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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흥태...300년 전 조선 구하고자 일어선 선비의 의릐

오흥태(吳興泰:1700~?)

 

국가의 위기 상황은 절도(絶島)의 이름 없는 선비의 가슴에 의분의 불을 질렀다. 3백여 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오늘까지도 공맹(孔孟)의 의리(義理)를 온몸으로 실천했던 조선 선비의 의로운 행의(行誼)는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여전히 가슴을 울리게 한다.

 

정의현(旌義縣) 의사(義士) 오흥태(吳興泰)에 대한 사실(史實)은 다음과 같다.

영조 4년(1728) 영조의 즉위로 소론이 정계에서 배제되자 이인좌(李麟佐), 정희량(鄭希亮) 등이 무력으로 정권쟁탈을 꾀하는 역모를 일으켜 전국이 어수선해지자 정의현 난산리(현 성산읍 난산리) 유생 오흥태가 삼읍에 격문(檄文)을 돌려 의병을 모집하였다. 이에 의병 수백 인을 모으고 군량과 무기를 마련하여 출육(出陸)하려 할 즈음에 난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됨에 따라 이내 곧 군사를 해산하여 돌려보냈다.
정조 18년(1794) 어사 심락수의 보고로 이 사실을 안 국왕은 그 뜻을 아름답게 여겨, 실적이 없으면 정려를 명하지 아니하는 전례를 깨고 의사로 정려(旌閭)토록 하였다.

 

철종 원년(1850) 목사 장인식(張寅植)은 유림들의 건의에 따라 정의서당 안에 의사묘(義士廟)를 세워 오흥태(吳興泰)를 향사(享祀)하게 하고 그의 후손들을 찾아 제전(祭田)을 마련하여 주고 요역(徭役)을 면제하여 주었으며, 서귀포 앞 범섬, 섶섬을 주어 거기에 살게 하였다.

 

 

고종 8년(1871)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의사묘는 철향(撤享)되었다. 철향 당시 정의현의 향청, 향교, 집강들이 정의현 유일의 향현조두처(鄕賢俎豆處)를 훼철할 수 없다하여 따르지 아니하려 하였으나 전국이 대동(大同)한 일이니 어찌할 수 없다하여 관에서 들어주지 아니했다. 후일을 기약하여 위판을 매안하지 아니하니 관에서도 묵인하였으나 왜정 때에 완전히 철폐되었다.

 

오의사가 삼읍에 돌려 의병을 모으던 창의격문(倡義檄文)이 다음과 같이 전한다.

 

창의격문

 

다음과 같이 격문을 띄우는 일은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중요한 것은 임금과 어버이이요 귀한 것은 충성과 효도일 뿐이다. 그러므로 옛사람이 말하기를, “임금과 어버이가 비록 같지 않다 하나 충성과 효도는 둘이 될 수 없다.” 하였다. 이를 두고 볼 것 같으면 사람의 신하되고 아들 된 자는 임금과 아버지가 어려움을 당하였을 때 구차하게 살려 하여서는 안 될 것이다. 혹시라도 아들이 아버지의 위급함을 구하지 아니하고 신하가 임금의 어려움을 풀려고 먼저 서둘지 아니한다면 충효의 마을에 죄가 될 뿐만 아니라 소나 말과 같은 무리가 될 것이니 어찌 경계치 아니하랴!

 

우리 임금님은 숙종의 아들이며 경종의 동생으로 백성들이 원하는 바에 따라 대통을 계승하였다. 또 요(堯)임금과 같은 자질을 타고 나셨고 탕(湯)임금이나 무왕(武王)과 같은 덕을 지녀 임금님 되신지 4년 만에 은택이 모든 백성에게 적셔들었다. 그러므로 나라 안 백성들은 모두 다 죽지 않고 오래 살아서 그 덕화가 성대히 이루어짐을 잠시라도 보고자 아니하는 이가 없었다.

 

천만 뜻밖에 흉적의 무리가 음흉한 마음을 품고 임금의 자리를 엿보려고 무리를 모아 경기도와 영남에서 발호하였다. 구정(九鼎:우왕이 주조한 솥. 하나라 은나라에서 천자의 보물로 보존되었음)을 가벼이 여겨 묻고자 하였고, 머리를 내밀어 삼천(三川:한강․낙동강․섬진강)을 엿보니 어리석고 알지 못하는 백성들이 따라야 하고 거절하여야 할 의리를 분별하지 못하고 왕왕 그 무리에 들어가 삼남지방 태반이 적의 소굴이 되었다 한다. 아! 어찌 이와 같은 세상이 되었는가?

 

수천 년 전해 온 기자의 나라요 삼백년 이어 온 우리 조정이 예의와 문물이 조금도 중국에 비하여 부끄러움이 없었고, (임금님의) 깊은 어지심과 두터운 은택이 실제로 백성에게 적셔져 있어 흉악한 무리가 그 사이에서 물들여질 줄은 일찍이 생각하지 못하였다. 통분할 일이며 한탄할 일이다. 지금 적의 괴수가 불괴를 도모하여 하늘을 거역하는 악한 일을 시작하였으니, 어찌 조정의 장군이나 정승들만이 절치부심할 도적들인가. 실로 온 나라의 모든 백성들의 같은 하늘 아래서는 살 수 없는 원수인 것이다. 우리나라 3백 6십 4개 현(縣) 가운데 강개하고 충의로운 선비가 먼 시골구석에서 반드시 일어나 국가의 위급함에 몸 바쳐 충분히 적을 평정할 것이다.

 

우리 제주도는 육지와 달리 오래도록 잊지 못할 (국가의) 은덕을 입었다. 지난 계사년(숙종 39년:1713)년과 갑오년에 흉년을 당하여 굶주릴 때 우리 숙종대왕께서 특별히 곡식을 보내어 은덕을 베풀었으므로 오늘에 이르기 까지 처자를 보전할 수 있었으니 모두 임금님이 내려준 바가 아님이 없다. 초목금수도 오히려 하늘에서 비와 이슬을 내려주는 은혜를 알거늘 항차 만물의 영장이라는 사람이 유독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이 없어서야 되겠는가? 지금이 임금님이 위태롭고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때라 신하가 목숨을 바치기에 알맞은 때이다. 위 아래 모든 사람들이 선왕을 잊지 못하는 마음으로 전날 구원하여 준 은혜를 생각하여 가지런히 전쟁터로 나아가 적진과 맞부딪쳐 우리 임금님께 보답하지 않겠는가?

 

옛날 진(秦)나라 목공(穆公)이 기산(岐山) 아래 사는 야인들과 밥을 같이 먹고 말을 같이 타면서도 법을 집행할 때에는 마땅한 벌을 주었다. 그러나 목공이 술을 하사하였던 일을 감사히 생각하여 접전에 나아가 진(晋)나라 군사를 무찔러 목공의 은혜에 보답하였다. 어찌 만고에 아름다운 이름이 아닌가? 야인의 무리도 이와 같이 하는데 두루 국가의 은택을 입은 우리 섬 안 백성들이 어찌 야인의 무리만 못하여 국가의 어려움에 몸 바쳐 성스러운 은혜에 보답하지 못하겠는가?

 

우리들 백면서생(白面書生)은 임금을 생각하고 아끼는 마음에서 순국을 결의하였으나 적을 제압할 재주와 임기응변할 책략이 없이 망령되게 근왕(勤王)의 뜻을 내었다하여 함께 국난에 나아갈 자가 없으니 진실로 통탄할 일이다. 그러나 백성과 신하된 사람이 국가의 어려운 때를 당하여 (국가를 위하여) 죽으면 영광된 일이지만, 흉악한 칼날이 횡행할 때에 살아남는다면 또한 욕이 된다. 옛사람은 성공과 실패, 무기의 날카롭고 둔한 것은 의론할 것이 못된다고 말했다. 만약 싸움에 이기고 질 것과 한 몸이 죽고 살 것을 헤아려 그에 따라 나가고 물러선다면 어찌 충신의 사의 마음이라 하겠는가?

 

이에 삼읍(三邑)의 각반(各班) 각청(各廳) 각면 각리에 격문을 보내어 진실로 충의롭게 한 몸을 잊고 나라에 몸 바칠 자가 있으면 맹세코 더불어 행하려 한다. 나의 말을 우활하다 하여 머뭇거려 바라보지만 말고 또 한 번 죽기가 어렵다 하여 늦추어 임금님의 은혜를 저버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 꾸며서 하는 말이 아니고 진실한 마음에서 하는 말이니 혈기 있는 대장부는 어깨를 펴고 뛰어나와 의로운 함성을 함께 외치고 국가의 어려움에 부딪쳐 죽든지 살든지 하여 준다면 다행함이 이루 다할 수 없겠다.(번역 : 오문복. 오문복 편,『정의군지』,남제주문화원,2005,138-139쪽.)

 

글=백종진/ 제주문화원 문화기획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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