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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계곤...대를 이은 효, 무인도 표류에도 생환

박계곤(朴繼崑;1675~1731)

 

“우리 부모님을 불쌍히 여기소서. 얼마 없어 영원히 이별하게 되나이다. 하늘이여 이를 불쌍히 여기시어, 표식을 아버님 집으로 보내주소서. 하늘에 빌며 절하며 통곡합니다.(哀我父母, 幾乎永訣, 天其矜怜, 標送父家, 祝天拜哭)”

 

애월읍 옹포리 출신의 박계곤(朴繼崑;1675~1731)이 목사 일행을 따라 육지로 가다 파선되어 사서도(斜鼠島) 근처에 표착하고는 부모님과의 영원한 이별을 슬퍼하며 널빤지에 적어 내려간 글귀이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던가. 이 널빤지는 물결을 따라 곧바로 제주성 북문 앞 바닷가에 도착했고 자식의 도항을 걱정하던 아비가 이를 발견하고 관가에 고하여 박계곤은 결국 목숨을 구하게 되었다.

 

감천(感天)의 효자(孝子)라 알려진 박계곤에 대해 심재 김석익은 ‘탐라인물고’에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박계곤은 본관이 밀양으로 독포촌[현 애월읍 옹포리]에서 살았고, 어려서부터 효자라고 칭찬받았다. 일찍이 일이 있어 바다를 건너게 되었는데, 배가 바다 가운데서 부서져 무인도에 표류하게 되었다. 거의 죽게 될 때에 배의 널판 한 조각에 부모에게 이별하는 글을 쓰고는 하늘에 빌면서 바다에 던졌다. 푸른 바다가 아는 것이 있는 것인지, 잠깐 사이에 바람을 일으키고 물결을 몰아 곧바로 제주성 북문 밖 벼랑에 이르게 하였다. 그의 아버지가 가져다가 관가에 알리니 가벼운 배를 보내어 싣고 돌아왔다. 또 숙종이 승하하니 계곤이 30여 인을 데리고 능의 역사에 나아가서 노래로써 슬퍼했다. 인원왕후(仁元王后)가 듣고는 가상히 여겨 특별히 능에 제사지냈던 반찬을 줌으로써 위로했다. 또 쌀과 베를 주고 여러 고을의 말[馬]로 바꿔주면서 돌아가게 하였다. 한 집안이 그 덕에 감화를 입어 그 딸인 이씨의 처가 수절하였으며 계집종 고소락(高所樂) 또한 몸을 깨끗이 하여 주인을 섬겼다. 이 일이 관가에 알려져 그 손자 중환(重煥)은 부장(部將)을 지냄과 동시에 정려(旌閭)를 세웠다. 외손 부천겸(夫千謙)은 효도로써 세상에 알려졌다.’

 

효자가 효자를 낳는다고 하였던가? 하늘을 감동시킨 효자 박계곤의 딸도 이항춘(李恒春)에게 시집갔는데 일찍이 남편과 이별하여 종신 수절하여 貞節夫人이라 불리었고, 그녀의 몸종 고소락 또한 주인의 절행(節行)을 본받아 끝내 시집가지 않고 60여세에 죽을 때까지 박씨 부인을 도와 충비(忠婢)로 불리게 되었다. 효와 열과 충의 삼강(三綱)이 박계곤에서 그의 딸, 그리고 몸종에 이르기까지 고루 드러나게 된 것이다.
이들에 대한 정려는 1794(정조 18년) 심낙수 어사가 정려(旌閭)하여 ‘박씨삼정문(朴氏三旌門)'의 이름을 내리고 정려기와 신사를 지어주어 후손에게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으며 삼정문은 애월읍 신엄리에 위치하고 있다.

 

글=백종진/ 제주문화원 문화기획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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