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겐 1611평의 감귤밭이 있었다. 1992년 돌아가신 어머니가 애지중지 아끼시던 감귤밭이다. 그 밭은 1980년대 중반부터 어머니가 손수 돌보시던 밭이다.
어머니가 가꾸시던 그 밭은 나에게 애틋한 사연이 있다. 1982년 경제부처가 신도시 과천으로 이전하게 되자 정부에선 과천 이전 공무원에게 그 지역 주공아파트를 특별분양했고, 나도 31평 아파트 한 채를 분양받았다. 서울 종로구 신교동을 거쳐 옥인동에서 살던 나는 경복고, 청운중에 다니던 세 아들을 과천과 안양에 있는 중·고등학교로 전학시키고 서울 집도 팔았다. 서울 집을 판 돈으로 아파트 대금을 내고 나니 2000만원이 남았다. 그 돈을 평생 고생만 하신 부모임이 쓰시도록 드리자고 아내가 제안했다. 너무도 고마웠다. 아내의 제안에 따라 우리 부부는 부모님도 뵐 겸 고향 제주로 갔다. 안부 얘기를 묻다가 이런 얘기를 꺼내자 어머니가 물끄러미 우리를 쳐다보다 이렇게 말했다.
“용인(큰 아들 이름)이 어멍아(엄마야)! 난 미깡(감귤) 밭 이신(있는) 사람이 제일 부럽나(부러워). 한번 우리 미깡 밭에 앉아 검질(김) 매여 봐시민(봤으면)···.”
두말 할 이유가 없었다. 그 돈으로 감귤밭을 사시라고 말씀드렸다. 그렇게 해서 마련한 감귤밭을 어머니는 보물단지처럼 애지중지 했고, 그 밭에서 일하는 것을 낙으로 삼다 돌아가셨다.
감귤이 없는 제주도를 상상할 수 있을까? 감귤이 우리 삶에 준 풍족함을 모를 이가 있겠는가?감귤 덕에 그나마 지금의 삶을 누리고 있는 제주도다. 그러나 그 감귤 탓에 우리는 가야 할 길을 가지 못했고, 언제나 발목이 잡혀 도전의 기회를 잃었고, 뻔히 알고 있는 승부수를 던지지 못했다. 더 나은 삶이 보장돼 있건만 안주했던 건 아닐 지 되돌아 볼 일이다.
1993년 말 관선 제주도지사로 부임하고 난 뒤 여러 선배공무원들을 인사차 찾아뵜다. 북제주군수를 지낸 김인화 선배님이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1968년 농어민 소득증대 특별사업으로 감귤을 권장하기 시작했을 때 전부 밀식(密植)을 했주(했지). 나중에 과원관리를 하면서 간벌(間伐·솎아베기)하기로 했는데 미깡(감귤) 따는 재미에 간벌 안 허당 보낭(안 하다 보니) 거의 곶자왈(제주의 천연원시림 지대)이 돼 버린거야. 한마디로 엉망이 된 거라. 신 지사는 꼭 간벌 도지사가 돼야 허매(해).”
부임 첫 해 9660억 원 지원규모의 우루과이라운드(UR) 대책을 김양배 농림부 장관에게 보고해 지원과 협력을 약속 받았다. 그러나 우리 농민들의 자구노력부터 끌어내야했다. 첫 해 5천ha 목표의 대대적인 간벌(間伐·솎아베기)운동을 시작했다.
간벌에 나서면서 난 어머니가 애지중지하시던 그 감귤밭을 폐작해 버렸다. 그 때 강정은 도교육감도 간벌시책에 교육공무원의 동참을 권장하고자 자신이 소유한 감귤밭을 절반이나 간벌했다. 너무도 고마웠다. 농촌 지도자와 농·어민 후계자, 농·감귤협 생산자 단체 직원, 새마을지도자, 공무원 모두가 간벌현장으로 달려갔고 마을에서는 파쇄기가 모자란다고 아우성쳤다.
제주도에서 UR 대책의 하나로 감귤나무를 베어내고 있다는 소식은 바다를 건넜고, 그해 2월 KBS가 감귤 간벌현장을 ‘체험, 삶의 현장’으로 방영하기 위해 녹화 차 제주를 찾았다. 녹화는 서귀포시 남원읍 신례2리 정낙식씨 농장에서 이뤄졌다. 이장 일을 맡아 보던 오명도씨가 현직 도지사인 나를 부하일꾼으로 거느리던 광경이다. 간벌 작업은 이후 계속됐다. 이 자리를 빌어 당시 간벌시책에 호응, 나서준 농민과 공무원 여러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2년 동안 간벌과 적과(摘果·열매솎기)를 시행하면서 생산조정에 대한 필요성을 농민들이 어느 정도 인식하게 되었다고 판단했다. 그 다음엔 '감귤생산조정제' 시행 준비에 착수하였다. 당시 제주의 농업경제 전문가였던 제주대학교 농과대학 강경선 교수가 '감귤생산 쿼터제'에 대한 세미나를 주관, 이를 이론적으로 뒷받침해 주었다. 그 때의 상황을 이전 통계로만 보면 이렇다.
1989년 감귤사상 유례 없는 대풍으로 생산량이 74만6000톤에 이르렀고, 92년에도 풍작이어서 생산량은 71만9000톤이었다. 한 관(3.75kg)당 가격이 1천원 미만으로 곤두박질 쳤다. 농촌의 젊은이들은 제주시 중앙로에 감귤을 뿌리며 시위에 나설 정도였다. 그 상황의 이면엔 그런 어려움과 고통을 겪으면서도 풍작이면 ‘파치’(非商品)를 수매하라고 아우성치다가 흉작일 때는 파치도 상품으로 팔아버리는 악순환이 있었다. 제주감귤 역사 30년간 임기응변식 문제해결만 있었지 정책다운 정책을 개발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문제로 봤다. 그것도 이제 수입개방이 목전인 현실에서 그런 행태를 반복한다면 우리 스스로 자멸의 길로 가는 것이란 판단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98년 외환위기에 따른 구제금융(IMF) 체제 시절 우린 한국전 이후 최대의 국난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그 때 감귤은 오히려 잘 나갔다. 천정부지로 오른 환율 때문에 수입업자들이 오렌지를 수입하지 못해 이득을 본 것에 불과하다. 결국 주변 여건으로 어쩌다 이득을 챙긴 것일 뿐 우리 스스로 튼실한 경쟁력을 갖춰 예상된 이익을 우리 스스로 얻지 못했다는 소리가 된다. 그 시절 내 생각은 서둘러 미래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일념뿐이었다.
1929년 뉴욕 월가에서 주식폭락으로 시작된 대공황 시절 미국 정부는 유명한 뉴딜 정책을 추진했다. 농업부문에선 농업조정법(the Agricultural Adjustment Act)을 제정해 농산물에 대한 생산통제를 시작했다. 이 농업조정은 오늘날까지도 미국 농업정책의 기조가 되고 있다. 농산물 생산과 유통 부문에서 정부개입 및 간섭의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EU의 공동농업정책(the Common Agriculture Policy)도 역시 EU 역내의 생산조정과 통제를 생산쿼터제, 잉여생산 처분을 위한 벌금 부과 등의 방법으로 시행하고 있다. 공산품과 달리 시장상황에 따라 수급조절이 쉽지 않은 농산물에 대해선 가격·소득보장 차원에서 다양한 방법의 생산조정제도를 선진국들이 시행하고 있는 것이다. 제주도 감귤에 대한 공공부문의 개입 배경이자 정당성이다.
‘감귤생산 조정 및 유통에 관한 조례’는 1996년 말 도의회에 상정돼 97년 1월15일 공포됐다. 제주감귤은 흉년이 들어야 산다. 마침내 작황에 관계없이 제주감귤을 흉년으로 만드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된 것이다. 사실 이 조례는 유일하게 상위법령의 근거 없이 제주도가 제정한 최초의 조례이며 더욱이 농산물 생산조정제가 없던 정부는 이 조례 내용을 원용하여 차후 ‘농산물 가격안정 및 유통에 관한 법률’을 개정, 유통명령제를 만들기에 이른다.
그러나 무엇보다 감귤생산조정제의 성패는 전체 출하량에 대한 시기별 출하조절, 정확한 집계와 지도·감독이 가능한 ‘콘트롤 타워’(control tower)의 존재 유무에 달려 있었다. 그런 구상으로 출범시킨 게 감귤출하연합회다. 제주도내 곳곳의 감귤선과장을 운영하는 농·감귤협과 상인의 협력 여하에 달려 있었던 것이다. 97년 5월 감귤출하연합회가 출범했다.
그때쯤 비상품 감귤의 출하를 막기 위한 검사규격도 마련됐다. 농·감귤협, 행정, 학계의 협의와 농민의견 수렴을 거쳐 15kg 한 상자당 감귤이 120~250개가 들어가도록 규격화했다. 작황과 수급여건에 따라 10%의 개수 증감이 가능하도록 했다. 이를 토대로 하면 선과기 규격상 2~9번과 안에 들어가는 규격열매는 상품이 되지만 그 보다 작거나, 더 큰 것은 비상품이 된다.
예상대로 1997년산 감귤은 79만톤이란 대풍작을 기록할 것으로 관측됐다. 게다가 예년에 없었던 가뭄, 해수피해 등 기상이변 때문에 한경면을 중심으로 한 서부지역에서 많은 소과(小果)가 발생했고, 성산 등 동부지역에선 해수피해로 인한 품질저하가 우려되는 일이 벌어졌다. 하지만 생산조정제 시행 첫 해에 일을 그르칠 순 없었다.
어느 날 강대준 감귤조합 조합장이 모 이사와 함께 도지사실로 찾아왔다. “현행 검사규격으론 비상품 비율이 30%를 넘어설 것이기에 규격을 완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동안 제대로 감귤을 살려보자고 간벌과 적과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농민과 공무원, 농·감귤협 직원들이 그렇게 고생했는데 조합장이 그런 소리를 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죄어 오는 느낌이었다. 그만 그에게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여론에 편승해서 시행해 보지도 않은 감귤 검사규격을 완화부터 하자니 그러고도 농민지도자 자격이 있소?” 잠시 정적이 흘렀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던 그는 함께 있던 이사와 지사실을 나서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언제까지 도지사 해먹는지 두고 보자!”
물론 농민들로부터 항의전화도 왔다. 서귀포 하효에 산다는 어느 아주머니는 새벽에 전화를 걸어 거칠게 항의했다.
“도지사우꽈?(도지사입니까)”
“예. 접니다”
“게난 도지사가 고망 막아불렌 헙디가?(그러니까 도지사가 구멍 막아버리라고 했습니까)”
처음엔 무슨 얘기인가 했지만 곧 알아차렸다. 선과기에서 일부 규격 구멍을 도지사가 막았느냐는 물음인 것이다.
참으로 고통스러웠고 답답했다. 나는 마음 속으로 숫자만 되뇌고 있었다. “1989년 생산량 74만6천톤, 농가총수입은 2000억원, 1996년 생산량 48만톤, 수입은 6000억원. 생산유통량을 줄여야 농민이 산다. 감귤은 흉작이 들어야 산다. 풍작 때에는 여러 정책을 써 흉작처럼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제주감귤이 살고, 농민이 산다. 제주경제가 산다···.”
그렇게 버텼다. 그러나 허사였다. 감귤조합장과 지역농협 조합장들이 농민 1373명의 서명을 받아 ‘감귤 검사규격 완화’를 도와 의회에 진정했다. 도의회는 97년 10월 ‘조례 시행규칙 상품규격 완화촉구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그 다음해인 1998년 6·4 지방선거가 예정돼 있었기에 모두들 표심잡기에 혈안이 된 것처럼 느껴졌다. 3만여 감귤농가의 표를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로선 더 이상 방법이 없었다. 두 손을 들 수 밖에 없었다. 결국 검사기준을 완화했고, 그 발표 후 감귤값은 하락세를 반복하더니 급기야 kg당 500원 이하로 폭락했다.
97년 11월28일 난 감귤출하연합회를 긴급소집해 kg당 수매가격 200원, 수매량 5만톤을 내용으로 하는 방침을 결정했다. 비상품 감귤 수매를 시작함으로써 감귤가격 하락행진을 막아내야 했다.
감귤 검사규격을 완화하라고 아우성치던 농민들은 그 때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고집쟁이 신구범 도지사가 무사(왜) 고집 안 부련(안 부리고) 규격 완화 시켜서(시켰냐)?” <14편으로 이어집니다>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
이어 첫 민선 지방선거인 95년 6·27선거에선 무소속으로 출마, 당선돼 31대 지사를 역임했다. 그러나 98년, 2002년 두 번의 제주지사 선거에선 연거푸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그후 축협중앙회장을 거쳐 친환경 농업회사법인인 (주)삼무와 전시판매장인 삼무힐랜드를 운영했지만 지사 재직시절 뇌물수수사건에 휘말려 2년여 수감된 뒤 풀려났다. 삼무힐랜드는 수감기간 중 문을 닫았다.
제주삼다수와 관광복권, 제주국제컨벤션센터, 제주세계섬문화축제 등이 그의 지사 재직시절 작품이다. 현재 제주생태도시연구소 이사장직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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