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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점...조선조 제주와 호남을 아우르는 문필가로 명망

오점(吳霑:1764~1856)

 

흔히 명필이라 하면 제주에 유배 왔던 추사 김정희를 일컫는다. 추사체가 제주 유배시절에 완성되었기에 제주에서의 명필이라 하면 일반 사람들은 추사 김정희를 머리 속에 떠올리곤 한다.

 

그렇다면 제주가 고향인 사람 중에 명필이라 할 만한 인물은 없을까?

오점은 조선시대 정조에서 순조, 헌종, 철종조에 활동했던 제주의 명필, 더 나아가 호남의 명필로 알려진 인물이다. 여기에 그는 문장까지 겸해 진정 서예가로서의 자질을 두루 갖추어 오늘날 ‘글씨만을 잘 쓰는 명필’과는 격이 다른 인물이었다. 또한 금석학에까지 상당한 조예가 있었다고 전하여 진다.

 

하지만 오점의 자취는 앞서 등재된 제주사 인물의 기사에서처럼 자세하게 남아있지 않다. 그의 글씨 또한 명필이라는 호칭에 무색하게 몇 작품이 남아있지 않다.

 

호남명필로 일컬어진 오점의 자(字)는 시지(時之), 호는 청파(靑坡), 본관은 화순(和順)이며 제주 성안에서 성장하였다. 정조 10년(1786) 사마시에 뽑혔으나 벼슬길에는 나가지 않았다.

 

필법이 뛰어났는데 특히 송설체(松雪體)를 중시해 썼으며 당대 금석서(金石書)에 독보적인 존재였다고 한다. 유배지에서 이러한 오점의 글씨를 본 추사(秋史)도 그의 필법을 칭찬했다고 전한다. 제주향교 계성사(啓聖祠) 현판이 그의 필적이다.

 

또한 문장력이 뛰어나 당시 공사문(公私文)이 그의 솜씨에서 이루어졌으며 연상루중수상량문(延祥樓重修上樑文), 망경루개건상량문(望京樓改建上樑文), 동문상량문(東門上樑文) 등이 현재 전해지고 있다.

 

그의 차남인 소림(小林) 오태직(吳泰稷)도 사마시에 급제하였고 아버지를 닮아 글씨와 문장이 뛰어나 시학(詩學)에 있어 남주제일(南州第一)이라는 평이 있었다. 손자인 연와(蓮窩) 오경로(吳卿魯) 또한 시문(詩書)에 능하여 3대에 걸쳐 문명(文名)을 떨쳐 칭찬이 끊이지 않았다.

 

※ 오점의 행적은『제주사인명사전』(김찬흡 편,제주문화원,2002)과 김석익의 「탐라인물고」에 나온 그의 자취를 발췌하여 정리하였다.

 

글=백종진/제주문화원 문화기획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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