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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현장-남기고 싶은 이야기]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18)

1998년 11월 어느 날. 조간신문을 집어 든 난 한동안 회상에 잠겼다. 안타까운 마음이었다. 일본 오키나와 지사 선거에서 오타 마사히데(大田昌秀) 현 지사가 낙선했다는 기사가 실려 있었다. 그는 내가 1998년 6·4지방선거에서 낙선했다는 소식을 듣고 “답답하고 서운하다”는 말을 전해온 인물이다.

 

그 일이 있기 2년여 전인 1996년 나는 그를 처음 만났다. 71세의 노(老) 지방정객이었다. 작은 키와 탄탄한 체구에 남방계 특유의 고집스런 인상을 가지고 있는 그는 일본 와세다 대학 영문과를 졸업한 후 미국 시라큐스 대학에서 언론전공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사람이다. 고향 오키나와로 돌아와 평생 오키나와대 교수로 봉직하다 1990년 연합공천 형식으로 오키나와현 지사 선거에 무소속 후보로 출마해 당선됐다. 11월의 선거에서 그는 3선 고지를 노리다가 이나미네 게이치 자민당 후보를 만나 패배한 것이다.

 

그는 오키나와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의 철수를 주장하면서 오키나와의 자존·자립의 꿈을 실현하려고 했던 이상주의자다. 1997년엔 오키나와의 미군기지 사용연장에 대해 서명을 거부해 일본 대심원으로부터 그의 거부권 행사가 위헌이라는 판결을 받기도 했다. 그런 그와의 인연은 나에게 운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1995년 2월 비서실에서 두툼한 보고서가 올라왔다. ‘동아시아 섬관광정책 네트워크 구상’이라는 보고서였다. 작성자는 국제협력통상실에 근무하는 송재호 관광정책 전문위원(한국문화관광정책연구원장 역임, 현 제주대 관광개발학과 교수)이었다.

 

성장하는 한국의 관광산업, 그리고 제주관광산업의 미래비전을 주목하고 있는 보고서였다. 그 때의 예측이 이미 전 세계 관광인구가 향후 20년 동안 2배가 증가할 것이며, 아시아지역은 3배 이상 증가할 것으로 보았다. 한마디로 아시아는 앞으로 폭발하는 관광시장이 될 가능성이 어느 대륙보다 크다고 본 것이다. 일본 1억2000만명, 중국 13억명 등을 포함해 우리 주변 동북아시아 거주 인구만 놓고 보더라도 20억명인데 그들이 우리 시장인 셈이다. 그 지점에서 난 20억 인구를 두고 있는 동북아시아 지역에서,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관광시장을 석권하기 위한 우리의 관광전쟁 무기가 무엇인지 물음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섬’이란 특성에 착안했다. 18세기까지 인류의 문명은 대륙중심이었지만, 그 이후엔 영국·일본·싱가포르·홍콩·대만 등 일찍이 깬 ‘섬’지역으로 인해 인류의 문명에 새로운 기운이 움텄다. 더욱이 21세기는 해양시대라고 판단한 난 우리 제주도는 섬으로 승부를 걸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으로 기획한 것이 1998년 7월18일부터 8월13일까지 한달간 우리 제주도에서 처음 열렸던 ‘세계섬문화축제’다. 송 전문위원의 보고서는 바로 그런 내용들을 담고 있었다.

 

그 시절 나는 각종 모임에서 기회가 될 때마다 이 구상과 관련해 이런 말을 했다. “앞으로 우리의 경쟁상대는, 미안하지만 대한민국 안에 없습니다. 일본정부가 앞으로 5년 동안 무려 5조엔을 투자해 아시아지역에서 제2의 홍콩으로 만들려는 오키나와, 700만명의 인구를 갖고 있는 중국 최대의 경제특구 하이난섬, 그리고 연간 400만명이 넘는 외국관광객이 찾아오고 19개의 국제항공노선을 갖춘 인도네시아의 발리가 바로 우리의 경쟁상대입니다. 이들과 싸워서 우리 제주도가 이길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은 이들과 손잡고 시장을 공유하는 것입니다.”

 

95년 6월 선거에서 당선되자마자 난 이를 바로 실천에 옮겼다. 그해 7월 섬관광정책포럼(ITOP; The Inner Island Tourist Policy Forum) 창설을 중국 하이난과 인도네시아 발리에 서면으로 제안하는 한편 8월, 포럼 창설을 협의하도록 김한욱 관광문화국장(전 국가기록원장, 제주도 행정부지사 역임) 등 관계공무원을 일본 오키나와에 보냈다. 발리와 하이난은 제주도와 이미 자매결연 관계에 있었고, 포럼 창설을 놓고 공식·비공식 논의가 진행된 반면 오키나와는 자매결연 관계도 없었고, 외무부를 통한 협력과정에서도 그들이 포럼창설에 소극적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오키나와는 1995년 8월16일 ‘포럼참여 불가’ 입장을 통보해왔다.

 

 

난감했다. 경제대국 일본의 오키나와가 불참하는 섬괌광정책포럼으로는 동북아시아 지역의 다국적 도서관광 협력체계를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오키나와의 포럼 참여 불가 입장은 공식적으로는 오키나와 주둔 미군의 초등여학생 강간사건 등 국내문제 때문이었지만 자존심 문제가 더 크게 도사리고 있는 것이라는 말이 들렸다. “왜 4개의 섬 가운데 가장 작은 제주도가 포럼을 주도해야 하느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외무부와 주일 한국대사관, 그리고 오키나와를 관장하는 주일 후쿠오카 총영사관을 통해 오키나와의 참여를 다시 교섭해주도록 요청하는 한편 그해 10월7일부터 열리는 한라문화제에 중국 하이난성의 주안 총우 성장, 인도네시아 발리의 이도 바구스 오카 주지사, 그리고 오키나와의 오타 마사히데 지사를 공식 초청했다.

 

예상대로 오타 오키나와 지사는 불참했다. 그러나 그를 제외하고 한라문화제 기간 중에 하이난 성장, 발리 주지사와 함께 우리는 동아시아 섬관광정책 포럼 창설에 원칙적인 합의를 했다. 오키나와에 대해 “당신들도 고집 부리지 말고 들어오시라”는 무언의 압박용이었다. 그러나 반응은 여전히 없었다. 마지막 수단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타 마사히데 지사와 직접 협상하는 것 외에는 달리 길이 없었다.

 

직접 나서기로 결심했다. ITOP 포럼을 거절한 오키니와에 대해 제안자인 제주도지사로서의 입장과 자존심, 그리고 협상이 실패할 경우 위험부담 등을 감안해 공식방문이 아닌 관광여행으로 비공식 일정을 잡았다. 김포발 오키니와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제주를 떠났다. 그리고 일요일 오키나와에 도착했다. 휴일인데도 불구하고 오키나와현 관계자들이 공항에 나와 우리 일행을 영접했다. 또 도착 당일 오타 마사히데 지사가 오키나와 전통 음식점으로 우리를 초청해 비공식 만찬을 베풀어 주었다. 그래도 제주도지사가 관광차 온다는데 무심코 지나쳐 버릴 수는 없었던 모양이었다.

 

만찬 도중 우리는 역사와 문화, 그리고 지역경제에 대해 서로 많은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그는 작달막한 키에 근엄하고 고집스런 인상을 주었으나 웃는 모습은 의외로 소박하고 깨끗한 느낌이었다. 그는 영어도 유창했다.

 

 

이야기가 경제문제로 옮아가자 그는 청·장년들이 고실업 문제로 어려움이 많다고 고민을 털어놨다. 당시 오키나와의 면적은 2,000평방km로 제주도의 1.1배 정도지만 인구는 120만명으로 2배가 넘는다. 산업구조는 서비스업 중심의 3차산업이 78%인 반면 1차 산업은 2.8%에 불과하고, 지역경제의 40% 내외를 미군기지에 의존하고 있어 청·장년층 실업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던 현실이다. 반면 제주도의 경제는 그 시절 1차 산업 의존도가 30% 내외였고, 경제활동인구도 34%를 흡수하고 있어 실업률은 미미하다고 설명해줬다. 그가 흥미를 가질 것이란 계산이 깔린 설명을 한 것이다. 물론 1차 산업 강화를 골자로 한 나름의 해결책도 그에게 권고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공무원과 언론인 교류 등 상호교류에 관한 문제로 논의가 이어졌다.

 

첫 만남치고는 괜찮은 느낌이었다. 자연스레 다음날 오전 9시30분 오키나와현 지사실로 그를 예방하기로 예정에도 없던 약속이 이뤄졌다. 비공식 일정이 드디어 공식일정의 길로 우리를 안내한 것이다. 오키나와현청 집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문화와 역사 얘기로 대화를 시작했다.

 

“1499년 오키나와에 표류했던 제주인 김유비 일행의 오키나와 체류기를 보면 오키니와 사람들은 길에 돈주머니가 떨어져 있어도 줍지 않는다는 말이 있을 만큼 정직하다고 들었습니다. 우리 제주도에는 대문 없고, 거지 없고, 도둑이 없다는 3무(無)가 있습니다.”

 

“오키니와에도 고전을 보면 거지 없고, 도둑 없고, 그리고 현관이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대문과 현관만 서로 다른 3무(無였)다. 과거 집에서 ‘돗통시’를 만들어 돼지를 키우던 풍습까지 같았다. 물론 오키나와로 가기 전 읽었던 자료도 떠올렸다.

 

2차 세계대전 말 일본 군부는 미군이 일본 본토 침공을 위한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해 제주에 상륙하리라 예상했다. 그에 맞서 최후의 결전(태평양 결 7호 작전)을 제주에서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미군은 1945년 4월1일 오키나와로 상륙했고 소위 ‘철의 폭풍’이라는 3개월간의 전쟁에서 그 당시 오키나와 주민의 1/3인 15만명이 희생됐다. 미군이 오키나와가 아니라 제주도로 상륙했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런 역사를 떠올리다 난 오타 마사히데 지사의 얼굴을 쳐다보며 조용히 말했다.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오키나와 주민들의 숭고한 희생을 생각하면서 형제의 정(情)으로 왔습니다.”

우리는 제주도와 오키나와의 교류협력에 대한 기본입장에 관해 서로 의견을 나누고 관광부문의 협력에 앞서 기본적인 상호교류협력의 틀을 만드는 데 노력하기로 합의했다. 또 제주도는 이른 시일에 오타 마사히데 지사와 오키나와현 관계공무원을 초청하기로 하고 실무자간 회의에서 모든 문제를 검토하기로 합의했다. 그후 합의한 대로 오키나와현 실무대표단이 제주도-오키니와 간 상호교류와 오타 마사히데 지사의 제주도 방문에 합의했다. 96년 5월17일 나는 8월1일에 거행되는 제주도 도제실시 50주년 행사에 그를 공식초청했다. 이번 기회에 그가 ITOP포럼 창설에 동의하도록 만들겠다는 심산이었다. 그의 방문은 포럼의 운명을 가름할 중요 사건이었다.

 

그의 방문을 앞두고 김한욱 국장이 그의 일정을 보고하러 집무실에 들어왔다.

“오타 지사가 오키나와를 떠나 현재 후쿠오카에 체류중인데 거기서 제주행 비행기를 탈 예정입니다.”
“이번 방문 기회에 포럼에 참가한다고 오키나와가 발표를 하게 됩니까?”
“아닙니다. 일단 단순한 도제실시 50주년 기념 초청에 따른 방문입니다.”
“그러면 제주에 올 필요 없으니 후쿠오카에서 그냥 오키나와로 돌아가라고 하세요.”
“옛?·····.”

 

김 국장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어쨌든 이번 기회에 일을 성사시키라는 뜻이었는데 김 국장은 정말 오타 지사보고 돌아가라고 하는 소리인 줄 알았던 것이다.

 

결국 제주도에 도착한 오타 지사에게 나의 강한 뜻이 전달됐다. 그는 당장 오키나와가 참여하는 것은 곤란하지만 대신 오키나와관광협회가 준회원 자격으로 참여하겠다는 뜻을 전해왔다. 대만과 긴밀한 교류를 하고 있는 오키나와로서는 중국 하이난이 참여하는 포럼에 선뜻 들어온다는 게 대만과의 관계를 고려해 볼 때 여러모로 어려움이 있다는 현실적인 이유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제주에서 하룻동안의 체류일정 동안 제주가 갖고 있는 잠재력과 발전가능성을 읽어낸 그로선 이 기회를 버리기도 또한 싫었던 것이다. 그래서 고민 끝에 변형된 형태의 참여제안을 한 것이다. 실무자들 선에서 그런 얘기가 오고 갔다. 그리고 나에게 그런 보고가 왔지만 나는 그 제안을 유감스럽다고 거절했다.

 

결국 1996년 8월1일 오타 지사는 손을 들었다. 제주도 도제실시 기념행사를 하는 날 나와 오타 마사히데 지사는 앞으로 관광을 위시한 문화·경제부문의 교류, 자매결연, 사무소 설치 등에 관해 합의하고 오키나와가 동아시아 섬관광정책포럼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는 선언을 담은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드디어 한국 제주도, 중국 하이난성, 인도네시아 발리, 일본 오키나와가 참여하는 동아시아 섬관광정책포럼의 구도가 완성된 것이다. 그 진전은 1997년 7월23일부터 25일까지 제주시 칼호텔에서 열린 ‘섬관광정책 포럼 창설 및 제1차 회의’로 표면화됐다. 제주선언과 공동성명이 채택됐고 동북아 해양연대의 첫 걸음이 시작됐다.

 

해프닝도 있었다. 1998년 포럼개최지는 영어의 알파벳 순서에 따라 인도네시아 발리(Bali) 차례인데 그해 선거가 있는 오키나와의 오타 마사히데 지사가 발리의 이다 바구스 오카 주지사에게 양보해 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선거에 맞춰 합의된 순서를 바꾸고 포럼개최지를 변경했지만 그는 낙선했다. 안타까웠다.

 

어쨌건 ‘강인과 진취’·‘폐쇄와 소외’라는 섬사람의 보편적인 정서와 관광진흥과 정체성 확립을 제1의 발전전략으로 채택한 정책목표의 동질성, 섬들이 외부인에게 주는 신비의 매력 등 섬의 공통성을 바탕으로 ‘고립에서 연대로’, ‘변방에서 해양의 중심으로’를 추구한 섬관광정책포럼(ITOP Forum)은 제주도의 주도로 탄생했다.

 

 

섬을 고리로 하는 야심찬 기획은 또 있었다. 세계섬문화축제다.
세계관광시장, 특히 동북아 관광시장에서 장사가 될만한 물건을 만들어내려고 한 고민 끝에 만들어낸 것이 이것이다. 한마디로 기획상품이었다. 이 세계섬문화축제라는 기획상품과 섬관광정책포럼이라는 유통시장을 잘 연계하면 우리 제주도가 충분히 승산이 있다는 흥분이 내게 있었다. 세계 섬문화를 한데 모아 놓고 장을 벌이는 데도 없었고, 선례도 없었기에 우리가 이 아이디어를 선점하면 된다고 봤다. 더욱이 나는 이 섬관광정책포럼과 세계섬문화축제를 기반으로 전 세계 섬들의 연대, 즉 전 세계의 섬을 하나로 묶어 소위 '섬의 UN'을 창설하고 그 본부를 중문 소재 제주국제컨벤션센터에 유치하여 명실공히 우리 제주도가 세계 섬의 중심에 우뚝 서는 날의 도래를 꿈꾸고 있었다.

 

세계섬문화축제는 그 아이디어가 주는 신선함 때문인지 관심이 많았다.

 

사실 난 관(官)이 축제 등의 행사를 주관하는 것을 싫어한다. 지금은 탐라문화제로 이름을 바꾸었지만 과거 한라문화제만 하더라도 실질적으로 민(民)이 주관하도록 유도해 보지만 잘 안된 것도 안타까운 요인 중 하나다. 물론 나로선 세계섬문화축제를 민간 차원에서 기획하고 집행하기를 원했다. 행정은 지원세력으로만 남아있기를 원했다.

 

민간 중심의 기획단이 설치되고 당시 제주대 고성준 교수, 탐라대 양영근 교수(현 제주관광공사 사장), 제주KBS 김종명 부장, 제민일보 허영선 부장, 제주MBC 송정일 PD, 그리고 김한욱 제주도 문화관광국장이 기획위원으로 일들을 전담했다. 물론 담당부서인 관광문화국에 철저히 민간주도로 일을 추진하고 공연히 행정이 나서는 일이 없도록 분명한 지시를 했다. 공무원들의 속성을 알기 때문이다. 기획위원들은 참가 섬의 규모, 소요예산 등 기본문제에서부터 참가 섬에 대한 교섭 등 어려운 일을 진행해 나갔다. 사실 자기 고유의 직업이 있는데 과외업무인 세계섬문화축제 기획업무를 본업처럼 하려니 많은 노고가 있었을 걸로 짐작된다.

 

그 시절 난 기획단과 함께 비자림 지역, 동부산업도로변 중산간, 어승생 부근, 축산진흥원, 천마목장 등을 돌아보며 검토한 결과 천마목장 부지가 축제 행사장소로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천마목장 관계자와 무상사용 협의를 진행했다. 목장 측에서는 고맙게도 YMCA 회관 밑으로 바다 쪽을 향해 약 10만평의 땅을 무상사용 조건으로 제공해 줬다. 다만 앞으로의 자체 개발계획과 관련해 5년 이상의 사용은 곤란하다고 했다. 우리로선 진입도로, 전기, 통신, 수도 등 50억원 이상의 기반시설 투자를 해야 하기 때문에 기왕이면 영구적으로 쓸 수 있는 행사장소가 필요했다. 그 생각에서 천마목장 부지를 잠정 행사장소로 정하고 다른 곳을 물색했다. 그 때 찾아낸 게 당시 쌍용이 개발사업 시행자로 지정된 오라관광지구 내 땅이다. 쌍용은 행사장소를 영구적으로 무상 사용하도록 합의했을 뿐만 아니라 자비로 진입도로 공사도 했다.

 

그 시절 행사장소를 고민하는 과정에서 난 세가지 조건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우선 중문관광단지가 고려됐지만 그 장소는 아직 건립되지 않은 컨벤션센터 부지였고, 축제가 끝난 뒤 모든 기반시설을 철거해야 된다면 예산낭비가 될 노릇이었다. 두 번째는 행사가 주·야간에 진행되는데 서귀포 중문지역에서 행사가 진행되면 제주시와 산북지역 체류 관광객들의 이동상 문제가 발생할 것으로 봤다. 셋째는 제주시에서 한때 그린벨트지역 내에 중앙공원 개발을 구상중이었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주말 제주시민이 쉽게 찾아가 쉴 수 있는 공간이 제주시에선 없었다. 세계섬문화축제는 격년 개최 예정이었고, 행사기간도 30일 미만이기에 축제장에 간이축구장과 야구장 등 공원 위락시설만 보완해 놓으면 훌륭한 시민공원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어떻든 행사장소 문제가 해결되고 나자 97년 5월29일 정식으로 ‘세계 섬문화축제 조직위원회’를 발족시켰다. 교육부장관을 지낸 김영식 박사가 위원장으로 선임됐고, 위원으로 관광협회 회장을 비롯한 각계 인사가 위촉됐다. 사무국 업무를 총괄할 추진본부장에는 기획단 기획위원인 고성준 제주대 교수가 맡았다. 도에서도 축제 추진본부에 대한 행정지원으로 2명의 서기관 등 분야 별로 16명의 공무원을 파견했다.

 

그 축제는 고작 2번 열리고 나서 폐지됐다. 참 답답한 마음이다. 마치 관 주도로 섬문화축제가 준비되고 집행된 것처럼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다. 추진본부에 파견돼 온갖 어려움을 겪은 공무원들은 한마디로 이중고(二重苦)를 겪었다. 그들이 그런 말을 듣고 있을 때 가슴이 아팠다. 98년 1회 축제시절 그들은 숱한 어려움 속에 행정지원 공무원으로서 사명을 다했다. 98년 7월은 그 이전 해인 97년 말의 구제금융(IMF) 여파로 도무지 정상적인 행사를 치를 상황이 아니었는데도 그들은 헌신을 다했다. 물론 민간 부문에서 참여한 분들 역시 오로지 ‘제주발 축제의 신기원’과 ‘동북아 섬연대의 대표 축제’를 보여주고자 애썼다. 그러나 그랬기 때문에 내가 낙선한 이후 헌신적으로 노력했던 공무원들이 인사상 불이익을 감내해야 했으니 참으로 어이가 없다.

 

98년 6·4 지방선거에서 낙선한 후 난 도지사 직 사임준비를 하면서 7월18일부터 시작되는 세계섬문화축제 기간 중 영어 자원봉사자로 일하겠다고 밝혔다. 물론 조직위에 자원봉사자로 등록도 했다. 도지사직을 떠나지만 도민의 한 사람으로서 축제의 성공개최를 조금이나마 돕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98년 7월 예기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 6·4 선거에서 상대 후보는 상당히 많은 방법으로 나를 옭아맸다. ‘아니면 말고’ 식이었다. 새로이 출범한 정권 역시 상대후보이자 당선자의 편이었다. 후일 무혐의로 밝혀졌지만 난 컨벤션센터 건립과 관련해 5000만원의 뇌물을 수수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한달여 간 검찰이 이 잡듯 내 주변을 뒤졌다. 정치탄압이었다. 저항할 수단은 하나 뿐이었다. 난 단식투쟁에 돌입했고, 세계섬문화축제 전야제 행사가 열리던 7월17일 단식 9일만에 제주의료원 501호 병상으로 실려갔다.

 

세계섬문화축제 전야제 행사가 열리는 날 나는 텅빈 가슴을 안고 제주시 중앙로 광장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19편으로 이어집니다>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
=1942년생. 오현고를 나와 육군사관학교 4년을 중퇴, 1967년 5회 행정고시에 합격해 공직자로 입문했다. 제주도 기획관, 주이탈리아 한국대사관 농무관, FAO(국제식량농업기구) 한국교체수석대표, 농림수산부 축산국장, 농업구조조정정책국장, 기획관리실장을 거쳐 YS정부 시절인 1993년 12월 제29대 제주도지사로 취임했다.

 

이어 첫 민선 지방선거인 95년 6·27선거에선 무소속으로 출마, 당선돼 31대 지사를 역임했다. 그러나 98년, 2002년 두 번의 제주지사 선거에선 연거푸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그후 축협중앙회장을 거쳐 친환경 농업회사법인인 (주)삼무와 전시판매장인 삼무힐랜드를 운영했지만 지사 재직시절 뇌물수수사건에 휘말려 2년여 수감된 뒤 풀려났다. 삼무힐랜드는 수감기간 중 문을 닫았다.

 

제주삼다수와 관광복권, 제주국제컨벤션센터, 제주세계섬문화축제 등이 그의 지사 재직시절 작품이다. 현재 제주생태도시연구소 이사장직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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