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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현장-남기고 싶은 이야기(9)]-신구범 전 제주도지사

위기의 순간엔 기회도 다가온다고 했던가? ‘6공의 황태자’ 박철언에게 찍혀 미국으로 쫓겨난 내 처지는 너무도 초라했다. 하지만 그 1년의 시간은 후일 제주도정을 책임지게 된 나에게 ‘금쪽 같은’ 자양분이었다.

 

미국 조지타운대 객원연구원 자리를 얻은 난 아내와 함께 워싱턴 외곽 버지니아주의 펄스처치(fallschurch)란 조그만 도시에 거처를 마련했다. 허름한 원룸 아파트였다. 그곳에 살면서 난 학교를 오갔고, 아내는 집안 일을 돌봤다. 농림부 소속인 신분이기도 했지만 개인적으로도 눈길이 가서 난 조지타운대 근처에 있는 미국 농무성 산하의 경제조사연구소(ERS: Economic Research Service)를 자주 들렀다. 세계의 농업현황에 대한 자료가 풍부해 그곳에서 참 많은 자료들을 들춰 볼 수 있었다. 더욱이 제주출신이어선지 그곳에서 세계 오렌지시장 현황에 대한 자료가 유독 눈에 들어왔다. 생과와 가공용 오렌지의 원산지와 수·출입 실태를 많이 탐독했다. 제주도지사 시절 감귤정책은 이때 알게 된 정보에 근거한 것이다.

 

하지만 그 시절 내 머리를 감싸 쥐게 만든 건 다름 아닌  ‘물’이었다. 어느 날이었다. 아내가 이것 저것을 메모해 준 대로 난 슈퍼에 장을 보러 갔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게 1970년대 중반 미국 유학시절 보지 못했던 초대형 슈퍼마켓이었다. ‘자이언트’란 상호가 붙은 이 슈퍼는 지금 우리의 대형할인점 규모다. 게다가 24시간 문을 연다는 것도 이색적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눈이 휘둥그레지는데 더 어이없는 장면을 그 슈퍼에서 목격했다. 고객들이 페트(PET)병에 든 생수를 사 먹는 것이었다. 지금 세대는 그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우리 시절은 안 그랬다. 물을 돈 주고 슈퍼에서 사 먹는다는 것 자체가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현실로 다가오던 때다.

 

퍼뜩 떠오른 게 과거 제주도에서 지역계획과장으로 근무하던 때의 일이 생각났다. 내가 지역계획과장이던 1972년 한라산 중턱 어승생 저수지와 댐을 완공했다. 어승생 저수지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시로 이루어진 제주도 최초의 대규모 수자원 개발사업이다. 1969년 어느 날 박 대통령은 제주시내 파라다이스호텔(지금의 하니관광호텔)에 머무르며 그 호텔 메모지에 손수 그림을 그리고 깨알 같은 메모를 적어 당시 도지사에게 건넸다. 강(江)도, 호수도 없는 제주섬의 물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박 대통령의 기발한 아이디어가 돋보였다. 한라산 계곡에서 내려오는 물을 특정 지점에 가둬두고, 북제주 지역 전역에 229km의 송·배수관을 깔아 주민들에게 직접 상수도를 공급하는 지금의 방식은 그 때 그 분의 메모 구상 그대로다. 그 외에도 박 대통령은 스웨덴으로부터 지하수 개발을 위한 고성능 착정기도 도입하도록 지시, 이때부터 지하수 개발이 이뤄졌다.

 

 

그 시절 어승생 저수지 공사를 하면서 실패도 반복했다. 워낙 많은 양의 물을 가둬놓는 시설이다보니 수압을 견디면서 물을 채울 수 있는 저수시설을 만들어야 했으나 터지기를 반복했고, 일본 기술자를 불러 방법을 궁리했지만 여전히 허사였다. 하지만 어찌됐건 만들어냈다. 저수지를 완공한 뒤 그곳을 방문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이거 완전히 쇠통이구만···”이라면서 혀를 차던 게 기억이 난다. 시멘트와 모래, 자갈, 아스팔트 패널, 강판을 이중 삼중으로 켜켜이 덧대 마치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만든 게 지금의 어승생 저수지다.

 

미국의 슈퍼마켓 현장에서 그 생각에 다다르자 우리 고향 제주도의 먹고 살 거리가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한라산 계곡수를 저수지에 담아 두면서, 일부 지역에서 지하수 관정을 개발하는 기나긴 공사 도중 우리의 일을 거들었던 일본 등 선진국의 기술자들이 하던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물자원이 상당히 많은 것도 그렇지만 물맛이 아주 좋다. 세계에서 보기 드문 물이다”고 탄복하던 그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한국에 돌아가면 제주의 지하수를 상품으로 만들어 보자는 아이디어를 전해줘야겠다. 제주도를 석유가 아닌 물이란 지하자원으로 세계 최고의 부자섬으로 만들어봐야겠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물론 그곳에서의 1년간 세월을 보내며 에비앙과 볼빅 등 세계적 생수제품의 소비동향과 마케팅 현실을 차곡차곡 머릿속에 담아두었다.

 

1992년 3월 눈치를 보며 귀국했다. 앞서 말했듯이 농촌경제연구원 한 켠에 마련된 책상과 의자 하나 뿐. 무위도식하던 나날의 연속이었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건 버티는 데 까지 버텨 보는 것이다. 그해 후반기 대선의 열기는 뜨거웠다. 결국 12월 대선에서 최종 당선자는 YS였다. 이미 상도동 집을 찾아가 그의 풍모를 보았던 지라 그저 마음 속으로 “언젠가는 대통령 자리를 꿰찰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예상대로 됐구나”고 읊조렸다. 그런데 그가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며칠 뒤 무위도식하던 나에게 인사발령통지서가 날아들었다. 농림부 내 수석국장인 농업구조조정정책국장으로 가란 것이다. 더 황당한 건 수석국장 생활 3개월 만에 다시 1급 공무원으로 승진, 기획관리실장이 된 것이다. YS가 93년 2월말 대통령으로 취임하고 나서 또 다시 며칠 뒤인 3월 초 그렇게 승진했다. 나중엔 안 사실이지만 ‘마사회 이관 저지 사건’에 얽혀 내가 YS의 상도동을 찾아가 대면했을 무렵 그는 측근들에게 “농림부 신 국장을 잘 관리하라. 고위공무원이 갖춰야 할 일에 대한 열정과 자세를 보여주는 인물”이라고 극찬했다는 것이다. 전임 정권에서 골칫덩이로 찍혔던 난 YS정권에서 ‘촉망 받는’ 지위로 격상됐다. 이런 게 인생만사 새옹지마인가?

 

 

정말 신명나게 일했다. 일할 기회가 주어졌고, 인정을 받았기에 최선을 다했다. 물론 내 고향 제주도를 돕기 위해서도 백방으로 뛰었다.

 

그 시절 기억나는 또 다른 일화도 있다. 93년 10월 경으로 기억한다. 당시 제주도지사이던 우근민 지사가 나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우 지사와는 1983년 얼굴을 트게 된 사이다. 당시 정부에서 정부부처 간부공무원 40명을 선발, 40일간 미국연수를 보내주었다.  그때 같은 제주출신이란 인연으로 함께 숙소에서 지냈다. 워싱턴DC 흑인빈민가의 허름한 아파트가 숙소였다. 당시 우 지사는 총무처의 감사관이었고, 난 농림부의 교수부장으로 둘 다 부이사관급 공무원 신분이다. 내가 농림부 총무과장 시절 그가 육군 소령으로 복무하다 총무처 상훈과장으로 특채된 사실도 그때 처음 알았다. 어찌 됐건 그는 나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당시는 우루과이라운드(UR) 문제가 불거져 전국에서 농민시위가 만연했고, 제주에선 ‘감귤과수’ 문제가 초미 관심사였다. 그는 “신 실장이 와서 UR 협상에 따른 감귤대책에 대해 제주농민들에게 농림부 차원의 설명회를 열어 달라”고 부탁했다. 기꺼이 응했다. 고향 제주도민들에게 상황의 심각성을 서둘러 알리고 서둘러 미래를 준비할 태세를 다지도록 해야 하는 건 나로선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다. 곧바로 내려와 제주도공무원교육원(지금의 인재개발원)에서 수백 명의 농민을 상대로 설명회를 진행했다. 그때 제주농민들은 UR협상에서 제주감귤을 비교역품목(NTC: Non Trade Concern)으로 지정해달라고 요구했다. 시장개방 대상에서 제외, 정부의 특화된 보호 과수품목으로 지정해달라는 것이다. 당시 UR 협상의 원칙과 의제로 볼 때 그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이었고, 또 감귤시장 개방은 향후 단계적 시점만 남아 있을 뿐 불가피한 것이었다. 그보다 우리가 UR 체제에 어떻게 적응하고,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를 염두에 둔 전략적 대책을 마련하고 추진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날 설명회는 파행으로 흘렀다. 감귤농민들의 핏대 올리는 항의를 뒤로 하고 “그러고서도 네가 제주도 놈이냐?”란 욕설 섞인 말까지 들으며 농림부 동료와 함께 쫓기듯 서울행 비행기를 탔다. 제주에서 밥 한끼 먹을 틈도 없었다.

 

 

그런 일을 겪고 나서 딱 두 달여만인 12월 말 난 제주도지사로 부임했다. 나에게 삶의 방향전환을 가르쳐준 성산포 단골식당의 정유진씨를 수소문했다. 찾아보니 그는 식당을 남제주군 안덕면으로 옮겨 벌이를 하고 있었다. 그의 손을 꼭 쥐었다. 환하게 웃던 그의 얼굴이 지금도 눈에 아른거린다. 이제 십수 년여가 흘렀는데 그의 근황은 요새 어떤지 궁금하다.

 

그렇게 제주도지사 직무를 시작할 무렵 새로운 도전은 저만치 앞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물'로 승부를 걸고자 했던 내 앞에  '물싸움 전면전'이 예고돼 있었다. <10편으로 이어집니다>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

=1942년생. 오현고를 나와 육군사관학교 4년을 중퇴, 1967년 5회 행정고시에 합격해 공직자로 입문했다. 제주도 기획관, 주이탈리아 한국대사관 농무관, FAO(국제식량농업기구) 한국교체수석대표, 농림수산부 축산국장, 농업구조조정정책국장, 기획관리실장을 거쳐 YS정부 시절인 1993년 12월 제29대 제주도지사로 취임했다.

 

이어 첫 민선 지방선거인 95년 6·27선거에선 무소속으로 출마, 당선돼 31대 지사를 역임했다. 그러나 98년, 2002년 두 번의 제주지사 선거에선 연거푸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그후 축협중앙회장을 거쳐 친환경 농업회사법인인 (주)삼무와 전시판매장인 삼무힐랜드를 운영했지만 지사 재직시절 뇌물수수사건에 휘말려 2년여 수감된 뒤 풀려났다. 삼무힐랜드는 수감기간 중 문을 닫았다.

 

제주삼다수와 관광복권, 제주국제컨벤션센터, 제주세계섬문화축제 등이 그의 지사 재직시절 작품이다. 현재 제주생태도시연구소 이사장직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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