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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현장-남기고 싶은 이야기]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16)

1995년 3월 말. 도지사를 사퇴했지만 외롭지 않았다. 나는 검찰의 비열한 처사에 이어 청와대 경호실에 의해 도지사 공관에서 강제퇴거(?) 당하는 수모까지 겪으면서 분노 속에서 도지사 직을 사퇴했다. 하지만 그저 담담한 마음으로 선거를 치를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진실과 진심으로 선거를 치를 심산이었다. 진정성은 통했다. 검찰로부터 불의의 일격을 당했지만 그건 화(禍)가 아니라 천군만마 우군의 지원을 얻는 명분이 됐다. 여러 언론이 중앙정부가 지방선거에 개입하고 있다는 의혹을 제기했고, 난 민선 1기 지방선거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행운을 거머쥐는 상황으로 국면이 뒤바뀌고 있었다.

 

그러나 여당인 민자당 도지사 후보로서 당의 조직과 지원으로 선거를 치르려고 계획했던 나로서는 당연히 조직도 돈도 없었거니와 내가 여당 후보가 될 것으로 예견하고 협력과 지원을 약속했던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했다. 태양이 구름에 가리우면 사라져버리는 그림자처럼 나에게서 떠나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선거기획은 고사하고 일정관리조차 여의치 않았다. 더욱이 자신의 선거경험은 물론 다른 사람의 선거를 도와본 적도 없는 나는 바람 같은 선거를 치러야할 판이었다. 그러나 사람은 그냥 죽으라는 법은 없다는 게 맞는 말이었다.

 

 

오현고등학교 재학 시절 우리에게 화학을 가르치셨던 은사인 김영호 전 제주교육대 학장께서 우선 급한 대로 공무원 출신인 김성량씨와 김종구 사장에게 나의 일정관리를 전담시키는 한편 선대본부 구성과 선거기획을 위한 사람 확보에 심혈을 기울여 주셨다. 그 이후 여러분들이 나의 선거 캠프에 참여하여 선거대책본부를 꾸리고 선거를 치르느라 수고가 많았지만 도지사 사퇴 후 그 어려웠던 시절 나를 도왔던 이 세분에 대한 특별한 고마움을 나는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

 

우리 선거캠프에선 강보성 전 농림부 장관의 거취를 주목하고 있었다. 모교인 오현고 선배이자 농림부 축산국장 시절 농림부 장관으로 모셨던 이가 바로 그다. 그 와중에 민주당에서는 강승훈 도지부장과 정경호 정책기획실장을 통해 나의 입당과 민주당 후보 출마를 교섭해왔다. 정중하게 거절할 수 밖에 없었다. 당연히 여당 민자당 도지사 후보로 출마하려던 내가 민자당에서 쫒겨났다고 해서 나를 도지사로 임명했던 정부·여당을 배신하고 홧김에 뭐한다는 식으로 야당으로 말을 갈아탄다는 것은 내 마음에 찔리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우리나라의 정당구조, 특히 중앙집권식 정당구조 하에서 그 당시의 공천 역시 상향식이 아니라 하향식 낙점방식으로 이뤄지고 있는 사정이 못마땅했다. 진정한 지방자치 정신에 맞지 않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자 민주당은 제주도를 무공천 지구로 결정하고 도지사 후보를 공천하지 않았다. 내가 도지사에 당선되면 나를 영입한다는 입장이었다. 하루는 민주당의 유력인사로부터 DJ의 명함이 내게로 왔다. 아·태평화재단 이사장 명의의 명함엔 '건투‘란 그의 격려가 쓰여 있었다.

 

강 전 장관과 따로 만났다. 그의 출마의지는 확고했다. 나는 이렇게 제의했다.
“장관님께서 민자당 공천을 받으시면 전 출마하지 않겠습니다. 대신 공천을 못 받으시면 출마하지 말고 저를 도와주십시오.”
내 제의에 그는 즉답을 피했다. 다만 후일을 기약하는 눈치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민자당 도지사후보는 우근민 전 도지사가 유력하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강 전 장관이 반발, 경선에 참여하지 않고 민자당을 탈당할 것이라는 소문도 떠돌기 시작했다.

 

4월23일 그랜드호텔에서 다시 강 전 장관을 만났다. 그는 당초 민자당 지구당 위원장을 사퇴하면 도지사 후보로 공천하기로 했다는 당의 조건을 꺼냈다. 당에서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경우 경선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라는 뜻을 분명히 했다. 만약 경선으로 가게 되면 이에 불복, 사퇴해 내게 협력하겠다는 말을 했다.

 

난 그에게 “최선을 다하시라”는 말 밖에 할 수가 없었다. 민자당 경선에서 절대 불리한 그가 경선에 불참하고 도지사 출마를 위한 ‘제3의 길’을 이미 찾고 있다는 걸 그와의 대화에서 감지했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그는 민자당 도지사 후보 경선 불참을 선언했다. 5월3일 그를 만나 나의 출마에 대한 이해를 구하면서 민자당 후보가 되지 않은 이상 협력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는 “한 이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주말쯤 연락을 주겠노라”고 했다. 하지만 그에게선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다만 그가 무소속 출마를 결심하고 있다는 소식만 들려왔다.

 

5월4일 민자당 제주도지사 후보 경선이 있었다. 우근민 후보가 강봉찬 후보를 쉽게 물리치고 도지사 후보로 확정됐다. 나로선 결국 ‘신구범 대 우근민’ 구도로 가야만 본선에서 승산이 있다는 생각이었고, 어쨌건 강보성 전 장관의 출마를 막아야 했다. 당시 내 마음은 조급했다. 내가 공직생활을 하는 동안 많은 도움을 주었던 현경대 의원은 검찰의 입건과 관련해서도 일부러 제주에 내려와 검사장을 만나는 등 많은 힘이 돼주었다. 그러나 민자당 후보가 결정된 마당에 민자당 원내총무가 나를 돕는 건 불가능해졌다. 그를 만났다. 그는 중앙차원에서 나를 위한 자리 마련을 협의해 볼 터이니, 이번에는 출마하지 말고 3년 후에(민선 1기 도지사 임기는 3년이었다) 도지사 하면 안되겠느냐고 지나가는 말처럼 내 의사를 물었다.

 

그의 어려움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고, 그 어려움의 상당 부분이 내 책임임을 느끼고 있던 나로서는 그의 제안을 거절하는 게 괴로운 일이었다. 정치는 우정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번 절감했다.

 

일은 더 어려워지고 있었다. 민자당 공천이 안 돼 사퇴하게 되면 나와 협력하겠다고 했던 강 전장관이 약속을 깼다. 민주당 공천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었던 것이다. 강 전 장관에게 매달리기 보다 하루라도 빨리 출마선언을 하는 게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5월10일을 출마선언 및 기자회견의 날로 잡았다. 그러나 강 전 장관을 만나 최종입장을 정리하는 게 낫다는 참모들의 의견으로 일정을 하루 늦추고 밤늦게 그의 숙소를 찾아가 만났다. 그리고 그와의 대화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을 뿐이다. 5월11일 제주도청 기자실에 들러 출마기자회견을 했다.

기자회견을 마치고 선거관리지사로 내려온 중앙경찰학교장 출신의 김문탁 제주도지사를 예방했다. 공교롭게도 그에게서 재미있는 인연을 들었다. 젊은 시절 행정고시를 공부하던 무렵 난 공안직 4급 을류 공개경쟁채용시험도 치렀다. 지금의 경위임용 시험인 경찰간부후보 시험이다. 그 때 함께 합격했던 동기가 바로 김문탁 지사, 자신이라는 것이다. 물론 난 아버님의 만류로 경찰직에 입문하진 않았지만 그런 인연을 듣게 되자 속으로 고마웠다. 이어 도청 실·국을 돌며 직원 한사람, 한사람과 손을 맞잡았다. 도청을 나서면서 난 다짐했다. “기필코 50일 후엔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 마무리하지 못한 제주도정의 미래를 다시 열겠다.”

 

언론사도 찾았다. 제주신문사로 갔다. 특별취재반까지 만들고 집중적으로 ‘구좌읍 이장단 매수의혹 사건’을 다룬 언론사다. 김대성 사장이 직접 편집국으로 나를 안내했고, 떠나는 나를 현관까지 배웅해 주었다. 떠나보내면서 내 고교동창인 김 사장은 “신문은 신문이고, 동창은 동창이지”란 독백 같은 표현을 했다. 만감이 교차했다. 승자가 되는 길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이어서 서울도민회와 부산도민회도 직접 찾아가 만났다.

 

 

5월 19일 제주를 도지사후보 무공천지구로 결정한데 대하여 반발한 이기택계의 ‘꼬마민주당’을 등에 업은 강보성 전 장관이 민주당 입당신청을 했고, 5월26일 경선을 거쳐 민주당 도지사 후보로 확정됐다. 담담했다. 그를 원망할 생각도 없었다. 결국 욕심 따라 정치판에 뛰어든 것이고 약속을 지켰는지의 여부와 잘잘못을 따지는 게 우습다는 생각이었다. 3파전 구도에서 치를 선거판 만 생각했다.

 

6·27선거를 앞두고 5월26일 처음으로 나온 여론조사에서 ‘신구범 24%, 우근민 20%’로 내가 조금 앞서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작고하신 서성옥 전 제주농업고등학교 교장께서 선거대책본부장을 맡기로 하고, 정책은 양영철 제주대학교 교수, 조직은 윤태현 전 도의원, 홍보는 강순원 전 한라일보 기자가 맡는 한편 여성팀에는 오옥화 여성상담소장이 합류하고 도체육회 사무처장 직을 사임한 변창보씨도 합류하여 선거사무를 총괄하고 현장을 지휘했다. 선거가 끝난 후 사람들은 신구범이 시의원 후보만도 못한 선거캠프와 사람, 자금으로 선거를 치렀다고 말했다. 그 당시 시골 초등학교 운동회 같은 선거를 치를 수 있도록 당당함과 즐거움으로 선거의 마지막까지 나와 함께 했던 모든 분들에게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 그 시절 선거는 솔직히 ‘신바람 나는 선거’였음을 고백한다. 더욱이 공식적인 선대본부 참여 이상으로 온 몸을 다해 나의 선거를 도왔던 이유근 전 한마음병원 원장과 유명을 달리한 친구 양세훈 사장을 또한 잊을 수 없다.

 

 

여론은 좋은데 그것을 득표로 연결시키는 게 시급하다고 많은 사람들이 지적했다. 조직과 자금에서 절대 열세인 입장에서 선거사상 처음 시도되는 후보자 TV토론이 여론의 조직화를 위한 최대의 선거전략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우린 6월1일 선거대책본부를 구성하고, 선거캐치프레이즈로 “경쟁과 자존, 그리고 번영-위대한 제주시대를 연다”로 내걸었다.

 

경쟁은 세계화시대의 생존수단이고, 자존은 우리의 삶의 원천인 제주정신이었으며, 번영은 우리가 함께 추구해야 할 우리의 삶이자 제주의 미래였다. ‘위대한 제주시대’는 한반도의 변방에서 동북아시아의 중심으로 나아가려는 비전이었다.

 

6월2일 KBS의 도지사 후보 초청 토론회를 필두로 언론기관의 후보토론과 대담이 시작됐다. 토론과 대담에 임하는 내 기본입장은 ‘위대한 제주시대의 구현’이었다. 각종 유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비열한 흑색선전이 난무했지만 우리 캠프에서는 미래를 지향하는 밝은 선거를 치르기로 한 기본원칙에 따라 방어는 하되 상대방 후보를 비방하거나 흑색선전 등으로 개인의 인격을 공격하는 일은 없도록 했다. 깨끗한 선거, 그리고 이벤트성의 기획선거문화 창출에 기여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선거를 두 주일 앞둔 6월13일 서울에서 사람이 왔다. 청와대의 의도를 내게 전달하는 역할을 그가 담당한 것으로 보였다. 민자당 우근민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해 신 후보의 사퇴가 불가피하다는 판단을 상부에서 하고 있기 때문에 응분의 보상을 전제로 내가 후보를 사퇴해주기를 희망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참으로 불쾌하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는 6월19일 다시 내려올 테니 그 때까지는 마음의 결정을 해달라면서 떠났다. 6월19일 제주시내 로얄호텔 2층에서 다시 나를 만나러 온 그는 서울에서 내려온 개신교 목사, 모 단체 회장이라고 불리는 사람, 제주도내 정보기관 책임자 등 세 사람을 대동했다.

 

그들의 주문은 단순하고 분명했다. 문민정부의 정권 유지와 YS의 권위 유지 차원에서 민자당 후보가 당선될 수 있도록 신구범 후보가 사퇴해주면 장관, 전국구 국회의원, 지역구 국회의원 어느 것이든지 신 후보가 희망하는 대로 주겠다는 것이다. 물론 선거법 위반 사건도 선처하겠다는 것이다. 난 네 사람 중 중심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이는 개신교 목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나는 김영삼 대통령 보다 제주도민을 더 사랑합니다.”

 

이후엔 황당한 일도 겪었다. 그들의 제안을 거절한 뒤 정체불명의 여론조사가 판을 쳤다. 질문은 이런 것이었다. “신구범 후보가 사퇴하면 누구를 찍겠습니까?”

 

 

선거 이틀 전인 6월 25일 제주시 탑동광장에서 마무리 유세를 했다. 유세는 오후 7시 부터 1시간 40분 동안 계속되었다. 많은 도민이 와 주셨다. 솔직히 나로서도 놀랐다. 예상치 못한 인파행렬이 쏟아졌고, 모두 제주선거 역사상 가장 많은 유세군중들이었다고 입을 모았다. 나는 욕심도 미움도 다 버린 채 진실과 열정으로 연단에 올랐다. 나는 여당 후보도 야당 후보도 아닌 검찰공천으로 나온 제주의 후보라고 익살을 부렸다. 그리고 제주의 비전과 실천전략을 하나하나 유세군중들에게 전달했다. 유세는 마치 제주비전선포식이나 다름 없었다. 나는 당선을 위한 치열한 마지막 선거운동 현장이라는 것을 망각하고 있었다. 도지사 재임시 실현했던 '삼다수 개발' '장기 미집행 도시계획도로 조기집행을 위한 해외증권 발행(사무라이본드)' '어머니를 도시락에서 해방시키는 전국 최초의 초·중·고 학교급식시설' 등이 탑동유세장에서 내가 했던 약속들이었고, 이후 실현시킨 일들이다.

 

연설 말미엔 무소속으로 나왔다가 여당으로 당적을 바꾸는 그 이전의 행태를 비판하고, “당선돼도 어느 정당에도 입당하지 않겠다. 도민의 부름을 받는 무소속으로 남겠다”는 서약서를 청중에게 전달했다. 그 서약서는 그 당시 연단 앞 쪽을 지키고 있던 한 장애인 어르신이 지금도 보관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그 행동은 내 스스로 무소속이란 약속을 지킬 수 있도록 도민이 감시해 달라는 주문이었다.

 

1995년 6월27일. 제1회 전국 동시지방선거가 실시되던 그날 해는 예정대로 떠올랐다. 절망과 기대의 교차 속에 달려온 지난날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오전 8시 난 아내와 평온한 마음으로 큰아들 내외와 제주시 일도2동 투표구를 찾아 투표했다. 그리고 아내와 단 둘이서 내가 직접 차를 몰아 애월을 시작으로 서쪽 방향을 선택, 제주도내 전 읍·면을 돌며 선거책임자들을 만나 그들의 노고를 격려했다.

 

 

저녁 6시가 조금 지나 표선면 선거책임자를 만나기 위해 우리 부부가 어느 집을 막 들어설 무렵 박수가 터져 나왔다. MBC 출구조사에서 내가 유력 경쟁후보인 우근민 후보를 제치고 10.2% 포인트 차로 승리했다는 예측조사가 나왔다는 것이다. 최종결과는 신구범 11만1205표(40.6%), 우근민 8만9000표(32.5%), 강보성 6만6406표(24.3%) 였다. 도민들의 선택을 받고 나는 진심으로 제주 땅에 태어난 것을 감사했다.

 

그리고 그때 다짐했다. 내 소명을 알아차렸다. 때를 못 만날지언정 결코 때를 스스로 포기해서는 안되는 나의 소명이었다. 그것은 '경쟁, 자존, 번영의 위대한 제주시대를 열어가라‘는 도민의 준엄한 명령이었다.<17편으로 이어집니다>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
=1942년생. 오현고를 나와 육군사관학교 4년을 중퇴, 1967년 5회 행정고시에 합격해 공직자로 입문했다. 제주도 기획관, 주이탈리아 한국대사관 농무관, FAO(국제식량농업기구) 한국교체수석대표, 농림수산부 축산국장, 농업구조조정정책국장, 기획관리실장을 거쳐 YS정부 시절인 1993년 12월 제29대 제주도지사로 취임했다.

 

이어 첫 민선 지방선거인 95년 6·27선거에선 무소속으로 출마, 당선돼 31대 지사를 역임했다. 그러나 98년, 2002년 두 번의 제주지사 선거에선 연거푸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그후 축협중앙회장을 거쳐 친환경 농업회사법인인 (주)삼무와 전시판매장인 삼무힐랜드를 운영했지만 지사 재직시절 뇌물수수사건에 휘말려 2년여 수감된 뒤 풀려났다. 삼무힐랜드는 수감기간 중 문을 닫았다.

 

제주삼다수와 관광복권, 제주국제컨벤션센터, 제주세계섬문화축제 등이 그의 지사 재직시절 작품이다. 현재 제주생태도시연구소 이사장직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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