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읍과 관음사 사이 난대림(暖帶林) 등반길 옆에 백화초본(白花草本)과 적화초(赤花草)가 웃음을 띠우고 있으니 아마 무심(無心)한 인사(人士)들은 관심사가 아니겠지만 곳곳에 상율(桑栗) 송묘(松苗) 등을 조림하거나 가용(家用)으로 재배한 곳도 있다. 고조(高燥)한 곳에는 우마(牛馬)가 함부로 내왕(來往)하야 수목이 볼 것이 없고 고사리만이 전 세력으로 군생(群生)하였고 고산접류(高山蜨類)가 분분비거(紛紛 飛去)하니 참 유구장대(悠久長大)한 기분이다. 계곡지(溪谷地)에는 우마(牛馬)의 침범을 면하야 근근(僅僅) 수목이 잔존하니 백화(白花)가 눈을 끌고 있다. 그러나 제주읍 관음사 사이는 초부(樵夫)의 남벌(濫伐)과 우마(牛馬)의 목축이 없었다면 대삼림(大森林)을 이루었겠지만 지금은 유감이지만 그 장관을 볼 수 없다. ▲ 개미목 관음사 개미목 고대밧 사이 온대림(溫帶林) 관음사 뒷편 수십정간(數十町間)은 아직 우마가 사람을 두려워도 안하고 그리워도 안하고 제멋대로 구식(求食)이라는 본능성(本能性)만을 발휘하고 있다. 개미목 못 미쳐서 부터는 밀림이 되기 시작하니 임간(林間)은 일중 불서(日中 不署)하며 일중상
제주도는 조선반도에 속한 3300여 도서 중 최대한 섬으로 그 면적은 120여만리 인구는 23만을 포용(包容)한 조선의 대도(大島)다. 그 위치는 조선의 다도해라 이름 하는 남해에서 서남으로 뚝 떨어져 잇는 고도(孤島)로써 목포(木浦)에서 남방 80리 부산(釜山)에서 서남으로 170리 장기항(長崎港)에서 동북 100리를 상거(相距)하였으니 실로 반도와 구주(九州)간의 점이적(漸移的) 중간성을 띈 위치라 할 수 있다. 다시 서남으로는 동지나해(東支那海)를 우(偶)하야 남지(南至)의 상해(上海)를 멀지 아니 상거(相距)하고 남로는 태평양의 흑조(黑潮)의 일파(一派)가 이 섬의 남쪽에서 다시 서조선(西朝鮮) 해류 대마해류(對馬海流)로 갈라지는 교류에선 한 대양도(大洋島)이다. 본도는 전부 화산암(火山岩)으로 덮여 타원형(楕圓形)의 화산도(火山島)[지질시대 제3기에 분출한 사화산(死火山)이나 유사(有史) 이후 부분적 활동의 기록이 유함)]로 중앙에서 조금 서남에 치우처서 주봉(主蜂) 한라산(해발1950미터) 왕좌(王座)와 같이 솟아 있다. 이는 세계에서 그 존재를 드물게 보는 표식적(標式的) 아스피테(Aaspite)형의 화산에 속한
▲ 박영효 박영효(朴泳孝, 1861-1939)는 구한말 근대적 개혁을 추구하며 갑신정변과 갑오개혁의 주체인 개화사상가로 철종의 부마이며 고종의 친척 매제이다. 정변으로 일본에서 두 번의 망명생활을 보냈으며 1907년, 귀국 후 제주도로 유배되어 유배생활을 했다. 박영효는 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평가가 상존하는 인물이다. 즉 박영효는 반조선의 근대화에 이바지한 공을 평가하는 견해, 예를 들면 김옥균 등 개화파가 청나라에 바치던 조공과 문벌제도의 폐지 등, 정치 개혁을 시도했다는 점을 들어 근대화의 선각자로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공개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모두 선정되어 지탄받고 있다. 구한말 최대 문벌의 집안에서 태어났으면서도 사람됨이 소탈해 신분 상하를 막론하고 어울리기를 즐겼다는 박영효는 사실 제주 최초의 자발적 유배인이라고 할 수 있다. 박영효는 제주도에서 일년간의 유배기간이 끝난 후에도 곧바로 상경하지 않고 제주에 정착하여 농사를 지으며 제주도민과의 활발한 교류를 통해 제주도의 농업개량, 교육(여성
본도의 산업장려 시책상 도민의 생활향상과 함께 일용품의 반입이 격증하고 있는데 비해 섬 생산품의 도외(島外) 반출(搬出)액수가 그에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에 자연히 도민생활은 위협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면화와 같이 가격이 높은 생산품을 낸다는 것은 장래 도민의 복리증진을 위해서 적극 장려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된다(미개의 보고 제주도, 1924). 제주도의 면화재배기록은 약 450년 전 서남부지역 1000여ha에 재배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1913년 이전에는 동양면(東洋棉)이라는 재래면(在來棉)이 주로 재배되었으나 1905년 육지면(陸地棉, 미국면)이 처음 도입되어 식민정책에 의해 육지면을 적극 보급시킨 결과 수량 및 품질면에서 육지면이 재래종보다 질적으로도 우수하였고 판매 면에서도 유리하였기 때문에 점차 재배면적이 확대되었다. 주요품종으로는 '113-4호', '목포380호'가 대표적이다. 1933년 면화 10개년 생산계획에 의해 재배면적 확장과 농법의 개선에 따른 단위 면적 당 생산량 증가를 꾀하여 실제로 소득 면에서 대두, 조 등에 비해 월등한 우위를 점하게 된다. 이 결과 전통적
한라산 삼림대의 수종은 표고자목(資木)인 자작나무, 졸참나무의 번식으로 보충되고 바람에 꺽이고 난벌(亂伐)되는 수목에 자연 발생하는 표고는 극히 우수해서 본래 원주민들은 이것을 재취해 햇볕에 말려 시장에 반출하곤 했다. 제주유일의 특산품으로서 유망(有望)하다는 데 착안(着眼), 1905년 이들에 의해 창립된 동영사(東瀛社)에 의해 착수된 것을 효시로 1939년 11월에는 이 사업에 노련한 田中長嶺 등을 초빙, 여러 가지 어려움과 싸우면서 시험을 거친 결과 매우 유망하다는 것을 확인하였다(미개의 보고 제주도, 1924). 표고버섯(Lentinus edodes)은 민주름 버섯목 송이과에 속하는 식용버섯이다. 야생에서는 동남아지역의 참나무 등 활엽수의 고사목에서 주로 발생한다. 인공재배의 역사는 10세기경 중국에서부터 시작되어 현재는 한국을 비롯하여, 일본, 중국 등 동양에서 주로 재배되고 있다. Lentinus속 버섯은 전 세계적으로 분포하고 수십종이 기록되어 있으며, 표고와 잣버섯이 인공 재배되고 있다. 표고버섯은 항암성분인 렌티난을 함유하고 있으며 항바이러스 작용, 혈압 강하작용도 있다. 표고버섯은 색깔, 형태, 육질 크기에
▲ 1946년 미군정의 미곡수집정책에 의해 미곡을 공출하고 있는 장면이다. 1946년 말 제주도 총인구는 271,379명으로 이중 남자가 127,701명이고 여자는 143,678명이다. 리스트의 경제발전 단계로 제2단계인 농목(農牧)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기간산업이라고 할 수 있는 농업과 수산업의 생산관계도 원시적 자급자족의 범위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 종래는 총인구의 3분의 일에 달하는 일본에 출가자에 의한 환송금 등이 다액(多額)에 달하여 도민의 경제력은 강인(强忍)하다(조선은행 조사부, 1948, 조선경제연보 제주도 편). 해방 직후인 1945년과 1946년간 제주지역 농업생산량은 급격히 감소했다. 이는 해방 이후 농업생산 기반이 불안정하게 흔들렸음을 말해주는 것으로 이로 인해 양곡 부족 사태가 발생하고 양곡 가격이 폭등하는 사태로 연결된다. 1947년 10월 기준 제주도내 식량 여유농가는 10%, 자급자족 50%, 부족이 40%라고 조사되었다. 타도로 부터 반입되어온 식량을 보면 1946년 현재 미곡 2만4901석, 소맥 1만4982석, 소맥분 5354석 대맥 4648석, 옥수수 159석, 전분 23석 총 5만
양봉(養蜂)은 인류가 오래전부터 길들인 벌을 이용하여 채밀(採蜜)해오던 것으로 동․서양 모두에서 성행하였다. 한국에서의 양봉의 기원은 고구려 동명성왕 때이며 원산지 인도로부터 중국을 거쳐 재래종 벌인 동양꿀벌이 들어왔다고 한다. 이어 고구려·백제·신라의 순으로 양봉이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이전인 것으로 추측된다. 구석기시대부터 사냥을 하거나 나무열매를 따다가 바위 틈 등에서 자연의 꿀을 발견하게 되고 농경시대에 이르러서 사유재산의 개념이 싹터서 꿀벌의 소유와 양봉으로 발전한 것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643년 백제의 태자 여풍에 의해, 현재 일본에서 키우고 있는 벌이 전해졌다고 한다. 꿀이 주요 수출품으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한국에서 자생한 것으로 짐작되는 양봉은 계속 발전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조선시대에도 꿀은 중요하게 취급되었는데 특히 고려시대에는 유밀과(油蜜果)를 만들어 먹는 등 용도가 다양했으며 소비량도 증가하였다. 공급량을 훨씬 넘어서는 꿀의 수요로 1192년(명종 22년)에는 궁중 이외의 일반 가정이나 사찰에서는 사용하지 못하도록 금령(禁令)이 내려지기도 하였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고등어 산지(山地)를 전남 제주도(全南 濟州島)와 경남 북강원(慶南 北江原) 함남북 등지(咸南北 等地)라 소개(紹介)하엿슴을 볼진대 약 사백년 전부터 고등어 어군(魚群)이 전남 제주도(全南 濟州島)에서 동방 부산(東方 釜山)을 지나 동해(東海)로 향(向)하얏엇든 것이오(동아일보, 1939년 7월 5일). 고등어의 치어(稚魚) 오,육촌(寸)짜리는 멸치와 함께 섞어 흘러들어 오는데 초기에는 그 수가 적지만 팔, 구월 경에는 그 양이 많아져 도리어 멸치가 소량으로 섞이게 될 정도도 된다. 성어기(成魚期)는 가을 구월 경부터 봄 이월경까지 어화(漁火)로 밝히는 외줄낚시(一本釣)로 어획된다. 이 경우는 전갱이나 갈치와 혼획(混獲)되는 일이 많다. 도민들은 날것으로 판매하는 외에 염장(鹽藏)을 하기도 한다(한국수산지 권5 제주도, 1905). 본도는 대만(臺灣) 남서쪽에서 흘러내린 난류(暖流)가 오스미(大隅)해협 서쪽에서, 본류(本流)에서 분리된 지류(支流)가 연안을 씻고 쓰시마(對馬)해협을 향해 흘러가는 곳으로 부터 난류를 따라 참치나 가다랭이 등의 난류어족을 우리 연안으로 유치해 온다. 또 삼치 고등어 멸치와 같이 난류(暖流)를 좋아하
제주도 한나산(濟州島 漢拏山)은 산마디(産馬地)와 해녀(海女)로만 유명한 곳이 아니라 식물학(植物學)상으로 보아도 유명하야 조선에서 생산하는 각종식물이 이천 오백종 중 천오백종까지는 제주도에서 생산하는 것이며 그보다도 더 유명한 것은 사화산인 한나산의 분화산 전형(噴火山 典型)으로 전형이 삼백오십종이나 잇슴으로 지질학(地質學)상 표본으로도 동양은 차차하고 세계에서 보기 드문 것이라는데...(동아일보 1928년 7월 24일). 고려시대 이전 한라산의 산림은 소유자가 불명확해 아무나 임산물을 채취할 수 있음은 물론이고 오히려 농경이나 우마의 왕래에 지장을 주는 정도로 취급되었다. 그리고 한라산의 삼림은 농경지 확보, 방목지 조성 등을 목적으로 인위적인 화입(火入)에 의하여 계속 파괴되었다. 특히 고려시대 제주가 원나라의 직할지(直轄地)가 되었을 당시 원나라에 의한 대규모 방목지의 조성은 더 많은 삼림파괴를 초래하였다. 고려 말엽에 이르러 일부 세도가들에 의해 삼림이 독점되어 서민들의 어렵게 되자 1325년 사점금지령(私占禁止令)을 내렸는데 이 사적금지령은 조선 말엽까지 지속되었다. 1908년 삼림법(森林法)에 의하여 비로소 사유화가 인정되었다. 그러나 삼림법
조선에 감귤이 재배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런데 본도(本島)는 예부터 이의 재배가 성행하여 제주십경(濟州十景)의 하나로 일거될 정도이다. 그 종류도 아주 많아 십이종 이상이나 되며 그 전래(傳來)의 역사에 대해서는 확실한 고증(考證)의 재료가 없으므로 그 연대(年代)를 명확히 알 수 없지만 본도의 문헌(文獻)에 비추어 보건대 오백년 이전부터 재배되고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종래의 종류로 영리적(營利的) 재배가치가 있는 것은 하나 둘 있지만 내지(內地)의 우량종 온주(溫州), 네블, 하밀감(夏蜜柑)이 처음 재배된 것은 십삼년 전 미네모(某), 박영효(朴永孝) 양씨에 의해 시도되고 그 후 도(島)기술원이 조사․ 연구 결과 좋은 성적을 올려 유리하다는 것을 확인해서 계획을 수립, 대정(大正) 구년(1920년)부터 매년 칠, 팔천본의 우량종을 내지(內地)로부터 끌어 들어서 재배하고 있는데, 성적이 매우 양호하다. 현재 일단보(段步) 이상의 우량종 재배자는 삼명이며 성내(城內)의 홍(洪)씨는 일단(段)오묘보(畝步)로 순익(純益) 삼백엔을 올리고 있다. 그런데 현재 내지로부터 조선(朝鮮)에 반입(搬入)되는 감귤(柑橘)은 농
▲ 조선은행 정 100원권. 발행일 1943.7.1. 해방 후 현재에 있어 제주지역의 가장 큰 문제는 밀수입, 해방 후 수입된 물품은 실로 4억에 이른다. 경찰당국에서는 근래 이를 근절시키고자 힘쓰고 있으며 얼마 전에도 700만원 어치를 실은 밀선을 체포. 그러나 주민의 말을 들으면 제주도에 들어오는 물자는 간상배의 활동이라기보다는 일본을 위시한 각지에서 돌아오는 동포들의 물건이 태반. 수십년간 고혈을 기울여 저축한 재산을 그대로 버릴 수 없는 재일동포들은 할일 없이 물건을 사가지고 외국관헌의 눈을 속여 가며 본국을 찾아 우선 제주도로 들어오는 것. 현재 법령이 그들의 재산반입을 아직 인정하지 않은 이때에 그들이 이와 같은 밀수입을 하게 됨은 막을 도리가 없는 일이다(자유신문 1946년 12월 19일). 해방 이후 제주지역 경제는 일본과의 ‘단절’로 인해 상당한 혼란을 겪었다. 이로 인해 사회전체의 생산활동이 마비되고 생활필수품 품귀현상이 심화되자 이를 타개하려는 긴급대책으로 해외로부터 물자 도입이 시도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과의 ‘무허가(無許可) 사무역(私貿易)’ 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즉, 국내 물자가
해녀(海女)로 유명하야 장가만 들면 사내는 놀고먹는다는 남해의 거도(巨島) 제주도(濟州島)는 이번의 국세조사 결과 인구 이십만 팔천 삼백 이십오인 중 남자는 구만 육천 이백 십사인에 불과한데 여자는 십일만 이천 일백 십일인으로 넘치기가 일만 오천 팔백 구십칠이다(동아일보 1930년 12월 19일). 1911년 제주지역은 총호수 3만7130호, 총인구는 15만6778명이었다. 이 중 남자는 8만3801명, 여자는 7만2977명이다. 그러나 1912년에는 총인구 17만568명으로 이 중 남자는 8만4112명이며 여자는 8만6456명으로 여초(女招)현상이 본격적으로 나타난다(이 대목에서 1911년 인구조사 결과치의 신뢰성에 의문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30년이 흐른 1941년 제주지역 총인구는 21만6081명으로 30년간 5만9303명이 증가했으나 1946년에는 총인구가 27만1379명으로 불과 5년 만에 5만5298명이 증가했다. 이는 해방 이후 일본 등 타지에서 거주하다 고향으로 귀환한 제주도민이 급격히 늘어났기 때문이다(해방 이후 추자도가 제주도로 편입되는 등 행정구역 조정이 부분적 원인이라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다). 45년 동안 제주지역 인구는 총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