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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현장-남기고 싶은 이야기]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1부 에필로그①)

[격동의 현장-남기고 싶은 이야기]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 편이 지난 주인 21일 1부의 막을 내렸습니다. 1부는 신 전 지사의 '꿈과 도전'이 주제였습니다. <제이누리>는 1부를 요약, 정리하는 격이 될 신 전 지사의 육성강연록을 준비했습니다. 1997년 행정자치부 지방행정연수원에서 그가 한 특강 내용입니다. 행정고시에 패스, 전국에서 근무중인 사무관 시보 등을 대상으로 2시간여 진행한 강연입니다. 이 강연에서 그는 <21세기를 대비하는 자치단체, 제주도의 비전>을 주제로 그의 포부를 밝힙니다. 그 해 이 강연은 강연에 나선 광역자치단체장 중 유일하게 연수원이 뽑은 명강의로 선정됐습니다. 2회에 걸쳐 강연을 소개한 뒤 9월11일부터는 '신 전지사의 회고록 2부-새로운 도전, 그리고 좌절과 시련'으로 연재를 이어가겠습니다. 변함 없는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 편집자 주

여러분, 정말 반갑습니다. 교육받느라고 힘드시죠. 저도 교육받은 경험이 많아 피교육생이 얼마나 힘든가를 잘 알기에 여러분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제주도지사 신구범입니다. 석영철 (지방행정연수원) 원장님은 개인적으로 보면, 행정고시 선배시고 특히 제가 정부임명 도지사 또 민선 도지사로 일하는 동안 내무부 차관보로 계시면서 제주도정 발전을 위해 정말 사심 없이 협력해 주신 선배 가운데 한 분이십니다. 그런 차에 여러분 덕택에 서울구경도 하고 여기 와서 여러분을 뵈니까 옛날 생각이 납니다.

 

저는 67년도에 고시에 합격해서 고향인 제주도로 갔습니다. 그 때가 67년 8월 17일인데 제주도청이 생기고 나서 고시출신이 온 건 처음이라 도대체 '이 사람을 어떻게 처리해야 될지 몰라' 완전히 제가 물건취급 당했습니다. 여러분 중에도 보직 받으신 분과 받지 못한 분들도 계시겠습니다만, 전혀 불편해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금은 그래도 체계적으로 시보기간도 거치고 연수도 하지만 그 땐 그런 제도가 없었어요.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95년 6월 27일 동시지방선거를 실시함으로써 명실 공히 본격적인 지방자치가 시작됐습니다. 제가 관선 도지사 1년 3개월과 민선 도지사를 하면서 겪었던 일선 단체장의 경험담 같은 걸로 여러분께서 제 말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세계화는 하나의 현상, 지방화는 자기책임(自己責任)

 


최근 우리 사회의 화두가 세계화, 지방화거든요. 세계화라는 게 도대체 뭡니까. 세계화(Globalization), 우리는 이것을 어떤 이념이나 이데올로기로 착각하는 경우가 의외로 많습니다. 세계화는 단순한 하나의 현상일 뿐입니다.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산업사회가 시작되었듯이, 세계화도 하나의 현상이지 이데올로기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현상을 피할 방법이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적응하느냐에 있습니다. 또 하나는 지방화(Localization) 입니다. 지방화는 결국 자기책임(自己責任)을 말하는 겁니다. 그러면 세계화, 지방화를 우리가 얼마나 제대로 인식하고 현실화시키려는 노력을 하고 있나 하는 겁니다.

 

◇문민정부가 실패한 두 가지 원인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국가차원의 얘기를 해야 되겠죠. 문민정부의 임기가 이제 거의 끝나고 있습니다만, 문민정부가 이렇게 끝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않았을 겁니다. 오늘 제가 오면서 두 가지 뉴스를 들었는데 하나는 IMF 극동지역 책임자가 와서 기자회견 한 내용으로 한국이 필요한 만큼 자기들이 구제 금융을 하겠다, 두 번째는 전국의 은행장들이 모여서 종금사가 망하면 큰일이 나니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자금을 지원해서 종금사를 살리겠다는 겁니다. 왜 이렇게 됐느냐 하는 겁니다. 지방자치도 여기서 경험을 얻어야 되는 게 아닌가 싶어요. 저는 그렇게 봅니다. 문민정부가 이렇게 된 것은 두 가지 원인이 있다고 봅니다. 하나는 비전이 없다는 겁니다. 문민정부가 우리 국민들에게 준 비전이 뭐냐? 비전이라는 것은 여러분들이 아시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능력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해서 그 기대를 국민들이 공유하는 것이 비전이거든요. 문민정부가 우리 국민들에게 준 비전이 문민입니까, 신한국입니까? 비전을 제시해주지 못했다 이겁니다. 예를 들어 다른 나라들은 새로운 2000년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준비들을 하고 있습니까. 사실 새로 오는 21세기는 단순한 100년이 아니라 새로운 천년(New-Millennium) 을 준비하는 겁니다. 이 새로운 천년을 준비하기 위해서 우리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는 겁니다. 이 정부의 가장 큰 문제는 비전이 없다는 겁니다.

 

두 번째는 시스템의 문제입니다. 국가를 통치하는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는 거죠. 여기서 우리들은 교훈을 얻어야만 합니다.

 

◇자치단체가 중앙정부로부터 물려받은 유산

 

지방자치를 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요소들이 있습니다. 얼마 전이라고 기억합니다만, 지방자치법 개정안 공청회가 있었는데 그 때 정세욱 교수가 이런 얘기를 했다고 합니다. ‘사실 6.27 선거에 의해서 지방자치를 실시하고 있지만, 지금 우리의 지방자치라는 것은 도지사와 시장·군수를 주민들이 직접선거에 의해서 뽑는 거 외에는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다’는 겁니다. 저도 상당부분 그 말에 동감해요. 도지사나 시장·군수를 직접 선거에 의해 뽑은 것 외에는 달라진 게 뭐 있습니까? 아까 세계화와 지방화 얘기도 했지만 사실 세계화를 우리가 다르게 표현한다면, 전에는 국민경제라는 한 배가 있었기 때문에 그 국민경제 안에 타고 있으면 우리는, 각 지역이 더 개발되든 덜 개발되는 국민경제의 과실을 서로 나누어 가질 수 있었거든요. 우리 제주도의 예를 들면, 1인당 GDP가 9,000$로 전국 평균 GDP의 90% 수준밖에 안됩니다. 그러나 소비와 지출은 어떤가 하면, 전국 최고수준입니다. 말하자면 제주도는 국민경제로부터 도움을 받고 있는 땅인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까지는 가능했거든요. 그러나 세계화라는 것이 이제 국민경제를 깨버린 겁니다. 전에는 일본경제, 미국경제, 대한민국 국민경제가 있었지만 이제는 그런 얘기가 있나요? 제네럴 일렉트릭, 미쓰비시, 현대, 삼성 이런 것만 남았거든요. 이럴 때 지방이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를 하는 게 과제입니다.

 

그 다음 아까 자기책임을 얘기했지만 지방자치라는 것은 주민 스스로 의사결정을 해야 됩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지방자치가 되질 않아요. 그러면 적어도 세계화, 지방화라는 새로운 여건변화에 맞춰서 지방 스스로가 살아 나갈 수 있도록 하는 준비를 중앙정부가 해 주고 지방자치를 실시했는가 하는 겁니다. 지방자치를 실시한 것은 정치적인 판단에 의해서 한 것뿐이지 준비해 놓은 것이 사실 없습니다. 정말 민선 도지사나 시장·군수 입장에서는 “문민정부로부터 지방자치를 하기 위해서 물려받은 유산이 뭐냐” 누가 그런 질문을 하면, 저는 가혹하게 두 가지다 대답할 거예요. 물려받은 것은 딱 두 가지다, 하나는 황폐(荒廢)된 행정(行政)이요, 다른 하나는 병(病) 공동체(共同體)라고요. 정말 지방자치를 할 수 있는 모든 여건을 갖춰 놓고 지방자치를 실시했는가 하는 겁니다. 제가 민선 도지사가 돼서 보니까 기막힌 일중의 하나는(아마 여러분들도 일선에 가 계시면서 그런 경험을 했을 거예요) 분명히 지방시대라고 하는데 우리 공무원들의 관행이나 의식, 사고의 형태는 완전히 30년 전하고 똑 같았습니다. 말하자면 중앙의 지침에 의해서 일을 하는 것 이상의 생각을 못하고 있었거든요. 그러기 때문에 지방행정, 지방자치라고 하는 차원에서 보면, 이것은 황폐된 행정입니다. 지방행정을 할 수 있는 준비를 해놓지 않고 지방자치를 실시한 겁니다. 지금까지 중앙정부가 만들어 놓은 법령이나 지침에 의해 처리하던 행정에서 한 발자국도 더 나갈 수 있도록 해 놓은 게 하나도 없어요.

 

다음에 병든 공동체라는 것은 지금 어떻습니까? 각 지역에 가보면 하수종말처리장, 쓰레기매립장, 폐기물 소각시설 등을 하려면, 이 시설들을 전부 혐오시설이라고 그러죠. 소위 NIMBY라고들 하지 않습니까. 지금 이게 극단화되어 있거든요. 여러분 지역에 교통질서나 주차질서, 주변의 청소상태 등을 하나하나 보세요. 제대로 되어 있는 게 있는지, 하여튼 지금처럼 지역이든 개인이든 이기주의가 한계점에까지 치닫고 있는 예는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공동체를 자치단체장들이 물려받아서 지방자치라는 것을 하고 있거든요. 이것을 여러분들이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진정한 지방자치 정착의 3요소

 


 


그러면 어떻게 하란 얘기냐? 그래서 저는 우리가 지방자치를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3박자가 맞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중앙정부가 확실한 지방마인드를 가져야 돼요. 정부는 지방마인드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 지방에만 보고 지역경제를 활성화해라, 물가를 잡아라, 경제를 안정시켜라 하지만 무슨 방법으로 합니까? 대통령은 행정권을 확실하게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조세, 재정, 금융권 모두 가지고 있잖아요. 그러면서도 경제가 이리 된 것 아닙니까. 지방자치단체장들은 행정권 중에서도 극히 일부부분만 가지고 있거든요. 하다못해 무슨 경찰권이라도 있나요? 전혀 수단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행정권의 극히 일부만을 가지고 있는 자치단체장들에게 일을 하라고 하면, 무슨 방법으로 할 것이냐는 겁니다. 지방시대가 됐으니까 자치단체장들을 ‘하시오 만병통치약’으로 알고 있습니다. 자치단체장들은 무한책임사원으로 돼있어요. 권한이 없는 자치단체장들에게, 무한책임이 가능합니까? 예를 들어 우리 제주도에 얼마 전에 싱가폴과 영국 사람들이 기발한 아이디어를 가지고 왔습니다. 스웨덴 북해 같은 곳에서는 바다에 플랫폼을 만들어서 기름을 뽑아내지 않습니까. 그런 식으로 제주도 앞바다에 플랫폼을 만들고 그 위에 호텔을 얹겠다는 거예요. 전 세계에 아직까지 그런 호텔은 없습니다. 기가 막힌 아이디어임에도 안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공유수면 관리법에 의한 건설교통부장관 훈령에 의해서 공공용 이외에는 공유수면을 점유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공유수면 관리법에 의한 건설교통부장관 훈령에 의해서 공공용 이외에는 공유수면을 점유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그것도 겨우 장관 훈령 하나 때문에 그 멋진 해상호텔을 못 짓는다는 겁니다.

 

그 다음에 재일동포 중에 제주 출신들이 많습니다. 이 분들 중에 조상 대대로 가지고 있던 고향땅에 골프장을 하고 싶어 하는 분들이 많아요. 골프장을 건설하려면, 땅을 살 돈이 아니라 골프장을 건설하는 비용이 필요할 거 아니에요. 그 건설비용을 일본에서 제주도로 가져오려고 하니까 정부에서 안 된다는 겁니다. 소위 재일동포도 외국인이다, 외국인 투자규정에 의해서 골프장 지을 돈은 못 가져오게 되어 있다는 거지요.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다음 사례입니다. 제주도는 재정자립도가 30%에 불과합니다. 서울이 98%, 경기가 78%이지만 제주도는 30%밖에 안 됩니다. 돈은 보조를 받거나 빌리거나 해야 할 거 아니에요. 기업은 해외에 가서 현금차관을 가져 올 수 있는데, 왜 자치단체는 못하느냐 이거예요. 이걸 가지고 정부와 2년이나 싸웠지요. 정부와 2년간 싸운 끝에 16개시도 가운데 제주도가 금년에 제일 먼저 일본 채권시장에 사무라이 본드 즉 해외증권을 발행해서 200억 엔을 가져왔습니다. 그 외에 대구시도 미국 채권시장에 양치본드를 발행해서 가져왔습니다. 이게 처음 시작이거든요.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예를 들어 제주도는 감귤산업이 무너지면 제주 경제 전체가 무너집니다. 그러면 감귤을 살리기 위해서 생산조정이 불가피합니다. 금년 7월부터 오렌지 수입이 전면 개방됐거든요. 그러나 생산조정제를 할 수 있는 권한 하나가 도지사에게 없어요. 왜냐하면 상위법령에 근거가 없기 때문에 제주도에서는 감귤생산조정제 조례를 못 만든다는 겁니다. 하지만 제주도에서는 만들었어요. 그리고 정부와 싸웠습니다. 제주도 감귤산업이 무너지면 정부가 책임을 지겠느냐, 상위법령에 근거 없다고 해서 우리 농민들이 합의해 낸 생산조정제도 안된다면 무얼 하라는 얘기냐? 마지막에 공정거래위원회하고 엄청난 싸움을 해서 결국 우리는 조례를 시행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지방자치를 해 나가고 있거든요. 이것을 여러분들이 명확하게 아셔야 합니다. 저는 정부와 싸우고 건의하고 요청하면서 지금 일을 해 나가고 있습니다.

 

여기 서울시나 경기도에 계신 분들은 저의 얘기를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런 관점에서 저는 조순 전 서울시장이나 이인제 전 경기지사를 좋지 않게 생각합니다. 정말 34년 만에 얻은 지방자치를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자치단체장들이 힘을 모으고 정부와의 교섭력을 강화하면서 우리 일을 해야 하는데 조순 시장이나 이인제 지사는 얼굴마담하다가 가버린 것 같아요. 재정자립도가 89%, 78%, 그 정도 실세라면 왜 지방자치를 발전시키려는 일들을 임기 중에 하지 않았나요? 서기관 하나도 마음대로 못한다, 그것은 핑계에 불가능 합니다. 아까 제 해외증권 발행도 말씀드렸지만, 지금 여러 가지 제도 자체가 지방자치를 완벽하게 할 수 있는 준비는 되어 있지 않지만, 정부와 교섭하고 승인이나 동의 받는 과정을 거치면서 얼마든지 일을 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자치단체장에게 100% 권한이 없다 해서 이를 탓하기만 한다는 것은 잘못입니다. 언젠가는 오도록 해야죠. 그러나 지금도 노력만 하면 할 수 있는 장치들은 다 되어 있거든요. 또 한편으로 저도 도지사로서 두렵게 생각하는 것도 있습니다. 정말 완벽한 지방자치를 하라고 해서 모든 권한을 시도지사에게 주었을 때, 과연 소화해 낼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겁니다. 그래서 조순 전시장이나 이인제 전 지사 같은 양반들에게 저는 유감천만입니다. 정말 34년 만에 부활된 지방자치인데 자기들과 그 후대 특히 이 대한민국의 지방자치를 위해서 얼마나 헌신했는가 하는 거예요. 이러한 것들을 여러분들이 좀 아셨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지방자치라고 하는 것은 정부가 확실한 지방마인드를 가져야만 합니다. 지방경제가 활성화되면 그만큼 국가는 짐을 더는 겁니다. 우리 제주도 같은 경우에 대한민국 전체 GNP의 1% 밖에 안 됩니다. 이 1%짜리가 GNP 5%, 10%가 될 수 있도록 정부가 지방마인드를 가지고 해줘야 됩니다. 저는 도지사이면서도 정부에다가 굳이 돈 달라고 하지 않습니다. 줄 돈이 없으면 빌려오거나 조달할 수 있도록 만 해달라는 겁니다. 정부는 제도를 만들어 달라는 겁니다. 바로 정부가 지방마인드를 가지고, 자치단체가 지방자치를 성공적으로 해 나갈 수 있도록 해주는 게 아주 중요하다는 겁니다. 이것을 해내지 않는 한 안 되는 거예요.

 

다음 두 번째가 지방자치단체, 지방의회까지 포함한 자치단체의 문제입니다. 지방자치단체가 확실한 지방경영 마인드와 철학을 가져야 돼요. 나중에 제도의 사례를 말씀드리겠습니다만, 소위 정부의 법령이나 지침에 의해서 자치단체가 위임받아서 ‘선량한 관리자로서의 주의의무만 가지고 있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한 지방행정은 결코 발전할 수가 없습니다. 지방차지단체에 근무하는 공무원과 의회 의원들 전부 달라져야 되는 거예요. 의회 의원들은 어떻습니까? 국회의 겉모습만 배운 겁니다. 요즘 우리 도청 공무원들이 도의회로부터 행정감사를 받고 있는데 전부 질책, 질책, 무엇이 그렇게 지방의원들에게 질책 받을 일이 많나요...... 지방의회와 자치단체라고 하는 것은 오순도순 모여 서로 협의하고 잘못된 것이 있으면 고쳐나가고, 할 일이 있으면 힘을 모아 해나가는 겁니다. 그런데 삼권분립으로 착각하고 있거든요. 외국 같은 경우에는 자치단체장이 의회 의장을 겸임하는 곳도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지방자치거든요. 그런데 마치 국회와 행정부처럼 생각하는 거예요.

 

지방단체에 견제와 균형이 필요할 정도로 힘이나 권한이 있는가요?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도지사, 시장·군수에게는 파출소 소장 임명권한 하나도 없어요. 그런데 견제와 균형이라는 잘못된 모습, 겉모습만 배웠거든요. 이러한 것들이 지방의 에너지를 얼마나 축내고 있는지, 이것이 잘못되었다는 거예요. 말하자면 지방자치단체는 지방경영을 하겠다는 확실한 신념과 철학을 가져야만 된다는 겁니다.

 

세 번째는, 지역주민들의 문제입니다. 아까 병든 공동체라고 표현했습니다만, 지방의 주민들이 ‘자기가 주인이다’라는 생각을 가져야 되는 겁니다. 그 의식을 갖지 않는 한, 지방자치는 정책되지 못합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국가, 자치단체, 지역주민’이 세 박자가 맞아 떨어져야만 지방자치가 제대로 뿌리내린다는 겁니다. 이런 것들을 하기 위해서 지금 어느 시도 또는 시군이 되었든 나름대로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경쟁, 자존, 번영의 위대한 제주시대를 열며...

 

 


이러한 것을 전제로 제가 앞으로 드리는 말씀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지난 93년 12월인데요, 제가 농림수산부 기획관리실장하다가 제주도지사로 발령받고 갔습니다. 가서 보니까 여러분들이 아시는 것처럼 UR협상이 막 타결된 때입니다. 감귤은 제주도의 지주산업, 기둥산업, 생명산업이라고까지 합니다. 왜냐하면 제주도 전체 GRDP의 20%, 제주 농업소득의 67%를 감귤이 차지합니다. 그래도 여러분들은 감이 잘 오지 않을 거예요. 제주도 농가 소득이 전국 시도 중에서 1위입니다. 작년에 호당 농가 소득이 2990만원으로 2위를 차지한 경기도보다도 110만원이 더 많고, 전국 농가의 평균소득 2330만원에 비해서는 무려 660만원이나 더 많은 액수입니다. 이렇게 대비해 보면, 제주도 농가소득이 얼마나 높은지 아실 거예요. 중국 사람들이 제주도에 와서는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도민들의 소득과 생활수준입니다. 중국 사람들은 지금도 공업화를 해야만 잘 산다고 생각하고 있거든요. 그런데 제주도에 와서 공장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거든요. 전부가 농업과 관광 일을 한다는데 2차 제조업이 없으면서도 왜 이렇게 소득이나 생활수준이 높은가? 그게 중국 사람들이 제일 궁금해 하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UR협상이 타결되고 나서 정말 감귤을 살리기 위한 몸부림을 치고 있어야 할 텐데 제가 93년 12월 말에 도지사로 발령받고 가서 보니까 감귤대책, UR대책 하나 없어요. 하지만 이러한 두 가지 대책은 정부가 해주겠거니, 아니면 농민들 입장에서는 수입개방 반대만 하고 있으면 되겠거니 하는 겁니다. 그것이 아닌데도 말 이예요. 그런 시기에 제가 도지사로 갔거든요. 우리 공무원들의 생각에는 중앙정부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제가 일을 하면서 도대체 앞으로 지방자치를 하기 위해서 우리가 가져야 될 기조가 무엇인가? 그걸 계속 생각해 왔어요. 여러분들에게 자료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 후 제가 6.27 지방선거에 출마하면서 내 건 캐치프레이즈가 ‘경쟁, 자존 그리고 번영의 위대한 제주시대를 연다’는 것입니다.

 

◇제주인의 자존(自尊) 확인

 


이중에서 제가 제일먼저 내세운 게 자존이죠. 우리 제주도 지방선거 때 재미있는 일이 있었는데, 제가 크리스찬입니다. 또 상대방 후보는 불교 출신이다 보니 종교끼리도 부딪치게 되는 겁니다. 선거가 끝난 후 스님들하고도 제가 가까워져서 언젠가 선거 때 상대 후보 편에 섰던 스님이 오셔서 하시는 말씀이 ‘신지사가 하는 것은 다 좋은데 위대한 제주시대는 좀 바꿔라’ 그러시는 거예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랬더니 ‘인구가 52만밖에 안 되는 조그만 제주도가 어떻게 위대하게 될 수 있느냐, 제주도의 분수에 맞도록 말을 고쳐라’ 그러시길래 제가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스케일이 큰 사람 눈에는 크게 보이고, 작은 사람 눈에는 작게 보이는 겁니다’ 라고요. 아마 우리 국민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제가 오늘 비행기를 타고 오면서 코리아 타임즈에서 상당히 재미있는 글을 읽었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우리들의 결점을 많이 얘기한다’는 거예요. ‘조급하고, 허세부리고, 합리적으로 생각하기 보다는 충동적이다, 하지만 사실 미국인들에게는 결점이 없겠으며 어느 나라 사람이든지 결점이 없겠는가, 문제는 우리 문화를 어디에다 바탕을 두고 어떻게 발전시키고 좋아지게 만드느냐 하는 것이 과제일 뿐이지 지금 지적받은 결점들은 별문제가 아니다’라고 외국인이 글을 썼더군요.

 

제주도의 경우도 ‘제일 먼저 풀어야 될 게 무엇인가’하고 생각해 봤어요. 아까 제가 경쟁, 자존, 번영 얘기를 했습니다만, 저는 자존 그 문제부터 풀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게 제주도의 역사와 관련됩니다. 정말 지방자치를 하기 위해서는 제주도의 역사와 관련됩니다. 정말 지방자치를 하기 위해서는 제주도 사람들이 얼마만큼 주인의식을 갖느냐 하는 게 제일 중요한 것이거든요. 여러분, ‘로마인 이야기’ 읽으셨어요? 저는 3권까지 밖에 못 읽었지만 그 시오노나나미 책에 보면, 아주 가슴에 와 닿는 얘기가 있어요. 그 로마인들이, 지성에 있어서는 그리스 인만도 못하고, 기술에 있어서는 에트루리아인만도 못하고, 용기에 있어서는 카르타고인만도 못한 로마가 어떻게 세계를 제패했었는가 하는 거예요. 로마하면 법하고 질서 아닙니까. 거기서 강조한 것은 로마인의 정신, 로마인들의 주인정신입니다. 모든 부분에서 1등을 못하는 로마가, 로마인들의 주인정신이 로마로 하여금 세계를 제패하도록 만들었다는 얘기죠. 우리 제주도가 어떻게 보면 그게 필요한 땅입니다.

 

여러분, 제주도 하면 딱 떠오르는 게 무엇입니까. 탐라... 제주도는 지금까지 지리적으로, 역사적으로 볼 때 두 가지로 특정 지워 집니다. 하나는 격절성(隔絶性) 즉 떨어져 있다, 바다를 건너서 떨어져 있다는 것이죠. 옛날에는 탐라, 탐모라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렸었는데 제주도라는 것은 육지에 계신 분들이 편하게 붙인 겁니다. 바다 건너간다, 그래서 제주도가 된 것인데,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 제주도에 탐라라고 하는 왕국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역사상 천년 동안 존속했던 왕국이 이렇게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적은 없습니다. 고려가 탐라왕국을 제패한 것이 고려 숙종 10년인 1105년입니다. 그래서 그 후 조선왕조와 일본이 지배하면서 전라남도에 예속되어 제주도가 섬도(島)자로 쓰이다가 지금의 길도(道)자로 자립한 것이 1946년입니다. 그러면 1105년에 탐라왕국이 없어지고 나서 약 900년 동안 제주도 사람들은 지배만 받고 살아온 거예요. 그렇듯 900년 동안 지배만 받고 살아 왔는데 뭐가 남아 있을 것 같습니까? 또 책 얘기해서 미안합니다만, 일본인 3세인 후란시스 후쿠야마가 쓴 ‘역사의 종언(歷史의 終言)’이라고 있지 않습니까, 그 ‘역사의 종언’이라는 책에 보면, 역사의 끝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인간이 발견해 낼 수 있는 정치체제, 경제체제로 민주주의와 자유경제 체제, 이것 이상 더 발전할 수 없는 단계라고 결론 맺는 책입니다. 최근에는 그 양반이 ‘TRUST(信賴)’라는 책을 또 썼어요. 그 책에서는 이 세상에 도덕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주인의 도덕이요 다른 하나는 노예의 도덕이라는 겁니다. 주인의 도덕은 책임을 지고 희생할 줄 안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자존 때문에요. 그러나 노예의 도덕이라는 것은 자존이 없으니깐 책임도 희생도 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제가 지방자치는 우리가 책임을 지는 것이라고 얘기했잖아요. 아까 로마인 얘기도 했지만 같은 얘기거든요. 주인정신, 자존, 지금 제주도에서 가장 빨리 복원시켜야 될 일은 바로 그것입니다. ‘내가 책임지고 희생할 줄 아는 자존’ 이거라는 거예요. 이것을 찾기 위한 일들을 시작해야 한다는 겁니다. 아까 제가 탐라 얘길 했지만 AD 2세기부터 천년동안 계속됐던 탐라가 지금은 흔적도 없습니다. 제주도에 와서 탐라왕궁, 왕의 무덤, 왕의 연대기를 보신 적이 있나요? 제가 우리 제주도 사람들에게도 이런 얘길 합니다. 우리가 조선왕조만 하더라도 태정태세문단세.... 이러면서 외우잖아요. 탐라왕국의 1대왕이 누군지, 7대왕이 누군지 우리는 모릅니다. 왕궁, 왕의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는 더더욱 모르고. 그래서 제주도 사람들의 자존을 복원시키는 일부터 시작하고 있는 겁니다. 제주인의 주인의식, 제주인의 왕이 되었던 시대, 제주인이 주인이었던 시대를 찾자고. 그러한 주인정신을 가지고 제주도가 새로 시작하자는 얘깁니다. 공무원이 어떻고 그런 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니에요. 해낼 수 있어요.

 

그러나 무엇이 기초로 해서 지방자치를 시작할 것이냐? 지금 서울대학교의 신용하 교수께서 제주사정립추진협의회 위원장을 맡으셔서 그런 일들을 하고 있어요. 대우그룹의 김우중 회장도 제주도 분이신데 이 얘기 듣고는 당신도 정신이 번쩍 났나봐요. 그래서는 제주사 정립사업 기금으로 10억 원을 턱하니 내놓으셨어요. 필요하면 돈을 더 쓰라는 거예요. 그런데 요금 IMF를 맞아서 더 줄지는 모르지만. 제주인의 주체성, 주인정신, 아까 얘기한 것처럼 제주인 들의 왕이 되었던 시대, 제주인이 주인이 되었던 시대의 삶을 찾아서 그 삶의 바탕으로 지방자치를 해 나가자. 그리고 또 하나 하고 있는 것이 아마 여러분들이 전해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컨벤션센터를 제주도 사람들의 손으로 건립하고 있다, 이것은 제주인들 스스로 자존을 확인하는 겁니다. 우리 손으로 정말 해 날수 있을까? 한번 해보자 이거죠.

 

작년 8월 1일 제주도 도제(道制)실시 50주년 기념식에서 도민들에게 제안했어요. 우리 손으로, 제주인의 힘으로 5,000명이 들어갈 수 있는 국제적인 컨벤션센터를 지어보자, 그렇게 제안한 후 닥 1년만인 금년 8월 1일에 (주)제주국제컨벤션센터 창립총회를 했습니다. 여러분, 아시아와 유럽 정상회담. 아시죠? 이 ASEM을 유치하기 위해서 작년에 서울, 경주, 부산, 대전, 경기, 제주도가 한판 붙었습니다. 모두들 탈락되고 마지막에 제주와 서울만이 남았어요. 그런데 제주도가 결국 졌습니다. 서울은 지금 한국종합전시장(KOEX)자리에 컨벤션센터를 건립하고 있어요. 일산, 대전, 경주 모두 다 포기하고 오직 제주도만 컨벤션센터를 건립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컨벤션센터를 대한민국에서 서울과 제주도에만 있게 됩니다. 이달 말까지 개념설계(Concept design)를 받고 12월에는 설계에 들어갑니다.

 

요즘은 전부 Fast-Track 방법으로 공사하기 때문에 내년 3월이면 착공해서 아무리 늦어도 2000년 8월이면 개관할 거예요. 컨벤션 센터라는 시설이 문제가 아니라 제주도 사람들의 자존을 확인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여기에 1,800억 원이 필요한데 제주도민들이 609억 원의 주식만 사주면 이 컨벤션센터 사업은 전국 최초의 도민주로 하게 되는 거지요. 문희갑 대구시장이 저에게 그 얘길 듣고 깜짝 놀라더군요. 대구시에도 609억 원을 도민주로 못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조그만 제주도가 609억 원씩이나 도민주를 하겠다는 얘기냐? 그러나 우리 제주도는 공모한 결과 얼마냐, 아마도 여러분들 놀랠 거예요. 609억 원이 문제가 아니라 자그마치 1088억 원, 당초목표인 609억 원 보다도 무려 79%나 더 많은 거예요. 우리 제주도민들이 그렇게 함으로써 자존을 확인한 겁니다. 이것을 바탕으로 제주도가 앞으로 지방자치를 하겠다는 겁니다.
 

 

<다음 주에 1부 에필로그 2편 이어집니다>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
=1942년생. 오현고를 나와 육군사관학교 4년을 중퇴, 1967년 5회 행정고시에 합격해 공직자로 입문했다. 제주도 기획관, 주이탈리아 한국대사관 농무관, FAO(국제식량농업기구) 한국교체수석대표, 농림수산부 축산국장, 농업구조조정정책국장, 기획관리실장을 거쳐 YS정부 시절인 1993년 12월 제29대 제주도지사로 취임했다.

 

이어 첫 민선 지방선거인 95년 6·27선거에선 무소속으로 출마, 당선돼 31대 지사를 역임했다. 그러나 98년, 2002년 두 번의 제주지사 선거에선 연거푸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그후 축협중앙회장을 거쳐 친환경 농업회사법인인 (주)삼무와 전시판매장인 삼무힐랜드를 운영했지만 지사 재직시절 뇌물수수사건에 휘말려 2년여 수감된 뒤 풀려났다. 삼무힐랜드는 수감기간 중 문을 닫았다.

 

제주삼다수와 관광복권, 제주국제컨벤션센터, 제주교역, 제주세계섬문화축제 등이 그의 지사 재직시절 작품이다. 현재 제주생태도시연구소 이사장직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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