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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현장-남기고 싶은 이야기]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15)

이제 선거 얘기를 하려 한다. 영광도 있었지만 좌절도 있었다. 선거에서 단 한번 이겼고, 두 번이나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그런 마당에 “한참이나 지난 과거의 일을 다시 들춰서 무엇 하려는가”라고 반문할 분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짚고 넘어가야할 일들이 있다. 물론 지난 날 내가 두 번씩이나 낙선한 것은 나의 정치적 미숙, 과오·오만 등에 그 원인이 있었음을 자인한다. 그러나 이러한 많은 결점과 부족함에도 공인으로서 타락선거문화와 타협하기를 거부했던 나로서는 제주선거문화에서 20년 전 진작 도려냈어야할 썩은 부위가 아직도 왕성하게 살아 있어서 공작과 거짓으로 일관하는 세력들의 거점이요 서식처가 되어 있다는 걸 좌시할 수 없다. 우리가 추구해야할 새로운 선거문화 정착을 위해 나의 경험을 기록하는 것은 아직 유효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1993년 말 제주도지사로 부임하고 도정을 점검하기 시작했다. 인사, 예산집행, 인·허가 등 많은 부문에서 전임 도지사가 다가올 지방선거에 대비하려고 했던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예컨대 전직 도지사, 제주대학교 총장, 교육감으로 구성된 지역 원로모임인 '연우회‘(緣友會)가 있는데도 도내 기업인들을 앞세워 이들을 포함한 별도의 대규모 원로모임인 '곰솔회'를 구성했다든지, 노인회가 이미 결성되어 있는데도 지역별로 원로회를 따로 조직했다든지 하는 것이었다. 물론 모두 인력·예산이 수반되는 일들이었다.

 

나는 우선 예산집행에 착안했다. 제주도에는 대기업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제주도와 제주도지사가 도내 최대 투자기업인 셈이다. 또 그렇게 역할해야 한다. 따라서 도지사는 도 예산을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식으로 나누어 써버려서는 안 된다. 더욱이 현직 도지사가 선거용으로 도민의 혈세인 예산을 자기 주머니 돈 쓰듯이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나는 ‘선심성 예산’ 가능성이 높은 사회단체 보조금과 도지사 재량사업비를 점차 감액하도록 조치하고 그 집행도 엄격하게 하도록 지시했다. 1년 후에 도지사 선거를 치러야할 내가 스스로 내 손발을 묶어버린 것이다. 그 예 가운데 하나가 이장단(里長團) 여행경비 지원이다.

 

일선 이장들은 얼마 안 되는 수당을 받으면서 마을 일은 물론 지방행정 집행의 첨병 역할을 하는 자원봉사자들이다. 나는 그들의 봉사에 보답하기 위해 이장수당을 현실화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도비보조를 증액하고 200개 전 이사무소에 PC 보급 등 행정전산망을 갖춰 주었다. 그런데 과거의 관행 중 이장단이 국내외를 여행할 때 도지사가 여행경비의 일부를 보조해주는 사례가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는 도지사가 해야 할 일은 아닌 것 같았다.

 

일선 시·군행정을 총괄하는 지방과장을 불러 그런 관행이 타당한지 물었다. 잘못된 것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나로선 단호하게 지시했다. “앞으로 이장단이 국내외를 여행할 때 도지사의 여비보조는 일체 안 되니 그렇게 일선에 주지시키세요.” 하지만 막상 일은 내게서 터졌다.

 

 

1994년 12월 초 모 정보기관 인사가 지사 집무실로 찾아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얼마 전 구좌읍 동복리 신의정 이장에게 여행경비 조로 준 일화 30만 엔을 선거와 관련해 악용하려는 세력이 있으니 조심하라는 것이었다.

 

신의정 동복리장은 내게 먼 친척으로 할아버지 뻘 되시는 분이다. 솔직히 우리 ‘거창 신(愼)씨’ 문중은 제주에서 소수다. 고작 1000여명에 불과하다. 그래서 일가의 모임에서 처음 볼 지라도 난 그 분을 깎듯이 모셨다. 그도 그런 나를 자랑으로 여기고, 집안 어른으로서 걱정도 해주시는 분이었다. 1994년 10월 말이던가. 하루는 그 할아버지가 도지사 집무실로 나를 찾아와 동복리 체험관광어장 조성 구상 등 지역개발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던 중에 구좌읍 이장단이 동남아 여행을 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자기가 사적으로는 도지사의 할아버지 뻘이기 때문에 여행기간 중 이장단들에게 체면 좀 세울 수 있으면 좋겠다고 하면서 은근히 도움을 바라는 눈치였다.

 

이미 지방과장에게 내린 지시가 있었기에 불가한 일이었다. “공적으로는 도지사가 지원이 어렵습니다”고 말하고 이해를 구했다. 그리고 며칠 후 곰곰이 생각하다 일본 해외출장시 그곳 친지들이 내게 준 돈이 생각났다. 비서관을 불러 그 때 쓰다가 남은 일화 30만엔을 “도지사가 사비로 드리는 것”이라고 말하고 전하도록 했다. 그런 터여서 정보기관 인사의 말을 듣고는 쓸데없는 오해가 염려됐다. 굳이 그런 오해를 받고 싶지 않았기에 할아버지께 연락드리고 그 돈을 돌려받았다. 마침 구좌읍 이장단에서도 관내 농협임원들의 대형 교통사고가 겹쳐 여행일정을 취소한 형편이었다.

 

하지만 이를 사전선거운동으로 몰아붙여 나를 쓰러뜨리려는 음모는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12월 초부터 구좌읍 한 이장이 작성했다는 양심선언서가 투서 형식으로 검찰, 경찰, 행정기관, 언론사 등 기관으로 우편배달되고 있었던 것이다. 양심선언한 사람의 이름도 없고, 구좌읍에서 발송한 것으로 돼 있지만 우체국 소인은 제주시 관덕정에 있는 제주우체국에서 발송된 것이었다. 구식 타자기로 내용을 적었고, 잘못된 띄어쓰기와 서투른 문체도 의도적으로 보였다. 음해공작 전문가의 솜씨를 곳곳에서 눈치 챌 수 있었다. 사전선거운동이 의심스러우면 당당하게 나를 고발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해가 바뀌어 민선 1기 6월 지방선거를 앞둔 1995년 1월6일. 이 문제는 제주의 한 일간지에 사회면 톱기사로 보도됐다. 그 이후로 나는 공직선거 및 선거부정 방지법 상의 매수 및 이해유도죄로 기소되는 과정을 거쳐 97년 6월20일 제주지방법원 제2형사부에서 벌금 70만원이란 선고를 받기까지 24개월간 지루한 정치투쟁과 법정싸움을 벌여야 했다. 말하자면 초대 민선도지사 3년 임기 중 2년을 법정투쟁에 소진한 것이다. 구좌읍 이장단 여행경비 파문은 그 진실 여부와 관계 없이 도지사 출마저지 압력, 민자당 공천대상 제외, 검찰의 기소 등 후속 격변을 몰고 왔다.

 

95년 그해 3월13일 김용태 내무부장관의 제주도 초도순시가 있었다. 6·27 선거와 관련, 주무장관의 초도순시는 나에게도 중요한 기회였다. 세계섬문화축제, 동북아섬관광포럼, 세계섬유엔 설립 등 동북아환도서관광권 구상과 제주를 역내 종자공급기지로 만들겠다는 구상을 접한 그는 YS정권의 지사후보 공천에 대해서도 긍정적 사인을 보내왔다. 그러나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당초 3월24, 25일 이틀간으로 예정됐던 김영삼 대통령의 초도순시 일정이 돌연 무기한 연기됐고, 4월 초에나 가능할 것이란 청와대 비서관들의 연락이 왔다. 불길한 예감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3월25일 서귀포 한 농가의 유리온실 개장식에 참석하고 식사를 하는데 제주지검 검사장으로부터 ‘좀 만났으면 한다’는 전갈이 왔다.

 

“싸울 때가 온 것 같다”는 예감이 왔다. 제주시로 돌아와 오리엔탈호텔에서 검사장과 마주 앉았다. 그는 구좌읍 이장단 여행경비 지원에 관한 일을 꺼내들더니 혐의인정이 불가피하다고 했다. 젊은 검사들이 사법처리를 강하게 주장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나는 그에게 사회정의를 위한 검사장으로서의 판단을 요구했다. “도대체 지난 1년 동안 제주사회에서 누가 사전선거운동을 했고, 누가 안 했는가는 검사장이 더 잘 알고 있는 것 아니오?” “출마하지 마시오. 3년만 기다리면 될 것 아니오.” “검사장이 출마, 불출마를 강요할 수 있는 거요?” “신 지사는 돈도 없지 않소. 이번 기회보다 다음을 봅시다.” “상부의 명령이요?” “아니오. 내 스스로의 판단이오.” 이런 대화가 오갔다.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떠한 경우에도 나는 출마할 거요. 당신네들이 혐의를 인정한다면 나는 내 명예를 위해서라도 오히려 더 출마할 거요.” 이튿날 이 검사장과의 대화내용을 인지한 모 정보기관장에게서 연락이 왔다. “무소속으로라도 출마해야 합니다. 다른 후보의 인기는 거품입니다. 지난 12월부터 신지사의 인기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그는 나에게 그렇게 말했다.

 

3월27일 나는 출근하자마자 내무부 장관에게 전화를 걸어 내일 사퇴하겠다고 말했다. 첫 민선 지방선거에서 후보로 나설 경우 현직의 경우 사퇴시한이 선거일 90일 전 즉 3월29일이 시한이었다. 하루를 앞당겨 사퇴하기로 마음 먹은 것이다. 그는 나에게 “잘 해보라”고 격려했다. 그런데 10분이 채 안 돼 장관이 당황한 목소리로 내게 다시 전화를 걸어왔다. 구좌읍 이장단 여행경비 지원이 선거법 위반이기 때문에 출마하면 입건되고, 출마하지 않으면 입건되지 않는다고 하니 출마문제를 재고(再考)하라는 소리였다.

 

기가 막혔다. 아무리 은밀하게 진행되는 게 정치판, 특히 공천장난이라 할 지라도 선거 주무장관인 여당소속 내무부장관이 모르고 있었다는 게 어이가 없었다.

 

출마결심을 확고히 했다. 관선 제주지사로 부임하고 난 뒤 제주를 진정 신명나는, 자랑스러운 고향으로 만들어 보고 싶은 일념이었다. 고작 1년 3개월의 시간으론 그 구상을 채 펴 보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잘못된 풍토와 비전에 우리 도민들이 휘둘려서도 안된다고 생각했다. 더욱이 나를 사전선거운동 혐의로 위협해 출마를 저지하려는 정부·여당에 심한 배신감도 느꼈다. 28년간 공직자로 봉직한 나를 이런 식으로 팽개치는데 그대로 수용하는 건 곤란했다. 또 ‘구좌읍 이장단 여행경비 지원’ 건은 나로선 그대로 넘어갈 수 없는, 차제에 시시비비를 명백히 가릴 필요가 있는 사안이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분이기에 말하는 게 조심스럽지만 이해 바란다. 그 구좌읍 이장단은 나에게서 사비로 돈을 받았지만, 역시 선거를 준비하고 있던 신철주 북제주군수로부터도 돈을 받았다. 신 군수는 300만원을 군 예산으로 줬다. 검찰의 기소 자체도 편파적이었던 것이다. 친족에게서 받은 개인 돈을 준 건 유죄가 되고, 도민의 세금으로부터 나온 돈을 준 건 기소는 고사하고 입건하는 시늉조차하지 않는다는게 말이 되지 않는 소리인 것이다.

 

난 청와대 이원종 정무수석비서관, 김영수 민정수석 비서관, 그리고 김덕룡 민자당 사무총장에게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했다. “당신들 같으면 도대체 어느 놈이 국가에 충성하겠는가?” “대통령이 우릴 도지사로 임명했을 땐 개혁하라는 것이었다. 이러고서 우리나라가 개혁이 되겠는가?” 이유가 있었다. 이 수석은 그 때 나에게 출마를 접고 선거관리 지사를 하다가 선거 후에 자리 보장을 해서 정부에서 일할 자리를 주겠다고 불출마를 권유했다. 김 수석은 법률적 판단은 검찰이 할 일지만 나에게 민자당 공천을 준다 한들 당선이 될 수 있겠는가라고 냉소한 인물이다. 김 사무총장은 어이 없게도 “꼭 이런 식으로 해야 하느냐. 할 말이 없다”고 했다.

 

 

3월28일 오전 내무부 장관의 요청으로 3차례나 통화가 더 있었다. 출마하기 위해 사퇴하지 말고 선거관리지사직을 더 수행해 달라고 했다. 내가 뜻을 굽히지 않자 그는 “언제 사직하느냐”고 물었고, 오후에 사직서를 제출하겠다고 하자 그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바로 그날 도청 출입기자단들과 도청 옆 마리나가든에서 점심식사를 하는 도중 정오뉴스가 흘러 나왔다. 제주지검에서 나를 선거법 위반으로 입건했다는 보도였다. 당시 차장검사는 검찰출입기자들에게 급하게 연락해 그동안의 보도정보 제공과는 판이하면서도 친절하게 ‘신구범 제주도지사 선거법 위반 내사사건 기자회견자료’까지 배포했다. 한술 더 떠서 “꼭 유죄판결을 받게 하겠다”는 의지표명은 물론 “부정선거에 개입된 사람이 당선되는 사례가 없도록 도민들의 현명한 판단을 바란다”는 당부까지 했다.

 

 

담담했다. 출입기자들과 오찬을 마치고 집무실로 돌아온 나는 오후 4시30분 기자회견을 통해 공식 사임을 밝혔다. 사퇴는 곧 출마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중앙과 지방언론은 일제히 보도의 방향을 바꿨다. 한낮 신 제주도지사의 선거법 위반 입건 사실을 단순 보도하던 언론들은 나의 기자회견 이후 ‘중앙정부, 신 제주지사 출마포기 외압 의혹’이란 타이틀로 내용이 뒤바뀌었고, 기사는 더 커져 있었다.

 

이튿날인 3월29일 오전 10시. 나는 1년3개월간 정부가 임명한 제주도지사로 재임했던 일을 회고하면서 이임인사를 했다. 그때 했던 말 가운데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것은 다음의 두 가지다.

 

“저는 제주라는, 내가 사랑하는 일터를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권력의 그늘에 기생하며 도민의 판단과 분별력을 마비시켜온 일부 세력을 저는 잊지 않을 것입니다.” <16편으로 이어집니다>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
=1942년생. 오현고를 나와 육군사관학교 4년을 중퇴, 1967년 5회 행정고시에 합격해 공직자로 입문했다. 제주도 기획관, 주이탈리아 한국대사관 농무관, FAO(국제식량농업기구) 한국교체수석대표, 농림수산부 축산국장, 농업구조조정정책국장, 기획관리실장을 거쳐 YS정부 시절인 1993년 12월 제29대 제주도지사로 취임했다.

 

이어 첫 민선 지방선거인 95년 6·27선거에선 무소속으로 출마, 당선돼 31대 지사를 역임했다. 그러나 98년, 2002년 두 번의 제주지사 선거에선 연거푸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그후 축협중앙회장을 거쳐 친환경 농업회사법인인 (주)삼무와 전시판매장인 삼무힐랜드를 운영했지만 지사 재직시절 뇌물수수사건에 휘말려 2년여 수감된 뒤 풀려났다. 삼무힐랜드는 수감기간 중 문을 닫았다.

 

제주삼다수와 관광복권, 제주국제컨벤션센터, 제주세계섬문화축제 등이 그의 지사 재직시절 작품이다. 현재 제주생태도시연구소 이사장직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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