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걷는 자는 잘 넘어지지 않는다. 비열한 자를 칭찬하는 것은 선한 자를 욕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말이다. 우리가 평소에 운동을 하는 것은 무언가에 대비하고자 함이며, 생명은 움직임에 의해서 존속된다. 살아있는 것은 부드럽고, 죽은 것은 굳어버린다. 생명활동은 부단하게 움직여 열에너지를 만들며 굳지 않게 살아가려는 것이다. 만사가 그렇듯 하나 이상의 대상과 접촉하면서 부딪치민서 살아가는 것이다. 우주 만물과 자연은 우리를 에워싸고 있으며 공동체 사회도 생명체 개인들이 살아가려고 모여든 인간종의 무리일 뿐 자연적 존재이면서 사회적 존재인 우리는 부딪치며 나아가다가 다시 자연으로 돌아간다. 2024년 지금 우리 사회는 매우 정치가 탁해서 당장 눈앞의 내일이 불안할 지경이다. 민의와 반대로 가는 지도자가 연일 국민과 다투고 있는 하수의 리더쉽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버티다가 포기한 시민들은 최후의 결단처럼 마치 적자생존에 내몰린 생물마냥 각자도생(各自圖生)의 길을 가고 있다. 민주주의 앞에서 해서는 안 될 행위 ‘각자도생'(各自圖生, 스스로 살 길을 모색한다), 참 기가 막힌 일이다. 풍경화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하는 지금, 아이러니컬하게도 우리는 풍경 앞에서 조난당한 꼴이다. 기대했던 아름다운 풍경은 보이지 않고, 메마른 내천과 밭, 황량해진 숲에는 비비대는 벌레도 재잘되는 새소리도 그친 지 오래고, 도시의 거리는 한숨 소리와 분노, 통탄만 가득하다. 21세기 한국의 사회적 풍경에는 시커먼 먹구름만 잔뜩 끼어있다. 우리는 폭풍우를 몰고 오는 풍경 앞에 서 있다. ◇ 풍경의 3가지 의미 풍경(風景), 혹은 경관(景觀)은 한 마디로 말하면 ‘자연의 모습’이다. 영어 ‘랜드스케이프(landscape)’라고 한다. 1590년대에 네덜란드어 ‘란츠합(landschap)’ 또는 ‘란츠킵(landskip)’에서 차용되다가 1605년에야 영어에 ‘landscape’라는 철자가 도래했다고 기록돼 있다. 여기에서 풍경이라는 말은 세 가지 의미로 확장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림으로서 ‘풍경화’, 토지로서 풍경(경관), 그것의 인간적 확장으로서의 ‘문화풍경(경관)’이 그것이다. 1) 그림으로서의 풍경 16세기 풍경이라는 단어는 네덜란드에서 '세련된 판에 그림을 덧붙인다'라는 의미로써 회화에 특화된 전문 용어에 불과했다. 그러나 풍경화(landscape painting, landscape art)라는 회화 장르의 용어가 나오기 전에, 풍경을 그린 그림의 태동은 B.C 15세기 미노스 문명에서 풍경의 요소들을 찾을 수 있으며, 또 B.C 30~20년경 리비아의 저택에 그려진 프레스코 벽화의 정원 풍경은 오늘날의 현대회화처럼 경쾌하고 발랄한 색채로 가득하다. 그리고 완벽한 풍경화의 모습은 A.D 1세기 로마 알바니 별장 벽화에 아름다운 전원(田園)의 풍경으로 나타난다. 서양에서 풍경을 그린 그림들은 세계 곳곳에 있으나 독립적인 회화 장르로서 풍경화는 르네상스 시대에 처음 등장했다. 2) 풍경은 경작지 풍경이라는 말의 의미는 크리스토퍼 말로(1564~1593)가 ‘계곡과 언덕과 들판’을 분명하게 독자적인 땅의 모습으로 묘사한 적이 있다. 또 1630년대 존 밀턴(1608~1674)의 시에, 주변의 풍경((landskip)을 살피는 사이에, 황갈색 잔디밭, 회색 휴경지, 새 떼가 모이를 쪼며 돌아다니는 곳. 이라고 하여 눈앞에 펼쳐진 풍경(경관)을 노래하고 있다. 이때 풍경(landscape)은 땅(土地), 또는 경작지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landscape는 ‘land’와 ‘–scape’라는 접미사를 모아 만든 말이다. 이때 land는 용도가 있고 경계선이 그어진 소유권 있는 토지를 가리키는 말이고, –scape는 어떤 단위가 모여서 ‘한 덩어리를 이루는 상황’을 말하는 자격을 뜻하는 접미사이다. 그러므로 원래 풍경의 의미가 회화에서 토지로 바뀌면서, 그것도 ‘농촌의 경작지’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내용적으로 보면 사실상 경치보다는 환경이라는 말에 더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지리학에서는 풍경(경관)을 어떤 물리적, 문화적 특징이 한 곳에 모여 있는 한 덩어리의 토지, 또는 지역이라고 여기므로 이것으로 볼 때 환경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말한다(황기원, '토지에서 경관으로', 1999년). 3) 문화풍경(경관) 문화경관(cultural landscape)이라는 말은 20세기 초 인류학자 크레뵈스의 영향을 받은 지리학자 칼 사우어가 주창한 말이다. 사우어는 경관의 형태학을 말하면서, 자연경관(natural landscape)과 문화경관의 상관관계를 말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다. 자연환경이란 시간이 변화함에 따라 특정 문화를 지닌 인간이 매개체가 되어 인간에 의해 변화되며, 결국 인간에 의해 변화된 자연경관은 문화경관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이때의 자연 경관은 인간에 의해 전혀 고쳐지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경관으로, 토양, 기후, 지하자원, 해안, 하계망(河系網), 식생 등이다. 이러한 자연경관은 특정 문화를 지닌 집단이 그 지역을 어떻게 경영하는가에 따라 가시적으로 나타나며, 경관은 처음의 자연경관과는 다르게 표현되는데, 바로 이렇게 인간에 의해 달라진 경관을 문화경관이라고 한다. 문화경관은 토지이용, 가옥, 인구분포, 도로망 등 인간이 만들고 인간에 의해 이용되며 경영되는 모든 요소들의 총체적 집합이며 그 지역을 점거하고 있는 인간 집단의 사고, 문화를 그대로 반영한다. 자연경관이 변하는 요소란 다름 아닌 인간의 행위에 달린 것이다. 그것이 원시적 자연이 아닌 인간의 출입이 시작되는 순간 문화경관으로 변해버린다. 제주도 대개의 풍경이 문화경관임을 알 수가 있다. 영국의 역사가 사이먼 샤마(Simon Michael Schama, 1945~)는 “풍경은 자연이기 이전에 문화이며, 숲과 물과 바위에 투사된 심상(心象)의 산물이다”라고 하여 자연을 문화적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풍경에 인간 개인의 마음이 투영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치 프리드리히 니체가 “미에는 관능이 깊숙하게 숨겨져 있다"고 말한 것처럼 인간은 사물을 보면서 느끼는 감정이 있어, 대상이 아름다우면 여러 가지 욕망이 생긴다. 이제 풍경은 자연으로서의 풍경이 아니라 인간과 관계된 문화풍경(경관, cultural landscape)에 다양한 집단들의 경쟁이 일어난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김유정은? = 최남단 제주 모슬포 출생이다. 제주대 미술교육과를 나와 부산대에서 예술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미술평론가(한국미술평론가협회), 제주문화연구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는 『제주의 무신도(2000)』, 『아름다운 제주 석상 동자석(2003)』, 『제주의 무덤(2007)』, 『제주 풍토와 무덤』, 『제주의 돌문화(2012)』, 『제주의 산담(2015)』, 『제주 돌담(2015)』. 『제주도 해양문화읽기(2017)』, 『제주도 동자석 연구(2020)』, 『제주도 산담연구(2021)』, 『제주도 풍토와 문화(2022)』, 『제주 돌담의 구조와 형태·미학(2022)』 등이 있다.
거지와 마의(馬醫) 전국시대 때에 제(齊)나라에 있었던 일이다. 가난 때문에 곤경에 빠지자 마을을 돌아다니며 걸식하는 거지가 미움을 샀다. 사람들은 그를 싫어하여 먹을 것을 나누어주지 않았다. 어쩔 수 없게 되자 거지는 전(田) 씨의 마구간에서 말을 돌보는 마의(馬醫, 수의사)의 조수 일을 하면서 연명해 나갔다. 마을 사람들이 거지를 비웃으며 말했다. “마의를 쫓아다니면서 먹을 것을 얻어먹는 게 부끄럽지도 않느냐?” 거지가 답했다. “천하에 거지보다 더 부끄러운 것이 어디 있겠소? 내가 마의를 쫓아다니면서 먹을 것을 구하는 것이 어찌 거지보다 못하다는 말이오?” 당시에 마의의 지위는 비천하였다. 봉건사회에서는 역대로 비천한 직업군에 속했다. 마을 사람들이 거지를 싫어해서 먹을 것을 얻지 못하게 되자 마의를 도와 노동하며 입에 풀칠하면서라도 살아가는 것은 원래 훌륭한 일이다. 그런데도 비웃음을 받고 조롱을 받았으니. 그렇다면 그 거지를 다시 길거리로 내몰아 비럭질하며 살아가라는 말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거지는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하는가. 세속의 편견은 가난해 마의를 도우며 살 수밖에 없는 거지를 어찌할 바를 모르게 만들었다. 『열선전』 속 거지, 한음생 위진(魏晉)시기에 장안(長安) 위교(渭橋) 아래에 거지 한음생(漢陰生)이 살았다. 늘 거리에 나가 걸식하였다. 시장사람들은 거지를 매우 싫어해서 그에게 똥을 뿌리기도 하였지만 이튿날 한음생이 걸식할 때면 의복은 예전처럼 어떤 오물도 찾아볼 수 없었다. 관리가 그를 붙잡아다 형벌을 가했지만 한음생은 여전히 시장에서 걸식하였다. 다시 잡아다가 사형을 내리려고 할 때에서야 한음생은 시장을 떠나 어디로 갔는지 종적이 묘연하였다. 그런데 이전에 한음생에게 똥을 뿌렸던 사람의 집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허물어졌고 10여 명이 죽임을 당했다. 그래서 장안에는 일시에 통속적이 말이 떠돌았다. “거지를 만나거들랑 미주를 주시구려, 집이 망하는 흉사를 피하시게.” 무슨 말인가? 거지를 만나거들랑 먹을 것을 나주어 주라는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재앙을 당한다는 협박(?)까지 하였다. 이 이야기는 『열선전(列仙傳)』에도 보이고 불교 경전인 『법원주림(法苑珠林)』에도 보인다. 민간고사다. 인과응보설을 이용해 세상 사람에게 거지를 무시하지 말라고 경계하고 있다. 어쩌면 정말로 한음생이 암암리에 자기에게 해악을 끼친 사람에게 복수해 살해까지 했을 수도 있을 터이고. 상서령(尙書令), 어린 시절에 구걸했다가 모욕당하다 남북조(南北朝)시기 남조 양(梁)에 유명한 문학가 심약(沈約, 441~513)은 상서령이라는 높은 관직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그의 어린 시절은 가난하였다. 살길이 막막해지자 친구에게 부탁해 쌀 백 곡(斛)을 얻었다. 그러자 집안어른이 모욕을 주었다. 심약은 화내며 얻어온 쌀을 쏟아버리고는 집을 나가버렸다. 심약이 입신출세한 후에는 그 일에 개의치 않았다. 당시 친속에게 먹을 것을 구했을 뿐 길거리를 떠돌아다니는 지경에 이르지도 않았던 심약이 그런 경멸과 치욕을 받은 것을 보면, 가난해 어쩔 수 없이 길거리에서 구걸할 수밖에 없게 된 거지들이 받았을 냉담과 치욕의 정도를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세속관념은 그랬다. 이와 반대로, 역대로 의롭지 못한 부자를 죽여 빈민을 구제한 많은 의협의 거사가 기록되어 있다. 부자가 되기를 빌고 가난을 없애려는 여러 가지 풍속습관이 형성되었다. 어느 날엔가는 빌어먹어야 되는 처지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두려워했다. 동시에 사람들은 그런 음험하고 악랄하게 사람을 해치는, 편견의 족쇄에 얽매이게 되었다. 그러한 심리는 본래 천성적으로 가지고 있는 가련히 여기는 마음, 측은지심을 이끌어내어 거지에게 즐거이 베풀게 만들었다. 그러면서도 세속관념에 순응해 거지를 부끄러워하고 욕되게 하면서 경멸하는 것이 능사로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거지는 슬퍼하기도 하고 탄식하기도 했던 대상으로, 이중 심리의 표상이었다. 중국 민족문화 전통 중 그런 모순된 심리 현상, 모순된 논리 관념은 실제 많고도 많다. 중국의 민족문화는 그러한 기묘하고 특이하게 보이는 모순 상태에서 발생하였고 발전했으며 오랫동안 누적되어 형성되었다. 장(張) 씨 거지, 교묘하게 농짓거리하다 오대시기 후량(後梁)의 마지막 황제 주진(朱瑱)이 권력을 누리던 용덕(龍德) 연간(921~923)에 장함광(張咸光)이라는 거지가 걸식하며 곳곳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당시에 유월명(劉月明)이라는 거지도 있었다. 그 둘은 걸식하면서 많은 젓가락과 숟가락을 들고 다니는 공통적이 특징이 있었다. 권세가 집에 가서 걸식할 때에 식기를 뺏기게 되면 재빨리 소매에서 다른 것을 꺼내곤 하였다. 부마인 간의(諫議) 온적(溫積)이 개봉부사를 맡고 있을 때 장함광이 부호 가문을 한 집도 빠짐없이 돌아다니면서 자신은 온적에게 의탁하러 간다며 하직인사 하였다. 이상하게 생각한 사람이 누구 소개로 가는 것이냐고 묻자 장함광이 답했다. “기록을 보자면 이번 거행은 분명 후한 대우를 받을 것이요. 대간에서 만든 『갈산잠룡궁상량문(碣山潛龍宮上梁文)』를 보면 ‘만두는 그릇과 같고 빵은 채와 같다. 제멋대로 유월명 주부를 죽였고 기뻐하며 장함광 수재를 죽였다’라고 하였으니 이와 같다면 분명 환영을 받을 것이다.” 이 말을 듣고는 주변 사람 모두 배꼽 잡고 쓰러졌다. 이것을 보면 당시 거지는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구걸하면서 모욕을 당했지만 대부분은 법도를 벗어나는 나쁜 짓은 저지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간혹 이판사판으로 행동하는 경우가 있기는 했지만 상점이나 마을에 해를 끼치지는 않았다. 물론 한음생처럼 그렇게 집을 부숴버리고 사람을 죽여 보복을 했다는 혐의를 받는 경우도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 또한 절박한 상황에서 스스로 지키려고 한 행동이었을 뿐, 구걸하면서 나쁜 길로 빠진 무리는 아니며 불량배나 악한이 참여하지도 않았다. 당시에는 건달이나 불량배도 부끄러움 없이 거지 무리에 끼어들기도 했지만 극소수였다. 실제로 거지의 도리를 지키는 사람과는 거리가 멀었다. 총괄적으로 말해, 당시의 역사기록을 살펴보면 나쁜 짓을 저지르며 해악을 끼친 거지의 사례는 극히 적었다. 이 점이 나중에 거지〔걸(乞)〕와 의협〔협(俠)〕을 서로 연결시켜 받들며 지키는 덕의(德義)의 바탕이 되었다. 그리고 더 나중에 거지 구성원이 불량배 범죄 집단으로 전락해, 깃발을 세우고 단체를 결성해 이용하는 조건을 제공하였다. 그런데 이후에는 거지 이름을 빈 집단은 나날이 타락해갔다. 사회 문명 속에서 끊임없이 전이하면서 만연되었다. 떼어 내야 하는 악성 종양으로 변질되었다. 그럼에도 이렇게 오랜 역사를 가진, 빈곤의 역사와 내재적 모순이 가득한 중국민족의 문화전통을 감안해보면 거지라는 그러한 공적으로 해악을 끼치는 현상, 즉 거지를 없애기에는 손바닥 뒤집듯 하루 이틀에 쉽게 이루어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사회를 개조하고 사회가 끊임없이 문명으로 향해나갈 수 있도록 촉진하면서, 발전 과정 속에서 총체적으로 고쳐나가야 하는 중대하면서도 종합적인 숙제였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인공인 ‘화자(話者)’는 타인의 고통을 ‘눈팅’하면서 자신의 고통을 잠시라도 잊는 ‘부끄러운 짓’을 하던 중, 자신과 마찬가지의 ‘고통 눈팅족’인 말라(Marla)를 발견하고 심한 부끄러움을 느낀다. ‘치부’는 누구에게나 있지만 그 치부를 남들에게 들키기 전까지는 부끄럽지 않다. 그런데 말라는 주인공에게 치부를 들키고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말라의 등장으로 느꼈던 수치심은 당연히 말라가 사라지면 같이 사라져야 할 텐데 그렇지 못하다. 주인공 ‘화자’는 그제야 남들에게 들키지 않은 치부도 부끄럽기는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영혼까지 갈아 넣는 노동의 대가로 장만한 ‘이케아’ 가구로 채워 넣은 작은 아파트가 얼마나 부끄러운 것이었는지를 절실하게 느낀다. 남들에게 들키지는 않았지만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낀다. 부끄러울 ‘치(恥)’는 누구에게 들켜서가 아니라 ‘자기 마음(心)’에 ‘귀(耳)’ 기울이면 스스로 알 수 있는 부끄러움이다. 남미 오지로 선교하러 간 사제들은 남미 원주민들이 벌거벗고 산다고 같이 벌거벗지 못한다. 주인공은 결국 이케아로 채워 넣은 안락한 아파트로 상징되는 ‘물질’에 얽매여 살았던 자신의 삶에 수치심을 느낀다. 그는 아파트를 불 질러버리고 모든 물질적 욕망과 단절된 타일러 더든의 ‘파이트 클럽’에 합류한다. 파이트 클럽에서 매일 밤 누군가에게 얻어맞아 얼굴이 으깨지고 피투성이가 되도록 자신을 학대하면서 부끄럽게 살아온 자신의 ‘참회록’을 쓰는 것 같다. 그곳에서 자신이 정말 욕망해야 하는 것이 ‘이케아 가구’가 아니라 다른 무엇이었다는 것을 알아간다. 성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e), 톨스토이(Tolstoy), 그리고 루소(JJ. Rousseau)의 참회록은 세계의 3대 참회록이라고 불린다. 모두 자신의 치부를 스스로 낱낱이 들추고 고백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느님을 배반했던 부끄러움을 고백한다. 톨스토이는 “나는 신을 믿었다기보다는 신을 부정하지 않았을 뿐이며, 신을 믿지 않는 자들이 오히려 나보다 더 지혜롭고, 정직하고 솔직하고 도덕적이었다”며 “나는 그들보다 더 잔인하고, 비도덕적이고 교만했다”고 고백한다. 루소의 참회록은 압권이다. 루소는 거룩한 교육사상을 설파하면서 정작 자신은 변태적인 ‘바바리맨’ 짓을 되풀이하고, 동거녀와 낳은 다섯 아이들을 모두 고아원에 내던져버렸던 치부를 숨김없이 고백한다. 루소는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수치심이 죽음보다, 범죄보다, 그 무엇보다 두려웠다. 땅속으로 들어가 질식해 죽고만 싶었다. 억누를 길 없는 수치심이 모든 것을 압도했고, 그 수치심이 나를 뻔뻔하게 만들었다.” 아우구스티누스, 톨스토이, 루소 모두 ‘뻔뻔함’으로 수치심을 감추기를 거부하고 용기를 내어 ‘참회’를 통한 새로운 사람이 되는 길을 택했다. 프랑스 철학자 프레데릭 그로(Frédéric Gros)는 신간 「수치심은 혁명적 감정」에서 우리의 부끄러운 자화상을 꼬집는다. “권력을 쥔 소수 기득권자들의 뻔뻔함과 몰염치, 무례가 이 세계를 점령하며 곳곳에서 ‘수치도 모르는 것들’이란 분노의 외침이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다. 이들은 수치심을 알지 못하기도 하지만, 성장하지 못한 정신적 유아에 머물러 광적인 자기애로 자기의 무가치함을 자각하지 못한다. 이뿐만이 아니라 그런 저열함을 타인의 탓으로 쏟아내기에 수치심이 이들의 내면에서 어떤 조심성이나 신중함을 만들어내지도 못한다.” 이는 권력자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모습이기도 하다. 수치심을 아예 못 느끼거나 그 수치심을 ‘뻔뻔함’으로 뭉개는 개인이나 사회는 질곡에 빠져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기 어렵다. 윤동주가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부득이 창씨개명을 신청하기 5일 전에 썼다는 ‘참회록’은 아우구스티누스나 톨스토이, 루소의 참회록보다 더 절절하다.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만 이십사년 일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창씨개명을 한 수많은 사람들이 느끼지 못하거나, 느껴도 뻔뻔하게 뭉개는데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소망하고,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던’ 윤동주는 혼자 죽도록 괴로워하고 참회한다. 그들의 그런 수치심과 참회가 있었기에 우리에게 독립이라는 혁명이 가능했을 것이다. 영화 속 말라처럼 수치스러운 모습을 들켜도 수치심을 느끼지도 못하든지, 뻔뻔함으로 뭉개는 사람들이 ‘별종’이 아닌 ‘정상인’처럼 보이는 세상이다. 말라도 ‘사치스럽게’ 수치심을 느끼는 주인공을 별종 보듯이 한다. 지극히 당연한 참회록을 쓴 아우구스티누스나 톨스토이, 루소, 그리고 윤동주 모두 별종처럼 보이는 세상이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온갖 부끄러운 모습을 이미 모두 들켜버린 정치인들이 국회의원 선거에 너무도 당당히 나선다. 그들에게는 수치심이라는 것이 아예 없었든지 아니면 수치심을 뻔뻔함으로 뭉개고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들에게 열광하고 지지하는 사람들도 수치심을 느끼지 못하거나 뻔뻔함으로 뭉개기는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혹시 목욕탕에서 다 같이 발가벗은 것처럼 수치심을 느낄 필요가 없는지도 모르겠다. 프레데릭 그로의 말처럼 ‘수치심을 느끼지 못하는 사회는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게 맞다면 참으로 우울한 일이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는 윤동주의 ‘서시(序詩)’가 국민 최애(最愛) 애송시(愛誦詩)라는 것이 왠지 민망한 오늘이다. [본사 제휴 The Scoop=김상회 정치학 박사]
다음 달(2024년 5월 1일)부터 코로나19 감염병에 대한 위기 단계가 가장 낮은 ‘관심’으로 하향되면서 코로나19는 본격적인 엔데믹(endemic) 상황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치명적인 감염병이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는 것이 팬데믹(pandemic, 대유행)이라면, 엔데믹은 코로나19 감염병이 풍토병화되어 계절 독감처럼 많은 사람들이 감염되더라도 치명적이지는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나라는 코로나19 바이러스의 빠른 진단과 백신 접종을 통해 팬데믹을 잘 극복할 수 있었다. 엔데믹을 맞아 코로나19 바이러스 감염자를 진단하는 PCR 검사와 신속항원 검사에 대해 돌아보고, 연이어 여러 종류의 코로나19 백신의 특징과 차이에 대해 두 편의 글로 나누어 다뤄보려고 한다. 우리가 지금 사용하는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말은 바이러스의 생김새를 일컫는 것이다. 원래 코로나(corona)는 개기일식 때 달 그림자 밖으로 환하게 보이는 고온의 빛(플라즈마)을 말한다. 태양 코로나와 유사한 모양을 가진 바이러스를 통틀어 코로나 바이러스라고 하고, 과거 우리를 괴롭혔던 사스(SARS)와 메르스(MERS) 바이러스도 코로나 바이러스의 일종이다. 따라서 2019년에 발생하여 전 세계로 퍼진 코로나 바이러스를 다른 것들과 구별하기 위해 COVID-19(corona virus disease 2019,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19) 바이러스 또는 코로나19 바이러스라고 부른다. 코로나19 초창기에는 치료제도 없고 백신도 개발되지 않았기 때문에 감염자를 빠르게 찾아내어 격리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 당시 코로나19 바이러스 감염자를 찾아내는데 PCR법이 사용되었기 때문에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우리 국민 대부분이 PCR이란 용어에 매우 익숙해졌다. PCR은 polymerase chain reaction의 약자로 우리 말로는 중합효소 연쇄반응이라고 한다. 중합효소를 이용하여 유전자의 증폭(복제) 과정을 연속하여 반복함으로써 분석 대상자의 목적 유전자(개체 간의 차이를 나타내는 유전자)를 다량 확보하는 것이다. PCR법은 감염병 진단뿐만 아니라 과학수사, 농·수·축산물의 원산지 확인, 친자 확인 등에도 사용된다. 우리는 머리카락 한 올만 있어도 유전자 분석으로 범인을 잡을 수 있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머리카락 한 올에 들어있는 DNA의 양은 너무 적어서 분석하기가 매우 어렵다. 예를 들면 물 한 컵에 설탕 한 숟가락을 넣고 혀를 대면 단 맛이 감지되지만, 물이 가득 찬 욕조에 설탕 한 숟가락을 넣은 후 혀를 대면 단 맛이 전혀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욕조 물에도 한 숟가락의 설탕이 들어 있지만 농도가 너무 낮아 혀라는 분석 방법으로는 감지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설탕이 욕조에서 증폭되어 한 숟가락이 한 가마니가 된다면 충분히 감지하고도 남을 것이다. 설탕은 증폭할 수 없지만, 유전자는 생명체가 가지고 있는 복제 시스템을 이용하여 충분한 양으로 증폭시킬 수 있다. PCR 검사에서 대상자의 모든 유전자를 증폭할 필요는 없다. 사람의 경우 남성과 여성의 유전자는 약 1%만 차이가 있고, 인간과 침팬지의 유전자는 98% 이상 일치한다. 범죄 현장에서 나온 범인의 유전자 모두를 증폭시켜 분석한다면 98%의 확률로 모든 인간과 침팬지가 용의자가 되는 웃지 못할 상황이 발생할 것이다. 따라서 유전자를 증폭하되 사람마다 차이가 있는 유전자 부위만 증폭해야 한다. PCR은 개체 간에 차이가 나타나는 목적 유전자만 다량 증폭시킬 수 있는 혁신적인 기술인 것이다. 코로나19 바이러스 유전자의 PCR에는 몇 가지 기술이 더 들어간다. 원래 PCR은 유전자 DNA의 특정 부분을 복제하는 것인데, 코로나 바이러스는 DNA 대신에 RNA를 유전자로 가지고 있다. 따라서 RNA를 DNA로 바꾸어주는 과정이 필요한데 이를 역전사라고 하고, 이때 얻어진 DNA를 cDNA라고 한다. 또한 사스, 메르스 등의 다른 코로나 바이러스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유전자 부위를 증폭시키면 안되고, 오로지 코로나19 바이러스가 가지고 있는 특징적인 유전자 부분만 증폭해야 한다. 고전적인 PCR은 목적 유전자를 증폭시킨 후에 유전자 분석 과정을 거치는데 이 때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감염 의심자의 시료를 채취하여 PCR로 목적 유전자를 증폭한 후 유전자 분석까지 하게 되면 시간이 많이 걸려 감염자를 조기에 찾아내어 격리하는 것이 어려울 것이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실시간(real time)-PCR이 사용되는데, 코로나19 바이러스의 특정적인 목적 유전자가 복제됨과 동시에 형광 물질이 색을 나타내도록 하였다. 실시간으로 유전자 증폭 과정에서 감염되었는지를 바로 확인할 수 있어서 분석 시간을 크게 줄일 수 있었다. 다만 실시간-PCR도 전문 장비를 사용하여 유전자를 증폭하면서 분석을 수행하다 보니 아무리 시간을 단축했다 하더라도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감염 여부를 통보받을 수 있었다. 팬데믹이 지속되면서 감염자가 폭증하여 실시간-PCR의 검사 역량으로 검사 수요를 따라잡기 어려워지는 상황에 놓이다 보니 신속항원 검사를 같이 사용하게 되었다. 신속항원 검사는 코로나19 바이러스의 특이 단백질(항원)을 감지하는 방법으로 15~30분 내에 감염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매우 빠르고 편리한 방법이다. 검사 키트에는 코로나19 바이러스의 단백질(항원)에 대한 항체가 있어서 항원과 결합 시에 ‘T’ 부분에 붉은 색 띠로 나타나 양성 판정을 내리게 된다. 코로나19 바이러스의 항원 단백질이 없으면 ‘T’ 부분에는 띠가 나타나지 않고, ‘C’ 부분에만 붉은 색 띠를 나타내 음성 판정을 받게 된다. 감염자의 체내에 바이러스가 미량 존재하더라도 PCR 검사에서는 유전자를 증폭하기 때문에 감염 여부를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바이러스의 항원 단백질은 증폭이 되지 않기 때문에 바이러스의 양이 적으면 음성으로 나타날 수 있다. 특히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잠복기에 있는 무증상자는 PCR 검사에서 양성으로 찾아낼 가능성이 높지만, 신속항원 검사에서는 음성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PCR 검사나 신속항원 검사 모두 코로나19 바이러스를 감지하는 정확도는 높지만 민감도(얼마나 적은 양을 감지할 수 있는지)에서 차이가 난다. 만약 백신과 치료제가 전혀 없던 코로나 유행 초기에 신속항원 검사를 통해 감염자를 찾아냈다면 분석 시간은 줄일 수 있었겠지만, 민감도가 낮기 때문에 아직 증상이 나타나지 않은 감염자를 음성으로 판정하는 사례가 발생할 수 있었다. 즉 무증상 감염자로 하여금 코로나에 걸리지 않았다고 잘못 판단하게 함으로써 자유롭게 돌아다니면서 바이러스를 여기저기 확산할 가능성이 커지는 문제가 있어 치명률이 높은 코로나 초기에는 조금 불편하더라도 실시간-PCR 검사로만 감염자를 찾아낸 것이다. 현재는 실시간-PCR 검사와 함께 기침, 열, 인후통 등의 코로나 의심 증세를 보이는 사람을 대상으로 신속항원 검사가 유용하게 사용되고 있다. 우리나라는 실시간-PCR 검사로 감염자를 조기에 찾아내어 격리함으로써 감염자수와 치명률을 낮추면서 백신 접종까지의 시간을 벌었고, 높은 백신 접종률로 코로나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백신 부작용에 대한 우려도 있었고, 의료인, 자영업자, 소상공인을 비롯한 많은 국민들의 희생이 있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다음 글에서는 바로 이어서 코로나19 바이러스 백신에 대해 다뤄볼 것이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 김동청 교수는? = 연세대 생화학과를 졸업했다. 연세대 대학원 생화학과 이학석사 및 서울대 대학원 농화학과 농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대상㈜ 중앙연구소 선임연구원, 순천제일대 조교수, 영국 캠브리지대 방문연구원, 성균관대 기초과학연구소 연구교수를 거쳐 현재 청운대 인천캠퍼스 화학생명공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식품기술사 자격도 갖고 있다.
새해를 맞아 새로운 연재를 시작합니다. 고광표 작가의 '돌하르방이 전하는 말'입니다. 제주의 상징이자 제주문화의 대표격이나 다름 없는 석상 '돌하르방'을 통해 '오늘 하루의 단상(斷想)'을 전합니다. 쉼 없이 달려가는 일상이지만 잠시나마 생각에 잠기는 순간이기를 원합니다. 매주 1~2회에 걸쳐 얼굴을 달리하는 돌하르방은 무슨 말을 할까요? 독자 여러분의 성원을 기다립니다./ 편집자 주 "제주엔 참 존거 많수다양" (제주엔 참 좋은 것이 많이 있군요) "There are so many good things about Jeju." ☞ 고광표는? = 제주제일고, 홍익대 건축학과를 나와 미국 시라큐스대 건축대학원과 이탈리아 플로렌스(Pre-Arch)에서 도시/건축디자인을 전공했다. 건축, 설치미술, 회화, 조각, 공공시설디자인, 전시기획 등 다양한 분야로 활동하는 건축가이며 예술가다. 그의 작업들은 우리가 생활에서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감정에 익숙한 ‘무의식과 의식’ 그리고 ‘Shame and Guilt’ 등 현 시대적인 사회의 표현과 감정의 본질을 전달하려 하고 있다.
거지 구성원은 복잡다단하며 역사 속 거지 형상은 기이하기 그지없다. 색채 또한 각양각색이다. 불결하고 죄악으로 넘쳐난다. 그 근본 원인은 무엇일까? 곤궁에 있다. 의식주를 해결하지 못하여 목숨을 연명할 방법을 찾아야 하는 사람들이 걸었던 길이다. 지금도 여전히 가난을 견디지 못하고 거지가 된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거지왕국 중 점점 많아지는, 신비한 죄악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운 유혼(遊魂)은 거지 현상이 번식된 파생물이다. 거지 가사를 뒤집어쓴 범죄 무리로, 불량배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런 찌꺼기들이 거지 단체 중에 갈수록 많은 부분을 차지하면서 거의 주체가 되다시피 했다. 걸식이라는 명목을 가진 불량배요 범죄 집단이다. 바로 ‘직업 거지’다. 정당한 직업을 가질 수 있으면서도 직장을 구하지 않는다. 정당한 직업에 종사하지 않은 일부를 포함하는 ‘직업 거지’ 현상과 ‘거지 조직’의 형성은, 성격적으로 거지 집단을 완전하면서도 철저하게 사회문명이라는 유기체 내의 부스럼이요 악성 종기로 전락하게 만들었다. 그런 악성 종기는 여러 가지 사회범죄와 한 덩어리가 되었다. 함께 행동하고 의기투합해 인류문명사에서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사회의 악이 되어 버렸다. 거지 현상은 만연성이 지극히 강한 두려운 사회악이 되었다. 오랫동안 정리할 수 없었고 근절될 수 없었다. 빈곤 때문에 걸식해야만 하는 본래 의미에서, 거지가 끊임없이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은 더 이상 중요한 이유가 되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회경제, 문화가 발달하지 않음에 있다. 문명 수준의 높고 낮음에 따라 파생된 범죄는 왕왕 그런 가사를 쓰고 그런 분야를 점유해 이용하면서 여러 죄악과 한 덩어리를 이뤘다. 거지의 논리 사유 당나라 때 대시인 두보(杜甫)에게 추숭 받았던 유명한 문학가 원결(元結)은, 자는 자산(次山)이요 호는 만랑(漫郞), 오수(聱叟)로 719년에 태어나 772년에 세상을 떠났다. 시문은 정치 현실과 백성의 고통스런 삶을 집중적으로 반영하였다. 원결은 전문 문장 『개론(丐論)』 한 편을 써서 거지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논했다. 원결의 대의는 이렇다 : 천보(天寶) 7년(748) 중원절(中元節)에 당시 경도 장안을 유람할 때에 거지와 교류하였다. 거지와 친교를 맺는 것이 너무 쌍스럽지 않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었다. 원결은 답했다. “옛사람들은 사는 곳에서 친구를 찾지 못하면 구름과 산을 벗으로 삼았고 이웃에 군자가 없으면 송백으로 벗을 삼았소. 군자와 함께하지 못하면 거문고와 술을 벗으로 삼았고 다른 나라를 두루 돌아다닐 때에도 군자를 만나기만 하면 교류하였소. 거지는 지금의 군자요. 그들과 벗을 맺지 못할까 염려될 뿐이요. 거지에게는 거지의 도리가 있소. 그 말 들어보셨소? 거지와 친구를 맺은 후 거지 친구에게 어떤 도리가 있느냐고 물으니 거지 친구가 답을 합디다.” “당신, 거지인 나와 친구를 맺었으니 부끄럽소? 세상에 부끄러워해야할 사람들이 많고도 많소! 모든 사람이 종실의 구성원이 되려고 구걸하오. 시집가기를 구걸하오. 명예와 지위를 구걸하고 남에게 안색을 구걸하지요. 심지어 부끄러움을 모르는 가노와 비녀처럼 권세가들 앞에서 무릎 꿇고 구걸하기도 하지요.……더 심한 것은, 구하는 것이 있어 다른 집의 노복을 에워싸 뱅글뱅글 돌면서 구걸하기도 하오. 목숨을 보전하려고 고관 희첩(姬妾)의 치마 아래 엎드리기도 하오. 종묘에는 구걸하지만 얻지 못하지 않소? 처자를 구하지도 못하면서 말도 못하지 않소. 이런 지경에 이르렀는데 어찌 부끄럽다 하지 않겠소! 거지는 남이 버리는 옷을 구걸하고 남이 버리는 음식을 구걸하오. 지팡이 짚고 길거리에서 구걸할 뿐이요. 천하의 사람과 같이 되고자 할 따름이오. 그렇지 않다면 세상에 어찌 낯짝을 내밀 수 있겠소. 의복과 음식을 구걸하는 것은 가난하기 때문이오. 가난해서 거지가 된 것이니 부끄러운 마음은 없소. 행동도 다른 사람과 같소. 다르지 않소. 이것이 군자의 길이오. 군자가 어찌 완전무결하기를 바라겠소? 다행히도 산림에 있지 않고 오지병과 지팡이를 가지고 있으니 거지와 같은 모양을 하고 거지의 언어를 배우며 거지와 만나고 있는 것이오. 거지가 부끄럽지 않소.” 원결은 거지의 말을 듣고 「개론(丐論)」을 써서 “「시규(時規)」를 보충하였다”라고 하였다. 이 글은 거지의 말을 빌려 당시 사회를 풍자하고 있다. 당시의 사회병폐를 질타하는 「개론」을 보면, 본래 의미를 유지하면서 가난해서 걸식하게 된 거지의 인격을 존중하여야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치가 정당하며 날카롭고 엄숙한 말 중에 거지의 역사와 관련된 중요한 정보를 드러내고 있다. 당나라 때에, 적어도 원결이 살고 있던 당시에는, 어리석은 황제 이륭기(李隆基)가 정권을 잡고 있던 천보 연간에는, 중국의 거지 단체는 기본적으로 빈곤 때문에 길거리를 떠돌아다니며 걸식하게 된 백성이었다. 본래 뜻대로의 거지, ‘정종(正宗)’ 거지다. 적어도 그때에는 불량배가 아직 거지의 중심 구성원이 되지 않았다. 악한이나 도둑, 무뢰배들이 거지 왕국에 부정적인 수단으로 주도 지위를 차지하지 않고 있었다. 거지 단체의 구성원은 당(唐)대와 오대(五代)에 처음으로 범죄단체와 같은 성격으로 추락하기 시작하였다. 송(宋), 원(元)을 거쳐 명(明), 청(淸)대에 이르면 두르러졌다. 이전 사료에서 찾을 수 있는 거지의 자료를 보면, 거지와 관련된 여러 이문취사나 거지의 덕행 이외에 비교적 많은 부분은, 가난 때문에 사방으로 흩어질 수밖에 없었던 거지들이 어떻게 세상에서 경시받고 모욕당했는지를 기록하고 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백신은 항생제와 더불어 인류를 심각한 전염병으로부터 보호해주고 수명을 획기적으로 연장시켜준 혁신적인 발명품이다. 백신은 인간에게 특정한 바이러스나 세균에 대한 면역력을 갖도록 투여하는 의약품이다. 물론 사람뿐만 아니라 가축에게도 전염병 예방을 위한 백신이 사용되고 있다. 백신 접종 시에 바이러스나 세균 등의 특정 병원체를 그대로 사람에게 주사하면 진짜로 감염되어서 병에 걸리거나 죽을 수 있기 때문에 병원성이 없는 유사한 물질이 백신으로 사용된다. 세균이나 바이러스와 같은 병원체가 우리 몸에 들어오는 것은 자신의 유전자를 복제하여 개체수를 늘리기 위한 것이다. 병원체는 세포벽이나 단백질 껍질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인체의 면역 체계는 병원체의 내부가 어떤지 들여다 볼 방법이 없다. 따라서 우리 면역 체계는 세균이나 바이러스의 바깥 껍데기에 붙어있는 단백질이 사람의 것이 아니면 적으로 인식하여 공격하는 것이다. 이러한 세균이나 바이러스 껍질에 있는 단백질을 항원이라고 하고, 항원이 우리 인체에 들어오면 적으로 인식하고 이에 대응하는 항체가 만들어져서 항원을 제거하는 것이 면역이다. 특정 병원체의 껍데기 조각이나 단백질을 백신으로 사용하면 유전자가 없기 때문에 감염력은 없지만 우리 면역 체계를 자극하여 항체를 만들어낸다. 백신을 맞은 이후에 같은 병원체에 노출되더라도 백신에 의해 만들어진 항체가 즉각적으로 대응하여 해당 바이러스나 세균이 인체에서 증식하기 전에 제거하므로 병에 걸리지 않는 것이다. 모든 바이러스와 세균의 껍데기는 자신만의 고유한 항원 단백질을 가지고 있고 이것에 대응하는 항체가 제각기 다르기 때문에 하나의 백신은 오직 한 종류의 병원체에 대해서만 면역력을 가질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새로운 전염병이 나타날 때마다 그것에 적합하도록 만들어진 백신을 맞아야 하는 것이다. 백신이 없던 시대에는 전염병에 예방이라는 개념은 없었고, 전염병이 돌면 개개인의 면역력에 따라 감염 여부가 결정되고 병에 걸리면 낙후된 의료 수준으로 인해 사망자가 많이 발생하였다. 백신의 개발은 인류에게 치명적인 바이러스나 세균에 대항하는 효과적인 무기를 제공하여 전염병 예방과 수명 연장이라는 놀라운 선물을 안겨 주었다. 인류 최초의 예방접종에는 천연두 바이러스에 대한 백신이 사용되었다. 조선시대에 어린아이들에게 가장 위험한 재앙으로 호환, 마마, 전쟁을 꼽는데, 호환은 호랑이에게 물려가는 것이고, 마마는 천연두(두창)를 뜻한다. 그만큼 천연두는 어린아이들의 목숨을 많이 앗아간 치명적인 전염병이었고, 설사 감염되었다가 낫는다고 하여도 얼굴에 수포가 생겨 곰보가 되는 불행을 가져왔다. 기원 전 이집트에서도 천연두가 발병했다는 증거가 있고, 20세기 들어서도 최소 3억명이 천연두로 목숨을 잃었다는 보고가 있다. 천연두가 워낙 위험한 질병이다 보니 15세기 중국에서는 천연두 환자의 상처 딱지나 고름을 가루로 만들어 코로 흡입하게 하여 천연두 바이러스에 대한 면역력을 가지도록 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살아있는 바이러스가 들어가서 실제 천연두에 걸리는 위험한 일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18세기에 영국 의사인 제너는 자기 동네에서 소젖을 짜는 일을 하는 여성이 우두(소 천연두)에 걸리고 난 후에 사람을 전염시키는 천연두에는 걸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소를 감염시키는 우두 바이러스는 천연두 바이러스와 구조는 유사하지만 사람에게는 병원성이 매우 낮아 위험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우두 바이러스를 사람에게 접종하여 천연두 바이러스에 대한 면역력을 갖게 하는 종두법을 백신이 과학적으로 적용된 최초의 사례로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조선 말에 지석영 선생이 종두법을 도입하여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살릴 수 있었다. 19세기 파스퇴르에 의해 광견병과 탄저병에 대한 백신이 개발되면서 본격적인 백신의 시대가 열렸다. 백신으로 실제 살아있는 바이러스나 세균을 사용하면 전염병에 걸리게 되기 때문에 △병원체를 열이나 화학 약품으로 처리하여 죽이되 껍데기에 있는 항원 단백질은 남아있는 사균 백신 △세균이나 바이러스가 살아는 있는데 인체에 해가 없을 정도로 약하게 만든 약독생균 백신 △질병을 일으키는 병원체의 독성은 없애고 항원 단백질은 갖는 톡소이드 백신이 일반적으로 사용되어 왔다. 또한 세균이나 바이러스를 적으로 인식하여 면역력을 갖게 하는 것이 결국 껍데기에 있는 항원 단백질이므로 이것만 따로 분리해서 백신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유전공학 기술이 발전하면서 세균이나 바이러스의 유전자로부터 대량으로 항원 단백질을 생산하여 백신으로 활용하고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COVID-19) 백신 중에 mRNA 백신은 기존의 백신과는 다른 과학적 원리를 활용하여 만들어 지는데 코로나 백신과 진단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다뤄보려 한다. 백신은 전염병의 확산을 막는 강력한 무기이다. 예방접종이 이루어 지면서 천연두는 인류가 최초로 완전히 박멸한 질병이 되었다. 1980년 5월에 WHO(세계보건기구)는 천연두 근절을 선언하였고, 이후 우리나라에서도 천연두 예방접종을 하지 않게 되었다. 천연두 외에도 홍역, 결핵, 수두 등의 전염병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는데 백신이 개발되고 예방접종이 이루어 지면서 이제는 감염자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다. 물론 결핵 예방접종을 했더라도 다시 결핵에 걸리는 경우가 있듯이 백신이 모든 사람에게서 해당 전염병을 100% 예방해 주는 것은 아니지만 천연두, 홍역, 소아마비와 같이 백신이 없던 시대에 치명적이었던 전염병들이 현대에서는 거의 발병하지 않는 데에서도 백신의 효과를 확인할 수 있다. 특히 면역력이 약한 어린아이들은 전염병에 취약하므로 우리나라에서도 소아국가예방접종을 실시하고 있다. 소아국가예방접종은 국가에서 필수적으로 권장하는 것으로 B형 간염, 결핵, 디프테리아, 파상풍, 백일해, 폴리오, 폐렴구균, 로타바이러스, 홍역, 풍진, 수두, A형 간염, 일본뇌염 예방접종 등이 여기에 들어간다 백신이 전염병 예방에 효과적이라고 아무리 얘기하여도 코로나의 사례를 예로 들며 백신을 맞아도 다시 걸리더라 또는 부작용이 심하다더라 하면서 걱정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한다. 일반적으로 백신은 한번 맞으면 인체의 면역 세포가 그것을 적으로 기억하고 항체를 만들어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한번 접종으로도 병을 예방할 수 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백신을 맞더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해당 병원체에 대한 면역 세포의 기억이 희미해지고 항체의 양도 점점 줄어드는 경우가 있어 몇 차례 예방접종이 필요할 수도 있다. 또한 바이러스는 돌연변이를 계속 일으키기 때문에 껍질의 항원 단백질의 구조가 바뀌어 기존의 항체가 인식하지 못하게 되므로 바뀐 항원에 대한 백신을 다시 맞아야 한다. 그래서 독감 백신도 해마다 맞는 것이고 코로나 백신도 새로운 돌연변이가 나타날 때마다 맞는 것이다. 백신은 임상 시험을 거쳐 효능과 안전성을 검증하기 때문에 안전하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우리 몸에 원래 존재하는 물질이 아닌 것을 인체에 넣기 때문에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그 증상은 경미하고 지속 시간도 짧다. 사람의 체질과 상태에 따른 부작용을 고려하여 예방접종은 반드시 병원에서 하게 되어 있고, 일정 시간을 머무르게 하면서 지켜보게 하고 있다. 간혹 사람에 따라 백신 접종에 따른 부작용이 심하게 나타날 수도 있지만 백신을 맞았을 때의 이점이 부작용보다 훨씬 크기 때문에 백신 접종을 권하는 것이다. 하지만 면역 억제치료를 받고 있거나 백신에 사용되는 항원이나 첨가제에 대한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은 백신을 맞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백신 접종은 전염병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도 보호해 주는 중요한 수단이다. 집단 내에 면역을 가진 개체수가 많아질수록 전염의 고리가 끊어져서 백신을 맞지 못하는 사람들도 보호할 수 있다는 측면을 고려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백신 접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또한 백신에 대한 우려를 하지 않아도 되게 백신의 유통과 보관 과정이 철저히 관리되어야 하고, 부작용 발생 시에 그 원인을 파악하여 적절한 대책과 보상 방안이 마련되어야 한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 김동청 교수는? = 연세대 생화학과를 졸업했다. 연세대 대학원 생화학과 이학석사 및 서울대 대학원 농화학과 농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대상㈜ 중앙연구소 선임연구원, 순천제일대 조교수, 영국 캠브리지대 방문연구원, 성균관대 기초과학연구소 연구교수를 거쳐 현재 청운대 인천캠퍼스 화학생명공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식품기술사 자격도 갖고 있다.
‘이식위천(以食爲天)’, 사람이 살아가는 데 먹는 것이 가장 소중하다는 말이다. 옛 중국인은 먹는 것을 하늘로 삼았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의식주가 부족해 생계를 꾸려나갈 수 없다면 구걸하게 되고 거지가 된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거지에 관한 여러 가지 조사의 대부분은 이런 상황에 주의하고 있다. 현장에서 여러 가지 구걸하는 추태를 대면했을 때 그들에게 물었다. “당신이 이렇게 구걸하는데, 가장 기초적으로 가지고 있어야할 체면도 없고 염치조차도 필요 없다는 말이요?” 대답은 지극히 자연스러우면서 단순하고 명쾌하였다. “배고픔을 참을 수 없는데 체면을 살필 겨를이 어디 있단 말이요. 체면을 생각하면 굶어 죽고 얼어 죽게 생겼는데, 이런 상황까지 이르렀는데 체면이 뭐가 필요하오!” 이런 솔직한 대답을 들으면 사람들은 놀라면서도 이치에 맞는다고 생각하게 된다. 논리에 맞는다고 생각하여 그들을 동정하게 된다. 그런데 거지의 다른 면을 보면 어떻게 될까. 돈을 위해서는 어떤 나쁜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돈이 생기면 주색잡기에 빠져 방탕한 생활을 한다. 먹고 마시며 오입질도 하고 도박도 한다. 매우 많은 거지들이 때때로 놀랄만한 금액을 집에 붙이기도 한다.……말문이 막힌 나머지 분개하고 비할 수 없는 증오에 온몸이 떨릴 수도 있다. 그러다가도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이 그 가련한 얼굴과 사람 마음을 떨리게 만드는 애걸복걸하는 말을 듣게 되면 다시 측은지심이 생겨나서, 자기 자신은 물건 살 때에 재삼재사 고려하면서 쓰지도 않았던 돈을 꺼내 한꺼번에 그 떨고 있는 지저분한 손에 쥐어주게 된다. 아! 사람 천성이 본래 선하다는 것은 그렇게 기이하고도 교묘하다. 길을 잃은 그 죄악의 영혼은 그렇게 가증스러운 마력(魔力)을 갖추고 있음이니. 누가 알겠는가, 그 배후에 때때로 나타나는 여러 가지 죄악 중에 당신 도움도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그런 죄악은 당신이 생활하는 사회 치안환경을 오염시키고 파괴하고 있다. 선량한 공공생활 질서를 오염시키고 파괴하고 있다.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것은 사회 환경의 악순환이다. 궁하면 생각이 바뀐다는 다른 면 : 가난은 비웃어도 창녀는 비웃지 않는다 모택동은 50년대에 유명한 논점을 발표하였다. “중국 6억 인구의 명백한 특징은 일궁이백(一窮二白)1)이다. 그것은 나쁜 일이라 볼 수도 있으나 사실은 좋은 일이다. 궁하면 생각이 변하여 일을 처리해 나가고 혁명을 한다. 한 장의 백지는 부담이 없다. 가장 새롭고 가장 아름다운 문자를 쓸 수 있고 가장 새롭고 가장 아름다운 그림을 그릴 수 있다.” 이 사상은 일찍이 빈곤대국인 중국이 자력갱생하고 간고분투 하도록 고무하여 어느 정도 성공을 거뒀다지만, 실제는 빈곤을 영광으로 알고 궁핍을 즐거움으로 여기는 ‘궁과도(窮過渡)’2)현상이다. 분명한 ‘아Q정신’인, 거지 철학으로 변질되었다. ‘문화대혁명’ 이래로 수많은 의식주의 거지와 정신적인 거지가 터져 나왔다. 한쪽은 스스로 허리띠를 졸라매고 다른 쪽은 시원시원하게 타인에게 희사하면서 스스로 만족해했다. 동시에 스스로 봉쇄하면서 아무도 그 오묘함을 알 수 없는 역사 여정을 연출해냈다. 중국에는 가장 두려운 문화 현상이 하나 있다. “가난은 비웃어도 창녀는 비웃지 않는다.(笑貧不笑娼)” 구걸은 부끄러워도 몸을 파는 것은 부끄럽지 않다는 뜻이다. 이런 가치관은 직접적으로, “궁하면 사상이 변한다”라고 하는, 옳고 긍정적인 사상과는 다른, 상반된 한 면을 이끌어 냈다. 가난도 범죄가 자생하는 토양의 하나가 되었다. 한편으로는 “빈곤하더라고 빈곤한 패기가 있다(窮有窮志氣)”라고 하거나, “빈곤한 사람도 자연히 빈곤한 자의 기개가 있다”라고 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가난은 비웃어도 창녀는 비웃지 않는다"라고 영락과 죄악이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비정상적인 변태심리요 인격 왜곡이며 자포자기다. 이 모든 것은 중국인이라면 다 알고 있는 명백한 역사적 사실이요 현실이다. 다른 각도에서 보면 곤궁도 범죄를 양산하는 토양 중 하나다. 이런 ‘곤궁, 빈곤, 가난’은 경제적 빈곤을 포함할 뿐만 아니라 정신적 빈곤도 포함한다. 이는 사회생활의 잠재적 위기 중 하나다. 거지의 발생과 내막에는 그러한 역사적 사실을 내포하고 있다. 우리가 심도 있게 성찰하여야 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중국은 인구가 많은 농업문명의 역사가 오랜 나라, 고국(古國)이다. 비록 역사상 몇 번의 번영을 구가한 태평성세가 있기는 했지만 빈곤과 낙후는 처음부터 끝까지 마귀의 어두운 그림자처럼 그 오래되고 낡은, 신주(神州) 대지를 배회하였다. 빈곤의 악마는 오랫동안 역대 중국인들이 끊임없이 경건하게 계속적으로 올리는, 결코 낮아져 본 적이 없는 제사의 향불을 마음껏 향유하였다. 그렇기에 빈곤은 느긋하게 흩어지지 않고 연속되어 왔다. 역사적으로 농업문명으로 유명한, 농사짓기를 생업으로 삼고 살아나가는, 경식(耕食) 위주의 대국이 매번 전쟁의 봉화가 끝이지 않고 홍수가 온 땅을 할퀴며 천재가 세상을 뒤덮을 때마다 맨 먼저 환란을 당하는 부류는 농민이었다. 그 다음으로는 도시와 시골의 빈민이었다. 다행히 도탄에 빠지지 않은 농민은, 생계를 유지하려고 처자를 데리고 황망하게 고향을 버리고 타향으로 피난길에 들어설 수밖에 없었다. 죽이라도 먹으려고 자녀를 팔기도 했다. 처자와 생이별해 각자 살 길을 찾아야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면서 대량으로 가장 기본적인 거지 자원이 생겨났다. 거지 무리 속에는 곤경에 빠진 궁핍한 농민이 대다수였다. 걸식하면서 근근이 목숨을 부지하니, 심리적 부담이 가중되어 왜곡된 심리가 생겨날 수밖에 없었다. 고유한 인격의 존엄이 손상되었다. 남세스럽고 낯을 들 수 없는 불운한 삶을 그 누가 원하겠는가! 곤궁은 늘 거지와 동반하였다. 궁핍은 생각만하여도 전율하게 만드는 글자였다. 빠져나갈 길만 있다면 절대 비천하게 생계를 꾸리지 않을 것이다. 누가 먹을 것을 구걸하는 거지 떼와 같이 지내겠는가. “가난은 비웃어도 창녀는 비웃지 않는다”라는 말은 이러한 심리상태가 비틀린 의식이다. 양가 부녀자가 창기가 된다는 것은 실제 육체를 팔고 인격을 파는 특화된 걸식의 한 방식이다. 창기의 실제 수입은 자신과 가족이 지불하는 대가에 결코 미칠 수 없지 않은가.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1) 첫째는 빈궁, 둘째는 공백 상태 ; 기초가 박약하다는 말로 경제적으로 가난하고 문화적으로 공백상태에 있음을 가리킨다. ‘궁(窮)’은 농·공업이 낙후된 것, ‘백(白)’는 문화·과학 수준이 낮은 것을 뜻한다. 1956년 4월, 모택동(毛澤東)이 ‘10대 관계를 논함(論十大關係)’이라는 연설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이 선진 제국에 비하여 낙후된 것을 표현한 말로, 이러한 공백 상태는 오히려 장래의 창조성과 발전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뜻에서 썼다. 다시 말해, 당시 모택동은 중국 상황은 첫째가 경제적 궁핍이고 둘째가 문화적 백지상태이기 때문에 이를 벗어나기 위하여 모든 인민이 자발적으로 사회주의 건설에 동참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2) ‘가난한 상태에서 공산주의 사회로 넘어가다’라는 의미다. 20세기 50년대 말에 나타난 중국 정부의 극좌적인 정치 현상을 말한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새해를 맞아 새로운 연재를 시작합니다. 고광표 작가의 '돌하르방이 전하는 말'입니다. 제주의 상징이자 제주문화의 대표격이나 다름 없는 석상 '돌하르방'을 통해 '오늘 하루의 단상(斷想)'을 전합니다. 쉼 없이 달려가는 일상이지만 잠시나마 생각에 잠기는 순간이기를 원합니다. 매주 1~2회에 걸쳐 얼굴을 달리하는 돌하르방은 무슨 말을 할까요? 독자 여러분의 성원을 기다립니다./ 편집자 주 "일 허젠 허난 속아수다" (일 하려고 하니 수고했습니다) "Thank you for your hard work." ☞ 고광표는? = 제주제일고, 홍익대 건축학과를 나와 미국 시라큐스대 건축대학원과 이탈리아 플로렌스(Pre-Arch )에서 도시/건축디자인을 전공했다. 건축, 설치미술, 회화, 조각, 공공시설디자인, 전시기획 등 다양한 분야로 활동하는 건축가이며 예술가다. 그의 작업들은 우리가 생활에서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감정에 익숙한 ‘무의식과 의식’ 그리고 ‘Shame and Guilt’ 등 현 시대적인 사회의 표현과 감정의 본질을 전달하려 하고 있다.
김산의 상징적인 담론들 ‘폭낭’은 제주어로 팽나무를 말한다. 제주에서 폭낭은 깊은 의미가 있다. 폭낭은 오래된 마을일수록 수령(樹齡)과 형태가 을씨년스러울만큼 기괴하지만 그 나무의 역할도 중요하다. 특히 바닷가 마을일수록 그 형태가 상상을 초월하며 풍향수(風向樹)로써 한라산을 향해 빗자루처럼 누워있다. 폭낭의 역할 중 한 가지는 폭낭이 있는 곳이 마을의 중심지가 된다는 사실이다. 평소에는 더위를 쫓는 쉼터의 역할도 하고, 마을 소식도 서로 전하는 장소가 되기도 하지만 긴급할 때 마을 공회(公會)의 장소가 되기도 했다. 또한 폭낭은 대표적인 神木(신목)이 되기도 한다. 본향당 안에 오방색 물색(컬러)을 걸고 신체(神體)가 되는 것이다. 해안 마을은 신체가 석상이나 잡목이 되지만 중산간 마을에선 폭낭이 주요 신체가 되고 있다. 김산이 폭낭을 마을의 중요 사건을 지켜본 목격자, 시간의 증인이라고 하는 것은 그 나무가 인간보다 훨씬 오래도록 역사 앞에 의연하게 서 있었기 때문이다. ‘사회적 풍경’이라는 담론은 풍경 속에 은닉(隱匿)된 사람들의 삶의 흔적을 찾는 것이었다. 멀리서 자연 그대로 보이는 풍경도 가까이에서 보면 수많은 사람들의 흔적으로 생채기를 입고 있다. 전쟁, 벌채, 산불, 채집, 사냥, 산행 등 생존과 관련된 직·간접적인 이유들의 흔적이 가득한데 토기 파편, 안경, 소뼈, 농기구, 비닐까지 인간 삶의 파편들은 아름다운 숲에 몰래 숨어 있다. 자연이 어떻게 서서히 사회화되고 있는 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때로는 풍경의 일부처럼, 때로는 너무 어색하게 말이다. 몰래 숨긴 것의 보물찾기처럼 숲의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는다면 결코 보이는 것은 없다. 보이지 않는 것과 보이는 것은 자아의 통찰에 달려 있다. ‘동자석’ 은 영혼에 대한 사유(思惟)에서 시작되었다. 어릴 때 산(山;무덤)에서 자주 보았던 동자석이 어른이 돼 새롭게 소환된 것이다. 동자석은 귀여운 아이 석상으로 먼저 떠난 이들을 위해 자손들이 효성으로 세운 현무암 조각이다. 석상 아이는 외로운 조상과 벗이 되어 온갖 심부름을 한다. 동자석은 떠난 조상을 위해 자손들이 예의, 효도, 그리움, 봉양의 의미를 담고 있는데 유독 제주도에 많이 만들어졌다. 여린 나비는 투박한 동자석과 대조를 이룬다. 아이 석상이 자손들 마음의 상징이라면, 나비는 조상의 영혼이 환생한 것으로 생각되는 자연적 실체이다. 굿에서 ‘나부(나비)’는 조상의 영혼으로 관념돼 한지 조각으로 날려 보낸다. 동자석과 나비는 서로 과거와 현재를 이으며, 인간의 육신과 영혼의 상보성(相補性), 조상과 후손이 교감하는 시간, 돌의 강함과 유기체의 유연함을 서로 대응시키고 있는 관계다. 무기물과 유기물도 모두 자연에서 나서, 결국 현실에서 만나고 다시 원래의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작가의 영원회귀사상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백록(白鹿)’은 한라산 신선 사상에 입각한 표현이므로 제주에서 장수와 평화를 상징하는 담론이 된다. 백록, 숲의 빛나는 만남 김산은 요즘 신비한 숲을 그리고 있다. 한 마리의 백록은 지금 한라산에 없지만 작가의 마음에는 늘 살고 있다. 백록의 숲은 과거 제주 원시림을 상징하기도 하고, 한라산 자락에 있는 곶의 모습이기도 하다. 원형(archetype)의 숲 사이 한 마리 흰 사슴은 제주의 상징으로 빛을 발한다. 고려시대 제주에는 노장 사상, 무속과 불교가 유행하였는데 ‘당(堂:본 향당)오백 절(寺)오백’이라고 하여 제주섬 곳곳에 신당과 절간이 매우 많았었다. 예전 한라산은 사슴, 노루들의 놀이동산과 같았으나 조선시대에 해마다 다량의 사슴, 노루 가죽을 진상하다보니 19세기 말에 이르러 한라산 사슴이 멸종하였다. 흰 사슴은 조선 초기부터 한라산에서 포획하여 조정에 바친 기록이 있고, 전설에 사슴 무리를 돌보는 신선이야기가 전해온다. 구전에 의하면, 한라산은 홍산(紅山), 청산(靑山), 백산(白山) 세 가지로 불렀다. 봄에는 붉은 진달래, 참꽃이 가득하고 가을에는 단풍이 빨갛게 물들어 홍산이라 하고, 여름엔 수목이 푸르러서 청산(靑山)이 되며, 겨울에는 흰 눈이 덮여 백산(白山)이라고 했다. 계절 따라 변화무쌍한 한라산에서는 남극노인성을 볼 수 있으며, 신선이 날마다 백록(白鹿)을 데리고 와 물을 먹이는 곳이라서 백록담이라고 불렀다. 한라산은 예로부터 이처럼 노인성, 신선, 흰 사슴, 불로초, 영지버섯 등 도가의 장수사상이 깃든 곳으로 유명했다. 한라산을 꼭짓점으로 보면 제주도는 남북의 길이가 짧고 동서의 길이가 긴 타원형의 섬이다. 180만 년 전 화산으로 만들어진 섬이기에 가는 곳마다 검은 색 현무암이 지천으로 널려있다. 그 산허리 아래로 에워싸고 있는 곶이라고 부르는 숲이 여러 군데 있는데 오늘날은 곶자왈이라 부르고 있다. 곶은 우거진 숲을 말하며 한자로는 ‘수(藪)’로 쓴다. 지역민들은 오래전부터 ‘술’이라고 불렀다. 곶자왈은 근래에 만들어진 합성어로 곶=산 숲, 또는 깊숙한 산속의 수풀이고, 대규모로 숲을 형성하고 있다. 연관된 명사로 곶질(길). 곶밧(밭), 곶쉐(소), 곶돌(아아용암판석) 등의 말이 있다. 자왈=가시밭, 또는 작은 잡목이나 수풀이 우거진 가시덤불 지대로 작은 규모이고 곶가까이나 또는 밭 구석에 형성된다. 연관된 말로 가시자왈(가시가 많은 자왈)이라는 단어가 있다. 사실상 곶은 원시림 숲이 있는 장소이다. 제주는 바다로 둘러진 울울창창한 고도(孤島)였지만 몽골이 일본 정벌을 위해 한라산에서 벌목하여 수백 척의 전선(戰船)을 만들었거나 목장용 목책(木柵), 초가의 자재(資材), 진상선(進上船) 제작, 숯 재료 벌채, 화전(火田) 개간 등에 의해서 오늘의 숲의 모습이 되었다. 김산의 숲에 대한 모티프는 곶(자왈)에서 시작되었다. 곶은 제주인의 생활근거지로 대개의 일상생활에 필요한 사냥, 땔감과 열매의 채취, 목양(牧養), 숯가마 운영, 도피 은둔, 비념의 장소이기도 했다. 숲은 제주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핵심 장소가 된다. 숲으로 보여도 숲 이상의 사회적 장소였던 것이다. 김산의 백록은 한라산의 자연과 제주인의 삶의 소망으로써 장수사상을 근원에 두고 있다. 숲은 신성한 곳으로써 백록의 길이자 우주(하늘)의 기운이 내리는 영역이다. 이때 백록은 작가의 염원의 상징으로써 세계, 인간, 생태, 사물 모두를 아우르는 수평적 관계의 길로 안내하는 매개자가 된다. 특히 사실적인 묘사와 대기 원근법의 표현은 세속에서 벗어난 성스러운 신비주의를 더하고 있어서 마치 오늘날의 문명을 역설적으로 되돌아보게 한다. 자연스럽게 현재의 우리 세계를 비판적으로 보게 하는 것이다. 자연의 모든 것이 인간과 공생하는 관계라면, 여기에서 백록은 인간의 온갖 행위들을 응시하는 신성한 존재로서 현현(顯現)한 것이다. 인간다움의 마지막 모습이, 우리에게 여전히 양심이 남아있을 때까지라고 한다면 그래도 인류의 미래에 희망을 가져볼만하다. 김산의 염원은 인간다움을 잃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 숲의 생태적 ‘아름다움이 그대로 있음으로’ 묻고, 백록이 빛나는 ‘순백(純白)으로 돌아올 날을 기다리는 것으로 답하고’ 있다. 모든 색의 마지막은 처음 바탕색(素色)일 것이라는 믿음에서 김산은 우리에게 묻고 있다. “인간이여, 숲을 버리고 우리는 어디까지 추락할 것인가?”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김유정은? = 최남단 제주 모슬포 출생이다. 제주대 미술교육과를 나와 부산대에서 예술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미술평론가(한국미술평론가협회), 제주문화연구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는 『제주의 무신도(2000)』, 『아름다운 제주 석상 동자석(2003)』, 『제주의 무덤(2007)』, 『제주 풍토와 무덤』, 『제주의 돌문화(2012)』, 『제주의 산담(2015)』, 『제주 돌담(2015)』. 『제주도 해양문화읽기(2017)』, 『제주도 동자석 연구(2020)』, 『제주도 산담연구(2021)』, 『제주도 풍토와 문화(2022)』, 『제주 돌담의 구조와 형태·미학(2022)』 등이 있다.
거지를 보는 관점에 모순이 존재한다. 복잡하고 여러 특징을 가진 사람이 모인, 모순에 가득 찬, 어중이떠중이가 모인 구성원이기에 그렇다. 신비한 조합이 모순된 관점을 가지게 된 원인이다. 각양각색의 거지 유형을 식별하면 그 일부를 알 수 있다. 거지의 여러 가지 걸식 방법으로 분류하면, 거지를 크게 11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다 : 첫째, 지팡이를 짚고 그릇을 들고 다니면서 거리에서 동냥하는 사람이 가장 많다. 그 다음으론 길거리에서 무릎을 꿇고 다니면서 동냥하는 거지, 그 다음으론 큰소리로 ‘동냥 줍쇼’ 외치며 다니는 거지가 많다. 여기에는 네 가지 부류가 있었다. 동항(東項), 서항(西項), 홍항(紅項), 백항(白項)으로 구분된다. 억지 부리며 강압적으로 구걸하는 거지는 홍항이고 애걸복걸하며 구걸하는 거지는 백항이다. 동항과 서항은 어떠했는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둘째, 전문적으로 경조사를 거행하는 점포, 매장, 가정에 가서 금일봉을 요구하는 거지다. 거지에게는 근거지가 있었다. 자기 경계를 넘지 못했다. 다른 근거지에서는 구걸하지 못했다. 규정과도 같았다. 금일봉 액수의 대소는 큰일을 치루는 가정의 크기에 따라 달랐다. 이외에 거지는, 신부를 맞을 때나 영구를 바랠 때 일을 도와주면서 수수료 일부를 받았다. 셋째, 다른 일은 하지 않고 강호 여러 지역을 유람하는 거지다. 한 지역에 가면 현지 거지의 우두머리를 찾아가 동냥하였다. 1년에 한 곳을 한두 번만 가야한다. 어떤 때에는 길 가는 사람에게나 상점을 찾아가 구걸하기도 하였다. 넷째, 기예를 팔면서 강호를 돌아다니며 구걸하는 거지다. 한 곳에 머물지 않고 사방으로 돌아다녔다. 희곡이나 도정(道情)1)을 음창하거나 산가(山歌)2)나 연화락(蓮花落)3)을 불렀다. 이마에 그릇을 올려놓는 것과 같은 사완(耍碗), 손가락이나 콧등으로 사발 돌리는 소잡사(小雜耍)를 하기도 하고 칼 삼키기, 쇠구슬 삼키기를 공연하기도 하였다. 뱀을 콧구멍에 집어넣고 입으로 나오게 하는 뱀 쇼를 보여주기도 하였다. 이런 여러 가지 기예를 가지고 행인을 불러 모은 뒤 공연 사이사이 멋들어진 부분에서 관중에게 관람료를 받았다. 다섯째, 막일하며 먹고 사는 부류다. 마부를 도와 언덕을 오르거나 다리를 건너는 데에 힘을 보탰다. 체력 노동자의 조수가 되는 부류도 있었고 타인의 물건을 날라다주는 일을 하는 부류도 있었다. 여섯째, 신체불구형 거지다. 불편한 몸으로 거리를 지나는 행인에게 돈을 구걸하였다. 맹인, 절름발이가 있었고 넓적다리 헌 데서 농혈이 흘러나오는 사람도 있었다. 손과 발이 합쳐져 머리 옆에서 자란 기형인 몸으로 구걸하는 거지도 있었다. 독약으로 신체를 훼손시켜 귀, 코, 입, 눈 모두에 작은 구멍 하나씩만 남겨두고 동냥하는 거지도 있었다. 기형인 몸을 가지고 구걸하는 불구자는, 불량배가 인위적으로 멀쩡한 지체를 자르거나 훼손시켜 강압적으로 거리에 나가 구걸하게 만든 후 나중에 이익을 갈취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일곱째, 거짓말하거나 명의를 도용하여 사람에게 가련하게 느끼게 만드는 방법으로 구걸하는 거지다. 친척에게 의탁했다가 불우하게 재난을 만나 어쩔 수 없이 타향을 전전하게 됐다고 거짓말하는 사람도 있고, 부모가 병들어 효도하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동냥하고 있다고 거짓말하거나, 집안에 돌아가신 분이 있는데 돈이 없어 장사를 치르지 못하고 있다고 거짓말하며 구걸하였다. 혹은 코가 썩어간다거나 궤양이 생겼다고 하거나 피가 나고 고름이 흐른다는 등 일부러 몸에 병을 만들어 구걸하는 거지도 있었다. 분장한 거지가 그들이다. 여덟째, 억지 부리며 강제로 요구하는 거지다. 생떼부리는 경우다. 범죄자인 경우도 있었고 불량배인 경우도 있었다. 돈을 요구하다가 주지 않으면 곧바로 강압적으로 돌변하여 생떼부리며 칼로 자신의 머리나 팔, 얼굴 등을 자해하였다. 피 흘리면서 겁주는 경우다. 돈 줄 때까지 그런 행동을 계속하였다. 아홉째, 귀이개와 같은 조그마한 물건을 팔면서 구걸하는 거지다. 주로 거지 두목이 일하는 데에 눈과 귀 역할을 했다. 열째, 여자거지다. 이런 부녀자는 특별한 기예나 특기가 없었다. 불구자이거나 위장해 돈을 편취하기도 하였다. 열한째, 남녀가 함께 구걸하는 거지다. 사찰이나 도관에서 아직 식지 않은 향의 재를 운송해주면서 돈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고, 길가에 서서 지나가는 행인에게 빗자루로 먼지를 털어주면서 돈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외에 의사 노릇하면서 약을 팔며 다니는 경우도 있고 점치면서 구걸하는 경우도 있었다. 어린 아이를 데리고 다니면서 구걸하거나 노인이나 병자를 데리고 다니면서 구걸하는 거지도 있었다. 가지각색이요 형형색색이다. 세상의 추태란 추태는 다 동원하였다. 상술한 여러 가지 형태는 대부분 예나 지금이나 일맥상통한다. 현재도 별반 다르지 않다. 거지꼴하고 다니면서 편취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 무리를 어찌 증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물며 그중에 머리털이 치솟는 범죄행위가 감춰져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강탈, 약탈, 간음, 강도, 절도, 상해를 입히는 경우가 그 예이다. 역대로 사람들은 변함없이 꼬임에 빠져들었다. 여전히 도외시하며 손해를 당했다. 그러면서 불결한 재주를 부리게 만들었고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선량한 마음을 모독하고 희롱하게 만들었다. 일부 사람들은 본질을 꿰뚫어보고 아랑곳하지 않고 지나쳐버리기도 했지만, 거지 놀음을 알지 못하는 일부 사람들은 주동적으로 열성적으로 자비의 마음을 내어 그 놀음에 따랐다. 거지의 수법은 변했다 해도 그 본질은 여전히 달라지지 않고 예나 지금이나 판에 박은 듯이 특정한 하위문화의 전통을 형성하고 있다. 그래서 생계 때문에 어쩔 도리 없이 곤경에 빠진 거지조자 많은 패악을 저지르는 무리와 한패거리처럼 오해 받고 있다. 사람들은 거지의 희롱 때문에 판단내리기를 어려워한다. 누가, 어느 것이 진짜 거지인가? 어느 것이 가짜 거지인지, 누가 쉬이 분간할 수 있는가? 어느 누가 흥미를 가지고 진짜와 가짜를 세밀하게 판별하려 하겠는가? 거지의 세계는 실로 귀신과 사람이 섞여 있는, 어룡혼잡의, 신비하면서도 죄악이 충만한 세계임은 분명하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1) 도정(道情)은 곡예(曲藝)의 한 종류다. 당대의 『승천(承天)』, 『구진(九眞)』 등 도곡(道曲)에서 시작된 창(唱) 위주의 곡예(曲藝)다. ‘어고(魚鼓)’와 ‘간판(簡板)’으로 반주한다. 원래는 도사(道士)들이 강창(講唱)한 도교(道敎) 이야기의 곡(曲)이었는데 나중에 일반 민간고사로 제재를 삼았다 ; 어고(漁鼓), 타악기의 하나로, 죽통(竹筒)의 한쪽에 얇은 가죽을 씌우고 손으로 친다. ‘도정(道情)’의 주요 반주악기다 ; 간판(簡板), 한 자 남짓한 대나무 판이나 나무판 2쪽으로 된 타악기의 일종으로 ‘희곡(戱曲)’나 ‘도정(道情)’의 반주에 썼다. 2) 산가(山歌), 남방의 농촌 혹은 산촌에서 유행하던 산이나 들에서 일을 하거나 사랑을 구할 때 부르는 민간 가곡이다. 3) 연화락(蓮花落)은 설창(說唱)하는 전통 곡예 예술이다. 공연자는 1인이 일반적으로 말하기도 하고 노래하기도 한다. 칠건자(七件子)를 치면서 반주한다. 몇 사람이 간단히 분장하고 대나무 판을 치면서 노래하기도 한다. 통속적인 내용을 가진 가곡이다. 보통 노래의 매 단락마다 ‘연화락(蓮花落), 낙연화(落蓮花)’라는 메기는 소리를 붙인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새해를 맞아 새로운 연재를 시작합니다. 고광표 작가의 '돌하르방이 전하는 말'입니다. 제주의 상징이자 제주문화의 대표격이나 다름 없는 석상 '돌하르방'을 통해 '오늘 하루의 단상(斷想)'을 전합니다. 쉼 없이 달려가는 일상이지만 잠시나마 생각에 잠기는 순간이기를 원합니다. 매주 1~2회에 걸쳐 얼굴을 달리하는 돌하르방은 무슨 말을 할까요? 독자 여러분의 성원을 기다립니다./ 편집자 주 안트레 들어 왕, 저녁 먹엉 갑서 (안으로 들어오셔서 저녁식사하고 가십시오) "Come inside and have dinner before you leave." ☞ 고광표는? = 제주제일고, 홍익대 건축학과를 나와 미국 시라큐스대 건축대학원과 이탈리아 플로렌스(Pre-Arch )에서 도시/건축디자인을 전공했다. 건축, 설치미술, 회화, 조각, 공공시설디자인, 전시기획 등 다양한 분야로 활동하는 건축가이며 예술가다. 그의 작업들은 우리가 생활에서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감정에 익숙한 ‘무의식과 의식’ 그리고 ‘Shame and Guilt’ 등 현 시대적인 사회의 표현과 감정의 본질을 전달하려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