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시절 돈이 없어 학교를 쉬고 돈을 벌겠다며 서울 용산으로 달려갔다. 날품팔이, 삐끼, 신문팔이 안 해 본 일이 없다. ‘나와바리’를 침범했다는 이유로 붙들려가 흠씬 두들겨 맞아 보기도 했다. 그래도 공부에 매달렸더니 학비 없어도 다닐 수 있는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사랑에 빠졌다. 주위의 기대를 뿌리치고 장교 임관을 목전에 뒀지만 다니던 학교를 그만뒀다. 제주 촌구석에 틀어박혀 농사를 지었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이었다. 고시공부에 달려들었는데 6개월만에 행정고시에 합격했다. 고시출신으론 처음으로 제주도청에 사무관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그리고 그는 박정희 대통령이 제주도를 ‘동양의 하와이’로 지목, 본격적인 관광개발 계획을 수립하던 시절 청와대로 불려갔다. 제주도관광종합개발계획이 그의 머리에서 나왔다.
1993년 12월 말 부임, 그리고 선거를 앞둔 3개월 공백 뒤 1995년 6·27 선거로 당선, 이어 98년 6월 말 퇴임. 관선 1기와 민선 1기 등 4년3개월 간의 재임.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
그는 1974년 다시 농림수산부로 불려갔고, ‘똥차’ 취급을 받던 승진누락자 신세를 겪다 어렵사리 고위 공무원으로 올랐다. 하지만 서슬퍼런 6공의 황태자 박철언에 맞서 축산국장의 본분을 다한다며 YS에게 마사회의 체육부 이관을 막아달라고 나섰다가 한마디로 찍혔다. 1980년대 말 그는 미국으로 쫓기듯 마치 국외 추방자 신세처럼 미국 연수를 떠났다. 그래도 꿈은 언제나 고향 제주에 있었다. 그런 그의 눈에 꽂힌게 그 시절 생소한 장면이다. 슈퍼마켓에서 생수를 사 먹는 미국인들의 일상을 보며 “물 좋은 고향 제주의 물을 상품화해보리라”는 다짐을 했다.
정권이 바뀌고 기회가 왔다. 상도동을 찾아와 축산농민의 아픔을 설파하던 그를 YS는 눈 여겨 보았다. 1993년 12월30일. 그는 29대 제주도지사로 제주도에 부임했다. 신명을 다바쳐 일했다. 아버지 시절부터 유산이었던 4·3사건이란 제주도민의 아픔도, 그 오랜 세월 재야와 보수진영이 나뉘어 치르던 위령제도 화해·상생을 위한 통합 위령제로 만들어냈다. 산업이라곤 기껏 감귤인 제주의 농업 대표작목을 품질과 가격경쟁 체제에 맞서는 경쟁력으로 인식을 뒤바꿔 놓았다. 제주도민들은 1995년 민선 1기 6·27선거에서 그의 열정에 압도적 지지로 표를 몰아줬다. 무소속 지사였지만 사실 자신은 ‘제주도민당’ 소속이라고 부르짖던 그는 자치단체론 처음으로 먹는샘물 제주삼다수를 상품화했고, 제주국제컨벤션센터를 일궈냈으며, 내친 김에 관광복권도 발행했다. 세계 섬들의 연대를 내건 ‘섬관광정책포럼’을 창설하더니 급기야 1998년 7월 ‘제1회 세계섬문화축제’를 열 수 있도록 만든 주역도 그였다. 지금도 연간 수백억~수천억에 이르는 제주도의 경영수익은 그 시절 그의 도전이 이뤄낸 결과다.
그러나 그는 좌절과 시련에 직면했다. 1998년 6·4지방선거에서 낙마, 몇 개월 뒤 축협중앙회장으로 재기하는듯 하더니 정부의 농·축협 통합 구조조정에 맞서 저항하다 급기야 국회할복사건의 주인공이 됐다. 정권의 눈 밖에 난 그에게 검찰의 표적수사가 이어졌고, 다시 한번 나섰던 2002년 선거에서도 그는 또 쓴맛을 봤다. 민간인 신분으로 돌아가 녹차밭 농사로 소일하던 그는 다시 무농약·무항생제·무화학비료란 ‘3무’(三無) 정신을 내걸로 친환경농업회사와 매장운영으로 제주의 1차 산업 부흥을 꾀했지만 집요한 사법당국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끝내 영어(囹圄)의 몸이 됐다. 10여년 전 선거에서 불거진 뇌물수수 논란이 1심에서 무죄를 얻어 잠잠해지는 듯 했지만 오랜 시간이 흘러 2007년 말 그에게 다시 유죄의 굴레가 씌워졌다. 그는 2010년 1월 말 ‘국립학교’(?)를 나왔다.
옥살이를 하며 조폭 양은이파 두목으로 불리던 조양은으로부터 ‘형님!’으로 불리기도 했다. 수감생활 도중 교도소내 인권을 부르짖으며 교도소장으로부터 골칫덩이 ‘꼴통죄수’로 불리기도 했다. 2년여 수감생활 기간 동안 재소자들에겐 인생강론을 듣고 싶은 가장 마음에 드는 동료죄수로 손꼽히기도 했다. 그의 처지를 딱하게 여겨 면회를 간 제주의 인사들에게 그는 “고향 제주의 발전을 위하는 길은 이런게 있다”며 각종 자료와 데이터를 들이대며 쇠창살을 사이에 두고 강연을 펼쳤다. 면회를 간 사람들이 ‘불평 아닌 불평’을 한 사연이기도 하다. 하지만 언제나 그는 가슴 따뜻한 사람이었다. 감옥수발을 하던 아내에게 건네지 못한 790일의 기록을 편지형식으로 매일 써 나간 그는 출소 직후 790통의 편지를 한 꾸러미 아내에게 내밀고 고개를 돌렸다. 아내는 그저 눈물을 훔치기만 했다.
제29대, 31대 제주도지사를 역임한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의 자전적 회고가 책으로 나왔다.
마치 한 편의 드라마를 보듯 지긋지긋한 가난과 어려움에 짓눌렸던 유년기와 도전으로 일관했던 청년기, 성공의 신화를 구가했던 고위공무원 생활과 제주도지사의 경험이 소설처럼 흥미롭다. 영광 뒤에 찾아온 실패와 옥살이 등의 시련과 좌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굽힘 없이 모질디 모진 생명력으로 맞선 그의 인생이 눈물이 날 정도의 감동으로 다가온다.
사실 그 감동은 제주도지사를 지낸 신구범 개인의 인생사였다는 이유론 나오지 않는다. 그의 인생사가 맞닥뜨린 현실이 현대를 살아가는 제주의 중·장년층은 물론 어느 누구나 공감하는 가슴 저민 아픔이었고, 변방 제주인이 겪어야 했던 일들이 공감대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신구범은 말한다. “평생을 살아가면서 그런 굴곡은 누구나 다 있다. 말하고, 드러내지 않아서 밝혀지지 않았을 뿐이다. 정도의 차이만 있다. 다만 난 공직생활을 하면서 내가 그 일을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상황이 그리 돼 어떤 일과 역할을 했다. 그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누구나 그랬을 것이다. 마사회 문제로 불거진 국외추방이나 국회 할복사건에 이르러러서도 결과적으로 난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내 삶만 특별한 게 아니라 어쩌다 내가 행운아가 됐다. 다행히 어떤 역사적 시기에, 마침 그때 내가 그 현장에 있었다. 그땐 그통스러웠지만 이제 그 시절을 지나고 보니 기회이고 행운이었다.”
그의 자전적 회고 <삼다수하르방! 길을 묻다>는 그가 지난해 4월부터 올해 4월 말 까지 1년여 간 제주의 인터넷뉴스 <제이누리>에 연재했던 글을 모아 묶어낸 책이다. 서울이 아닌, 중앙이 아닌, 지역사 차원이 내용을 채우는 제주의 새로운 시도인 것이다.
회고록을 연재한 <제이누리>의 양성철 발행인은 “수십년의 인생사를 깨알같이 매일 매일의 기록으로 이어가 결국 80여권의 비망록으로 만들어내 소장하고 있던 걸 보고 마치 보물을 만난 느낌이었다”며 “제주의 과거·현재·미래를 가늠하는 것은 물론 지금의 제주가 안고 있는 현실과 문제의 연원을 파악하기 위한 보고서로서 이 보다 나은 걸 만나긴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의 자전적 회고록 『삼다수하르방, 길을 묻다』 출간을 축하하는 출판기념회는 오는 10일 오후 3시 제주시 제주그랜드호텔 컨벤션홀에서 열릴 예정이다. 전직 도지사와 교육감, 제주대 총장 모임인 연우회가 후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