추진에 가속도를 붙였다. 이유가 있다. 부임 이듬해인 1994년 3월 보사부 장관 고시(보사부령)로 제한되고 있던 생수시판이 위헌판결을 받으면서 ‘제주의 물 자원화 구상’은 현실화 발걸음이 빨라질 수 밖에 없었다. 생수시판이 허용된 마당에 제주도의 지하수가 사기업의 각축장으로 변하면 제주도는 ‘재주만 부리는 곰’이 될 가능성이 농후했기 때문이다.

 

 

그 시절 내 구상의 핵심은 지방공기업을 만들어 제주의 지하수를 상품화하고, 이를 세계적인 브랜드로 만들어 생긴 이익을 제주도민을 위한 공적자금으로 활용한다는 것이었다. 우선 제주도와 제주시에 있는 공영개발사업소를 통·폐합해 제주개발공사를 만드는 작업에 착수했다. 더불어 제주도개발특별법을 개정하는 준비에 들어갔다. 제주 지하수를 이용, 먹는 샘물을 제조·판매할 수 있는 주체를 지방공기업이 아니면 불가능하도록 묶어버리는 조항을 그 특별법에 담는 것이었다.

 

당시 가장 신경 쓰이는 곳이 한진그룹의 계열사인 ㈜제동흥산이었다. 그 회사는 1984년 이미 제주에서 유일하게 지하수를 이용한 먹는샘물 제조·판매 허가를 받고 있었다. 주한 외국인 사절 제공 등 수출용과 기내서비스 음료, 계열사 공급용으로 한정돼 있긴 했지만 그걸 그대로 두었다간 제2, 제3의 기업이 나타나 제주에서 먹는샘물 제조·판매에 나서겠다고 하면 막을 명분이 사실상 없었다. 그렇기에 제주개발특별법에 공기업만이 가능하도록 제한을 둬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제주에서 다른 사기업의 먹는샘물 사업 진출을 막기 위한 방편이다. 게다가 지금 ㈜한국공항으로 이름을 바꾼 ㈜제동흥산의 취수량 증량도 도의 허용이 없인 불가능하도록 했다. 당시 제동흥산의 하루 취수량이 21톤, 한달 600톤에 불과한데 지금 한 달 취수량이 3,000톤까지 가능하도록 제주도가 허가한 걸 보면 솔직히 답답함을 느낀다.

 

제주개발공사 조직은 1995년 1월 출범했다. 제주에서 지방공기업만 생수 제조·판매가 가능하도록 한 조항을 신설한 제주도개발특별법도 같은 시기에 국회를 통과했다. 그리고 그해 3월 말 난 지사직에서 물러났다. 그해 6월27일 치른 첫 민선 지방선거에 도지사로 출마하기 위해서였다. 고작 1년3개월의 관선 제주지사 재직기간이었지만 난 그 기간 중 내가 꿈꾸었던 제주의 미래비전을 실현하기 위한 제도와 메커니즘 구축을 거의 끝냈다.

 

 

 
     
 
   
 

 

 

 

 

 

 

민선 1기 첫 도지사 선거에 나서면서 내가 내건 슬로건은 <위대한 제주시대를 연다-경쟁과 자존, 그리고 번영>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뛰어든 민선 1기 첫 지방선거에서 나는 도민들과 언론을 통해 “제주 물 파는 봉이 신선달”이란 닉네임으로 회자됐다. 모든 준비가 마무리돼 당선만 되면 그 구상을 충분히 실현할 수 있다는 판단을 세운 것이다. 그리고 도민들은 그런 날 인정해줬다.

 

 

민자당 경선에서 탈락하자 탈당한 강보성 전 농림부 장관이 '꼬마 민주당'으로 불린 이기택 계의 민주당 후보로, 우근민 현 지사가 당시 여당인 민자당 후보로 출마했다. 난 무소속 후보로 나와 그들과 3파전을 벌였다. 정당을 선택할 길이 없어 무소속이었지만 내가 소속한 정당은 '제주도민당'이란 생각을 가슴에 새겼다. 그리고 난 그때 도민들의 선택을 받았다. 지금도 그때 도민들의 선택에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제주를 사랑한 도민들을 위해 난 일로써 보답해야 했다. 그 첫 승부수는 ‘제주삼다수’의 성공신화를 향한 도전이었다. <11편으로 이어집니다>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

=1942년생. 오현고를 나와 육군사관학교 4년을 중퇴, 1967년 5회 행정고시에 합격해 공직자로 입문했다. 제주도 기획관, 주이탈리아 한국대사관 농무관, FAO(국제식량농업기구) 한국교체수석대표, 농림수산부 축산국장, 농업구조조정정책국장, 기획관리실장을 거쳐 YS정부 시절인 1993년 12월 제29대 제주도지사로 취임했다.

 

이어 첫 민선 지방선거인 95년 6·27선거에선 무소속으로 출마, 당선돼 31대 지사를 역임했다. 그러나 98년, 2002년 두 번의 제주지사 선거에선 연거푸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그후 축협중앙회장을 거쳐 친환경 농업회사법인인 (주)삼무와 전시판매장인 삼무힐랜드를 운영했지만 지사 재직시절 뇌물수수사건에 휘말려 2년여 수감된 뒤 풀려났다. 삼무힐랜드는 수감기간 중 문을 닫았다.

 

제주삼다수와 관광복권, 제주국제컨벤션센터, 제주세계섬문화축제 등이 그의 지사 재직시절 작품이다. 현재 제주생태도시연구소 이사장직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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