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례에는 삶과 죽음이라는 갈림길에서 개인 중심으로 펼쳐지는 통과의례와 사회적 통합의 이데올로기를 작동시키는 사회적 의례인 세시 의례가 있다. 이 통과의례와 세시 의례 모두가 사회적 통합을 위한 하나의 이데올로기 국가 장치로서 임무를 수행한다. 의례를 사회의 모든 영역으로 확대해보면 무수한 제도 속에는 의례가 변형됐거나 의례의 본질을 내포하고 있는 의례적 요소들이 산재해 있다. 예를 들면 제사, 기념식, 졸업식, 마라톤 대회, 스포츠 대회, 기획된 축제, 열병식 등이 있다. 전통사회의 윤리나 가치들이 자본주의적으로 변형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래도 근본적으로 의례의 기능은 소멸하지 않는다. 오늘날 성인식과 다를 바 없는 과거의 관례(冠禮)나 계례(髻禮) 형식은 주민등록증으로 대체되었지만, 여전히 통과 의례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성인식과 같이 주민등록증을 받는 순간 미성년자가 아니라는 것, 그 즉시 사회적인 효력(법적 효력)을 가질 수 있고 미성년자 금지구역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다는 것은 통과의례가 제도화된 것일 뿐이다. 예전에는 개인의 생일 즉 왕이나, 대비, 왕세자의 생일(탄신)들은 국가의 대사(大事)로 생각하여,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과거를 치르거나 죄인을 사면해 주기도 하고, 공로자를 포상하는 등 국가 차원의 기념행사를 치렀다. 이러한 예는 오늘날에도(대통령 생일은 국가 의례에서 생략) 다른 형태로(광복절, 현충일) 여전히 존재한다. 반대로 오늘날은 민주주의라는 진보적 이념 때문에 개인의 가치가 존중되고 있는데 특히 개인의 생일은 작은 의례들의 현재 스타일로 변형된 의례이다. 통과의례의 한 형식인 생일축하식은 과거처럼 크게 의례에 규정을 받지는 않지만, 대체로 그 유형이 규정돼 있다. 친구들을 만나 생맥주를 마시고, 케이크를 자르며, 영화를 보러 가는 식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어떤 형태로든지 기념해야 될 것과 기념하는 방식의 차이는 있어도 의례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기념성’이라는 것은 사라지지 않았다. 또 전통시대의 학교인 향교의 기능은 의례의 기능을 설명하는데 매우 적절하다. 향교는 유교의 학문을 전파하는 이데올로기 국가기구로서 그곳에서 행해지는 의례는 유교의 사상을 실천하고 증명하고 세습하게 만드는 현장인 셈이다. 그러기 때문에 의례공간에 모셔진 훌륭한 조상들과 그것을 기리는 후손들은 제례를 통해 정신적으로 교감하며, 이 법통은 지역 공동체 사회의 입지를 구현할 수 있는 토대를 생산하는 혈연 이데올로기로 기능한다. 나아가 향교가 이념화화고 전파시키는 지배체제의 관념은 가문과 혈통의 이데올로기를 통합하는 가묘와 묘지라는 의례공간에까지 영향을 미치며, 향교가 구축하는 이데올로기 국가장치의 역할을 포기하지 않는 한 향교의 의례공간은 ‘정치적 장식’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김유정은? = 최남단 제주 모슬포 출생이다. 제주대 미술교육과를 나와 부산대에서 예술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미술평론가(한국미술평론가협회), 제주문화연구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는 『제주의 무신도(2000)』, 『아름다운 제주 석상 동자석(2003)』, 『제주의 무덤(2007)』, 『제주 풍토와 무덤』, 『제주의 돌문화(2012)』, 『제주의 산담(2015)』, 『제주 돌담(2015)』. 『제주도 해양문화읽기(2017)』, 『제주도 동자석 연구(2020)』, 『제주도 산담연구(2021)』, 『제주도 풍토와 문화(2022)』, 『제주 돌담의 구조와 형태·미학(2022)』 등이 있다.
남송 때 임안(臨安, 현 항주)의 와사(瓦舍) 구란(句欄) 중의 기악(妓樂)은 노래를 팔며 구걸하는 거지가 전업화된 형태에 속한다. 송나라 때 오자목(吳自牧)의 『몽양록(夢粱錄)』 19권 『와사(瓦舍)』의 기록이다. “와사(瓦舍)라는 것은, 올 때는 깨진 기와를 서로 맞추는 것처럼 몰려오고 떠날 때는 기와 무너지듯 사라진다는 의미다. 쉽게 모이고 쉽게 흩어진다. 언제 시작됐는지는 모른다. 요즈음 경사는 사대부와 서민이 걷잡을 수 없이 방탕하게 노는 곳이 되었고, 자제들이 유락에 빠져 자신을 무너뜨리는 장소가 되었다. 항주와 소흥 사이에 제왕이 나들이 도중에 잠시 머무르는 곳이 있다. 전암양(殿岩楊)과 왕인(王因)의 군사 대부분은 서북사람이다. 성 내외에 왕사를 창립해 기악을 모으고 군졸에게 휴가 때 즐기는 장소로 제공하였다. 이후 명문자제 귀공자들이 그곳에서 방탕하게 놀면서 자신을 파괴하니 변도(汴都)보다도 심하다. 항주의 와사는 성 내외에 17곳에 이른다.” 같은 책 20권 『기악(妓樂)』의 기록은 이렇다. “시가에 음악가 서너너덧 명이 팀을 이루어, 여자아이 한두 명을 들어 올려 춤추고 사(詞)를 노래하면서, 길거리를 따라 재주 부리며 장사한다. 설날에 등불을 밝히고, 봄 석 달 동안은 회관에서 즐기며 구경한다. 호수를 거닐며 조수를 구경할 때 주루나 유흥가, 기녀 집에서 응대하지만 받는 돈은 많지 않다. 이를 황고판(荒鼓板)이라 한다.” 모두 노래를 팔며 구걸하는 부류에 속한다. 일반적으로 길거리나 객점에서 노래를 파는 것과 비교하면 내용이나 방식이 복잡하고 복장 등이 화려했다. 여색을 팔기도 하였다. 기록에 따르면 노래를 팔며 구걸하다가 부자가 된 경우도 있었다. 청나라 말기에 오회(吳會)가 고향인 거지가 있었다. 육칠 세에 부친을 잃고 모친을 따라 바느질하며 살아갔으나, 생계를 유지하기 힘들어 오래지 않아 거지가 되었다. 사람이 총명하여, 은은하며 구성진 자신의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구걸하였다. 이후 세월이 쌓이니 점차 부유해지기 시작했다. 거상보다도 많은 돈을 모을 수 있었다. 성인이 된 후 부친의 유업을 이어받아 신발가게를 차렸다. 청나라 말기 민국 초기에, 노래를 팔면서 구걸하는 거지가 비교적 많았다. 길거리와 골목을 돌아다니며 노래하면서 구걸하였다. 심지어 저택에 불려가 노래하기도 했다. 당시 유행하던 은어 중에 몇 가지를 보면 전체 흐름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이렇다 : 민가를 부르면서 구걸하는 것을 소리(響子)를 부르다 ; 소라를 울림, 징을 소리판 ; 점포를 높은 가게 ; 주인을 점포 두목 ; 구걸하는 것을 기와처마에 가까이 가다 ; 노래 부르는 소곡을 편자(片子) ; 향촌을 개 소굴 ; 주택을 가마 구멍 ; 호화주택을 높은 개 소굴 등등으로 불렀다. 이런 은어 코드로 구성된 언어의 뜻을 보면 노래를 팔며 구걸하는 거지들의 처지와 심리, 감정을 쉬이 감득할 수 있다. 옛날 북경 거리에는 남녀 맹인이 맹인용 지팡이를 짚고 악기를 가지고 연주하면서 구걸하였다. 북을 치며 구걸하는 걸인도 있었다. 모두 노래를 팔며 구걸하는 부류다. 어떤 사람들은 피서 하거나 대소사가 생겼을 때 맹인 예인을 불러 공연하였다. 노래 한 단락마다 2,3각, 혹은 몇 시간에 얼마를 주는 포천(包天)으로 계산해 줬다. 노래하는 소곡은 북경의 일이 대부분이었다. 예를 들면, 『탐청수하(探淸水河)』, 『왕우전(王友全)을 총살하다』 등, 『고금기관』 중 한 단락, 즉 『두십낭(杜十娘)이 격노해 백보상을 물에 가라앉히다』, 『교(喬)태수가 제멋대로 남녀 혼사를 맺어주다』, 『김옥노(金玉奴)가 박정한 남편을 때리다』 등이다. 서하대고(西河大鼓, 서하 지역의 곡(曲)으로 큰 북을 치면서 노래하는 민간 예술의 하나), 낙정대고(樂亭大鼓, 북방 지역의 곡(曲)으로 북을 치면서 노래하는 민간 예술의 하나), 매화대고(梅花大鼓)1), 고음연탄(五音聯彈, 4명의 악사들이 나와 서로의 손을 교차해 옆 사람의 악기를 켜면서 5개의 현악기를 연주) 등으로 생동하며 다채롭다. 살 길을 찾아 걸식하는 것이 목적이기에 노래를 팔면서 구걸할 때에는 때때로 노래에 국한되지만은 않는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희곡 곡예까지 겸하기도 하였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1) 매화대고(梅花大鼓), 곡예(曲藝, 중국 설창 문예)의 하나로, 한 사람이 박자판을 치며 노래하고 두세 사람이 반주를 넣는다. 악기에는 ‘삼현(三弦)’, ‘비파(琵琶)’, ‘사호(四胡)’ 등이 있다. 노래 가사는 보통 일곱 자구와 열 자구로 되어 있다. 청(淸)나라 말기에 북경에서 생겨나 화북 일대에서 유행하였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 학사, 대만 정치대학교 중문학과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자로 『선총원(沈從文) 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 『재미있는 한자풀이』, 『수달피 모자를 쓴 친구(선총원 단편선집)』, 『음식에 담겨있는 한중교류사』, 『십삼 왕조의 고도 낙양 고성 순례』, 『발자취-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가는 여정』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땅에는 기운이 잘 모이는 땅과 기운이 잘 모이지 않는 땅이 있다. 명당은 용맥(龍脈), 즉 산줄기를 타고 흐르는 지맥이 이어져 생명력이 가득한 산천의 기운이 모인 곳으로 이러한 자리는 건강과 복을 얻을 수 있다. 명당의 입지와 환경은 지세가 포근하고 물이 잘 감싸 흐르는 양지가 바르고 사람이 살기에 아늑한 장소를 말하는 것이다. 풍수에서 용(龍)이라고 하는 것은 산의 능선이 상하로 높고 낮게 기복을 이루고 좌우로 구불구불하게 흘러 내려온 모습이 마치 꿈틀거리는 용의 모습과 같음을 의미하는 것인데, 그 변화무쌍한 형세로 이어진 산맥이 마치 풍운 조화를 일으키는 용의 모습에 비교한 것이다. 지맥(地脈), 즉 용맥이란 풍수지리에서 땅속에 있는 산천의 정기가 순환하는 토맥(土脈)을 말하며 지리적으로 말해 땅속 지층이 이어진 기맥(氣脈)을 가리키며 인체의 기혈(氣血)에 비교된다. 맥(脈)이란 본래 시각적으로 보이는 일반적인 산줄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용맥을 타고 땅속으로 흘러 통하는 기(氣)의 통로를 말한다. 산세를 타고 온 지맥을 기운이 흐르지 않거나 약한 사맥(死脈)과 기운이 잘 흐르고 생동하는 생맥(生脈)으로 구분하는데, 생기를 타는 용맥 중에서 기운이 가장 집중되어 모이는 곳을 풍수지리에서는 혈(穴)이라고 하는 것이다. 풍수에서 보통 지세에 따라 음양의 생기가 유동하는 것이 마치 인체의 맥락에서 기혈이 흐르는 것과 같으므로 생기의 운행이란 측면에서 ‘맥’이라고 한 것이다. 사람의 인상을 관찰하는 것이 관상이라면 풍수지리는 땅을 살피고 음양의 허실을 관찰하는 지리 분야이므로 땅의 관상, 즉 상지술(相地術)이라고도 부른다. 혈(穴)이 맑으면 귀한 인품이 나고 혈이 흐리면 천한 인품이 난다고 여겼으며 지맥을 받아 기운이 모이고 산세가 맑고 아늑한 곳을 일명 명당(明堂)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청룡, 백호, 주작, 현무가 잘 이루어지고 물길이 잘 감싸고 도는 포근하고 아늑한 지세의 적당한 곳을 말하는 것이다. 명당을 이루는 지맥의 흐름도는 다음과 같다. 집의 뒤쪽을 받치고 있는 주산(主山)이 어머니의 품처럼 포근하고 수려하며 단정한 곳이며 주위 사방에서 호위하는 산들이 있고 산맥이 평지 쪽으로 유유히 뻗어 내리흐르는 물가에서 그쳐 평평한 들판에 집터가 이루어진 곳을 말한다. 가장 좋은 곳은 일조량이 적당하고 통풍이 잘되며 적당한 거리를 두고 전후좌우로 동산이나 산이 감싸주는 포근하고 아늑한 곳이 이상적인 명당이라 말할 수 있다. ☞ 명당은 심신을 건강하게 하는 치유의 장소이다! 예로부터 배산임수(背山臨水), 즉 뒤로 산을 의지하고 앞으로 물을 맞이하면 건강장수(健康長壽)하고, 전저후고(前低後高), 즉 앞이 낮은 듯하고 뒤가 높으면 세출영웅(世出英雄)하고, 전착후관(前窄後寬), 즉 앞이 좁은 듯하고 뒤가 넓으면 부귀여산(富貴如山)이라고 했다. 밝은 기운이 모이는 명당은 혈(穴)과 사(砂)가 합한 곳으로써, 양택이든 음택이든 산천의 기운이 흩어지지 않고 한 곳으로 조화롭게 모인 취합국세(聚合局勢)를 이룬 것을 말한다. 산천의 기운이 잘 모이는 장소들을 활용하여 관광과 연계한 명당의 기운 받기라는 치유코스를 개발하여 지역의 발전을 도모함과 동시에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활기찬 마을로 만들어갈 수도 있다. 전통적인 풍수 이론에서는 바람을 음기(陰氣), 물은 양기(陽氣)로 여겼으며, 이 두 가지는 모두 기(氣)가 돌아다니는 물질이다. 기(氣)의 양(陽)이라는 것은 바람으로 유행하는 것이고, 기(氣)의 음(陰)이라는 것은 물로부터 움직이는 것이다. 따라서 이 ‘기(氣)’는 특유의 겸성(兼性)을 가지고 있는데 즉 바람을 타면 흩어지고 물의 경계를 만나면 그친다.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바로 이 기(氣)가 모이면 살고 기(氣)가 흩어지면 죽는다. 이 때문에 “바람을 감추고 물을 얻는다. (藏風得水)”는 곧 풍수학설(風水學說)에서 말하는 ‘취기(聚氣)’의 근본이다. 이 가운데서 알 수 있는 것은 《역경》과 풍수학은 실제로 원(源)과 류(流)의 관계이다. 즉 근원과 파생의 관계이다. 한의학의 근본은 역시 음양오행의 이론을 바탕으로 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음양오행의 전체적인 기틀과 이론 위에서 건립된 것이다. 변별로써 인체의 음양가 허실(虛實), 표리(表裏), 한열(寒熱) 등을 주요 임무이며 따라서 인체 내부와 사람과 환경의 협조 관계이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 신영대는? = 대한풍수연구학회 편집위원장, 한국역술인협회 공인 역학연구원이다. 중문학 박사와 풍수학자로서 ‘제주의 오름과 풍수’, ‘명리학원리대전’, ‘풍수지리학 원리’, ‘전원시인 도연명 시선', ‘흰 구름 벗을 삼아 읽어보는 당시선’ 등 다수의 저서를 냈다. '한라산 총서'의 구비전승·지명·풍수 분야와 ‘세계자연유산지구 마을일지 보고서’ 중 풍수 분야 공동 집필자로도 참여한 바 있다. 또 제주도 각 마을 '향토지' 풍수 부문에 공동 집필자로 참여하고 있다. 현재 제주관광대 관광중국어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이른바 ‘매예형(賣藝型)’ 거지는 본인의 특기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기예를 자본으로 삼아, 관중을 불러 모으고 환심을 사면서 동냥하는 거지를 가리킨다. 옛날에 길거리에서 잡기, 무술, 곡예 따위의 기예를 팔아 생활하는 거지를 말한다. 강호에 나아가 기예를 파는 자의 개인 출신 성분, 사회배경, 처지 모두 대단히 복잡했다. 그중 거지는 항방(行幇)인 개방(丐幇)의 일원이 됐거나 흑사회(黑社會)에서 활약하기도 하여, 좋은 사람과 악한 사람이 섞여 있었다. ‘원시형’ 방식으로 구걸하며 살아가는 사람들도 훔칠 수 있으면 훔치고 사기 칠 수 있는 기회가 생기면 사기를 쳐서, ‘순수견양(順手牽羊)’1) 식에 버릇이 들었거나 다른 법도에 벗어난 수단을 쓰는 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매예형’ 거지는 사람을 모으는 방식과 동냥하는 방식이 천태만상이었다. 별의 별 것이 다 있었다. 그것들을 한꺼번에 모으면 ‘강호 예술단’이라고 부를 만했다. 퉁소를 불며 걸식하는 방법이 있었다. 가장 유명한 것은 춘추시대에 ‘오자서(伍子胥)가 퉁소를 불며 구걸해 시정에서 밥을 빌어먹었다.’ 그래서 많은 거지들이 자기 직업의 조사(祖師)로 오자서를 모시어 공양했다. 현대에도 퉁소를 불며 구걸하는 거지들이 있다. 맹인이 대부분이다. 길거리나 시장 바닥에서 애절하면서도 원망하는 듯, 완곡하면서도 구성진 악곡을 불면서 구걸한다. 당나라 때에 서양에서 하모니카가 전래되어 하모니카를 불면서 구걸하는 거지도 생겨났다. 역시 맹인이 다수를 차지한다. 중국 내지와 홍콩에서 모두 볼 수 있다. 오자서가 퉁소를 불면서 구걸한 때부터 당대에 하모니카를 불면서 구걸하는 방식까지, 구걸 방식의 변화와 교체를 반영하고 있다. 하모니카가 유행하자 사람들이 즐거이 받아들였다. 오래되고 예스러운 퉁소는 거지 손에서도 시대에 맞춰 자리를 양보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오랜 역사 속에서 ‘길거리에서 퉁소를 불다’는 말은 구걸한다는 대명사가 되었다. 노래를 부르며 구걸하는 방식 강호에서는 ‘매춘(賣春)’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역사가 유구하고 예나 지금이나 자주 보이는 구걸 방식이다. 가장 이른 시기는 전국시대에서 진(秦)나라 때까지 올라간다고 전한다. 노래를 아주 잘 부르는 한아(韓娥)라는 여인이 있었다. 노래를 팔며 구걸해 오늘날까지 ‘요량삼일(繞梁三日)’2)이라는 성어를 남겼다. 이야기는 『열자(列子)·탕문(湯問)』에 자세히 보인다. 한아가 먹을 쌀이 다 떨어지자 옹문(雍門)에서 노래하며 걸식하였다. 그녀가 지나간 지역에는 3일 후에도 여음이 남아 사람들이 그녀가 아직 주변에 머물고 있다고 여길 정도였다. 어느 날, 객점에 갔는데 객점에 있던 사람이 모욕을 주자 그녀는 소리 높여 구슬프게 울었다. 부근의 남녀노소가 그 울음소리를 따라 애처롭게 울면서 3일 동안 밥조차 먹지 못했다. 그런 지경이 되자 한아를 쫓아가 다시 노래를 불러달라고 간청하니, 노래를 불렀다. 사람들이 기쁨을 억누르지 못하여 함께 노래하면서 슬픔을 잊었다. 현지인들이 한아에게 후하게 보답하였다. 이후에 옹문 지역 사람 대부분이 노래를 잘하고 곡도 잘 지었는데 모두 한아의 여음이라 전한다. 이 이야기를 통해 노래를 팔며 구걸하는 거지는 오래전부터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길거리에서 노래하며 구걸하였을 뿐 아니라 객점에 들어가 여행객에게 노래를 들려주며 구걸했음도 알 수 있다. 후세에 창기로 생계를 유지하는 가녀(歌女)나, 소녀와 함께 다니며 주점이나 찻집에서 연주하며 구걸하는 맹인 예인이나, 객점에서 여행객에서 노래하며 입에 풀칠하는 사람들 모두 한아를 조사로 섬겼다. 노래와 함께 자태나 몸까지 파는 사람은 한아의 운명보다도 더 비참해졌으니. 구걸하며 다니는 거지 부류에서 노래를 팔며 구걸하는 거지는 일찍부터 존재했던 유형이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 학사, 대만 정치대학교 중문학과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자로 『선총원(沈從文) 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 『재미있는 한자풀이』, 『수달피 모자를 쓴 친구(선총원 단편선집)』, 『음식에 담겨있는 한중교류사』, 『십삼 왕조의 고도 낙양 고성 순례』, 『발자취-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가는 여정』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남관을 지나는데 포리가 의심쩍어 수레에 실은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장소삼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대답하였다. “산돼지입죠. 싣고 가서 먹으려고 합니다요.” 포리가 더 의심이 들어 농담 던지듯이 물었다. “고기를 나눠 줄 수 있소?” 장소삼이 거절하자 포리가 거적자리를 들췄다. 사람 시신이 아닌가. 곧바로 장소삼을 관서로 끌고 가 심문하였다. 결국 감옥에서 병들어 죽었다.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은 참극이다. 장소삼은 인성을 잃어버리고 음식에 대한 변태심리를 가진 식인광이 되어버렸다. 비단 거지를 사서 잡아먹었을 뿐 아니라 자기 생부조차도 잡아먹으려 했으니. 팔려가 잡혀 먹힌 거지, 운명이 어떤 지경까지 비천하게 전락했는지 똑똑히 알 수 있지 않은가. 변태심리와 유사한 것이 또 있다. 기와 조각을 먹거나 돌을 먹는 사람도 있었다. 청나라 때에 사람이 건네준 기와 조각을 받아들고 입에 넣어 얼음조각을 씹어 먹듯이 잘근잘근 씹어 삼키는 것을 본 사람이 있었다. 명나라 때에 광주(廣州)에서 20여 살 정도 되는, 배가 조롱박처럼 볼록한 거지가 기와 조각과 자기 조각을 사 모았다. 호사가가 돈을 주면서, 기와 조각을 주워 건네며 먹어보라고 하면 주저하지 않고 손에 받아들었다. 입 속에 넣고 연뿌리를 씹듯 감저를 씹듯 맛있게 먹었다. 사기 조각을 먹게 하려면 많은 돈을 줘야 먹었다. 먹은 후에는 눈을 크게 뜨고 목을 길게 내밀면서 삼키기 힘들어 죽겠다는 모양을 하기도 했다. 어떤 특별한 병태심리가 아니라면 어찌 사기 조각을 삼킬 수 있겠는가. 원시형 거지의 비참한 운명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원시형의 거지는 어리석을 정도로 온순했기에 법도에서 벗어난 호가사들에게 비인간적인 모욕을 당했다. 거지들은 그저 자기 운명이 나쁘다는 것을 달게 받아들였다. 모든 것을 운명으로 넘겨버렸다. 그런데 어찌 할 것인가? 목숨은 붙어있기에 자기 몸을 손상시키면서까지 한 세상을 살아가려고 몸부림쳤다. 청나라 때에 이 씨 성을 가진, 언 듯 보기에 50여 세로 보이는 거지 이야기가 전해온다. 장강과 한수를 30년 동안 넘나들었다. 그는 아무 것도 없이 오로지 밥 빌어먹는 바가지 하나만 들고 다니면서 소고기와 돼지고기 등을 구걸하여 먹었다. 쥐를 잡아 생채로 먹기도 했다. 남으면 낡은 저고리 속에 넣어두었는데 무더운 여름에도 변질되지 않았다. 사람들이 말을 걸어도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종이와 붓을 주면 무엇인가를 써 갈겼는데 부적처럼 보였지만 뜻은 알 수 없었다. 어떤 관리가 사람을 보내어 데리고 가서 억지로 한직에 앉혔지만 며칠 지나지도 않아서 작별을 고했다. 떠날 때에 관리가 가벼운 갈화 신발을 선물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신발이 다 닳자 풍설 속에서도 태연히 맨발로 구걸하며 다녔다. 현실 생활 중 일반적인 원시형 거지가 관리에게 예우를 받는 경우는 새벽의 별같이 대단히 드물었다. 대부분은 운명이 주어진 대로 받아들이며 살았다. 서글프고 초라하게 배고픔과 추위를 묵묵히 견뎌내다가 어느 순간이 오면 먼지처럼 사라졌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 학사, 대만 정치대학교 중문학과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자로 『선총원(沈從文) 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 『재미있는 한자풀이』, 『수달피 모자를 쓴 친구(선총원 단편선집)』, 『음식에 담겨있는 한중교류사』, 『십삼 왕조의 고도 낙양 고성 순례』, 『발자취-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가는 여정』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1938년 가을 아도르노는 친구인 발터 벤야민에게 한 통의 편지를 보냈는데 그 편지의 내용 가운데 영화를 정의하는 다음과 같은 말이 언급돼 있었다. “자네의 연구서는 마법과 실증주의의 교차로에 섰군. 그 장소는 사람을 홀리는 곳이지. 그 주문(呪文)은 이론만이 깨뜨릴 수 있을 걸세.” 아도르노의 편짓말인 ‘마법과 실증주의의 교차로’는 이후 영화를 정의하는데 가장 적합한 표현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렇다면 아도르노는 왜 영화를 ‘마법과 실증주의의 교차로’라고 했을까? 영화의 역사적인 등장은 과학기술의 필연적 결과였다. 1826년 프랑스의 화학자 니셉호레 니엡스(Nicephore Niepce, 1765~1851)가 사진을 발명하면서 새로운 예술의 전조를 내비쳤다. 특히 그의 제자였던 화가 출신 다게르(Louis J. M.Daguerre,1789~1851)가 1837년에 실용적인 사진을 발명하고, 1939년에 최초의 인물사진을 찍음으로써 세계는 더욱 고무되었다. 거듭되는 사진실험으로 연속사진을 넘어서 급기야 1895년 최초로 영화가 제작되었다. 영화탄생 11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는 극장 수는 줄었지만 비디오, 텔레비전, 상영관을 통해 영화를 접하는 영화의 관객 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아졌다. 이제 영화는 대표적인 문화산업이 되었다. 영화는 시작부터 기술을 바탕에 둔 자본집약적 매체로서 테일러-포드적인 전형인 실증주의의 적용에 강렬하게 끌리는 하나의 산업으로 빠르게 발전했다. 즉 대량생산(복제), 표준화된 설계(35mm, 70mm필름), 전체 생산과정을 단일 장소에 집중시키기(세트, 녹음, 편집), 철저한 분업체계(조명, 감독, 배우, 의상, 스턴트맨), 고용된 인원들을 관리하기(배우 사생활 등), 출연자들의 인지도와 능력에 따라 성과급을 차별하여 지급하기 등 대규모 공장 제조업 시스템인 테일러-포드식 노동 관리 체계가 도입되면서 확장되기 시작한 것이다. 실제로 영화의 실증주의가 영화 산업의 형식이 되었다면, 영화의 ‘마법성’은 관객을 사로잡는 내용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자본 집약적인 기술력과 만나는 다양한 주제들은 나열하기가 벅찰 정도로 많은데 무협, 판타지, 섹스, 애정극, 공포, 코미디, SF는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흥미를 유발하고 있다. 흔히 영화를 ‘드림박스나 마법상자’로 비유되는 것은 관객을 자신도 모르게 빨려들게 하는 강렬한 주술성이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 주술성은 도취, 오인, 가짜 신념 체계를 만들어 내는 장치로 작동한다. 단지 현실과 무관한 흥밋거리, 아니면 오락의 한 부분으로서 놀이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관객들은 결국 영화가 생산하는 이데올로기를 흡인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됨으로써 영화의 이데올로기에 자유롭지 못하게 된다. 결국 아날로그(굿 의례) 대 디지털(영화)이라는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데올로기를 생산하고 전파하는 문화적 본질 면에서는 서로 유사하다는 것, 두 유형 모두 꼭 퍼포먼스를 통해서 신념 체계를 전파한다는 점이 의례와 영화를 보는 중요한 문제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김유정은? = 최남단 제주 모슬포 출생이다. 제주대 미술교육과를 나와 부산대에서 예술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미술평론가(한국미술평론가협회), 제주문화연구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는 『제주의 무신도(2000)』, 『아름다운 제주 석상 동자석(2003)』, 『제주의 무덤(2007)』, 『제주 풍토와 무덤』, 『제주의 돌문화(2012)』, 『제주의 산담(2015)』, 『제주 돌담(2015)』. 『제주도 해양문화읽기(2017)』, 『제주도 동자석 연구(2020)』, 『제주도 산담연구(2021)』, 『제주도 풍토와 문화(2022)』, 『제주 돌담의 구조와 형태·미학(2022)』 등이 있다.
거친바람을 막아주고 좋은 기운이 모이는 명당의 요건을 이루려면 전후좌우에서 호위하고 감싸주는 산이나 언덕 또는 기타 자연적으로 형성된 지형지물 즉, 절대방위가 아닌 본인을 중심으로 왼쪽에서 감싸주거나 받쳐주는 산이나 언덕을 좌청룡(左靑龍), 오른쪽에서 감싸주거나 받쳐주는 산이나 언덕인 우백호(右白虎), 앞 즉, 맞은편에서 바라보이고 응대하는 앞산이나 언덕인 남주작(南朱雀), 뒤쪽에서 받쳐주는 산이나 언덕인 북현무(北玄武)의 요소가 갖추어져야 한다. 이 말은 뒤로는 산을 의지하고 앞으로는 멀리서 읍(揖)을 하는 형상, 즉 신하가 임금에게 공경의 뜻을 나타내는 형국의 작은 산을 바라보고, 좌우에서 호위하는 사산(砂山)인 청룡과 백호 등이 환포(環抱), 즉 조화롭게 감싸주어야 한다. 명당의 국세에 대해 배산임수(背山臨水), 즉 뒤로 산을 의지하고 앞으로 물을 맞이하면 건강장수(健康長壽)하고, 전저후고(前低後高), 즉 앞이 낮은 듯하고 뒤가 높으면 뛰어난 영웅이 나온다는 의미에서 세출영웅(世出英雄)하고, 전착후관(前窄後寬), 즉 앞이 좁은 듯하고 뒤가 넓으면 부귀가 산처럼 쌓인다는 의미에서 부귀여산(富貴如山)이라고 했다. 명당(明堂) 은 탁 트여야 하고 물이 굽이굽이 감아 돌아야 한다 이것은 풍수의 가장 이상적인 환경모식(環境模式)으로서 실제로 응용할 때는 후면의 지세나 건축물이 전방보다 높아야 하고 왼쪽의 지세나 건축물은 오른쪽보다 높아야한다 명당은 탁 트인 곳이어야 하고 아늑하고 포근한 지세에 답답한 느낌이 없는 상태에서 위에서 말한 장풍승기의 조건을 갖춘 곳이어야 한다 이 말은 바로 풍수의 중요한 네 가지 요소인 산이나 산줄기를 의미하는 용(龍), 산천의 기운이 잘 응집되어 형성된 요긴한 곳을 의미하는 혈(穴), 주변을 감싸주는 산이나 지형지물을 가리키는 사(砂), 지형의 낮은 곳이나 물줄기를 의미하는 수(水)를 의미한다. 용(龍)이라고 하는 것은 다시 말해서, 지맥을 일으켜준 시발점이 된 산을 의미하는 조산(祖山)으로부터 뻗어온 지맥을 이어주는 모든 산맥의 형상이나 지세를 뜻한다 다시 말해 지맥의 형상은 근본적인 산의 생김새를 의미하고 지세는 곧고(直), 휘고(曲), 일어나고(起), 엎드린(伏) 산세를 말한다 이것은 귀하고 천함을 의미하는 귀천(貴賤)을 주관하는 척도가 되며 사람의 사회적 지위나 성취 성품 등과 매우 깊은 관계가 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 신영대는? = 대한풍수연구학회 편집위원장, 한국역술인협회 공인 역학연구원이다. 중문학 박사와 풍수학자로서 ‘제주의 오름과 풍수’, ‘명리학원리대전’, ‘풍수지리학 원리’, ‘전원시인 도연명 시선', ‘흰 구름 벗을 삼아 읽어보는 당시선’ 등 다수의 저서를 냈다. '한라산 총서'의 구비전승·지명·풍수 분야와 ‘세계자연유산지구 마을일지 보고서’ 중 풍수 분야 공동 집필자로도 참여한 바 있다. 또 제주도 각 마을 '향토지' 풍수 부문에 공동 집필자로 참여하고 있다. 현재 제주관광대 관광중국어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이른바 ‘원시형’은 가장 본능적이며 가장 거지 본분에 맞는, 애걸복걸하는 방식으로 구걸하는 거지를 가리킨다. 이것은 고금을 통틀어 가장 흔히 보이는 거지 구걸의 기본 유형이다. 이런 유형의 거지는 예나 지금이나 다 존재하지만, 거지 항방(行幇, 동업조직)인 개방(丐幇)이 타락하고 변질되어 흑사회의 일원이 된 후에는 하위문화 단체 중에서 주류의 지위를 점하지 못했지만 이전에는 거지가 구걸하는 주체였다. 이런 부류의 거지는 일시에 곤궁해져서 사회 저층으로 전락한 가난한 사람들이거나, 한번 몰락한 후 다시 일어서지 못하여 입에 풀칠하려고 오랫동안 구걸하며 생계를 도모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거지는 대부분 소박하고 유약하다. 자립능력도 다소 떨어진다. 그 처지가 세상 사람들의 동정을 받아 동냥을 얻는다. 그래서 『관자(管子)·경중을편(輕重乙篇)』에서는 이야기한다. “백성이 태어났으나 부모가 없는 자를 고아라 한다. 처와 자식이 없으면 홀아비라 한다. 남편이 없고 아들이 없으면 과부라 한다. 이 3자는 모두 관에서 먹여 살리니 길에는 구걸하는 자가 없다. 길에 구걸하는 자가 있으면 상의 죄이다.” 고아나 노인의 의식주를 돌봐줄 사람이 없는 것이 거지가 생겨나게 되는 근원이니 거지가 출현하면 관리의 죄라고 여겼다. 이런 거지는 일반적으로 기예를 팔아 생활할 수 없고 노동도 할 수 없었으니, 불량배나 무뢰한이 되지 않는다면 애걸하며 동냥하며 생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당대 이상은(李商隱)은 『의산잡찬(義山雜纂)·불인문(不忍聞)』 중에 읊었다. “밤은 고요한데 거지 소리가 들린다.” 이런 원시형 거지는 후세에 말하는 불량배를 가리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원시형 거지는 처지가 가장 고생스럽고 사회지위도 낮아, 열등의식이 있었다. 송나라 때 왕군옥(王君玉)은 『잡찬속(雜纂續)·부득인련(不得人憐)』에서 말했다. “거지같은 성품은 자제의 재목이 되지 못한다.” 타인의 동냥으로 살면서도 노름하고 제멋대로 하면 ‘동정을 얻지 못하여’ 먹을 것이 없어 살아가지 못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굽실거리고 외부의 압력을 참고 견디어 내면서 굴욕적으로 살아갔다. 그렇지 않으면 송나라 때 소식(蘇軾)이 말한 ‘거지가 좋은 사람을 화나게 만드는’ 것은 ‘뒷생각이 없는’ 것이다. 실로 그렇지 않은가. 처마 밑에 있는 사람이 어찌 머리를 숙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떤 때에는 핍박을 받아 음식에 대한 이상심리가 생겨나기도 한다. 송나라 때 서현(徐鉉)의 『계신록(稽神錄)』에 기록되어 있다 : 광릉(廣陵)의 시중에서 구걸하며 살아가는 거지가 있었다. 땅에 떨어져 있는 말똥을 보기만 하면 집어먹었다. 그의 얘기는 이렇다. 이전에 다른 사람의 말을 대신 길렀는데 한밤중에 일어나서 사료를 주지 못했다. 주인이 밤마다 감독하면서 구유에 꼴이 없으면 질책하였다. 그래서 거지는 말에게 오매(烏梅) 구이를 먹였다. 말은 신맛 때문에 씹지 못하여 먹지 못하다가 굶어 죽었다. 나중에 거지도 병이 들자 말똥만 보면 걸신들린 듯 군침이 돌았다. 먹으면 오매와 같은 맛만 느낄 뿐 더러운 냄새는 맡지 못했다. 이 이야기 속에서 거지의 처지를 비추어 볼 수 있다. 이런 원시형 거지는 지위가 비천했기에 안전 또한 보장받을 수 없었다. 자신이 먹을 음식을 구걸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 먹을 것이 되어 타인에게 먹히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청나라 때 수녕(睢寧) 지방에 장소삼(張小三)이란 양곡 세금징수원이 있었다. 성정이 흉포하고 인륜과 거리가 먼 인물로 사람 고기를 즐겨 먹었다. 야외로 사람을 보내어 버려진 아이를 데려다가 쪄서는 술을 곁들어 먹었다. 아예 거지를 돈 주고 사서는 먹어치우기도 하였다. 마지막에는 자기 생부까지 먹으려 하였다. 그의 부친은 수레를 몰며 살고 있었다. 노예처럼 장소삼에게 시중들었는데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욕하면서 때렸다. 어느 날, 장소삼이 자기 부친이 끄는 수레를 타고 향촌으로 세금을 징수하러 나섰다. 돌아오는 도중에 그의 부친이 배가 고파서 수레를 제대로 끌지 못했다. 장소삼은 빨리 끌라며 재촉했는데 대답할 기력도 없이 부친은 길옆에 쓰러졌다. 대노한 장소삼이 몽둥이를 들고 앞가슴을 내리치자 그 자리에서 부친이 죽어버렸다. 그러자 자기 부친의 시신을 수레에 싣고 거적자리를 덮고서 수레를 끌고 갔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 학사, 대만 정치대학교 중문학과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자로 『선총원(沈從文) 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 『재미있는 한자풀이』, 『수달피 모자를 쓴 친구(선총원 단편선집)』, 『음식에 담겨있는 한중교류사』, 『십삼 왕조의 고도 낙양 고성 순례』, 『발자취-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가는 여정』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역사 속 인류사회는 방대하면서도 끝이 없는 풍속화이다. 다른 역사의 단면, 다른 자리나 모퉁이, 다각적인 생활공간은 모두 다양한 인류의 활동무대다. 변화하고 발전하는 멈추지 않는 무대에서 단장하거나 발가벗은 채로 다른 사회 층면, 다른 직업, 다른 연령, 다른 성별의 사람들의 양태를 표현하고 있다. 역사의 풍속화에 들어간 후, 정지된 스틸 속에 여러 양태가 매 시간 매 장소마다 언어, 행위, 사상, 심리상태를 묘사하지 않은 경우가 없다. 예부터 지금까지 거지가 구걸하는 수단과 방식을 종합적으로 살펴보면 하층 사회 단체의, 하위문화의 여러 군상의 양태를 분명하게 드러내 보인다. 진짜도 있고 가짜도 있으며 눈물도 있고 웃음도 있다. 각양각색인 다양성도 있기는 하지만 결국에는 비극으로 끝을 맺는다. 여러 가지 가식적인 면사를 벗겨내면 대부분 희극적 형식의 추태를 연출해 내면서 울 수도 웃을 수도 없게 만든다. 아주 오래 전에 거지는, 참고삼아 이용할 만한 여러 가지 구걸 방식을 채용하면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수단(예나 지금이나 거의 비슷한 구걸 예술)을 이루었다. 독특한 하위문화 전승 형태로, 구걸 습속과 관례를 형성하였다. 당대에 기괴하고도 다양한 구걸 수단과 방식은 대부분 예전의 선례나 역사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이것은 감탄할 만한 기적이며 실재다. 보도에 따르면 세계적으로 유명한 도시인 뉴욕에 전문적으로 거지를 훈련시키는 ‘거지 학교’가 있다고 한다. 학교는 뉴욕의 외진 지역에 위치해 있다. 입학신청하려면 학비 100달러를 내야하고 졸업하면 증서까지 발급한다. 그 학교는 6일 과정이며 야간에 공부한다. 교실에서 이론을 강의한다. 마지막 이틀 저녁에는 거리에 나가 실습한다. 강사가 나누어 강의한 내용을 길가는 사람에게 구걸하는 기술을 실연해 보인다. 그때 교장은 곁에서 실습하는 상황을 지켜보고 그중의 오류를 찾아내어 다시 구체적으로 지도하여서 졸업생 모두를 구걸하는 데에 합격할 수 있도록 완벽하게 학습시킨다. 그중 가장 성공적인 기술은 병원이나 약국을 가기 위하여 급히 돈이 필요하다고 가장하여 구걸하는 것이었다. 목석간장을 가진 사람일지라도 아픈 사람에게는 동정심을 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사람들의 그런 선량한 본능을 십분 이용했다. 성공한 거지가 될 수 있는 비결은 이렇다 : 말솜씨가 유창하고 기민하게 반응하며 인내심이 있고 얼굴이 두꺼워야 한다. 그리고 너무 가난하고 초라하게 분장해서는 안 된다. 중산층 인물로 분장해 갑자기 곤경에 빠져서 급히 타인의 도움을 필요한 것처럼 가장하는 것이 쉽게 구걸할 수 있는 비결이었다. 거지 학교를 세운 사람은 40세인 오마(Omar)로 제약공장에서 여러 해 동안 근무하였다. 학교를 설립한 주지를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공공사업이다. 나는 어려운 처지에 놓여 살아갈 방도를 찾지 못하는 사람을 구하려고 세웠다. 우리 학생은 절대로 부도덕한 일은 하지 않는다. 도둑질도 강도짓도 하지 않는다. 단지 길을 가는 사람들에게 선량한 마음을 내게 한 후 보잘것없는 돈 몇 푼을 받을 따름이다.” 그런데 도둑질이나 강도질을 가르치지 않는다하여도 세상 사람들의 아름다운 착한 마음에 사기를 치는 것을 가르친다면 ‘도덕적인 일’이라고는 할 수는 없지 않는가! 하물며 그 ‘학생’들이 거지가 된 후, "도둑질도 안 하고 강도질도 안 한다"라고 장담할 수 있는가. “절대 부도덕한 일을 하지 않는다”라고 장담할 수 있는가. 사기란, 일정한 조건 아래 법률이 정하지 않은 ‘도덕’ 범주에 속한다하더라도 직접 사기를 치는 수법으로 타인에게 재물을 얻는다면 다른 차원의 범죄행위가 된다. 중국에는 아직까지 거지 기법을 가르치는 전문 훈련 기관은 없다. 그러나 구걸 기술은 역사상 하위문화 내부에서, 민간에서 전승되어 온 궤적이 분명하게 남아있다. 종적을 찾아 근원을 찾아내면, 많고도 어지러운 세상사 속의 하층사회 단체의 여러 군상을 명확히 알 수 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 학사, 대만 정치대학교 중문학과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자로 『선총원(沈從文) 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 『재미있는 한자풀이』, 『수달피 모자를 쓴 친구(선총원 단편선집)』, 『음식에 담겨있는 한중교류사』, 『십삼 왕조의 고도 낙양 고성 순례』, 『발자취-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가는 여정』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든 민간 비밀 사회단체는 각자 일련의 규정과 직업 은어를 가지고 있었다. 하위문화에서 전승된 기본적인 상징이며 내용 중의 한 가지다. 거지 단체도 그렇다. 당대 미국학자 래리 A. 사모바, 리처드 E. 포터의 공저 『문화 간 커뮤니케이션』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 사람들이 주로 이상 행위에서 구성된 하위문하로 생각하는 것 중에서, 해당 문화의 언어 유형이 은어(argot)로 발전한다. 유랑자와 거지는 여러 가지 표준에 따르면 범죄자는 아니지만, 그들은 주류문화와 도무지 맞지 않는다. 모종 은어가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은어는 특정 하위문화와 그 단체 내부에 한해서 사용하는 언어이고, 구성원은 주류문화 밖에 있다. 하위문화와 문화 단체를 이해하려면 은어를 이해하여야 한다. “은어 언어의 특정 형식일 뿐만 아니라 특정 생활방식을 반영하고……심리상태, 사람과 사회에 대한 평가, 사유방식, 사회조직과 기술능력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 관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은어는 언어와 행위가 서로 결함된 방식이다. 하위문화는 특수한 언어 코드를 사용하여 요구를 만족시키기에 은어는 중요하다. 그러한 기능은 첫째, 은어로 표현하면서 반주류문화를 돕기에 자위의 수단이 된다. 둘째, 공동으로 습득한 언어 코드를 통하여 하위문화 단체 내에서 일치성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셋째, 진정으로 생존에 적합한 사회적 실체의 단체를 만드는 데에 도움이 된다. 일정한 하위문화 혹은 하위단체는 구체적인 환경 속에서 어떤 특정한 사람들에 대한 태도도 그들의 직업 언어 중에 반영된다. 여러 거지 단체의 은어(속어)는 강호 흑사회의 하위 언어문화 형태를 이룬다. 그렇기에 강호 여러 부류와 깊은 본질적 관계를 직관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예를 들어 명나라, 청나라 이래로 보이는 은어는 다음과 같다. 구걸을 괘한(掛熯, 걸어 말리다), 쇄산(碎山, 산을 부수다) ; 앉은뱅이 거지를 피가(披街, 거리를 나누다) ; 곤경에 빠졌다고 가장해 구걸하는 것을 탑상(搽相, 얼굴을 바르다), 목후(沐猴, 원숭이를 씻기다) ; 편지로 사정을 써서 구걸하는 것을 마가당(磨街黨, 길을 가는 무리) ; 여성을 데리고 다니면서 구걸하는 것을 관음당(觀音黨), 소개장을 가지고 돈을 구걸하는 것을 칭고상(稱古相, 예스럽고 수수한 상을 칭하다), 부모를 데리고 다니면서 구걸하는 것을 상문당(喪門黨), 읍하면서 구걸하는 것을 주권당(丢圈黨, 원을 던지는 무리), 울며불며 하소연하면서 구걸하는 것을 소원당(訴寃黨), 신의 이름을 빙자해 구걸하는 것을 동자당(童子黨), 뱀을 가지고 공연하면서 구걸하는 것을 차류(扯溜, 손으로 들다, 임분(臨汾)지역 방언) ; 원숭이를 부리며 공연하면서 구걸하는 것을 사노자(耍老子, 노자를 가지고 놀다) 등으로 불렀다. 이런 언어 코드는 비단 거지에게만 유행한 것이 아니라 강호 비밀 사회에서는 대부분 통용되었다. 단지 거지의 직업 특성에 국한된 언어일 뿐이다. 이 사이에 본업에 대한 은어들이 섞여있다. 예를 들어 보자. 돈을 구걸하는 것을 정파(釘把, 못 잡이) ; 사리에 어두운 것, 좋고 나쁨을 알지 못하는 것을 소렵등(小臘燈, 작은 초) ; 미인을 찰백(擦白, 닦아 하얗다) ; 이 사람을 격당마자(格檔碼子, 막아내는 놈) ; 눈을 파내는 것을 차조자(借照子, 동경을 빌리다) ; 좋지 않은 물건을 좋은 물건이라며 사기 치는 것을 매야인두(賣野人頭, 야인의 머리를 팔다) ; 재미삼아 사람을 희롱하는 것을 타붕(打棚, 막을 짓다) ; 돈을 빌리고 트집 잡아 빚을 갚지 않는 것을 도수흉(到手凶, 불행을 손에 넣다) ; 남편을 잃었다느니 처가 죽었다느니 하면서 구걸하는 것을 타단자(打單子) ; 거짓으로 친척을 방문했으나 만나지 못했다고 말하며 구걸하는 것을 탈축두(脫軸頭, 권축을 벗어나다) ; 재난을 피해서 왔다고 거짓말하며 구걸하는 것을 심반자(尋伴子, 짝을 찾다) ; 병이 들었다고 거짓부렁 하는 것을 묘황(描黃, 황색을 묘사하다) ; 벙어리를 사칭하는 것을 화지(畵指, 손가락을 그리다) 등으로 불렀다. 현대에 와서는 여자와 노는 것을 괘마자(掛馬子, 변기를 걸다) ; 소매치기가 지갑이나 호주머니를 터는 것을 발전(撥栓, 여닫개를 밀어내다) ; 내의 주머니를 터는 것을 번판자(飜板子, 판을 뒤집다) ; 상의 주머니를 터는 것을 개천창(開天窓, 천창을 열다) ; 장기간 한 지역을 불법 점유해 구걸하는 것을 궤점(跪點, 무릎 꿇다) ; 근거지를 산두(山頭) ; 소매치기 하는 것을 양협(兩夾, 양쪽에 끼다) ; 장물을 파는 것을 매교(賣巧)1) ; 장물을 사는 것을 흘교(吃巧)2) ; 남의 약점을 이용하거나 구실을 빌어 바가지를 씌우거나 재물을 뜯어내는 것을 흘이만(吃二饅, 만두 두 개 먹다) ; 철로를 쌍조(雙條) ; 버스를 단조(單條) ; 피를 파는 것을 도선(挑線, 선을 고르다) ; 백 원을 일간자(一杆子) ; 천 원을 조(槽) ; 만 원을 감(坎) 등으로 부른다. 이런 여러 가지는 거지의 수법(재주), 해당 비밀스런 작업, 심리상태를 충분히 드러내고 있는 동시에 공교롭게도 그 단체의 본 모습을 증명하고 있다. 즉 대단히 복잡하면서도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유랑자, 무뢰배 등 다른 흑사회 단체와 본질적으로 일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모두 사회조직에 기생하는 악성 종양이다. 하위문화 범주에 속한 비정상적인 문화 시스템이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1) 매교(賣巧)는 한어(漢語) 어휘로 발음은 ‘mài qiǎo’로, 총명을 뽐내며 남의 의향에 영합하다 뜻이다. 능숙한 솜씨를 보이다 뜻도 가지고 있다. 2) 흘교(吃巧)는 한어(漢語) 어휘로 발음은 ‘chī qiǎo’로, 옛날 절강 지역의 풍속이다. 칠석 때 문 앞에 모여서 술을 마셨는데 그를 ‘吃巧’ 또는 ‘끽교(喫巧)’라 하였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 학사, 대만 정치대학교 중문학과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자로 『선총원(沈從文) 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 『재미있는 한자풀이』, 『수달피 모자를 쓴 친구(선총원 단편선집)』, 『음식에 담겨있는 한중교류사』, 『십삼 왕조의 고도 낙양 고성 순례』, 『발자취-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가는 여정』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인간의 생명은 기(氣), 즉 에너지의 작용으로 유지되며 기의 조화와 부조화로 건강이 좌우된다. 지구는 자전과 공전을 반복하면서 기의 작용을 일으키고 있다. 이는 곧 우리 인간이 호흡하는 원리와 같으면서 기적(氣的)인 호흡을 하는 지구상의 생채환경도 매한가지다. 천지 대자연을 바탕으로 시간과 공간의 영향권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이 자연생태계에서 발산하는 기운, 즉 자연에너지를 활용하여 인생의 번영과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힐링풍수의 궁극적인 지향점이라 할 수 있으며, 자연에서 발산하는 좋은 에너지를 교감하여 보다 건강하고 심리적으로 안정된 행복한 삶을 누리기 위함이다. 힐링풍수를 통한 다양한 치유 활동은 자연, 경관, 생태, 인문, 예술에 이르기까지 대상에 제한이 없으며, 풍수와 산림을 결합한 치유의 숲 명상 프로그램 조성은 국민의 건강 증진과 인성 회복 차원에서 필요하다. 산업화와 도시 문명, 각종 공해에 찌든 현대인들에게 힐링 풍수는 지속 가능한 생활환경 개선과 미래 건강 증진 프로그램의 하나로 떠오르고 있다. 치유적 개념에서 힐링풍수는 입지론을 중심으로 지리적 환경과 기후적 조건에서 오는 기(氣)의 특성을 치유라는 개념에서 바라보고 있다. 풍수가 적용될 수 있는 영역은 크게 두 분야로 나눌 수 있는데, 돌아가신 조상을 모시는 음택 분야가 있고, 살아 있는 사람들의 삶의 공간을 풍수의 법에 맞추어 응용하는 양택 분야가 있다. 양택은 우리가 사는 공간인 개인의 주거 형태나 한 나라의 수도 또는 도시의 입지나 형태까지 모두를 포함하는 삶의 공간을 말한다. 이는 생동하는 기운이 잘 모이는 좋은 땅에 대지를 정해 건강과 행운의 복력을 구하고 삶을 윤택하게 하는 풍수법을 의미하는데,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 자면, 주택의 형태나 방위적인 위치, 실내 구조, 색상의 분위기, 주변 환경 등에 이르기까지 모두 풍수의 이치에 맞추어 좀 더 안정적이고 쾌적한 주거 공간을 이루고자 함이다. 본 코너에서는 주로 생활 속 양택풍수를 중심으로 기(氣) 즉, 주택이나 건물을 중심으로 에너지의 흐름을 원활하게 하는 치유적 개념의 힐링 풍수를 다루고 필요에 따라 현대의 장묘문화, 조상의 음택풍수도 살펴보려고한다. 기(氣)는 우주공간에 작용하는 전파와 같은 생명력의 근원으로서 눈에 보이지 않는 근본 미립자와 같은 존재이자 삼라만상을 움직이는 근본 생명체이다.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사물이다. 보이지 않는 어떤 작용은 ‘기’인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이 아니다. 또한, 냄새도 없고 귀에 들리지도 않지만, 반드시 공간에는 어떤 유형의 ‘기’가 순행 유통하고 있다. 산천의 기운이 잘 응결된 풍수적 국세도 중요하지만, 어떤 상황을 막론하고 쾌적하고 건강한 삶을 위해 부족한 지형과 구조를 풍수 이치에 맞게 보완하고 개선해 가는 일련의 과정이다. 천혜의 조건을 갖춘 완벽한 명당은 극히 드물다. 명당은 만들어가는 것이며 영원한 명당도 흉당(凶堂)도 존재하지 않는다. 풍수의 이치를 응용하고 활용하여 주거의 조건을 좋은 환경으로 보완하고 개선해 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풍수적으로 조화로운 자연의 생태환경을 통해 심신을 건강하게 하는 주택이나 생활공간의 장소로 활용할 때 힐링풍수는 치유의 생활 문화로 자리 잡을 수 있다. 살 터를 정할 때는 ‘생기(生氣)’, 즉 좋은 에너지가 모이는 땅을 선택하는 것이 좋다. ‘풍(風)’은 공기가 유동하는 현상이며, ‘수(水)’는 물의 흐름을 말한다. ‘기(氣)’는 육안으로는 식별할 수 없는 무형의 지기(地氣)와 공간에 존재하는 미립자인 에너지를 가리킨다. ‘기’는 중국 동양철학의 중요한 개념으로써 풍수를 구성하는 중요한 부분이다. 그 이론과 방법은 모두 산천 대지의 기운이 요긴하게 모이는 곳의 문제를 가지고 전개한 것이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 신영대는? = 대한풍수연구학회 편집위원장, 한국역술인협회 공인 역학연구원이다. 중문학 박사와 풍수학자로서 ‘제주의 오름과 풍수’, ‘명리학원리대전’, ‘풍수지리학 원리’, ‘전원시인 도연명 시선', ‘흰 구름 벗을 삼아 읽어보는 당시선’ 등 다수의 저서를 냈다. '한라산 총서'의 구비전승·지명·풍수 분야와 ‘세계자연유산지구 마을일지 보고서’ 중 풍수 분야 공동 집필자로도 참여한 바 있다. 또 제주도 각 마을 '향토지' 풍수 부문에 공동 집필자로 참여하고 있다. 현재 제주관광대 관광중국어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부랑자, 무뢰배와 거지의 자연적 관계 불량배, 무뢰배라는 뜻을 가진 중국어는 ‘유맹(流氓)’이다. ‘맹(氓)’자는 원래 글자 뜻대로 고찰하면 거지와 연대관계가 깊다. 당나라 공영달(孔穎達)은 『모시정의』에서 말했다. “맹민(氓民)의 명칭은 문장 중의 뜻이 다르다.……맹(氓)은 몽(懵)이다. 몽(懵)은 무지한 모양(안 : 사리에 어둡다, 흐리멍덩하다)이다.” 원나라 유근(劉瑾)은 『시전통석(詩傳通釋)』에서 제기하였다. “맹(氓)은 모호하고 무지함을 이르는 말이다.” 청나라 단옥재(段玉裁)는 『설문해자』 주(注)에서 풀이하였다. “다른 지역에서 온 백성을 맹(氓)이라 한다. 그래서 민(民)과 망(亡)을 따랐다.” 근대에 어떤 학자는 단옥재의 설명에 대하여 『시·위풍·맹(氓)』의 맹(氓)은 ‘다른 지역에서 온 백성’에 부합한다고 하였다.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이주하거나 이 마을에서 저 마을도 옮긴 사람을 모두 맹(氓)이라 하였다. 그래서 청나라 훈고학자 주준성(朱駿聲)은 ‘맹(氓)’을 ‘저기에서 여기로 온 백성’이라 하였고 위원(魏源)은 ‘맹(氓)’을 ‘유랑하는 백성’이라 하였다. 현재 통속적인 표현으로 ‘맹(氓)’은 바로 ‘타지인’, ‘외래인’의 뜻을 가진다.(『신화문적(新華文摘)』) 이 해석을 빌면 불량배 뜻인 ‘유맹’은 우매하고 무지하며 정상적인 일을 하지 않으면서 도처로 옮겨 다니고, 심지어 온갖 나쁜 짓을 저지르는 사람을 가리킨다. 물론 이미 ‘맹(氓)’자의 본래 뜻에서는 벗어났다. 거지와 같은 부류는 그런 종류의 사람들이다. 거지가 사회에 커다란 해악을 끼친다는 것은 사실로 증명되었다. 그들은 단체를 결성하고 흑사회 집단으로 전락하였다. 미국의 인류학자 복(P. K. Bock)은 주장하였다. “사회에서 정당한 단체가 연속적으로 제기되는 사회 요구를 만족시킬 수 없을 때는 사회에서 자발적으로 이루어진 단체의 중요성이 두드러진다.” “자발적 단체의 기능은 그 구성원에게 분명하게 행동하게 하거나 다른 형식으로 자아를 표현할 기회를 부여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거지는 떳떳하게 정당한 사회단체에 진입하기 어렵다. 거지 개인도 왕왕 사회에 발붙이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공동의 사회 지위와 운명은 구성이 복잡한 하층 사회 구성원과 연계하여 한 사회 층면에 속한, 특수한 내부 질서를 갖춘 여러 가지 단체를 구성하였다. 자발적이면서 강압적인 성격을 가지는 단체 속에서 그 구성원은 생존해 나가는 데에서, 의지할 수 있는 곳과 자아를 표현할 수 있는 자리를 찾았다. 민국 초기, 상해 거지의 사회조직 상황 본세기 30년대 상해에 있던 거지의 집거지를 조사한 결과 조막에서 거주하던 거지도 파별로 나뉘어져 있었다. 향토(고향)에 따라 산동방(幇), 강북방, 안휘방 등, 각 방파 사이에 자체적인 계통이 있었다. 각 방파에는 우두머리가 있었다. 거지 두목으로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두목은 소굴 내부의 모든 것을 이해하고 장악하고 있었다. 모든 일은 두목의 허락을 받고서야 진행할 수 있었다. 각 방파는 촌락과 같았다. 두목이 곧 촌장이었다. 거지의 방파란 ‘개방(丐幇)’을 말한다. 각 개방의 두목은 봉건시대의 제후와 같았다. 당시에 상해의 거지를 이끌던 두목은 육(陸), 주(周), 종(鍾), 왕(王)과 2심(沈), 2조(趙)인 8명의 방주였다. 육 씨가 제일 위에 있었고 다음으로 조 씨가 있었다. 합쳐 8형제라 불렀다. 전체 상해의 거지는 향토(고향)를 근거로 봉양(鳳陽), 회양(淮陽), 산동(山東), 강북(江北), 현지 방파를 합쳐 5대 개방으로 나뉘었다. 방파가 공동으로 제일 높은 우두머리인, 큰형님 ‘노대(老大)’를 추천했다. 두목들을 절충한 전권 대표였다. 두목은 지방의 상인대표와 지보(地保)가 본바닥 깡패 중에서 업무 능력을 인정받은 자를 추천하여 임무를 맡겼다. 부자세습이었다. 그들은 근거지 상해를 동서남북 4지역으로 분할하여, 8형제 중 2사람씩 나누어 각각 한 지역씩 관리하였다. 평상시에 거지 두목들은 내부의 질서를 유지하고 협력하는 책임을 졌고 갈등을 해결하였다. 연말연시가 되면 상점에서 헌납금을 받아다가 일부분을 여러 거지에게 나누어 주었다. 거지들이 평상시에 구걸한 수입도 일부분을 두목에게 납부하면 각계각층에 진공하였다. 만약 개방의 ‘가법’을 복종하지 않거나, 두목이 벽보를 붙인 상점에서 강제로 재물을 요구하거나, 개방에 반대해 다른 단체에 가입하거나, 다른 근거지에 침입하거나, 음란한 행위를 하거나 하면 상황에 따라 처벌하였다. 그들의 처벌 방식은 주로 형구를 쓰는 고문 형태였다. 예를 들어 ‘찰혼돈(扎餛飩)’은 손발을 묶어 하루 동안 밥을 먹지 못하게 하는 것이고 ‘판유배(扳油裵)’는 수 촌 넓이 목판을 등뼈에 끼워 넣는 형벌이었다. ‘판입액(板入額)’은 1촌 정도의 판을 이마에서 피부 안으로 끼워 넣는 것이었다. 더 센 것은 죽을 때까지 때리거나 경외로 추방하였다. 이러한 강력한 관리와 여러 겹으로 겹쳐 있는 조직 계통이 있기 때문에, 거지 두목은 십여 분이면 전 시내의 거지를 불러 모을 수 있었다고 한다. 범위가 그렇게 큰 상해시에서 오토바이 부대도 아닌데 어찌 그리 신속하게 모일 수 있었을까. 그런데 이 말에서 개방 조직의 힘을 엿볼 수 있다. 개방에서 가장 제일 작은 두목이 ‘야숙(爺叔, 숙부 뜻을 가진 상해 방언)’이라 불렀다. 직접 자기 관내에서 여러 거지를 관리하였다. 야숙도 거지이기는 했으나 모두에게서 ‘효경(孝敬)’을 받을 뿐 직접 구걸하지는 않았다. 거지 두목들은 조직 내에서 확고한 자리매김하기 위하여 왕왕 사회에 명망 있는 인물을 후원자로 삼아 도움을 받았다. 보스 즉 ‘노두자(老頭子)’로 모셨다. 상해 거지의 ‘노두자’는 대부분 흑사회의 중심인물이었다. 이렇듯 거지 조직은 처음부터 끝까지 여러 흑사회 조직과 안팎으로 결탁하여 서로 이용하였다. 그러면서 거지 조직인 개방도 자연스레 흑사회 일원이 되었다. 내부적으로는 강권 통치를 실행하고 외부적으로는 온갖 나쁜 짓을 저질렀다. 이것이 바로 강호의 여러 유랑자, 깡패, 무뢰배 조직의 공통적인 특징이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 학사, 대만 정치대학교 중문학과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자로 『선총원(沈從文) 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 『재미있는 한자풀이』, 『수달피 모자를 쓴 친구(선총원 단편선집)』, 『음식에 담겨있는 한중교류사』, 『십삼 왕조의 고도 낙양 고성 순례』, 『발자취-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가는 여정』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