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간 꼬닥꼬닥 걸어왔다. 교사, 화가, 해양경찰, 회사원, 주부 등 각기 다른 일을 하며 제주에 사는 사람들…. 그들이 그림책을 통해 제주를, 제주의 문화를 알리고 있다. ◇ 그림책으로 소통하며 20년간 제주문화 알려 "저희는 제주 연구자는 아니었지만 (중략) 거창하게 말하자면 결과적으로 제주 연구자가 된 셈이죠." 지난 5일 오후 제주한라도서관 1층 전시실에서 만난 제주그림책연구회 초대 회장이자 퇴직 교사인 이현미씨는 흘러간 20년을 돌이켜보며 이같이 말했다. '꼬닥꼬닥 걸어 온 제주그림책 이야기' 창립 20주년 기념 전시회가 열린 장소는 그간의 이야기를 풀어놓기에 적당한 장소였다. 2003년 처음 '그림책'을 매개로 이들이 모였을 때만 해도 '제주'라는 주제로 그림책을 낼 생각은 없었다고 한다. 그저 각기 다른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1년간 공통의 관심사인 그림책의 매력에 빠져들었을 뿐이었다. 그러다 '무얼 그리고 무얼 써야 할까…' 고민 끝에 나온 결과물이 바로 이듬해인 2004년에 펴낸 '제주가나다'였다. 기역(ㄱ)부터 히읗(ㅎ)까지 14개의 자음으로 제주를 풀어낸 그림책이다. 제주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 제주를 사랑하는 사람들이기에 어찌보면 너무나
"요긴하게 쓰고 있었는데 날벼락 맞은 기분입니다. 공지 바로 다음날에 (할인 혜택이) 중단되는 게 말이 됩니까?" 제주지역 화폐 탐나는전의 현장할인이 중단된 지 열흘째. 제주도와 도의회간 예산갈등이 불러온 지역화폐 공중분해 사태에 도민들의 불만이 극에 달하고 있다. 한때 제주도 관련 부서와 탐나는전 고객센터에 환불 및 재개시점 문의가 빗발치기도 했다. 탐나는전 가맹점에 한해 매출액 기준별로 적용됐던 5~10% 현장할인이 지난달 23일부로 하루 새 갑자기 사라진 것이다. 갑자기 사라진 혜택 ... "오락가락 할인, 언제 재개?" 제주도민 김모(44)씨는 "아이들 학원비를 결제하려고 탐나는전 애플리케이션에 접속했는데, 전날까지도 없었던 할인중단 공지가 올라온 것을 발견했다. 그것도 바로 다음날 중단된다고 했다"면서 "바로 아이들 학원에 전화해서 몇 개월치 선불 결제가 가능한지부터 물었다. 일단 급한 불은 껐지만 언제 재개될 지 몰라 불안한 마음이 있다. 학원비 결제만 해도 돈이 절약됐는데 아쉽다"고 토로했다. 평소 외식을 탐나는전 가맹점 위주로 했다는 또다른 도민 김모(46)씨도 "자주가는 식당 몇 곳이 탐나는전 10% 할인 가맹점이라 최근에 충전했는데 괜히 했
설문대할망 이야기에서 가장 큰 논쟁거리는 바로 그의 '죽음'(?)이다. 설문대할망의 죽음에 대해선 전혀 다른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해진다. 설문대할망이 자식인 오백명의 아들(일명 '오백장군')을 위해 죽을 쑤다가 죽 솥에 빠져 죽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한라산 산정호수인 '물장오리'의 물이 얼마나 깊은지 알아보려고 들어갔다가 그곳에 빠져 사라졌다는 이야기 등이다. 신(神)의 죽음에 관한 전혀 다른 이야기가 전해오는 건 왜일까. ◇ 설문대할망 이야기 조작 논란 제주신화와 전설을 연구한 고(故) 현용준 제주대 교수는 자신의 저서 '제주도 사람들의 삶'(2009, 민속원)을 통해 그 원인을 밝히고 있다. 사건의 발단은 지금으로부터 수십 년 전인 195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현 교수에 따르면 민속학자인 A씨는 과거 제보를 통해 전해 들은 이야기를 정리해 1959년 7월 제주관광안내소 출판부 발행으로 책을 냈다. 책에는 '옛날에 한 할머니가 아들 오백형제를 데리고 거기에 살고 있었다'로 시작하는 일명 오백장군 이야기가 담겼다. 하지만 A씨는 5년 뒤인 1964년 5월 개정판을 냈는데, 문제는 같은 이야기를 '옛날에 설문대할머니가 아들 오백을 거느리고 살았다'로 바꿔
2020년 9월 13일 제주 동남부 지역인 표선면에 갑작스럽게 폭우가 쏟아졌다. 낮 시간대 1시간여 동안 40㎜가량 퍼부은 폭우로 도로에 물이 차 차량들이 한때 고립되고 주택 일부가 침수됐다. 반면 같은 날 한라산 동북쪽 월정리에는 아예 비가 내리지 않았고 서부지역인 고산리에도 1.7㎜의 약한 비만 내렸다. 2017년 7월 5일에는 동부지역(난산)에 시간당 90㎜가량이 비가 내려 하루 누적 강수량이 244㎜를 기록했다. 같은 날 제주 북부와 서부지역에는 비가 전혀 내리지 않거나 약한 비만 내렸다. 제주 섬은 가로 길이가 70㎞가량이고 세로로는 30여㎞ 거리쯤 되나 지역별 강수량 편차는 이처럼 크게 나타난다. 특히 제주 동남부 지역에는 5월 말부터 더위가 채 가시기 전인 9월 중순까지 일부 지역에 국한돼 단시간에 기습적인 폭우가 종종 쏟아진다. 기상청에 따르면 2000∼2018년 6∼9월 시간당 20㎜ 이상 강수 횟수 분석 결과 제주 남부(서귀포 동지역)에서는 6월 22회, 7월 34회, 8월 64회, 9월 38회 등 총 158회나 많은 비가 쏟아졌다. 동부지역(성산)에서도 6월 20회, 7월 37회, 8월 67회, 9월 31회 등 총 155회 가량 강한 비를
제주를 만든 여신(女神) 설문대할망. 제주의 1만8000 신들의 이야기 중에서도 거대한 스케일과 블록버스터급 흥미진진한 소재를 자랑한다.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하는 구전문학의 특성상 진위를 따지는 건 소모적인 논쟁일 수 있지만 그런데도 설문대할망 이야기는 여전히 논쟁적이다. 잘 아는 것 같아도 잘 모르는 설문대할망을 둘러싼 흥미로운 논쟁거리를 2차례에 걸쳐 살펴본다. ◇ 제주를 만든 창조의 여신 '설문대' 설문대할망은 커다란 거인의 모습을 한 여신이다. 바다 깊은 곳도 무릎까지밖에 차지 않을 정도로 크고 힘도 세서 까마득히 머나먼 옛날 하늘과 땅을 나누고, 이어 흙으로 제주도를 만들었다고 한다. 치맛자락에 흙을 퍼 담아다가 한라산을 만들었는데, 이때 치마의 터진 구멍 사이로 흘린 흙이 제주 섬 곳곳에 있는 360여개의 오름이 됐다고 전해진다. 도대체 얼마나 크길래 한라산과 오름 등 제주 섬을 만들었다는 것일까. 실제 설문대할망의 키를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 있는데 '한라산을 베고 누우면 다리가 제주 앞바다 관탈섬에 걸쳤다'는 구절이다. 인터넷 지도를 통해 거리를 재보면 한라산 정상에서 소관탈섬까지는 약 40㎞, 대관탈섬까지는 약 43㎞ 정도다. 설문대할망
봄이 되면 드넓은 한라산 자락 곶자왈 어디서든 쉽게 만날 수 있는 게 고사리다. 4월 중순에서 5월 중순에 이르는 한 달 남짓한 기간 제주 토박이는 물론 이주민들도 고사리 꺾으러 산과 들판으로 향한다. 많은 사람이 재미 삼아 또는 용돈벌이 등 목적으로 이들 대열에 합류하곤 한다. 하지만 단순히 이러한 이유만으로 고사리 열풍을 설명하고, 이해한다는 건 부족함이 없지 않다. 제주 사람들에게 고사리는 어떤 의미일까. ◇ 제주의 고사리철…욕심은 부리지 않았다 '부슬부슬 비가 오길래/ 홀로 숲으로 나갔어/ 그대와 늘 함께 걷던 길/ 놀랍게 달라 보여/ 그토록 찾아봐도 안 보이더니/ 어느새 소리 없이 솟아 올라온 고사리들/ 당신을 보내고 난 뒤/ 이렇게 훌쩍 자랐네….' 제주에 이주해 사는 뮤지션 장필순의 곡 '고사리 장마'의 첫 소절이다. 어느덧 제주에 고사리철이 돌아왔다. 고사리를 꺾으며 제주의 봄을 만끽하는 한라산 청정 고사리 축제가 한창이다. 노래 제목처럼 고사리 장마라 불리는 짧은 봄장마가 시작될 무렵이면 싹을 틔운 고사리들이 조그만 얼굴을 들고 경쟁하듯 솟아오른다. 4월 중순을 전후해 짧게 반복되는 비 오는 날씨. 적당히 햇빛을 가려주는 한라산 곶자왈의 나무
지금까지 한라산에 오른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1974년부터 한라산 탐방객 수가 조사된 이후 올해로 50년째에 접어들면서 지난 3월까지 2690만명이 넘는 많은 사람이 한라산을 찾았다. 봄·여름·가을·겨울 할 것 없이 한라산은 독특한 아름다움을 뽐내며 계절마다 축제의 무대로 변신한다. 급증하는 등반객으로 인해 한라산 훼손이 심각해지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 사시사철 축제의 무대 한라산 한라산의 봄은 천천히 느리게 온다. 해발 1950m 남한 최고봉 한라산 정상엔 간혹 봄이 되도록 흰 눈이 덮인 풍경을 볼 수 있다. 옛날엔 초여름인 음력 5월까지도 한라산에 잔설이 남았다는 기록이 남아있을 정도다. 노란 유채꽃과 분홍빛 벚꽃, 초록초록 푸르게 돋아나는 청보리 너머로 한라산 백록담에 하얀 눈이 쌓인 모습은 이질적이면서도 신비로운 아름다움을 준다. 그래서 '녹담만설'(鹿潭晩雪)을 제주의 뛰어난 경관 10가지를 일컫는 '영주십경'(瀛州十景)으로 꼽는다. 여기서 '만설'은 눈이 가득 쌓인 모습을 뜻하는 만설(滿雪)이 아닌 때늦은 눈을 뜻하는 만설(晩雪)이다. 한라산 고지대에 비로소 봄을 알리는 건 무얼까. 털진달래다. 4월 중하순이면 해발 1400m 이상 고지대에서
제주4·3이 어느덧 75년을 맞았다. 따스한 봄기운이 물씬 풍기는 4월이지만 제주는 여전히 4·3의 상처가 아물지 않고 있다. 4·3의 아픔을 온몸으로 간직한 제주. 그중에서도 한라산은 4·3의 역사를 고스란히 품고 있다. 70여년 전 이념의 충돌 속에 전쟁터로 변한 한라산의 과거와 현재를 들여다본다. ◇ 전쟁터로 변한 한라산 「오늘도 잠들지 않는 남도 한라산 그 아름다운 제주도의 신혼여행지들은 모두 우리가 묵념해야 할 학살의 장소이다. 그곳에 뜬 별들은 여전히 눈부시고 그곳에 핀 유채꽃들은 여전히 아름답다. 그러나 그 별들과 꽃들은 모두 칼날을 물고 잠들어 있다.」 (이산하 시집 '한라산' 서시 중에서)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한라산 기슭 오름마다 봉화가 붉게 타올랐다. '남한 단독정부 수립 반대'와 '서북청년단 추방'을 외치며 남로당 제주도위원회가 주도한 무장봉기가 시작된 것이다. 350명의 무장대는 12개 경찰지서와 서북청년회(서청) 등 우익단체 단원의 집을 지목해 습격했다. 1년 전 3·1절 기념식에 참석했던 시위군중을 향해 경찰이 총을 쏜 '3·1절 발포사건', 발포한 경관의 처벌을 요구하며 벌인 '민·관 총파업', 파업주동자 색출 과정에서
평화롭던 제주 섬에 불어닥친 4.3의 광풍이 제주 전역을 휩쓴 지 7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간 4.3의 정의로운 해결을 다양한 움직임이 있었다. 진상 규명에 이어 국가 보상금 지급, 재심 재판을 통해 현재까지 1191여명이 무죄를 선고받고 명예를 회복했다. 이제 제주4.3은 화해와 상생으로 국가폭력을 극복, 전 세계 과거사 사건 중 모범적인 해결 사례로 꼽히고 있다. 그럼에도 '완전한 해결'까지는 갈 길이 멀다. 아직도 의도를 알 수 없는 명예훼손과 역사왜곡 발언이 무분별하게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에 75년 통한의 세월을 관통하는 4.3기록물의 중요성도 커지고 있다. 국가폭력의 직접적인 기록과 함께 진상규명과 화해, 국가의 보상으로 이어진 과정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제주도인터넷신문기자협회(미디어제주·제이누리·제주의소리·제주투데이·헤드라인제주)는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와 공동으로 75년 간의 기록과 역사에서 제주4.3이 세계에 전하는 진정한 평화를 짚어본다. /편집자주 제주4.3의 기록들을 우리나라의 기억을 넘어 '세계의 기억(Memory of the World)'인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남기기 위한 여정이 시작됐다. 제주4.3기록물은 단순히 4.3
평화롭던 제주 섬에 불어닥친 4.3의 광풍이 제주 전역을 휩쓴 지 7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간 4.3의 정의로운 해결을 다양한 움직임이 있었다. 진상 규명에 이어 국가 보상금 지급, 재심 재판을 통해 현재까지 1191여명이 무죄를 선고받고 명예를 회복했다. 이제 제주4.3은 화해와 상생으로 국가폭력을 극복, 전 세계 과거사 사건 중 모범적인 해결 사례로 꼽히고 있다. 그럼에도 '완전한 해결'까지는 갈 길이 멀다. 아직도 의도를 알 수 없는 명예훼손과 역사왜곡 발언이 무분별하게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에 75년 통한의 세월을 관통하는 4.3기록물의 중요성도 커지고 있다. 국가폭력의 직접적인 기록과 함께 진상규명과 화해, 국가의 보상으로 이어진 과정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제주도인터넷신문기자협회(미디어제주·제이누리·제주의소리·제주투데이·헤드라인제주)는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와 공동으로 75년 간의 기록과 역사에서 제주4.3이 세계에 전하는 진정한 평화를 짚어본다. /편집자주 제주사회가 4·3을 세계인의 역사로 기록하기 위한 목표 아래 하나로 뭉쳤다. 지난달 20일 서울 한국프레스센터에서 4·3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추진위원회(이하 등재추진위) 출범식
평화롭던 제주 섬에 불어닥친 4.3의 광풍이 제주 전역을 휩쓴 지 7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간 4.3의 정의로운 해결을 다양한 움직임이 있었다. 진상 규명에 이어 국가 보상금 지급, 재심 재판을 통해 현재까지 1191여명이 무죄를 선고받고 명예를 회복했다. 이제 제주4.3은 화해와 상생으로 국가폭력을 극복, 전 세계 과거사 사건 중 모범적인 해결 사례로 꼽히고 있다. 그럼에도 '완전한 해결'까지는 갈 길이 멀다. 아직도 의도를 알 수 없는 명예훼손과 역사왜곡 발언이 무분별하게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에 75년 통한의 세월을 관통하는 4.3기록물의 중요성도 커지고 있다. 국가폭력의 직접적인 기록과 함께 진상규명과 화해, 국가의 보상으로 이어진 과정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제주도인터넷신문기자협회(미디어제주·제이누리·제주의소리·제주투데이·헤드라인제주)는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와 공동으로 75년 간의 기록과 역사에서 제주4.3이 세계에 전하는 진정한 평화를 짚어본다. /편집자주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통틀어 한국전쟁 다음으로 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한 참혹한 역사가 제주4.3이다. 일제강점기를 벗어난 해방 시점과 냉전체제의 미군정, 우리나라 단독정부 수립과 한국전쟁을
평화롭던 제주 섬에 불어닥친 4.3의 광풍이 제주 전역을 휩쓴 지 7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간 4.3의 정의로운 해결을 다양한 움직임이 있었다. 진상 규명에 이어 국가 보상금 지급, 재심 재판을 통해 현재까지 1191여명이 무죄를 선고받고 명예를 회복했다. 이제 제주4.3은 화해와 상생으로 국가폭력을 극복, 전 세계 과거사 사건 중 모범적인 해결 사례로 꼽히고 있다. 그럼에도 '완전한 해결'까지는 갈 길이 멀다. 아직도 의도를 알 수 없는 명예훼손과 역사왜곡 발언이 무분별하게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에 75년 통한의 세월을 관통하는 4.3기록물의 중요성도 커지고 있다. 국가폭력의 직접적인 기록과 함께 진상규명과 화해, 국가의 보상으로 이어진 과정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제주도인터넷신문기자협회(미디어제주·제이누리·제주의소리·제주투데이·헤드라인제주)는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와 공동으로 75년 간의 기록과 역사에서 제주4.3이 세계에 전하는 진정한 평화를 짚어본다. /편집자주 우리나라의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처음 등재된 것은 1997년이다. 그 해 ‘훈민정음 해례본’과 ‘조선왕조실록’이 그 중요성과 영향력을 인정받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될 수 있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