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50을 일컫는 지천명(知天命). 제주의 도지사도 그렇거니와 소위 386세력으로 불리던 이들이 이제 지천명의 나이에 들어서 대한민국의 새로운 리더로 부상하고 있다. 공자의 뜻대로라면 천명을 알 나이다. 하지만 그 천명(天命)은 또 무언지 도통 철학적 의문으로 다가오는 시기다. 중국문학 전문가인 이권홍 교수가 다시 지천명의 세상을 돌아봤다. 스스로가 이른 나이에 대한 자아성찰적 고심과 고민이다. 10여차례에 걸쳐 ‘지천명’을 풀이한다. /편집자 주 |
공자의 생각은 이렇게 추론할 수 있다. 우선 정치적으로 군주를 잘 보필하면 세상에 도가 실행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가지고 철환천하(轍環天下)하였다. ‘예(禮)’가 실행되고 ‘인(仁)’이 베풀어지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정치에 투신하고자 수레를 타고 천하를 돌아다니며 자신의 사상을 받아들여지기를 희망하였다.
공자가 희망한 사회는 ‘예’가 행해지는 사회였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이는 공자가 살았던 시대에 질서가 문란하여 왕이 왕답지 않고 제후 역시 제후답지 않은 세상이었기 때문이었다. 과거에 등급이 낮았던 인물이 등급이 높은 자리에 올라 호령하고 이전에는 높은 등급에 있던 인물이 여러 가지 사유로 인해 아래로 곤두박질 쳐져 신하나 노예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기존에 안정된 질서가 휘청거려 더 이상 지탱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혼란을 끝내고 사회가 안정되어야 한다. 안정에는 필연적으로 질서가 있어야만 했다. 그것이 기존에 있었던 ‘예’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자는 “자신을 극복하고 예로 돌아가라(克己復禮)”고 외쳤다. 그리고 인의 덕목을 갖춘 군주의 상을 제시했다.
하지만 당시에는 이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였다. 혼란한 시국과 이해득실이 얽혀져 공자의 사상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기존 체제는 이미 붕괴된 후이니 사람들은 신분상승을 위해 각축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절제도 없었고 욕망만을 분출시키며 패권(覇權)을 장악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자는 자신의 한계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닐까? 현실의 불가능을 직시하고 교육에 의해서만 자신의 천명, 즉 하늘의 뜻을 실현 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고 볼 수밖엔. 그래서 자신의 여생을 후진양성을 위해 노력하는 방향으로 전환하였을 것이고.
공자는 사회적 신분을 고려하지 않을 정도로 교육의 위대성을 알고 있었고 교육자체에 최고의 가치를 두고 있었을 것으로 추론된다. 다음 말에 주의해보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가르침이 있으면 종류가 없다.”(子曰:有敎,無類)(「衛靈公」)
여기의 ‘무료(無類)’를 해석하는데 족속이나 신분의 차이가 없다고 본다. 그래서 “나는 사람을 교육시키는데 (빈부나 지역 등의)차별을 둔 적이 없다”로 해석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렇듯 공자는 출신성분에 구애받지 않고 교육을 할 정도로 스스로 하늘이 준 사명을 교육이라 판단하였다. 교육을 통해 사회를 개조하고 안정된 질서를 회복하려는 것, 이것이 공자가 판단한 천명이었을 지니.
셋째, 천명(天命 : 하늘의 뜻)
그렇다면 ‘천명’이란 무엇인가? 물론 이후부터는 ‘천명’이 하늘이 정해준(定) 운명은 적어도 아니라는 전제하에서 논의해야 한다. 만약 ‘명’이 하늘에게서 부여받은(태어나면서 주어지고 결정된) ‘운명(숙명)’이라고 믿는다면 이후의 논의는 불필요하기에 그렇다. 결정된 것을 어떻게 논의할 것인가, 그냥 따라가면 될 것임엔.
이제까지는 ‘천’과 ‘명’을 따로 떼어놓고 그 개념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살펴봤지만, 사실 ‘명(命)’은 ‘천(天)’과 함께 이해해야 한다. 물론 다음과 같이 풀이하기도 한다.
“공자에 따르면, 개인의 생활 중에는 자신의 역량의 지배하에 있는 일들이 있는가 하면, 자신의 역량이 지배할 수 없는 일들이 있다. 이 후자의 측면에서 볼 때, 마치 개인의 규제 밖의 어떤 역량이 존재해서 지배하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역량은 의지가 있는 것도 같고 없는 것도 같으며,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고 없을 것도 같다. 의지가 있는 것 같고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측면에서 말할 때의 역량이 ‘하늘(天)’이다. 의지가 없는 것 같고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은 측면에서 말할 때의 역량이 ‘명(命)’이다. 전통사상에서 ‘하늘’과 ‘명’은 함께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공자의 논의에서 ‘하늘’과 ‘명’은 늘 분리되어 언급되었다. 어떤 경우는 서로 바꿀 수 있고 어떤 경우는 서로 바꿀 수 없다.
예컨대 자하는 “듣건대 사생은 명이고(死生有命) 부귀는 재천이다(富貴在天)”고 하였는데, 여기서의 ‘천’과 ‘명’ 두 글자는 서로 바꿀 수 있다. 즉 “사생은 재천이고(死生在天) 부귀는 명이다(富貴有命)”고 말해도 안 될 것이 없다. 이처럼 서로 바꿀 수 있는 까닭은 여기서의 ‘천’과 ‘명’은 모두 개인이 지배할 수 없는 역량을 통칭하기 때문이다. 반면 공자는 “내가 누구를 속이란 말이냐, 하늘을 속이란 말이냐!” 하였고, “나를 알고 있는 것은 아마도 하늘뿐이리라” 하였는데, 이때의 ‘하늘’ 자는 ‘명’ 자로 바꿀 수 없다. 즉 ‘내가 누구를 속이란 말이냐, 명을 속이란 말이냐’ 또는 ‘나를 알고 있는 것은 아마도 명뿐이리라’라고 말할 수 없다. ‘하늘’과 ‘명’을 서로 바꿀 수 없는 까닭은 여기서의 ‘하늘’은 바로 의지가 있는 것 같고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하늘의 측면이 위주이기 때문이다.”(『중국철학사』)
하지만 중국 전통사상에서는 ‘하늘’과 ‘명’은 함께 연결돼있는 것이라 따로 떼어놓고 논하기는 어렵다. 지금부터는 ‘천명’을 같이 얘기해보고 이런 관점을 ‘천명관’이란 개념으로 논해보기로 한다.
『논어』에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는 세 가지 두려워함이 있나니, 천명을 두려워하며 대인을 두려워하며 성인의 말씀을 두려워한다.”(孔子曰:君子有三畏.畏天命,畏大人,畏聖人之言)(「季氏」)
군자는 천명을 두려워해야 한다. 그리고 ‘명을 모르면’ 군자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공자에게 있어서 ‘명(命)’이란 존재하는 것이며 알 수 있는 것이다. 알면 군자이고 모르면 군자가 아닌 것이다. 여기에서 ‘명(命)’은 ‘천명(天命)’의 명이다.
여기서 먼저 천의(天意), 천도(天道), 천심(天心) 등과 비교하여 만물이 ‘생생불식(生生不息)’하게 하는 주재자인 천(天)이 그 자체로서 갖고 있는 작용력을 가리키는 ‘천명’의 개념을 생각해보자.
천명(天命)·천의(天意)·천도(天道)·천심(天心) 등은 모두 같은 하늘(天)의 작용이다. 하지만 이 작용이 마치 명령하는 것과 같은 작용이라는 의미에서 천명, 당연히 해야 하는 도리라는 의미에서 천도, 사람의 의지와 같은 것이라는 의미에서 천의, 사람의 마음과 같다는 의미에서 천심이라 한다.
『중용』의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이라는 말에서 본다면 천의 명(命)이 인간의 존재 원리로서 인간에 내재하는 것이 된다. 천과 인간의 관계는 주재자와 피재자의 관계에서 천인합일(天人合一)의 관계로 전환한다.
그렇다면 ‘천인합일’이란 무엇인가? 그 설에 대해 간단하게 이해해보자. 사전적 풀이를 따라가 본다.
앞서 말했듯이 『중용』에서는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이라 하여 인간 존재의 원리인 성(性)을 천명과 동일한 것이라고 하였다.
성은 한 개인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있는 동일한 것이다. 또한 만물에 내재되어 있는 생(生)의 원리와도 동일한 것이다. 바로 개체의 본질이 전체의 본질인 것이다. 다만 개체의 본질을 가리켜 말할 때는 성이라 하고 만물 전체의 본질을 가리켜 말할 때는 하늘의 작용이라는 의미로서 천명이라고 한 것이라 보면 된다. 즉 성과 천명이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개체적 존재이면서 본질적으로는 전체적 존재이며 그러한 의미에서 하늘과 사람은 합일체라는 것이다.
『중용』에서는 성(性)을 다시 구하여 천인합일을 달성할 수 있는 방법으로서 ‘성(誠)’의 실천을 제시하였다.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오직 천하의 지성(至誠)이라야 능히 자기의 성을 다하니 자기의 성을 다하면 남의 성을 다하고 남의 성을 다하면 물(物)의 성을 다하며 물의 성을 다하면 천지의 화육(化育)을 도울 수 있고 천지의 화육을 도울 수 있으면 천지와 더불어 그 작용에 참여하게 된다.”(唯天下至誠,爲能盡其性;能盡其性,則能盡人之性;能盡人之性,則能盡物之性;能盡物之性,則可以贊天地之化育;可以贊天地之化育,則可以與天地參矣)
라고 하였다. 무슨 말인가? 오직 천하의 지극한 성(誠)이라야 자기의 타고난 성(性)을 온전히 발현할 수 있다. 그렇게 하여 점차 모든 사물의 성을 온전히 발현케 할 수 있고, 그렇게 되어야만 천지의 화육을 도울 수 있는 것이며, 천지의 화육을 도울 수 있어야 비로소 천과 지와 더불어 온전한 일체가 된다는 것이다.
이 말은 곧 심(心)을 다하여 성(誠)을 실천하고 천명의 성(性)을 다시 구하여 천인합일이 되면 인간은 개체적 존재를 극복하여 전체적 존재를 실천하게 된다는 것이다. 『주역』에서는
“무릇 대인은 천지와 그 덕을 합하고 일월(日月)과 그 밝음[明]을 합하고 사시(四時)와 그 차례[序]를 합하고 귀신과 그 길흉을 합하여, 하늘보다 먼저 해도 하늘이 어기지 않으며, 하늘을 뒤따라 해도 하늘의 때를 받드나니, 하늘도 또한 어기지 아니할진대 하물며 사람에게 있어서며 하물며 귀신에 있어서랴!”(夫大人者,與天地合其德,與日月合其明,與四時合其序,與鬼神合其吉凶,先天而天弗違,後天而奉天時.天且弗違,而況於人乎,況於鬼神乎.)
라 하였는바, 대인이라 함은 천지만물과 일월성신이 혼연일체가 되어 같이 흐르는 것이 이치인 것임에. 사람이 어찌 대소가 있을 것인가? 이런 것이 바로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를 따라도 법도에 어긋나지 아니하였다(從心所慾不踰矩)”라고 한 공자의 세계일지니. 이 또한 천인합일의 세계이리라.
한(漢)의 동중서(董仲舒)는 하늘도 인간과 같은 희로애락이 있다고 설명함으로써 천인합일사상을 더욱 발전시켰다. 조금 복잡하지만 정리해보자.
‘천인합일’ 사상에 동중서가 중심에 서있다. 동중서는 유학자이면서 최초로 오행을 논한 사람이다. 전국시대 이전의 유학자들은 음양을 얘기했지만 오행은 논하지 않았다. 동중서에 이르러 음양과 오행을 병합시켰고 그것을 가지고 주역을 해석한 최초의 인물이다. 또 공자가 썼다고 전해오는 『춘추』를 나름대로 해석하며 일대의 학설(『춘추번로(春秋繁露)』)을 이룬 인물이기도 하다.
사실 이 ‘천인합일’은 중국고전철학의 기본 관념의 하나다. 중국철학에서는 ‘하늘(天)’을 대략 다음과 같은 개념으로 정리를 한다. 첫째, 天은 사람과 감응하는 존재다. 둘째, 天은 길흉화복(吉凶祸福)을 부여하는 존재다. 셋째, 天은 사람들이 경외하고 받들어 섬기는 대상이다. 넷째, 天은 사람, 특히 왕조의 운명을 주재하는 존재(天命之天)다. 다섯째, 天은 사람에게 인의예지의 본성을 부여하는 존재다. 그리고 天은 ‘자연(自然)’의 대표로 여기는 관점도 있다.
‘천인합일’은 두 부류의 뜻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천인일치(天人一致)다. 우주자연은 대천지[대우주]이며 사름은 소천지(小天地)[소우주]라고 본다. 둘째는 천인상응(天人相应), 천인상통(天人相通)한다. 즉 사람과 자연은 본질적으로 서로 통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람과 사물은 자연의 규율에 순응하면서 사람과 자연의 조화[화해(和諧)]를 이룬다고 본다. 바로 노자(老子)가 말한 바와 같다.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으며 도는 스스로 그러한 것을 본받는다.”(人法地,地法天,天法道,道法自然)(『老子』)
바로 도라는 것은 스스로 그러한 것, 곧 스스로 움직이는 것이고 하늘도 스스로 움직이며 땅도 스스로 움직이며 인간도 스스로 움직이는 가운데 섞여[혼연(渾然)]서 돌아가는 것이라는 말이다. 이는 사람과 자연의 일치하고 상통함을 표명한 말이라 본다.
선진유가도 ‘천인합일’을 주장하기는 마찬가지다.
“성(誠) 그 자체는 하늘의 도이고, 성해지려고 하는 것은 사람의 도이다.”(誠者天之道也,誠之者,人之道也)(『中庸』)
이 또한 사람이 ‘성(誠)’의 덕성을 발양하기만 하면 하늘과 일치될 수 있다는 말이 아닌가?
한(漢)대에 동중서(董仲舒)는 더욱 명확하게 “하늘과 사람의 관계는 하나로 합쳐진다”(天人之際,合而为一)[‘際’는 교제다. 하늘과 사람이 서로 교제하다보면(엮이다 보면) 끝내는 혼합하여 하나가 된다고 보면 된다. 처음부터 하늘과 사람은 하나가 아니라는 것, 그러면서 본질은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춘추번로(春秋繁露)』)을 주창하면서 이천년 유학의 중요한 관점으로 확립된다.
달리 말하면 중국사상에 있어 ‘천인합일’은 기본 신념이기도 하다. 일반 학자들은 天은 바로 대자연(大自然)이요;人은 인류이고;合이라 함은 서로 이해하고 우의를 맺는 관계다. 자연을 정복하는 대상으로 파악하지 않고 중국사상에서는 인류란 천지만물의 일부분으로 사람과 자연은 끊임없이 상통하는 일체라고 여겼다.
또 ‘천인합일’은 중국철학의 기본정신이다. 다음 말을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중국학자의 말을 그대로 옮겨본다.
중국은 당우(唐虞) 이래로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사상을 가지고 있다. ‘경천(敬天)’은 바로 애민하는 까닭이요 애민은 곧 ‘존천(尊天)’하는 까닭인 것이다. 이른바 천인합일이라 함은 사실 하늘은 반드시 사람을 이긴다[天定勝人]는 생각과 사람은 반드시 하늘을 이긴다[人定勝天]는 생각하는 두 개의 관념을 다 포함하고 있다고 하겠다. “하늘의 운행은 강건하니, 군자는 이를 본받아 스스로 힘쓰고 쉬지 않는다”(天行健,君子以自强不息)(易․乾卦大象)라는 중국의 사상은 ‘天定勝人’에 치우쳐 있지도 않고 ‘人定勝天’에 속해 있지도 않다. 중국은 종교가 없다고 하지만 사실 중국인들은 종교적 관념이 풍부하다. 이것이 중국문명의 특징 중 하나다.
『좌전(左傳)』에 “사효(史囂)가 말했다. 나는 이렇게 들었다. 나라가 흥하려면 백성에게 듣고, 망하려면 신에게 듣는다. 신은 총명하고 밝으며 바로며 곧고 변함없는 존재로 사람에 따라 움직인다.”(史嚣曰:吾聞之,國將興,聽于民;將亡,聽于神.神,聪明正直而壹者也,依人而行)(莊公三十二年)라 기록돼있다. 사효의 말은 중국 고래의 인문주의를 대표한다. 이것이 바로 천인합일의 주제다. 역대의 성철들은 이 천인합일의 도(道)를 선양하려 노력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중국과 서양을 비교해보면 중국철학은 사람과 하늘이 ‘합일[合]’하는 경향이 있고; 서양철학은 하늘과 사람을 ‘나누는[分]’ 경향이 있다. 그렇기에 중국철학은 사람의 삶을 중심으로 우주를 관찰하여 사람과 하늘을 하나 되게 한다. 주역의 ‘건곤자시(乾元資始)’(만물의 생성은 모두 건원을 바탕으로 시작되었다)설은 신학의 성향을 포함하지 않으면서 천도(天道)로써 인간사(人間事)를 관통하여 성명(性命)을 바르게 함으로써 도덕수신의 근원을 밝히는데 있는 것이다. 이것은 중국전통철학의 천도사상이 순수한 합리적인 형이상학임을 말하고 있다 하겠다. ……중국철학에는 종교 신앙이 포함돼있지 않다. 그러나 종교 신앙을 반대하는 것도 아니다. 뼛속깊이 ‘하느님’을 믿는 신앙적 관념이 숨겨져 있으면서 노출되지 않을 뿐이다. 그래서 언급하는 대상이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천인(天人)’의 철학이 곧 인문철학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왕애군(王愛君))
물론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이런 해석을 받아들일 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다. 그런데 단 하나, 중국 전통사상에서 ‘하늘(天)’은 만물의 주재자이며 ‘생생불식(生生不息)’하게 하는 대천세계의 중심이라는 것을 부정한 적이 없다는 것은 확실하다. <9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제주 출생. 한양대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중국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사·박사학위를 받았다. [신종문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는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언어문화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