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좁다’는 건 매스컴의 세계에 더 적합한 말이 아닐까. 적어도 이 글을 게재해 온 <제이누리>에 관한 한은, 그렇지 않을까 싶다. 그동안 어머니의 백세 일기를 여기에다 기록해 온 건, 순전히 어머니를 요양보호하면서 함께 버텨내는 삶이 버거운 탓이었다. 기실은, 어머니가 요양원의 주간보호(아침 9시~오후 5시)에 다니는 동안 몇 차례의 긴급 호출이 있었다. 내용은 ‘아무래도 병원에 모시고 가는 게 좋을 것 같다’는 것인데, 정황은 돌봄에 대한 애로와 곤란의 우회적 표현이었다. 주간보호는 활동력과 인지력이 단체 생활에 가능한 정도라서 사회복지사 한 사람이 여러 어르신을 돌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어머니처럼 손이 많이 가는 경우는 요양원에 입소해서 생활 전반을 전적으로 기관에 의존하는 게 적절하다. 다만 비용도 많이 요구되고, 집을 떠나야 하는 문제가 걸림돌이다. 더욱이 어머니는 ‘요양원에 보내지 않기’를 약속하고 한국으로 모셔 왔다. 보통 미국에서는 노인이 아프다 해서 병원으로 갔는데, ‘요양원으로 옮겼다’는 소식이 들려오면, 얼마 없어 장례식장의 부고장이 날아든다. 바로 이 ‘병원-요양원-장례식장’의 루트가 어머니에게는 가장 견디기 힘든 미국 생활의 두려움이었다. 어쩌면 다니던 직장을 은퇴할 즈음, 내 손에 가장 먼저 잡혀들어온 게 요양보호사표준교재였음도 이 때문일 것이다. 평균 합격률이 90%에 달하는 요양보호사 시험은, 가족요양과 일자리를 동시에 해결해 주는 비결이었다.(실은 어느 요양원에 입사해 1주일쯤 근무를 하면서 요양원의 일상을 경험할 수 있었는데, 거동의 자유가 없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들어갈 때 2층이나 3층에 배정되면, 거의 그 자리가 생명이 꺼지는 날까지 고정석이 되었다. 1층으로 내려와서 땅을 밟아보는 일이란 도무지 꿈속에서나 가능한 일 같았다. 우리 어머니처럼 농사를 짓고 물질을 하면서 몸이 재빠르고 손발이 부지런한 사람에게, 요양원이란 그야말로 갇혀 지내는 감옥소나 다름없을 터였다. 요양병원을 일컬어 노인들 시체보관소란 말이 떠도는 현실 또한 이러한 상황을 암시하는 말이 아닐까.) 어느덧 어머니와 함께 살아온 지 22년. 아버지를 미국의 볼티모어 공원묘지에 매장하던 날, 땅속으로 들어가는 관을 얼싸안고 함께 묻히려는 어머니를 끌어내어 함께 돌아온 게 엊그제만 같다. 그동안 80세 어머니는 102세가 되셨다. 처음 10년 동안은 마치 서정주 시인의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누님’처럼 살림과 육아의 자리를 담담하게 감당하셨다. 아이들은 “할머니 김치찌개가 최고!”라며 엄지척을 하였고, 삶의 생기를 회복하신 어머니는 마치 미국으로 이민 가시던 60대 초반의 제주 여인으로 되돌아왔다. 물때가 되면 바당으로 나가서 보말을 잡으셨는데(그때는 동네 사람들이 썰물이 진 바다로 나가서 보말을 잡는 게 허용되었다), 그 바당 덕분에 어머니의 귀향은 급속히 제 자리를 잡는 듯 순조로웠다. 또한 전 재산을 팔고서 이민을 떠났던 어머니를 위해, 자녀들이 힘을 모아 고향 땅처럼 친근해 보이는 밭뙤기를 하나 사드렸다. 집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마을 안의 감귤밭은, 비탈진 게 미안한지 햇볕과 바람을 야무지게 끌어들였다. 눈을 뜨면 밭으로 가서 잡초를 뽑고, 물때가 되면 바다로 가서 보말을 잡는 사이, 어머니의 슬픔은 일상 속으로 스며들며 잦아들었다. 그 사이 마당의 잔디밭은 배추와 상추, 고추, 파 등이 자라는 우영팥(채마밭)으로 변했고, 집 주변의 바닷가는 칸나가 만발한 꽃밭이 되었다. 요즈음 올레꾼들은 이중섭 화백의 그림으로 유명한 ‘섶섬이 보이는 풍경’ 앞에서, 파도와 구름과 바람을 배경으로 칸나를 벗 삼아 사진을 찍는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고 하지만, 꽃 덕분에 사진 속 얼굴 위로 미소가 피어난다. 김종두 시인의 ‘제주여인 6’은 어머니의 젊은 시절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 ‘어두룩헐 때 일어낭(어스름에 일어나서), 물항 고득 물질어 나뒁(물항아리 가득 물을 길어 놓고), 솖아 낸 보리밥 혼 직 뜨는둥 마는둥(삶아 낸 보리밥 한 숟갈 뜨는 채 마는 채), 갈중이 걸치멍 빌레왓으로 내돌아십주(갈옷을 걸치면서 돌짝밭으로 내달렸습니다). 불벹 더위에 나앉앙(불볕 더위에 앉아서), 혼나절 지신검질 매당 보믄(한 나절 웃자란 잡초를 뽑다 보면), 4.3사태 때 죽은 아방(남편) 생각 남니께.’ 어쩌면 어머니는 그 질긴 잔디 뿌리를 캐내고 흙을 골라서 채소를 심으면서, 아버지와 함께 일하며 땀 흘렸던 시절- 주상절리를 에워싸고 도는 대포마을에서 농사짓고, 물질하고, 10명을 낳아서 2남 7녀를 키웠던 때를 떠올리셨는지 모르겠다. 어머니는 아홉 자녀 중에서 가장 당신의 도움이 필요한 나의 삶터에다 당신의 마지막 땀과 기도를 쏟으셨다. 한편, 어머니와 내가 살아가는 일상의 소소함이 누군가에게는 모녀의 특별한 사랑 이야기로 비칠 수도 있음을, 나는 눈곱만큼도 헤아리지 못하였다. 어머니의 요양보호사가 될 적에는, ‘그 삶이 서너 달쯤이나 이어질 수 있을까’하는 아쉬움이 내 삶을 통째로 차지했으니까. 아침에 일어나서 맨 먼저 하는 일이, 어머니의 기저귀를 갈아드리고, 따뜻한 물수건으로 온몸을 닦아드리는 거다. 옷을 갈아입히고 거실로 나와서 흔들의자에 앉혀드린 후 아침을 준비하는 동안, 어머니는 콩 고르기를 하신다. 까망·하양·주홍·노랑색 콩 중에서 같은 색깔의 콩을 별도의 그릇에 담아 놓는 게 작업이다. 그중에서 ‘주홍색 팥으로 저녁밥을 짓는다’는 게 나의 요구사항이고, 어머니는 부지런히 팥을 골라내신다. 마치 그 일이 당신의 존재 이유가 되는 것처럼 눈에 불을 켜고서 부지런히 손을 놀리신다. 안쓰러운 마음에 ‘이 일은 노는 것처럼 쉬엄 쉬엄 해도 되는 놀이’라고 이실직고를 해드려도, 어머니는 괘념치 않으시고 당신의 방식을 꿋꿋하게 밀고 나가신다. 그러저러한 일상을 <제이누리>에 실으면서, 내심 양심이 저려올 때가 있었는데, ‘어쩌면 어머니와 나의 생활이 글을 통해서 적당히 걸러지고 미화되고 있다’는 인식이었다. 이따금 어머니에게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머리를 감거나 목욕을 할 때는 시간을 지체하지 않으려고 대충 하기도 했으니까. 어쩌면 따뜻한 욕조 안에서 물장구도 치고, 머리는 여러 번 헹궈서 시원함을 만끽하고, 손과 발은 더 불려서 굳은살도 덜어내야 직성이 풀리실 터인데..... 그러나 이 모든 비리를 뒤덮고서 우리의 일상이 MBN의 특종세상이나 JTBC 등에 백세 어머니와 효녀의 아름다운 삶으로 묘사되었다. 그나마 이들은 짧은 에피소드 정도라서 적당히 넘어갈 만도 하였다. 하지만 지난 3월, KBS의 인간극장에서 ‘엄마의 102번째 봄’으로 송출된 어머니의 이야기는, 섶섬을 배경으로 펼쳐진 꿈결 같은 바다와 유채꽃이 무리 지어 흐드러진 들판, 고향 동네 친척과의 제주도다운 만남, 어머니의 전형적인 제주할망 역할로 인해 뜻밖의 고공행진을 기록하였다. KBS1에서 주도한 촬영이 KBS2에도 방영이 되어, 지나가던 올레꾼들이 어머니를 만나보기 위해 집으로 들어오기도 하였다. 90세 노모를 모시고 여행을 온 어떤 가족은, 어머니와 함께 사진을 찍으면서 장수를 기원하는 효심을 드러냈는데, 어머니는 십 년은 더 젊어진 함박웃음으로 내년을 기약하며 ‘나보다 더 오래 살라’는 덕담을 해주셨다. 또 어느 교수님은 ‘햇살이 그리울수록’이란 시집에서 ‘어머니’란 제목을 손수 골라 한지에다 붓글씨를 쓰고 와서 어머니께 선물하였다. ‘만약에 나에게도 다음 생(生)이 있다면, 한 번만 한 번만 더 당신 자식이 되고 싶지만, 어머니 또 힘들게 할까 봐 바랄 수가 없어라’는 내용이, 우리의 심금을 울려서 한동안 말을 잃게 하였다. 요즘 들어 어머니는 인간극장이 무색하게 심신이 쇠약해지셨다. 엊그제는 콩을 고르다가 바늘로 이리저리 찔러보더니, 속상한 듯 내던지며 푸념을 하셨다. “이 고매기는 아명해도 못 까키여게(아무래도 못 까겠다). 무사 잡앙 와시니(왜 잡아 온 거니)? 가져당 데껴불곡(가져가서 던져버리고), 다신 잡아오지 말라 이! 얼마 먹지 못허게 생겼져. 대포바당 고매기영 하영(많이) 틀리네. 경해도 혼 번 더 솖아그네 다시 열어보카 이(그래도 한 번 더 삶아서 다시 열어볼까)?” 오늘은 마당을 가리키며 기분 좋은 얼굴로 나를 부르신다. “호박잎이 어랑어랑 국 끓이민 좋키여. 고루 카 놩 끓이민 맛 이실 건디 이!(가루를 타 놓고 끓이면 맛이 있을 건데) 고루 어시민 쏠 씻은 튼물에 끓여도 좋은디(가루 없으면 쌀 씻은 뜨물에 끓여도 좋은데)....”라고 하신다. 아무래도 우리 어머니는 할 일이 있으면 기운이 나시는 게, 영락없는 제주도 할망이시다. 인간극장을 하고 나서부터 지나가는 사람들이 가끔 우리를 알아보고 아는 체를 한다. 미안스럽다. 어떤 분들은 나를 보고 효녀라 부르기도 하는데, 솔직히 민망스럽다. 본의 아니게 속이는 것도 같아서, 마음 한 켠에 그늘이 내려앉는다. 그러던 차에 문자가 한 통 날아들었다. ‘요즈음 어머니는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안부가 궁금합니다. 다시 소식을 읽을 수 있으면 하는 분들이 더러 있습니다만....’이라고. 문득 ‘커튼콜’이란 말이 떠올랐다. 연극이나 음악회 같은 공연에서, 관객들이 찬사의 표시로 환성과 박수를 보내어, 무대에서 퇴장한 출연자를 무대의 막 앞으로 다시 나오게 하는 일이다.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어느 한 사람이 우리를 불러낸다면, 있을 때 잘해야 하는 일임이 분명하다. 오랜만에 이 자리로 돌아오고 보니, 어느새 봄이 지나 여름도 중반을 지나고 있다. 모처럼 돌아온 이 자리에 기대어서, 어머니가 올여름도 무사히 보내실 수 있기를 두 손 모아 빌어본다. 모녀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마음 기울여 들어주는 여러분들 덕택에, 오늘도 어머니는 열심히 콩고르기를 하신다. 마치 그래야만 당신의 하루에 밥 먹을 자격이 부여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어서 일어나서 호박잎을 따다가 밀가루를 풀어놓아 국을 끓여야 하겠다. 제주도 어머니들이 한결같이 추천하는 이 계절의 보양식, 호박잎국을.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허정옥은? = 서귀포시 대포동이 고향이다. 대학 진학을 위해 뭍으로 나가 부산대학교 상과대학에서 회계학을 공부하고 경영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친 후 미국 볼티모어시에 있는 University of Baltimore에서 MBA를 취득했다. 주택은행과 동남은행에서 일하면서 부경대학교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이수했고, 서귀포에 탐라대학이 생기면서 귀향, 경영학과에서 마케팅을 가르치면서 서귀포 시민대학장, 평생교육원장, 대학원장을 역임했다. 2006년부터 3년간 제주국제컨벤션센터(ICC JEJU)의 대표이사 사장과 제주컨벤션뷰로(JCVB)의 이사장 직을 수행한데 이어 제주평생교육장학진흥원장을 거쳤다. 현재는 서울과학종합대학원에서 서비스 마케팅과 컨벤션 경영을 가르치고 있다. 한수풀해녀학교와 법환좀녀학교도 다니며 해녀로서의 삶을 꿈꿔보기도 하고 있다.
곧바로 두 사람에게 금란전(金鑾殿)에서 배를 올리도록 하였다. 예를 마치자 황제가 말했다. “너처럼 뛰어난 사람은 거지 중에는 물론이고 관리 중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과인이 그런 훌륭한 점을 보고서 어찌 발탁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지금 곧바로 이부에 명해 네게 청환(淸宦) 요직에 앉히려 한다. 백성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고 거지들에게도 의를 중하게 여기고 재물을 가볍게 보는 풍조를 강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자 ‘궁불파’ 고개 숙여 절하며 말했다. “만세이시여, 다른 하사품은 얼마든지 감사히 받겠사옵니다. 단지 이 일만은 명을 받기 어렵나이다. 의관은 조정의 진귀한 기물입니다. 어찌 거지에게 쉽게 하사할 수 있겠습니까. 신은 거지가 된 후 10년 동안 천하를 두루 돌아다녔습니다. ‘궁불파’가 유명한 거지임을 모르는 자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일단 관을 쓰고 띠를 둘러 벼슬아치 사이에 서면, 사람들이 관복을 더러운 기물로 보게 되고 봉록을 먹다 남은 찌꺼기로 여기게 될 것입니다. 거지 중에 현자와 어리석은 자가 섞이게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조정에는 귀천의 구분이 없어지게 됩니다. 만일 현인군자가 관직을 그만 두고 숨어버리기 시작하면 만세께서는 누구와 함께 천하를 다스리겠습니까? 신이 거지들을 이끌고 조정에 와서 일해야만 된다는 말씀이십니까? 이것만큼은 신이 절대로 명을 받들 수 없나이다.” 황제는 그 말이 이치에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요할 수 없다는 것은 알았으나 마음속으로는 아쉬움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잠시 주저하다가 말했다. “관리가 되지 않겠다는 것은 그대의 뛰어남이오. 짐은 지금, 다른 상을 그대에게 내리려 하오. 기녀 유 씨는 이미 나와 함께 궁으로 들어왔소. 지금 귀비에 앉혔소. 일찍이 그대는 그녀와 의남매를 맺었소. 나는 그대에게 유 씨 성을 내리려하오. 다른 성씨와 연결시켜 동족으로 만들어 황제의 국척으로 삼으려 하는데, 어떤가?” ‘궁불파’는 잠시 생각하다가 어렵사리 대답하였다. “황친 국척은 영예롭고 귀한 자리이지만 직책이 없는 관직인지라, 백성과 나라를 다스리는 것과 다릅니다. 예부터 ‘황제도 짚신을 신는 가난한 친척이 있다’라고 했으니 좀 비천하다해도 지장이 없을 것입니다. 신이 명을 받들겠습니다.” 곧바로 황제에게 감사하다 말하고 주(周) 씨와 결혼하였다. ‘궁불파’가 황친에 봉해지자 조정의 문무백관이 모두 경하하였다. 나중에 황제가 더 총애하고 배려해 더 많은 은상을 내렸다. 저택도 하사해 황성 안에 머물게 하였다. 그야말로 다 누릴 수 없는 부귀와 영화를 가지게 되었다. ‘궁불파’에서 과분한 부귀와 영화까지 누리게 됐지만 반대로 두려워지기 시작하였다. 이런 감당하기 어려운 복을 누릴 만한 운이 없어 의외의 재앙이 닥치고 일반적이지 않은 화를 불러올까봐 사람을 만날 때면 모조리 ‘나리’라고 불렀고 자신은 ‘소인’ 이라 불렀다. 황친이 된 후, 자주 거지로 분장하고 밖으로 나가 민간의 이해를 남몰래 탐문하였다. 일으켜야 하는 이로운 일이나 없애야 하는 해로운 일이 있으면 입궁한 후에 황제에게 알렸다. 나중에 ‘궁불파’의 아들 3명도 높은 관직에 앉았다. 본인은 88세까지 천수를 누렸다. 이것이 바로 거지 중 첫 번째 뛰어난 사람, 첫 번째 기이한 일을 기록한 『거지가 좋은 일을 행하고 황제가 중매를 서다』”는 전기적인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에서 받는 느낌은 세 가지다. 첫째, 작가 이어는 소설 서두에서 하류 천민이기는 하지만 거지를 창녀, 강도 위에 있는 부류로 보고 있다. “가난은 비웃어도 창녀는 비웃지 않는다.”라는 전통 관념에 반하는 관점이다. 그러나 전개되는 이야기의 내용은 정 반대다. 명기 유 씨가 받은 은혜에 감사해 ‘궁불파’를 구한 인연으로 마침내 거지는 부귀영화를 누린다. 유 씨가 입궁해 귀비가 되면서 황친이 되었다. 결국 ‘가난은 비웃지만 창녀는 비웃지 않는다’는 결론이요 창녀가 거지보다는 지위가 높다는 이야기가 된다. 여전히 과거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자기 모순적 관념이다. 관념과 ‘증과(證果)’의 불일치는 중국 전통문화에서 자주 나타나는 여러 가지 모순적 구성임을 쉬이 알 수 있다. 이러한 창녀와 거지의 지위가 거꾸로 된 현상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둘째, ‘궁불파’는 원래 부유하였다. 자신의 재물을 내놓아 의로운 일을 하다가 거지로 전락하였다. 사람이 궁하다고 뜻까지 궁할까, 아무리 가난해도 포부는 변하지 않았지만, 나쁜 짓을 하려하지 않고 명기 집에서 기식하려 하지도 않았지만, 결국에는 정덕 황제에게 충성을 다하는 것으로 결론을 맺는다. 이런 전통 관념 중의 ‘정통(正統)’ 논리는 당시 사람들은 벗어날 수 없었다. 청대의 이어조차도 벗어날 수 없었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유풍은 여전히 존재한다. ‘궁불파’의 몸에 기인 기사로 덧씌웠지만 당시 사회의 병폐와 전혀 어울리지 않게 보이는 듯하다. 협골(俠骨)로 세상에 이름을 날리고 ‘충군보국’으로 ‘정과’를 맺으면서 전통 관념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위로는 고관, 귀인, 선비에서부터 아래로 거지와 같은 천민까지 그것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처럼 복잡한 역사의 비극은 끊임없이 연출되었다. 셋째, 이어의 소설은 전편에 걸쳐 거지를 동정하고 애호하며 업신여기지 않았다. 거지 중에도 장룡와호(藏龍臥虎), 즉 숨은 인재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실의에 빠진 후 철저하게 타락하지 않고 새로이 다시 뜻을 이룰 수 있기에 그렇다. 당시 거지의 의로운 면만 서술하고 있다. 명나라 때의 거지들은 이미 변질돼 있었고 각양각색의 선하지 않은 사람들이 뒤섞여 있었다는 면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 전기적인 이야기 전체를 통관하면, 구전일 뿐이며 믿을 만한 역사적 사실이 아닐지라도 역사문화 배경에 상응하지 않는 것이 없다. 황제가 민간에서 암행하고 기녀의 집에서 기숙하는 일은 명나라 정독 황제 이전에 이미 송나라 때에도 전례가 있지 않던가! 황제가 금란전 앞에서 친히 백성을 심문하고 거지에게 상을 내린다는 이야기는 기이하고 황당한 상황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명 왕조 개국 황제가 거지 항렬이 아니던가! 청나라에 이르러서도 강소와 절강 접경지역에 매년 겨울이 되면 봉양(鳳陽)의 유랑민, 거지들이 도시에 나가 걸식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고 전해온다. 걸식하는 이유는, 명 태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풀이하는 사람도 있다. 주원장이 호주(濠州)지역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슴에 새겼다. 봉양 지역은 그의 발상지이기에 재난과 전란이 발생한 이후에 인구가 줄어들고 토지가 황폐해지자, 강남의 부유한 백성 14만을 강제로 이주시켜 그 지역을 보강하였다. 사사로이 도망치면 중벌로 다스렸다. 그렇게 이주한 사람들 중에서 매해마다 귀성해 성묘하러 갈 수 없는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거지로 분장해 몰래 고향으로 돌아갔다. 겨울에 떠나 봄이면 돌아가는 것이 습속이 되었다. 그렇게 구걸하면서 강화를 돌아다니는 봉양 사람들은 역사 현상이 되었다. 물론 이야기 자체가 사실일 수 있다. 봉양 지역은 예부터 가난하기로 유명한 지역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주원장이 자신이 젊었을 때 유랑하며 걸식했던 지역을 감사하는 마음에 가슴에 새겼다는 것도 인정상 맞다. 더군다나 거지로 전락한 고통의 경험은 죽을 때까지 가슴에 새겨져있어 잊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주원장은 자신의 그런 경험을 꺼리거나 숨기지도 않았다. 그러한 역사배경의 조건과 문화 환경에서 『거지가 좋은 일을 행하고 황제가 중매인이 되다』와 같은 민간 전설이 나타난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다. 다시 말해 명나라는 정덕, 가정 연간에 이르면 나날이 몰락하기 시작해 쇄미해 졌다. 사회를 지탱하는 강상이 이미 문란해 졌다. 그런 사회 분위기가 황제와 민간의 창기, 거지가 인연을 맺었다는 이야기의 단초를 제공하였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풍경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조화 풍경화는 눈 앞에 펼쳐진 전경(前景)을 그린 그림이다. 그것이 자연 경관일 수도 있고, 사회적인 경관일 수도 있는데 인간이 눈에 그대로 보이는 경치를 서양화의 한 장르로 표현한 것이다. 풍경은 자연 속에서도 변하고, 삶의 공간에서도 변한다. 숲이 자라고 하천이 물길을 바꾸고 해안이 침식되며, 산과 계곡이 깎여나간다. 그 어떤 것도 그대로 인 것이 없다. 변화의 크기와 속도가 다를 뿐 지구 공간을 구성하는 사물들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과 시골 또는 도시의 형태도 늘 달라진다. 풍경은 한자 바람 풍(風)자와 경치 경(景)자로 구성되었다. 풍(風)은 여러 가지 뜻이 있는데 바람, 흘레하다, 울리다, 뜨다(汎), 풍속, 경치, 위엄, 병풍, 모양을 말하고, 주로 “눈에 보이지 않는 대상”을 나타내는 표현을 말한다, 경(景)이란 ‘경치, 빛, 밝다, 크다, 형상하다, 사모하다’ 로도 읽는다. 주로 사실적으로 눈에 보이는 대상을 표현할 때 쓰는 말이다. 그러므로 풍경이란 보이지 않는 의미와 보이는 대상의 아름다움을 서로 어울리도록 조화시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풍경화의 개념이 서양화를 그리는 한 방식이라는 점에서 재료의 특성을 들 수가 있다. 주 재료인 수채(水彩)와 유화(油畫)이다. 수채는 물에 물감을 타서 종이에 그림을 그리는데 맑고 투명하여 시원한 느낌을 준다. 또 유화는 기름으로 녹여쓰는 물감으로 늦게 마르는 기름인 린시드와 빨리 굳게 하는 테레핀을 적절히 혼용하면서 물감의 색과 강도, 굳기와 마르는 속도를 조절하면서 그림다. 그 바탕은 아마포로 만든 캔버스인데 이 둘은 서양화의 핵심 재료가 되며, 수채는 빨리 마르기 때문에 단숨에 그리는데 유리하고, 유채(油彩)는 발색이 아름답고 보존력이 뛰어나다는 장점 때문에 대형 작품에 적합하다. 풍경화는 자연이든, 인간 공동체의 모습이든, 바라보는 사람의 세계관이 투영된다. 바라보는 사람의 경험에서 얻어지고, 그 인식은 당대의 시대정신을 반영하며 표현된다. 이를 테면 풍경화에도 화가의 정신세계와 로컬 컬러가 분명하게 나타나게 된다. 일제강점기는 우리 민족이 음울하고 어두운 시대였다. 일본 군국주의의 지배를 받을 때에는 일제 앞잡이들이 장밋빛 미래가 열릴 것 같았고, 해방된 후에도 진짜 그렀게 살고 있다. 연합국에 의한 일제의 태평양 전쟁 패배로 한반도의 새로운 미래가 열리고 있었지만 금새 그 미래는 먹구름으로 덮여 버렸다. 36년간 주권없는 설움에서 해방의 기쁨을 맞은 것도 오래가지 않았다. 미소 점령군의 한반도 통치, 친일파의 미청산, 좌우이념의 갈등은 끝내 분단과 한국전쟁이라는 괴물이 탄생하여 2024년 이 시점까지도 해방공간에서 예견되었던 나쁜 결과가 그대로 존속되고 말았다. 청산하지 못한 빚은 시간이 지날수록 이자가 붙어 더 무거워진다. 통일이라는 미해결 과제는 납덩이가 되었고, 다시 자유와 민주주의를 짓누르는 반공이념에 가려 제 등장한 친일파의 금빛 귀환으로 우리의 친일 청산을 더욱 멀어지고 말았다. 역사는 국면마다 정리하고 넘어가야 하지만 그렇지 못한 우리는 ‘친일에서 반공’으로 얼굴을 바꾼 이들에 의해 오늘날 극도로 민주주의가 파괴되고 있다. 해방공간의 풍경화 일제식민지 36년 동안 우리는 알게 모르게 나쁜 일본물이 들었다. 해방을 맞았으나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해야 하는 우리는 좌우대립의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림에도 사상이 있다. 해방공간에선 미술인들의 작품이 보기 어려울뿐더러, 이념의 선택으로 인해 그들의 행적마저 불투명했다. 그러나 한 사람에게 스며든 역량은 시대가 정치적으로 변했다고 해도 그 몸이 있는 한 문화적으로 이어진다. 어제 일본에서 배워온 서양화가 오늘 해방 정국이 되었다고 해서 금방 달라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여전히 화가들은 배운대로 추구하는 이상을 향해 그림을 그릴을 것이고 거기에는 새로운 민족 정체성이 자리할 것이다. 해방공간에 제주에 왔던 육지미술인들이 몇 있었다. 해방을 맞아 남쪽 제주로 처음 온 화가은 박노사(朴魯史)와 이석주(李奭柱, 1918~ ?)가 있었다. 그들이 제주에 머문 기간은 길지 않았지만 격동기임에도 불구하고 개인전을 여는 열정을 보여주었다. 제주를 주제로 그린 풍경화 작품이 한 점 있다. 1948년 해변에서 불턱에서 몸을 녹이고 있는 조병덕의 <해녀>라는 작품이 그것이다. 제작 연대가 1948년이면 4‧3이 있던 해인데 잠녀(해녀)들이 물옷을 입고 모여앉아 불을 쬐고 있는 모습을 그리 풍경화이다. 조병덕이 제주에 왔다면 4‧3과 관련돼 왔다가 해변에서 본 잠녀들의 인상일 것이다. 잠녀의 시선이 정명으로 쏠려 있는 것으로 보아 방문자나 사진기를 의식한 포즈이다. 조병덕(1916~2002)은 서울 출신으로 1940년 태평양미술학교를 졸업하고 1941~1945년 조선미술전람회(鮮展) 출품, 1942년에는<저녁준비>로 조선미술전람회(鮮展)최고상인 조선총독부상을 수상했다. 1949~1954년까지 국전 추천작가를 역임하였고, 1955~81년 국전 초대작가와 심시위원을 지냈다. 1954~1981년 이화여대 미대교수를 역임했다. 박노사는 1946년 5월 20일~25일까지 제주북국민학교에서 <돌하르방>, <풍경>, <인물> 등의 작품으로 개인전을 가졌는데 육지 화가에 의해 해방 후 첫 개인전이 열린 것이다. 박노사라는 화가는 이름만 알려졌을 뿐 그가 무슨 이유로 제주에 왔으며, 어디에 살았고 언제 제주를 떠났는지 알 수가 없다. 또 1947년 민족통일이라는 염원 속에 점점 정국이 불안해지는 상황에서도 제주인 김광추의 인연으로 광주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허백련의 문하생 허두정(許斗正)이 7월에 제주북국민학교에서 동양화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이석주 또한 1947년 부인과 아들을 데리고 입도하였는데 제주공립농업학교 미술교사로 지내면서 미술부 학생들과 제주의 풍경을 찾아 야외로 자주 나갔다. 이석주는 이렇게 그린 그림으로 1948년 2월 7일부터 2월 8일 양일간 제주북국민학교에서 도쿄문화학원 출신인 이정규(李政圭)와 함께 자신의 작품 30점을 가지고 2인전을 열자 ‘관람객들이 몰려들어 성황을 이루었다’라고 제주신보는 전한다. 그런데 박노사와 이석주에 대한 기억을 그의 제자였던 강용택(1931~2021)이 몇 가지를 기억하고 있었다. 강용택은 제주공립농업학교 4학년이었는데 당시 그 학교의 미술선생이 박노사와 이석주였다. 강용택은 제주공립농업학교 2학년때 미술활동을 시작하여 1947년 미술교사 이석주의 지도아래 같은 해 11월 21일 남조선 과도정부에서 주최하는 전국신교육전람회에 출품하여 도화부문 가작에 입상하기도 했다. <사진2 이석주 얼굴> 이석주는 서울시 종로구 통의동에서 출생하여, 1931년에 충청남도 홍천군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중학교를 다니다가 4학년때 중퇴하였다. 이미 중학교 1학년 때에 학교미술소조에 들어가고, 2학년 때에는 교내미술전람회에서 2등을 했으며, 4힉년 때에 당시 동아일보가 주최한 전국학생미술전람회에서 유화로 이조백자를 그린 <정물>이 2등에 당선되었다. 이석주는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미술선생님의 권고에 따라 화가의 길로 들어서서 서울의 ‘엔도회화연구소’와 중국의 ‘사까이노 화숙’의 연구생으로 1938년까지 있었다. 그 후 장춘에 있던 신경예술학원 서양과에서 3년 동안 공부하고 졸업 후 심양에서 처음으로 개인전을 가졌다. 1941년 이석주는 제21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산(山)>이라는 작품을 출품하여 입선했다. 이때 서양화부에서 같이 입선한 화가로는 조병덕(趙秉悳), 김경승(金景承), 김인승(金仁承), 심형구(沈亨求), 주경(朱慶) 등이 있었다. 북한미술자료에는 이석주가 선전(鮮展)에 입선한 작품에 대해 “전문 창작자로서 내놓은 처녀작은 유화 20호짜리 <서울교회의 산>”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 북한의 기록과 다른 강용택의 증언에 의하면, 이석주는 일본 태평양 미술학교를 졸업하였고, 일전(日展)에서 작품 <만추(晩秋)>로 특선한 그림을 제주도까지 가지고 다녔다고 한다. 북한의 기록과 다른 것은 일전이라든가 일본 태평양미술학교에 다닌 프로필을 일부러 빼버렸을 것이라고 한다. 심양에서 열린 개인전에는 유화 <청량리 풍경>(1942년), <조선아동>(1943년, 40호) 등 30점을 출품하였다. 또 1944년 전라남도 순천에서 유화 <인왕산>(1943년), <반점>(1944년), <농촌>(1944년, 25호) 등 30점으로 두 번째 개인전을 열었다. 해방후 이석주는 서울에서 진보적인 미술가들과 함께 조형미술가동맹을 조직하였고, 1946년에는 남조선미술가동맹 대전시지부장으로 활동하였다. 이 시기에 대전중학교, 경기상업학교 교원으로 근무했다. 1949년에 유화 <건조기>(1947년), <풍경>(1947년), <정물화>(1947년), <석류>(1948년), <한라산>(1949년) 등 30여점을 가지고 서울에서 개인전을 열었다(이제현;1999). 2020년 5월 5일 한국화가 강용택의 증언에 의하면, “이석주는 공립농업중학교(제주농업학교)에서 미술교사로 재직하였는데 그 기간은 1947년 9월 26일에서 1948년 3월 12일까지였고, 이석주는 제주에서 <한라산>을 두 점 그렸다고 한다. 한라산 그림 하나는 용연에서 원경으로 그렸고, 다른 하나는 동문에서 아라 남쪽으로 본 한라산을 그렸다”고 한다. 이 두 점의 한라산 그림을 그릴 때는 강용택이 동행했는데 1947년~1948년 3월 사이라고 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월북한 이석주는 서울제1국장 지배인, 청진미술제작소 소장으로 있으면서 유화 <농촌에도>(1952년, 50호), <풍어>(1952년) 등을 그렸다. 전후 이석주는 조선미술가동맹 현역미술가, 평안남도 미술창작사 미술가 등으로 있으면서 1981년까지 그림을 그리다가 그 후의 행적을 알 수 없게 되면서 언제 타계했는지 그 시점도 모른 채 깡마른 얼굴의 사진 한 장을 남긴 채 역사 속에 묻히고 말았다. <사진4 강용택 작품> 다시 강용택의 박노사와 이석주에 대한 회고로 돌아가보면, 서양화가 박노사는 제주인보다도 먼저 남다른 돌하르방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1946년 말부터 1947년 중반까지 제주에 머물렀고, 학생이던 나의 자취방에서 팥 한 알도 넣지 못한 맨 좁쌀밥을 나누어 먹으며 미래를 논하던 그는 47년 봄 제주시북국민학교 동관(지금은 철거)에서 개인전을 가진 것을 끝으로 소식이 없다.” 강용택은 동문의 돌하르방의 위치도 기억하고 있었다. “지금은 병원이지만(1990년) 몇 년 전에는 동양장여관 왼쪽으로 계단길이 있었는데 좌‧우에 중형 돌하르방이 세워져 있었다. 계단을 다 오르면 측후소가 있는 곳이다. 허술한 기와집 한 채 외에는 나무가 무성하여 음지가 되어 파란 이끼가 끼어 있어 여름철에도 시원한 느낌을 주는 <돌하르방>을 유화로 그렸는데 이 돌하르방은 제주도 상징이라며 화가 자신이 이 작품을 소장하겠다고 했다.” 이석주에 대한 강용택의 기억을 보면, 이석주는 유화 개인전을 제주시 북초등학교 본관 교실에서 열었다. 전시를 마치고 제주를 떠난 이석주를 찾아서 1948년 8월 여름방학때 제주를 떠날 때 적어준 서울 효자동 전차 종점 근처의 주소를 찾아갔지만 만나지 못했다. 이석주에 대한 강용택의 당시 기억은 선명했다. “1947년 9월부터 1948년 3월말까지 저는 줄곧 선생님을 따라 다녔습니다. 사라봉, 용연, 용두암, 동문통 거리 등 선생님은 이젤과 Box(화구상자)를 들고 다녔습니다.” 강용택은 이석주에게 공개 서한을 보내기도 했다. “해방 전에 일전(日展)에서 특선된 작품은 잘 소장돼 있습니까? 제주에 함께 오셨던 kahsla과 아드님(5~6세)도 궁금합니다. 이제 아드님도 초로의 나이가 되었겠습니다.” 2020년 5월 5일 한국화가 강용택은 필자에게 미술교사 이석주 지도로 받은 남조선 과도정부 상장을 보여주며 그 때 회상을 행복하게 기억한 채 90살의 생애로 2021년 타계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김유정은? = 최남단 제주 모슬포 출생이다. 제주대 미술교육과를 나와 부산대에서 예술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미술평론가(한국미술평론가협회), 제주문화연구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는 『제주의 무신도(2000)』, 『아름다운 제주 석상 동자석(2003)』, 『제주의 무덤(2007)』, 『제주 풍토와 무덤』, 『제주의 돌문화(2012)』, 『제주의 산담(2015)』, 『제주 돌담(2015)』. 『제주도 해양문화읽기(2017)』, 『제주도 동자석 연구(2020)』, 『제주도 산담연구(2021)』, 『제주도 풍토와 문화(2022)』, 『제주 돌담의 구조와 형태·미학(2022)』 등이 있다.
고광표 작가의 '돌하르방이 전하는 말'은 제주의 상징이자 제주문화의 대표인 돌하르방을 주인공으로 내세웁니다. 석상 '돌하르방'을 통해 '오늘 하루의 단상(斷想)'을 전합니다. 쉼 없이 달려가는 일상이지만 잠시나마 생각에 잠기는 순간이기를 원합니다. 매주 1~2회에 걸쳐 얼굴을 달리하는 돌하르방은 무슨 말을 할까요? 독자 여러분의 성원을 기다립니다./ 편집자 주 "맨도롱 헐 때 호로록 들이킵서" (따뜻할 때 후루룩 마시세요. ) “Drink it while it's warm.” ☞ 고광표는? = 제주제일고, 홍익대 건축학과를 나와 미국 시라큐스대 건축대학원과 이탈리아 플로렌스(Pre-Arch)에서 도시/건축디자인을 전공했다. 건축, 설치미술, 회화, 조각, 공공시설디자인, 전시기획 등 다양한 분야로 활동하는 건축가이며 예술가다. 그의 작업들은 우리가 생활에서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감정에 익숙한 ‘무의식과 의식’ 그리고 ‘Shame and Guilt’ 등 현 시대적인 사회의 표현과 감정의 본질을 전달하려 하고 있다.
사정을 이해한 ‘궁불파’는 급한 상황에서 방법을 생각해 냈다. 얼마 전에 굶어 죽을 뻔 할 때 목숨을 구해준 구명은인이 건넨 원보(元寶)를 꺼내어 부인에게 주었다. 원보를 배경으로 해서, 글쪽지를 가지고 거리를 다니면서 원조를 받아 문제를 해결하라 하였다. 위에 큰 글씨로 “해내에 유명한 거지 ‘궁불파’가 딸의 몸값으로 10량을 의롭게 원조했다.”라고 써줬다. 그런데 사람들은 거지가 선수를 친 것이 못마땅했던지 거지가 준 원보의 내력이 불분명하다며 아무도 호응하지 않았다. 헛수고가 되어버렸다. ‘궁불파’는 어쩔 수 없이 구명은인이 건넨, 함부로 사용하지 말하고 한 금가락지와 새로 구걸해서 얻은 부수입을 함께 부인에게 건네주면서 몸값을 지불해 딸을 집으로 데리고 가라고 하였다. 누가 생각이나 했을까. 부인이 궁불파가 준 돈을 가지고 가 몸값을 지불하고 딸을 데리고 오려 할 때 그 향신이 내력을 캐묻고는 부인에게 이튿날 오라하였다. 다음 날, ‘궁불파’가 딸을 데리고 왔는지 확인하려고 부인 집에 갔을 때 한 무리가 달려들어 돈과 양식을 강탈한 강도라면서 부인과 함께 묶어 현의 아문으로 데리고 갔다. 알고 보니 반년 전에 고향현에서 돈과 양식을 경성으로 호송하다가 도중에 향마(響馬)1)에게 모두 강탈당했었다. 범인 호송원이 가산을 탕진해 배상하고 원보(元寶)를 만든 후에야 경성으로 호송하여 자신과 가족의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 ‘궁불파’가 건네준 원보 위에는 호송원과 은장(銀匠)의 이름이 교묘하게 새겨져 있었던 것이었다. 지현(知縣)은 그것을 근거로 온갖 방법을 동원해 고문을 가하면서 ‘궁불파’에게 허위자백을 받아냈다. 그런 후 부인을 보증인으로 세우니 ‘궁불파’도 이제 죽음을 기다릴 도리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궁불파’가 가지고 있던 물건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이전에 ‘궁불파’는 한 집에 두 번 찾아가 구걸하지 않으며 의협을 행한다는 소문이 퍼져있었다. 그가 산서 태원(太原)에 가서 구걸하기 전부터 그의 이름을 사칭하여 이미 많은 재물을 구걸한 후 떠난 자가 있었다. 나중에 진짜 ‘궁불파’가 그곳에 나타나 걸식하자, 현지인들은 사기꾼이라 단정하고 1문도 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모욕주고 푸대접 했다. ‘궁불파’는 배고파서 혼절해 쓰러졌다. 현지의 지방 총갑(總甲)2)도 어수선한 기회를 이용해 곳곳에서 세금을 징수하면서 도중에 어부지리를 얻고 있었다. 당일에 유(劉) 씨 성을 가진 창부의 집에 세금을 거두러 갔다. 마침 명기(名妓)가 표객(嫖客) 한 명과 바둑을 두고 있었다. 산동의 거지 ‘궁불파’가 죽었다는 말을 들은 명기는 예전에 그가 은전을 마련해 관을 사서 어머니의 장례를 치렀던 은혜가 떠올랐다. “그저께 걸식하러 왔는데 나를 알아보지 못하더군요. 머무르게 하여 밥 한 끼 차려주고 다음에 다시 오기로 약속도 받았지요. 다시 오면 예전 일을 이야기하고 후하게 갚으려고 했는데, 누가 알았겠습니까, 며칠 못 본 사이에 굶어 죽을 지를.” 표객이 전후사정을 알고 나서 같이 온 사람에게 5량 은자를 지방 총갑에게 건네주었다. 관을 마련하여 장례를 치르고 스님을 초청해 망혼을 달래주도록 명했다. 명기는 지방 총갑이 착복할까 염려돼서 집안사람에게 직접 가서 장례를 치러주라고 부탁하였다. 관을 들고 갔을 때 다행히도 ‘궁불파’는 절명하지 않고 숨이 붙어있었다. 죽을 먹이자 얼마 없어 깨어났다. 사람에게 부탁해 은인에게 감사의 뜻을 표할 수 있게 데려가 달라고 하여 명기를 찾아갔다. 표객이 그와 명기를 의남매를 맺게 한 후 집에 머물도록 하였다. ‘궁불파’가 생각하기를, 기녀에게 공밥을 얻어먹고 유곽 주인의 친속이 되는 것은 절의와 명성을 잃는 짓이요, 10여 년 동안 쌓아온 거지의 공력이 헛되이 된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며칠 지나지 않아 핑계를 대고 떠나려 하였다. 떠나려 할 때 표객이 50량이나 되는 대원보를 꺼내어 친히 건네면서 그것을 밑천으로 삼아 장사하고 다시는 걸식하며 다니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사양하다 마지못해 받았다. 명기는 예전처럼 아무렇게나 남에게 동냥 줄까 염려되어 금가락지를 빼서 그의 손가락에 끼워주었다. 은자를 사용할 때마다 금가락지를 보면서 자신이 말한 당부를 잊지 말라는 뜻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아무렇게나 보시하면서 자신은 굶어죽는 경우는 만들지 말라는 의미였다. 그런데 그 물건이 지금, 자신이 목숨을 잃는 재앙이 될 줄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고문에 못 이겨 거짓일지라도 자백해버렸으니 그저 죽음을 기다릴 밖에. 지현은 형방에게 내걸라는 포고에 ‘궁불파’를 도적의 우두머리라 부르고 백성에게 그 도당, 의심스러운 사람과 의심 가는 물건을 고발하라고 명시하였다. 그런데 뜻밖에 그날, ‘궁불파’는 지현, 향신, 그 부인, 딸과 함께 경성으로 압송되었다. 하찮은 지방 사건이 천자를 놀래게 했단 말인가? 예측 못한 일이 발생하였다. 실제로 정덕 황제 주후조가 친히 보좌에 앉아 심문하는 게 아닌가! 먼저 지현에게 물은 후 향신에게 묻고 다시 부인에게 묻고서야 ‘궁불파’에게 물었다. ‘궁불파’는 바닥에 엎드려 처음부터 끝까지 있는 그대로 말하고서는 억울하다고 하였다. 갑자기 성상이 고개를 들라하였다. 용안을 보고 원보를 건넨 예전에 만난 표객과 닮지 않았는지 확인해 보라고 하였다. ‘궁불파’는 감히 직언하지 못했다. 결국 황제가 웃으면서 자초지종을 얘기하였다. “만약 짐이 네가 예전에 만난 표객과 닮지 않았다면 그대는 어리석은 관리와 권세를 부리는 향신의 농간 때문에 감옥에서 죽음을 맞았을 것이다. 여기까지 올 수가 없었을 테지. 짐이 사실을 얘기해 주마. 너에게 원보를 건네준 그 표객이 바로 과인이니라. 과인은 민간의 이해를 파악하려고 개인적으로 출궁했었느니라. 우연히 태원까지 가게 되어, 유 씨 기녀의 집에서 몇 개월 머물렀기에 성명을 말하기 어렵더구나. 유 씨 기녀조차도 내가 정덕 황제라는 것을 알지 못했으니 먼 곳에 온 손님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고. 그날 생각 없이 원보를 네게 건네주고는 가만히 생각해보니, 네게 해가 갈까 염려가 되더구나. 구걸하고 다니는 거지가 원보를 가지고 다니면 어찌 일이 생기지 않겠느냐. 나중에 고양을 유람할 때 포고문을 읽고는 염려한 대로 네게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과인이 그 지방에서 하루를 더 머물면서 네가 해를 당한 연유를 세세하게 확인하고 경성으로 돌아왔느니라. 경성으로 돌아온 후 관리를 파견하여 너를 구한 것이고. 지금은 억울함이 깨끗이 씻겼고 재앙에서도 벗어났다. ‘궁불파’의 뛰어남도 천하가 다 알게 되었다. 짐이 그대에게 권하고 싶은 게 있다. 이후에는 그런 위험 일에 끼어들지 말고 목숨을 유지하여 남은 생애를 배불리 먹으면서 살아가거라.” 그런 후에 금의위에게 명하여 지현의 관직을 박탈하고 곤장 40대 형에 처했다. 허실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여 형벌을 바르게 집행하지 않은, 공평무사하지 못한 관리에 대한 경고였다. 백성의 자녀를 차지하고 양민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워 해를 끼쳤으니, 형부에 명하여 향신을 곧바로 참수토록 하였다. 세력을 믿고 백성을 학대하는 자들에 대한 경고였다. 바닥에 엎드려 있는 부인과 딸을 보았다. 비록 오랫동안 고통 받기는 했어도 본래부터 지닌 자색은 감출 수 없었다. 황제가 ‘궁불파’에게 말했다. “그대에게 처자가 없다고 들었다. 저 여인을 보니 복상이구나. 그대가 애당초 저 여인을 위하여 여러 가지 고통을 받았으니, 그대에게 시집가지 않으면 누구에게 시집가겠느냐? 과인이 중매를 설 테니, 경사를 이루도록 하여라.”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1) 향마(響馬), 북방의 마적(馬賊)으로, 그들이 약탈을 할 때는 먼저 ‘향전(響箭)’을 쏘아 기세를 올렸기 때문에 이렇게 불렸다. 2) 총갑(總甲), 원(元)·명(明) 이래로 사용한 하급 관리 명칭이다. 명(明)·청(清)의 부역제도를 보면 110호를 1리(里)라 하고 리는 10갑(甲)으로 나누었다. 총갑은 관부에서 나누어진 1리의 세금과 노역을 담당하였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고광표 작가의 '돌하르방이 전하는 말'은 제주의 상징이자 제주문화의 대표인 돌하르방을 주인공으로 내세웁니다. 석상 '돌하르방'을 통해 '오늘 하루의 단상(斷想)'을 전합니다. 쉼 없이 달려가는 일상이지만 잠시나마 생각에 잠기는 순간이기를 원합니다. 매주 1~2회에 걸쳐 얼굴을 달리하는 돌하르방은 무슨 말을 할까요? 독자 여러분의 성원을 기다립니다./ 편집자 주 "호꼼만 이십서게" (조금만 기다리세요) “Please stay for a while.” ☞ 고광표는? = 제주제일고, 홍익대 건축학과를 나와 미국 시라큐스대 건축대학원과 이탈리아 플로렌스(Pre-Arch)에서 도시/건축디자인을 전공했다. 건축, 설치미술, 회화, 조각, 공공시설디자인, 전시기획 등 다양한 분야로 활동하는 건축가이며 예술가다. 그의 작업들은 우리가 생활에서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감정에 익숙한 ‘무의식과 의식’ 그리고 ‘Shame and Guilt’ 등 현 시대적인 사회의 표현과 감정의 본질을 전달하려 하고 있다.
사납고 거친 거지를 만나면 첫 번째 하류 인물 부류와 비교해보면 된다. 마음 씀씀이를 보자. 이런 부류의 사람이 강도나 도둑이 되어 깊은 밤에 남의 집에 뛰어든다면 집안 재물을 말끔히 가져가는 것은 물론이요 우리 생명조차도 그들 손아귀에 놓이게 된다. 어찌 돈 1·2 문, 밥 한두 사발에 그치겠는가. 어찌 그들에게 은덕을 베풀지 않고 핍박해 강도가 되게 하는가. 사람마다 이런 마음으로 그런 부류를 관대하게 대우하여야 관계가 친밀해질 뿐만 아니라 자신이 가지고 있는 부귀를 누릴 수 있으며, 후세에 거지가 되는 자손이 없게 되고 창녀와 배우들이 점점 적어지며 도적과 강도가 점차 희소해진다. ……하물며 예부터 거지 중에서 충신 의사가 많이 나왔고 문인 묵객이 그중에 숨어있었으니, 대충대충 봐서는 안 될 일이다. 전란으로 뿔뿔이 흩어진 이후 혁명의 초기에 걸식하며 살았던 사람이 충신 목양국〔牧羊國, 소무(蘇武)〕, 의사 채미산〔采薇山, 백이(伯夷)와 숙제(叔齊)〕이 되고 문인 묵객이 갱유(坑儒)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되지 않았는가. 무릇 머무를 집이 없고 돌아갈 나라가 없는 사람은 이렇게 빌붙어 산다. 세상의 도의에 마음 있는 사람은 마땅히 초현납사(招賢納士)의 예로 밥 한 끼에 세 번 토하고1) 감던 머리 세 번이나 꽁꽁 싸매어 나아가2) 초청하여 높여야지, 어떻게 버리는 차나 남은 밥으로 그를 업신여길 수 있겠는가.” 이어의 거지에 대한 측은지심의 정도를 알 수 있다. 여러 연고로 거지로 전락한 불운한 사람들을 동정하고 있다. 이어가 나눈 여러 가지 거지의 부류는 본질적으로 아직 타락하거나 변질되지 않은, 가난에서 비롯된 인물들이다. 그러기에 “가련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연민을 느끼면 되고 거지 입장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이해하면 된다.”라고 호소하고 있다. 이를 근거로 단도직입적으로 예부터 있어온 “가난은 비웃어도 창녀는 비웃지 않는다.”라는 전통 가치 관념을 부정하고 있다. 『거지가 좋은 일을 행하고, 황제가 중매인이 되다』는 명나라 무종(武宗) 주후조(朱厚照)가 황제 자리에 앉은 정덕(正德) 연간(1506~1521)에 재물을 하찮게 여기고 의리를 중하게 여겼던 산동 명문세가의 자제에 대한 이야기이다. 자신의 재물을 내어놓아 의로운 일을 하다가 불공정한 일로 여러 차례 소송하면서 천금의 재산을 소진한 후, 지팡이 하나와 그릇 하나만을 가지고 강호를 떠돌아다니며 걸식하는 거지로 전락했음에도 품성이 변하지 않았다. 조상과 친척에게 욕될까봐 이름을 숨기고 호를 ‘궁불파(窮不怕, 가난해도 두렵지 않다)’라 하였다. 그는 걸식으로 배를 채우며 살아가면서 항상 “도의를 행했다. 사람을 만날 때마다 도를 중얼거렸다.” “거지가 된 사람조차 그럴진대 어찌 사람이 거지보다 못할 수 있는가?” 무슨 말인가? 부르다〔규환(叫喚)〕할 때의 ‘규(叫)’, 탁발하다 뜻인 모화(募化)의 ‘화(化)’인 거지〔규화(叫化)〕를 배움을 권하다 뜻인 권교(勸敎)의 ‘교(敎)’, 변화하다의 ‘화(化)’〔거지의 다른 이름 중 하나가 ‘교화(敎化)’다〕가 되게 했다는 뜻이다. 세상 사람들에게 잘못을 고치도록 경계 하게 했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실로 꽤 높은 식견을 가진 인의덕행을 행하는 사람이 거지 즉 규화자(叫化子), 규화(叫化), 화자(化子), 교자(敎化)가 됐다는 말이다. 오래지 않아 ‘궁불파’는 북경, 하남, 산동, 산서 등지에서 협골(俠骨)로 유명한 거지, 명사가 되었다. 어느 날, 고양(高陽)성 거리에서 걸식할 때 ‘궁불파’는 어느 향신(鄕紳)의 집 문 앞에서 절하면서 “천관(天官) 어르신 내 딸 돌려주세요.”라며 애걸하고 있는 중년부인을 보았다. 며칠 동안 계속 그렇게 하자 ‘궁불파’는 측은지심이 생겨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그 부인은 묻는 사람이 거지인 것을 보고 퉤! 침을 뱉고는 떠나버렸다. 어쩔 수 없이 ‘궁불파’는 집까지 쫓아갔다. 우여곡절 끝에 자초지종을 알게 되었다. 전후는 이랬다. 그 부인에게는 용모가 수려한 16살 난 딸이 있었다. 3년 전에 남편 주(周) 씨가 세상을 떴다. 어머니와 딸은 서로 굳게 의지하며 살아갔다. 생각지도 않게 지방 불량배가 예쁜 딸을 보고 욕심이 생겼다. 그의 아버지가 살아생전에 딸을 자신에게 시집을 보내겠다고 약속했다며 거짓말하면서 자기가 데리고 가겠다고 집에 찾아왔다. 어머니가 반대하자 고발하겠다며 위협하였다. 그때 그 지방 향신이 집사를 보내 말했다. “우리 집 어르신이, 지역 깡패가 당신 딸을 거저 데려 가려고 한다는 말을 듣고는 옳지 않다고 여겨, 나에게 나서서 해결하라고 했다네. 당신이 거짓으로 매도계약을 맺어 우리 집 어르신에게 팔았다고 말하면, 그가 자연스레 망상을 버릴 것이 아니겠는가. 다시 그가 당신을 찾아오면 우리 어르신이 계약서를 현청에 보내어 그 개 같은 놈의 인대를 잘라버릴 거요. 일이 마무리 되고 나서 1년 반 정도 지나면 당신에게 딸을 돌려줄 거요. 그때 좋은 짝을 찾아 결혼시키면 되지 않겠소.” 부인은 호의를 철석같이 믿었다. 몸을 판다는 계약서에 30량 은자의 허위 가격을 쓰고는 딸을 향신의 집으로 보내면서 여러 번 감사하다며 고개를 조아렸다. 일은 뜻대로 풀리지 않았다. 3년이 지난 지금, 시비는 가라앉았고 딸도 다 자랐다. 부인이 딸을 데리고 와 사위를 맞이하고 여생을 보내려 했다. 생각지도 않게 향신이 불량한 마음이 생겨, 딸을 첩으로 삼으려 했다. 부인은 그제야 자신이 올가미에 걸려들었다는 것을 알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대로 따르려 했다. 그런데 그 향신의 부인은 고양성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질투가 심한 여인이었다. 갖은 방법과 수단으로 부인의 딸을 괴롭혔다. 부인이 딸을 데려가지 않으면 매일 가죽 회초리로 100대를 때린다는 규정을 정하여 핍박하였다. 부인이 데려 오려하자 이번에는 향신이 놓아주지 않았다. 계약서상에 허위로 기록된 30량 은자의 원금과 이자를 지불해야 가능하다고 억지 부렸다. 거금을 모을 수 없기에 어쩔 수 없이 매일 문 앞에서 절을 하면서 간청하였다. 향신이 자비심을 내서 딸을 돌려보내주도록 애걸할 심산이었다. 어제 딸이 인편으로 편지를 보내왔다. 지금까지 만 대 이상의 회초리를 맞아 온몸이 짙은 심홍색으로 변했다고, 멀쩡한 데가 한 곳도 없다고 하였다. 몸값을 지불하지 못하면 죽을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부인은 하소연할 데도 없고 갈 곳도 없었다.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대고 있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1) ‘일반삼토포(一飯三吐哺)’, 주공(周公)이 어진 사람을 구함에 있어 한 끼의 식사에 세 번이나 입에 넣은 밥을 도로 뱉고 일어나 객(客)을 맞아들였다 한다.(『사기(史記)·노주공세가(魯周公世家)』) 2) ‘일목삼악발(一沐三握髮)’, 한 번 머리를 감는 동안에 세 번이나 이를 중지하고 머리를 묶어 쥔 채로 찾아온 사람을 맞이한다. ‘어진 사람을 정성껏 대우함’을 이르는 말이다. 토포악발(吐哺握發)이라고도 한다. (『한시외전(韓詩外傳)』)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고광표 작가의 '돌하르방이 전하는 말'은 제주의 상징이자 제주문화의 대표인 돌하르방을 주인공으로 내세웁니다. 석상 '돌하르방'을 통해 '오늘 하루의 단상(斷想)'을 전합니다. 쉼 없이 달려가는 일상이지만 잠시나마 생각에 잠기는 순간이기를 원합니다. 매주 1~2회에 걸쳐 얼굴을 달리하는 돌하르방은 무슨 말을 할까요? 독자 여러분의 성원을 기다립니다./ 편집자 주 "어디서 옵데가?" (어디서 오셨습니까?) “Where are you from?” ☞ 고광표는? = 제주제일고, 홍익대 건축학과를 나와 미국 시라큐스대 건축대학원과 이탈리아 플로렌스(Pre-Arch)에서 도시/건축디자인을 전공했다. 건축, 설치미술, 회화, 조각, 공공시설디자인, 전시기획 등 다양한 분야로 활동하는 건축가이며 예술가다. 그의 작업들은 우리가 생활에서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감정에 익숙한 ‘무의식과 의식’ 그리고 ‘Shame and Guilt’ 등 현 시대적인 사회의 표현과 감정의 본질을 전달하려 하고 있다.
존재의 의미에 대해 되묻기 우리는 생각을 하며 산다. 어느 오름이라고 이름을 들으면, 벌써 그곳이 어디에 있으며, 어떻게 갈 것인가? 하고 아는 만큼 생각을 하게 된다. 만일 그 곳이 이름만 들어 알 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곳이라면 상황은 훨씬 심각하다. 장소가 외국이면 그곳에 가본 적이 없으므로, 우리는 어디? 어떤 곳인지 몰라 매우 당황하게 된다. 정보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는 분명 알지 못하는 것에 늘 긴장한다. 우리 문명은 지금껏 알지 못하는 것들을 소통시켜 온 것에 다름 아니다. 이름이라도 있으면 유추하거나 짐작을 할 수 있을 텐데, 또 그 이름 자체에서 드러나는 의미를 찾으려고 할 텐데 말이다. 그러니까 이름은 의미를 쉽게 구분하거나 찾으려는 행위의 결과다. 어떤 이름인 경우 생긴 모양이나 혹은 어떤 사람의 사건과 관련이 있었거나, 아니면 무엇인가 특별함이 있는 이유가 있을 때 명명된다. 결국 이름은 우리가 일상에서 쉽게 서로 알 수 있도록 공동 사용하기 위한 소통의 목적으로 지어졌다. 그래서 이름에는 나름대로 스스로의 역사가 있는 것이다. 한자 문화권에 사는 우리는 한글에 많은 한자를 병행해야만 이해하는 글이 많다. 이는 한글도 한자에게 많은 힘을 빌리고 있다는 말이다. 점심은 ‘點心’이라고 하여 낮 시간에 먹는 끼니를 말한다. 제주어로 알고 있는 ‘예점’이라는 말은 아마도 “짬을 내다”는 의미로 豫點(예점)일 것이다. “예점 갔다오켜(간편하게 다녀올게).” 하나만 더 말한다면 정신없게끔 부산떨면서 시끄러운 모습을 일러 ‘왕왕작작’이라고 한다. 한자어 조합으로 아마도 ‘往往灼灼’ 쯤 되겠다. “뜸하다가 갑자기 요란스런 행동을 말하는 것”이다. 헤르만 헷세의 ‘나는 별이다’라는 시는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 시에는 대상에 빗대 우리 인간의 존재 의미를 되묻는 철학이 있다. 나는 별이다 헤르만 헷세 나는 먼 지평선에 홀로 떠 있는 별이다. 그것은 세상을 살펴보며, 세상을 경멸하다가 스스로의 격정에 못 이겨 불타버리고 만다. 나는 밤중에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다. 묵은 죄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는 바다. 그러면서 새로운 죄를 쌓아가는 바다이다. 나는 당신들의 세계에서 추방되었다. 자존심 하나로 자랐고, 자존심 때문에 속았다. 나는 국토가 없는 왕이다. 나는 침묵하는 정열이다. 살림도구 없는 집에서, 살육이 없는 전쟁에서, 나의 타고난 기력이 쇠약해진다. 자신을 분명히 표현하는 언어의 본질 미술은 형상적 인식의 열매로서 오랜 연원을 갖는 예술의 한 유형이다. 그러므로 예술은 예술가 자신이 경험에서 얻은 자기 인식의 형상을 가지고 타인에게 전달하는 수단인 것이다. 거기에는 회화, 조각, 공예, 디자인, 사진, 영상, 설치미술 등 시대마다 만들어진 미술 언어가 나타난다. 미술은 예술가의 지성적인 결과이며, 그 표현에는 세계관에 바탕을 둔 미학, 이념을 머금은 시대정신 위에서 상징으로 반짝인다. 예술의 유형을 사람들은 순수예술과 대중예술로 구분한다. 이 분류에는 고귀한 왕실 사대부의 귀족예술과 속되고 하찮은 민중예술의 차별적 시선이 들어있다. 물론 둘 다 향유층이 다르겠지만 한 지역, 한 사회, 한 시대, 혹은 해당 사회 전체의 문화상징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민족성향을 보여주는 것은 민중의 미의식일 것이다. 물론 이견이 없을 수 없다. 그러나 예술은 속성이 언제나 반체제적이며, 시대 전복적이어서 기술 진보와 더불어 사람들의 인식과 목적도 달라진다. 요즘에는 예술의 개념도 모호하게 돼 전통과 현대, 시간과 공간, 인간과 물질의 관계 개념이 뒤섞이며 혼성적이고, 주체가 분명하지 않은 문화 변동과정을 겪고 있다. 시대의 문화변동은 사실 생산력의 변화에 따라 언제나 있어왔다. 지금의 시대에는 빠르게 우리의 예술이 인간의 기억과 욕망을 바탕으로 한 작품들을 자유분방하게 쏟아내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자기검열의 시대를 벗어나지 못했는지 명작이 없는 시대가 돼버렸다. 이 경우 예술의 비극일 수밖에 없다. 작품은 한 시대의 얼굴을 담고 있다. 시대가 지나면서 양식적인 스타일을 갖게 되고 어떤 패턴을 보이게 된다. 이 스타일이 도상(圖像) 언어의 의미체계가 어떤 형식을 갖추면서 전승되고 현재에 해석되거나 소통·소비되는 것을 우리는 전통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하나의 양식, 즉 정리된 패턴을 의미체계의 계보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현전 유물로 볼 때 15세기경 육지의 계회도(契會圖) 스타일이 18세기 <탐라순력도>와 19세기 <영주십경도>, <제주문자도>로 이어지는 것이 그렇다. 우리는 잠녀라는 기원의 언어가 시대의 권력관계 스펙트럼에 의해서 해녀라는 담론으로 바뀌는 과정을 알고 있다. 언어는 사물을 분류하거나 행위를 지시함으로써 만들어지는데 이 언어야말로 인간관계의 정치적 기호가 되고, 계급의 표정을 담고 있지만 그것의 의미를 바꾸는 것은 개인의 의지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합의라는 힘의 이해관계에 따라 가능하게 된다. 언어에는 그 본질을 드러내는 그림이 있다. 그 그림은 사실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그림은 개인 표현의 차이가 있겠지만 현실이나 마음을 사실적으로 담으려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잠녀와 해녀 잠녀(潛女)라는 말에는 '潛(잠길 잠)‘ 물에 잠기는 의미가 있다. '자맥질 하는 여자'가 자연스럽게 그려진다. 매우 특수한 일인 것이다. 사실적으로도 ‘물속으로 들어가서 노동하는 여자’를 말하는데 우리는 이를 ‘물질’이라고 한다. 물질은 ‘물일’의 발음상 변음이 된 것이지만 사실은 천한 행위를 나타내는 신분 비하된 의미를 띠고 있다. 잠녀라는 표현은 왕족 유배인 이건(李健,1614~1662)의 『제주풍토기(濟州風土記)』(1626)에 처음 나오는데 ‘미역 캐는 잠녀와 전복 따는 잠녀’가 있다. 그리고 허목(許穆, 1595~1682)의 『미수기언(眉叟記言)』에 ‘해처(海妻)’라는 말이 있는데 포녀(浦女), 어부(漁夫)의 처에 대한 육지식 표현이다. 잠녀라는 말의 계보를 보면, 1694년 숙종 때 제주목사로 왔던 이익태(李益泰, 1633~1704)가 지은 『지영록(知瀛錄)』에 점점 포작인이 줄어들자 미역 따는 잠녀를 전복 따는 잠녀로 대체하는 기록이 있으며, 1702년 제주목사로 부임한 병와 이형상(李衡祥,1653~1733)이 1703년에 그린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 「병담범주(屛潭泛舟)」에 ‘潛女’라는 표기와 함께 다섯 명의 잠녀가 물질하는 광경을 그림으로써 최초의 제주 풍속화가 되었다. 그리고 이형상의 「제주민폐장(濟州民弊狀)」에 ‘이 섬의 풍속은 남자가 전복을 채취하지 않고, 그 책임이 잠녀에게 있을 뿐입니다’라면서, 포작인의 역할이 잠녀에게 전가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남편(夫)은 포작(鮑作)에 곁꾼(船格) 노릇을 하고 있고, 부인(妻)은 잠녀로서 1년에 바쳐야 할 미역과 전복 때문에 그 고역(苦役)이 말테우리보다 10배나 됩니다”라고 하여 이형상은 잠녀의 비참한 처지를 지적하고 있다. 유배인 북헌(北軒) 김춘택(金春澤, 1670~1717)이 제주에 두 번 왔었다. 첫 번째는 아버지 김진구(金鎭龜)의 유배살이를 도우러 1689~1694년에 동천(東泉) 물가 적거지에서 체류했다. 두 번째는 자신마저 유배인 신분이 돼 1706~1711년까지 산지(山池)에 적거했다. 김춘택의 『북헌집(北軒集)』(1760)은 대부분 두 번째 제주 유배인 신분으로 왔던 6년 동안 쓰인 글들이다. 그가 「잠녀설(潛女說)」에서 '어떤 잠녀(潛女)라는 사람이 물에 잠겨 미역을 채취하거나 혹은 전복을 따는 것을 업으로 삼았다'라고 ‘잠녀’라는 용어가 나온다. 제주 유배인 정헌(貞軒) 조정철(趙貞喆, 1751~1831)은 정조(正祖) 시해(弑害) 사건에 연루돼 1777~1782년 2월까지 제주목과 정의현에서 유배 생활 중 지은 시문집 『정헌영해처감록(貞軒瀛海處坎錄)』 「탐라잡영(耽羅雜詠)」 기(其) 십칠(十七) 주(註)에, '잠녀(潛女)는 천(布)으로 작은 바지를 만들어서 음부(陰部)를 가리는데 제주어(俗謂)로 소중의(小中衣)라고 한다. 알몸(赤身)으로 바다 속을 들고 난다'라고 했다. 이렇듯 잠녀는 물에서 잠수물질을 하는 여성이었다. 그렇다면 해녀라는 말은 문헌에서 언제부터 등장하는 것일까? 해녀는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숙종 40년(1714) 8월 '왜관(倭館) 관문 앞에 매일 아침 촌가의 부녀자들과 해녀(海女)들은 채소와 생선을 가지고 와서 시장에서 서로 사고팔고 있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또 해녀라는 말은 존재(存齋) 위백규(魏伯珪, 1727~1798)가 1791년에 쓴 『존재전서(存齋全書)』 「금당도선유기(金塘島船遊記)」에 ‘해녀채복(海女採鰒)’이라는 말이 나온다. 이후 고종 때의 기록들과 20세기 초 일본인 지리학자 마수다 이치지(桀田一二)가 '제주 해녀(海女)의 출가지로 가장 오래된 곳은 도쿄부(東京府) 미야케지마(三宅島)로 메이지 36년(1903) 김녕의 사공 김병선(金丙先) 씨가 해녀 여러 명을 데리고 출가한 것이 시초'라고 했다. 그 무렵 일본 신문에서는 제주 ‘해녀’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이를 테면 1906년 신호신보(神戶新報), 1908년 대판매일신문(大阪每日新聞)의 보도를 비롯하여 일제강점기에서 해방 전까지 일본인들이 대거 해녀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그렇지만 분명한 점이 있는데 잠녀라는 용어는 주로 유배인이나 제주 목사, 제주 어사들에 의해서 현지에서 불렸던 말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해녀라는 용어는 왜관(倭館) 가까이에 있는 어부의 아내를 부르거나 남해안 섬에서 사는 포녀들을 부르고 있고 빈도수도 매우 적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구한말이나 일제강점기가 되면 해녀라는 말은 일본인 학자, 기자, 문필가, 조선의 문인들까지 마치 유행처럼 번져나가면서 주객이 전도되는 양상을 보인다. 해녀라는 말이 대세가 되면서 일제강점기, 해방후 제주 미술인들의 시각도 당연하게 잠녀라는 말보다는 해녀라는 말에 익숙하게 되었다. 1971년 제주도에서 관광을 위해서 잠녀라는 어감이 ‘잡녀’처럼 상스럽게 들린다는 평가로 인해 일시에 ‘해녀’라는 용어를 공식 채택하면서 언어 교란이 일어난 것이다. 만약 세계적인 시각으로 본다면 제주 잠녀가 일본 해녀(あま)와 함께 제주해녀로 세계문화유산에 공동 등재되면서 일제식민지였던 한국이 그 영향으로 해녀가 있는 것으로 세계인들이 착각하게 된다. 참으로 지식인이란 누구이고, 참된 학자가 과연 있는가라는 참담한 심정을 금할 길 없다. 사실 해녀 채택의 여파가 우리의 토착어인 잠녀(ᄌᆞᆷ녜, ᄌᆞᆷ녀)라는 용어를 사어화(死語化)시키면서 생활 속에서만 풍전등화처럼 희미하게 남아 있는 잠녀들이 숫자가 빨리 줄어들면서 머지않아 잠녀와 함께 용어마져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될 운명에 있다. 하기야 유기체는 영원한 것이 없고 그들이 만든 문화 또한 영속되지 않는다. 미술작품에서 잠녀와 해녀 미술은 때로는 나약하고 때로는 힘차다. 그 기운은 사상과 의지의 힘에 따라 결정된다. 엽해(獵海, 바릇잡이) 그림으로 가장 오래된 기록화는 1703년 김남길의 <잠녀(潛女)>이다. 이 그림은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 「병담범주(屛潭泛舟)」의 하단 오른쪽에 작게 그려졌다. 각각 동작이 다른 다섯명의 잠녀들은 물소중이를 입고 한 손에 빗창을 들고, 테왁을 의지하여 이동하거나 잠수하며 물질하는 모습을 구륵담채(鉤勒淡彩)로 그려 321년 전 제주 물질 풍속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일제강점기 서양화 화가였던 김인지(金仁志,1907~1967)는 조선미술전람회(朝鮮美術展覽會(이하 鮮展)에서 세 번을 입선했다. 1935년 제14회에 처음 입선함으로써 전라도에서 선전 입선 수상자로는 처음이었다. 1938년 제17회 선전 세 번째 입선작이 바로 <해녀>였다. 1948년 해방공간에 잠녀들을 그린 작품으로는 조병덕(趙炳悳)의 <해녀>라는 작품이 있는데 물소중이를 입고 불턱에 모여 앉아서 불을 쬐고 있는 잠녀들을 그리고 있다. 조영호(趙英豪, 1927~1989)는 일본에서 미술공부를 하여 해방이 되자 귀도(歸島) 후 여러 번 개인전을 열었다. 현재 전해 오는 조영호의 잠녀 소재 작품으로는 낭만주의 화풍으로 여인들의 공동물질 후 쉬고 있는 모습을 그린 <해녀들의 휴식>이 있다. 그리고 장리석(1916~2019)의 원시주의적인 시선은 잠녀들을 야성미 넘치는 여인들로 탄생시켰는데 대표작으로 1957년 유화로 그린 <해조음(海潮音)>이 그것이다. 고영만(1940~)의 물질을 마치고 온 잠녀들이 불턱에서 그날의 성과가 어땠는가 서로 말하는 장면을 그린 <하영 조물안디야(많이 잡을 수 있었느냐)>, 김택화(1940~2006)의 ᄉᆞ살(射殺)을 가진 <두 해녀>는 마치 비장한 전사처럼 서 있다. 청년화가 김산의 사회적 리얼리즘 시선으로 다가선 서촌 잠녀를 그린 <잠녀 김난춘>은 마치 한 화면에 음과 양의 가족사를 깊숙히 담고 있다. 야외 벽화의 운명이 단명이듯이 지금은 철거돼버렸지만, 1995년 제주항 여객선 터미널 1호 벽에 그려진 대형 벽화 <잠수도>는 리얼리즘을 구현하고 있는 작품으로 스케일면에서 압도적이었다. 기획에 미술평론가 김유정이, 주필에 박경훈이 맡아 MBC 본사에서 후원하고 탐라미술인협의회 소속 회원들로 구성된 벽화팀 10명, 특별참여에 강요배가 얼굴 그리는 것에 참여했다. 잠녀를 중앙에 배치하여 전방위적으로 잠녀들의 생활 모습을 그렸는데 주대종소(主大從小)의 배치법에 따라 마치 연환화적인 방식으로 잠녀들의 애환이 깃든 삶의 노래를 보여주는 벽화였다. 한국화가 강동언의 국전 특선작 <해녀의 꿈>은 바다로 나가기 위해 물질을 준비하는 제주 갯ᄀᆞᆺ의 잠녀를 그리고 있다. 공공미술 조각으로는 1982년 문기선, 송종원이 공동제작한 화강석 조각 <잠녀 군상>이 있는데 세 명의 잠녀들이 마치 물질의 전개과정을 보여주듯이 세 방향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임춘배의 <ᄌᆞᆷ녀>는 희망을 품고 바다로 나가는 젊고 발랄한 여성상을 보여주고 있다. 이밖에도 젊은 미술가들이 채색조각, 철망조각, 브론즈 조각의 형식들로 제주 잠녀를 상징적으로 표현해내고 있다. 조형미술은 내용과 형식, 재료에 따라 느낌, 분위기, 표현력이 다양하게 나타난다. 미학에 대한 관점 또한 미술작품이 지향하는 바를 선명하게 말해줄 수 있으며, 표현기법은 어떤 의미를 어떻게 드러낼 것인가를 결정하게 된다. 그렇지만 더욱 분명한 것은 하나의 작품은 한 시대의 상징이며, 예술가 자신의 정신세계를 보여주는 방법론이라는 사실에서 총체적인 사회상에 영향을 받고 있는 시대정신인 것이다. 대개 육지 출신 화가들이나 요즘 세대들의 작품에는 <해녀>라는 제목을 채택하는 경우가 많고, 제주 출신으로 오리지널리티를 추구하는 작가들은 <잠녀>, <ᄌᆞᆷ녀>라는 이름으로 작품을 제작하게 된다. MZ세대인 경우 해학적이고, 경쾌한 생활리듬으로 다가서는 <해녀>작품들이 많은 데 경험의 정도가 다르기 때문에 표현방법 또한 바다 물질하는 여성을 즐겁게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김유정은? = 최남단 제주 모슬포 출생이다. 제주대 미술교육과를 나와 부산대에서 예술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미술평론가(한국미술평론가협회), 제주문화연구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는 『제주의 무신도(2000)』, 『아름다운 제주 석상 동자석(2003)』, 『제주의 무덤(2007)』, 『제주 풍토와 무덤』, 『제주의 돌문화(2012)』, 『제주의 산담(2015)』, 『제주 돌담(2015)』. 『제주도 해양문화읽기(2017)』, 『제주도 동자석 연구(2020)』, 『제주도 산담연구(2021)』, 『제주도 풍토와 문화(2022)』, 『제주 돌담의 구조와 형태·미학(2022)』 등이 있다.
대원수 팽덕회, 소년시기 걸식했던 옛 일을 잊지 않았다 역사는 결국 역사다. 허식으로 덮어씌울 필요가 없다. 이 점은 현대중국의 혁명가, 군사전문가 팽덕회(彭德懷, 1898~1974)의 공명정대했던 성격과 비교하면 사실과 평가 사이에 천양지차가 존재함을 알 수 있다. 중국에서 중화인민공화국 개국 원훈, 탁월한 영도자라 평가받는 팽덕회는 자신이 젊었을 때 구걸하고 다닌 거지 출신이라는 사실을 결코 회피하지 않았다. 거지 생활은 그의 일생에 심원한 영향을 끼쳤다. 팽덕회는 다음과 같이 자술하였다 : 내가 만 10세가 됐을 때 모든 벌잇줄이 끊어져 버렸다. 정월 초하루, 이웃 부잣집에서는 연일 폭죽을 터뜨리며 즐거워하고 있었지만 우리 집에는 밥 지을 쌀 한 톨이 없었다. 둘째동생을 데리고 처음 구걸하러 나섰다. 유마탄(油麻灘)에서 공부를 가르치는 진(陳)선생님 댁을 찾아가 구걸하였다. 선생님은 초재동자(招财童子, 민간에서 재물을 불러온다고 믿는 신)이냐고 묻자 나는 그냥 거지라고 대답하였다. 내 둘째동생 팽금화(彭金華)가 그렇다고 대답했다. 밥 반 사발, 조그마한 고기 쪼가리를 얻었다. 우리 형제 둘은 황혼이 돼서야 집에 돌아갔지만 쌀 2승조차 구걸하지 못했다. 나는 배고파 혼미해졌다. 문을 들어서자마자 바닥에 쓰러졌다. 둘째동생이 오늘 형은 아무 것도 먹지 못했다고 말하자 할머니께서 나물국을 끓여 내게 먹이셨다. 정월 초하루는 그렇게 지나갔다. 초이틀은 어떻게 보내야 하는가! 할머니가 말했다. “우리 4명이 함께 나가 쌀을 구해오자.” 나는 문지방에 서서 쌀을 구걸하는 것은 업신여김을 당한다고 가지 않겠다고 하였다. 할머니가 말했다. “가지 않으면 어쩌란 말이냐! 어제 내가 가겠다고 했을 때도 네가 반대하지 않았느냐. 오늘은 네가 가지 않겠다고 하니 가족 모두 산채로 굶어죽으라는 말이냐?!” 찬바람이 살을 에듯 불어오고 눈꽃은 흩날렸다. 나이 70이 넘은 호호백발 노부인이 조그만 발에 손자 두 명(셋째동생은 4살이 채 되지 않았다)을 데리고 지팡이 짚고 비틀거리며 나섰다. 그걸 보는 나는 예리한 칼로 심장을 찌르는 듯 아픔을 참을 수 없었다. 그들이 멀리 사라지자 나는 낫을 들고 땔나무 하러 산에 올랐다. 10문(文)을 받고 땔나무를 팔아 소금 한 포와 바꿨다. 땔나무 할 때 마른 나무 그루터기에 자생한 버섯을 발견하고 캐왔다. 한 솥에 넣고 끓여 나와 아버지, 큰할아버지가 먼저 먹었다. 할머니와 동생들은 저녁이 돼서야 집에 돌아왔다. 밥 한 봉지와 쌀 3승을 구걸해 왔다. 할머니는 밥을 버섯탕에 넣고 끓인 후 큰할아버지, 아버지, 나에게 주었다. 내가 먹지 않으려 하자 할머니는 울면서 말했다. “얻어온 밥을 네가 먹지 않겠다고 하니, 먹는다면 우리 같이 살 것이고, 먹지 않는다면 우리 같이 죽자!” 그 일을 기억할 때마다 지금까지도 가슴이 아파 눈물이 난다. 오늘도 역시 그렇다. 더 이상 쓰지 않으련다! 내가 살아오면서 이런 가슴 아픈 일이 어찌 몇 백 번에 그치겠는가! …… 동년, 소년 시절에 겪은 그런 빈곤한 생활은 나를 단련시켰다. 이후 삶에 있어 나는 유년의 어려움을 추억하면서, 스스로 타락하지 않도록 채찍질하면서 가난한 인민의 생활을 잊지 않도록 노력하였다. 나는 유년의 생활 경험을 지금도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다. 이렇게 솔직하고 성실하며 감동적인 자술서를 읽으면 평탄치 못한 삶을 살았으면서도 탁월한 공적을 쌓은, 사심 없고 두려울 것이 없는 숭고한 팽덕회의 품격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사람이 있겠는가! 유감인 것은, 그러한 개국공신을 중국은 그의 일편단심에 마땅히 보답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거지보다도 못한 대우를 해, 처참한 노년을 맞게 했다. 어릴 때에 거지가 되지 않으려 했었고 사람들을 거지로 전락하지 않도록 하려고 목숨 걸고 혁명에 참여했었다. 거지에서 대원수가 되어 많은 거지를 구원했음에도 자신은 결국, 거지보다 못한 대접을 받았다. 중국 역사의 참극이요 중국의 치욕이다. 자, 이제 다시 원래 주제인 ‘제왕과 거지’로 돌아가자. 거지와 황제의 인연 : ‘거지가 좋은 일을 행하고, 황제가 중매인이 되다’ 명 왕조 개국 황제가 거지 출신이라는 역사 때문일까, 명·청 이래로 민간에는 ‘거지가 좋은 일을 행하고 황제가 중매인이 되다’라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믿을 만한 역사적 사실은 아닐지라도 참인 양 구전되고 있다. 명나라 말기 청나라 초기에 희곡가 겸 희곡이론가로 유명한 이어(李漁)은 그 민간고사를 바탕으로 통속소설1)을 썼다. 소설 첫머리 창사 「옥루춘(玉樓春)」은 이렇다 : “호한(好漢)은 여태껏 배부르기 어려웠고 가난은 거지가 되어도 해결하지 못했다. 돈을 얻어도 예전과 다름없이 건너기 위태로우니 기꺼이 도랑에 빠져 죽어 아사자 되기를 원하나니. 거지가 동전을 구하기는 쉬워도 거지 명성이 좋아지기는 어려웠어라. 누가 그 무리를 유명하게 했는가, 그저 벼슬한 이가 적은 까닭이네.” 말하는 바는 ‘명 왕조 정덕 연간에 거지 한 명의 장점’이다. 이어는 말했다 : “세상 사람들은 거지는 비천하고 더러워 높은 곳까지 발전할 수 없다고 말하는데 어찌 그들을 칭찬하는 것인가? 모르긴 해도 밥을 얻어먹는 것은 부끄럽지만 실패한 영웅이 뒷걸음질 친 것이요 실의에 빠진 호한(好漢)이 뒤처진 것이라, 다른 나쁜 짓하는 것과는 다르기에 그렇지 않을까. 세상 직업을 끝부터 거꾸로 세면 세 가지 종류의 인물이 있다. 첫 번째 하류 인물은 강도 도둑이요, 두 번째 하류 인물은 기생과 배우, 심부름꾼이요 세 번째 하류 인물이 거지 무리다. 거지는 강도질이나 도둑질은 하지 않으려고 한다. 기생과 배우, 심부름꾼을 하찮게 여기는 까닭이다. 신중하게 교류하며 직업을 골랐기에, 그렇게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세상에 돈 있는 사람은, 거지를 만나서 가련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연민을 느끼면 되고 거지 입장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이해하면 된다. 무기력한 거지를 보면 두 번째 종류의 하류 인물 부류와 비교해보면 된다. 마음을 헤아려 보자. 거지로 전락한 사람들이 기생, 배우, 심부름꾼이 되려한다면 어찌 먹을 밥을 구하지 못하고 쓸 돈을 구걸하지 못하여 그런 고뇌의 생애를 살아가겠는가. 하류의 일을 하지 않는 사람 모두는 그런 일을 못할 사람이 아니다. 하지 않는 사람일 뿐이다. 퉁소를 불었던 오상국〔伍相國, 오자서(伍子胥)〕이나 영락해 실의에 빠졌던 정원화(鄭元和)가 아니라 하겠는가. 많든 적든 간에 몇 문(文)으로 그들을 구제하면서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모욕하면 절대 안 된다. 독한 말로 욕설을 퍼부어도 안 되고 고함지르고 발길질한 음식으로 그들을 깔보면 안 된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1) 『거지가 좋은 일을 행하고 황제가 중매인이 되다(乞兒行好事,皇帝做媒人)』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컴퓨터가 정보를 처리하고 자동차가 움직이기 위해서 에너지가 필요하듯이 사람도 생명 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에너지를 얻어야 한다. 컴퓨터를 작동하는데는 발전소에서 만들어진 전기 에너지가 사용되고, 일반 자동차는 휘발유나 경유와 같은 연료를 태워서 에너지를 만들어 낸다. 이처럼 생명체도 섭취한 먹이를 연료로 사용하여 생체에 필요한 에너지를 생산한다. 사람과 자동차를 비교해 보면, 자동차는 휘발유를 연료로 사용하여 공기 중에 있는 산소와 반응시켜 에너지를 만들고, 사람은 섭취한 음식을 호흡으로 확보한 산소와 반응시켜 에너지를 얻는다. 마치 사용하는 연료만 다를 뿐 에너지를 만드는 과정이 유사하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사람과 자동차의 에너지 생산 과정에는 큰 차이가 있다. 자동차는 휘발유를 태워 에너지를 만드는데 그 과정이 한 단계로 아주 간단하다. 휘발유에 산소를 공급하고 연소시키면 폭발과 함께 열 에너지가 만들어진다. 연료의 폭발 과정의 힘을 이용하여 엔진을 돌리고 이때 강력한 열이 발산되는 것이다. 자동차의 엔진은 쇠로 되어 있기 때문에 열에 강하지만 냉각수가 부족하여 엔진에 불이 붙은 자동차도 뉴스를 통해 종종 보게 된다. 만약 생명체가 에너지를 만드는 과정이 자동차와 같이 한 단계로 일어난다면 밥을 먹을 때마다 몸에서 불이 붙을 것이고, 생명체의 구성 성분은 쇠처럼 강하지 않기 때문에 그 에너지를 견디지 못하여 타서 죽게 될 것이다. 따라서 생명체는 여러 단계를 거쳐 에너지를 만듦으로써 충격을 최소화하기 때문에 에너지를 만드는 과정이 다단계로 복잡할 수 밖에 없다. 예를 들면, 10층 빌딩 꼭대기에서 볼링공을 떨어뜨리면 강력한 에너지로 인해 공과 충돌한 바닥이 파손되겠지만, 10층에서부터 볼링공을 한 계단 한 계단씩 내려오게 하면 총 에너지의 합은 같지만 충격은 크지 않을 것이다. 또한 볼링공을 꼭대기에서 떨어뜨리듯 한 단계로 에너지를 만들게 되면, 떨어지는 볼링공이 원래 위치로 돌아갈 수 없는 것(비가역적)처럼 그 과정을 중단시키거나 속도를 조절할 수 없다. 하지만 볼링공이 계단을 차근차근 내려오듯 에너지를 만들 경우, 에너지가 충분하면 그 과정을 멈출 수 있고 다시 원래 위치로 돌아가거나 중간에 다른 층으로 나갈 수도 있다. 즉 에너지 만드는 과정이 가역적으로 조절할 수 있고 에너지가 충분하면 다른 물질로 바꿔서 저장할 수도 있는 것이다. 자동차는 멈춰 있더라도 시동을 끄지 않는 한 휘발유가 계속 타서 필요 없는 열로 소모되는 반면, 사람은 에너지가 충분할 경우 연료를 그냥 태워버리지 않고 에너지 만드는 과정을 중단하고 에너지원인 포도당을 글리코겐이나 지방으로 전환시켜 저장한다. 즉 연료인 음식을 많이 먹고 에너지를 소비하지 않으면 지방이 축적되어 살이 찌는 것이다. 여기서 생체 에너지의 실체가 무엇인지 알 필요가 있다. 자동차는 연료를 태워 열 에너지를 만드는데 비해 생명체는 연료를 다단계로 연소시키는 과정을 통해 생체 고에너지 물질인 ATP(생체 배터리)라는 것을 만든다. 일상 생활과 비교해 보면, 우리도 집에 충전이 가능한 배터리를 가지고 있는데 이 배터리를 라디오에 넣으면 소리가, 램프에 넣으면 빛이, 손 선풍기에 넣으면 바람이, 손 난로에 넣으면 열이 발생한다. 충전 배터리에 저장된 에너지를 소리, 빛, 운동 및 열 에너지로 바꿀 수 있고, 사용하여 방전되면 다시 충전하여 재사용할 수 있다. 이렇듯 생체도 음식을 연소시켜 생체 배터리인 ATP를 충전하는데 이 ATP가 체온 유지를 위해 열 에너지로, 성대에서는 소리 에너지로, 신경 세포에서는 전기 에너지로, 근육에서는 운동 에너지로 전환되어 쓰이고 나면 방전되는 것이다. 아래 그림처럼 충전이 세 눈금 되어있는 배터리를 ATP라고 한다면, 두 눈금 충전된 것은 ADP, 에너지가 한 눈금인 것은 AMP라는 물질이다. 우리가 음식(탄수화물, 지방, 단백질)을 섭취하여 다단계의 에너지 생산 과정을 거치면서 AMP→ADP→ATP로 배터리를 충전하게 되고, 이 ATP는 생체의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곳에 가서 쓰이면 ATP→ADP→AMP로 방전되고 다시 음식을 연소하여 재충전하게 된다. 우리가 집에 충전 배터리를 수백개씩 가지고 있지 않듯이 생체에서도 AMP/ADP/ATP를 합한 전체 배터리 개수가 아주 많은 것이 아니라 적정하게 일정량으로 유지된다. 완전 충전된 배터리인 ATP가 많다는 의미는 방전된 배터리인 ADP나 AMP가 적다는 것이다. 즉, 에너지를 소비하지 않으면 배터리가 방전되지 않아 빈 배터리인 ADP나 AMP가 없기 때문에 음식을 연소시켜도 충전할 빈 배터리가 부족하게 된다. 이 때는 음식을 연소시키는 과정을 중단하고 필요할 때 사용하기 위해 저장해 놓아야 한다. 사람의 주된 에너지원인 포도당이 남게 되면 글리코겐(포도당을 묶어 놓은 물질)으로 전환시켜 근육이나 간에 저장해 놓는데 간이나 근육은 공간이 한정적이기 때문에 다 차게 되면 무한히 늘어나는 공간인 피하 조직에 지방으로 전환시켜 저장하게 된다. 현대 사회에서는 넘쳐나는 먹거리로 인해 대사증후군으로 상징되는 성인병이 사회 문제로 부각되고 있다. 물론 아직도 일부 국가는 식량난에 허덕이고 있지만, 대다수의 사람이 충분한 식량을 확보하게 된 것은 인류의 역사로 보면 지극히 짧은 시간에 불과하다. 야생에서 사냥을 하고 과일을 채취하던 시대에는 먹거리를 구하지 못하면 굶어야 하기 때문에 음식을 먹을 수 있을 때 최대한 섭취하고 남는 에너지원을 체내에 저장해 놓는 것이 생존에 필수적이었다. 따라서 음식 섭취량에 비해 살이 잘 찌는 사람이 생존에 훨씬 유리했을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는 연료인 먹거리가 충분한 반면 사냥을 하기 위해 들판을 누빌 일도 없고, 에너지를 많이 소비하는 힘든 일도 잘 하지 않기 때문에 섭취한 연료에 비해 에너지 소비가 적은 경우가 많다. 그러면 혈액에 포도당이 잘 소모되지 않아 혈당이 올라가는 당뇨병의 위험도가 증가하고, 지방으로 전환되어 복부의 피하 조직에 축적되므로 복부 비만이 될 뿐만 아니라 고지혈증, 고혈압과 같은 각종 성인병에 노출되게 된다. 당뇨, 고지혈증, 고혈압 등이 동반되는 대사증후군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좀더 다뤄 볼 것이다. 비만이나 대사증후군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연료가 되는 음식 섭취를 줄이거나 에너지를 많이 소비하여 지방이 축적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일상에서 칼로리가 높은 음식의 섭취를 줄이고, 적절한 운동을 통해 에너지를 소비해야 한다. 우리 주위에도 똑같이 먹어도 전혀 살이 찌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물만 먹어도 살로 간다는 사람도 있다. 물론 물만 마셔서는 살이 찔리 없지만 기초대사량에서 차이가 나는 경우가 많다. 기초대사량은 생명 유지에 필요한 최소의 열량을 말하는데, 우리가 운동을 하지 않더라도 숨 쉬는데, 체온을 유지하는데, 심장이 뛰는데도 에너지가 소비된다. 기초대사량이 높은 사람은 기본적인 에너지 소비가 많아 살이 덜 찌는 것이다. 기초대사량을 높이려면 근육량을 늘리는 것이 중요한데 이를 위해서는 적절한 근육 운동과 단백질 섭취가 필요하다. 근육은 우리 몸에서 에너지를 가장 많이 소비하는 곳인데다가 근육량이 늘어나면 포도당을 묶어놓은 글리코겐을 저장할 수 있는 공간이 커지기 때문에 혈당 조절에도 유리하고 지방으로의 축적도 줄일 수 있다. 건강을 유지하는데 특별한 방법이라는 것은 없다. 타고난 체질은 어찌할 수 없기 때문에 적절한 식생활과 운동을 통해 조절해야 한다. 정제된 탄수화물(당, 흰밥, 밀가루)과 지방의 섭취를 줄이고, 단백질과 식이섬유를 충분히 섭취하면서 운동을 하는데 근육 운동뿐만 아니라 에너지를 효과적으로 소비할 수 있는 유산소 운동(걷기, 가벼운 달리기, 자전거 타기, 수영 등)을 병행하는 것이 좋겠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 김동청 교수는? = 연세대 생화학과를 졸업했다. 연세대 대학원 생화학과 이학석사 및 서울대 대학원 농화학과 농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대상㈜ 중앙연구소 선임연구원, 순천제일대 조교수, 영국 캠브리지대 방문연구원, 성균관대 기초과학연구소 연구교수를 거쳐 현재 청운대 인천캠퍼스 화학생명공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식품기술사 자격도 갖고 있다.
새해를 맞아 새로운 연재를 시작합니다. 고광표 작가의 '돌하르방이 전하는 말'입니다. 제주의 상징이자 제주문화의 대표격이나 다름 없는 석상 '돌하르방'을 통해 '오늘 하루의 단상(斷想)'을 전합니다. 쉼 없이 달려가는 일상이지만 잠시나마 생각에 잠기는 순간이기를 원합니다. 매주 1~2회에 걸쳐 얼굴을 달리하는 돌하르방은 무슨 말을 할까요? 독자 여러분의 성원을 기다립니다./ 편집자 주 "왕 봥 갑서" (와서 보고 가세요) “You can come look around and then leave.” ☞ 고광표는? = 제주제일고, 홍익대 건축학과를 나와 미국 시라큐스대 건축대학원과 이탈리아 플로렌스(Pre-Arch)에서 도시/건축디자인을 전공했다. 건축, 설치미술, 회화, 조각, 공공시설디자인, 전시기획 등 다양한 분야로 활동하는 건축가이며 예술가다. 그의 작업들은 우리가 생활에서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감정에 익숙한 ‘무의식과 의식’ 그리고 ‘Shame and Guilt’ 등 현 시대적인 사회의 표현과 감정의 본질을 전달하려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