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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뜻을 어떻게 알 수 있는 것인가? ‘배움(學)’에 있고 ‘살핌(省)’에 있다. 바로 자신의 노력에 의한 것이다. “아래를 배워 위에 달한다(下學而上達)”이다. 어떤 것인가? 아래로 ‘인간의 일’을 배우면서 위로 ‘천리’를 통달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주자(朱子)의 말이 새삼 마음에 다가 온다.
“이 말씀의 뜻을 깊이 음미해 보면 이 가운데 진실로 사람들은 미처 알지 못하고 하늘만이 홀로 아는 묘(妙)가 있음을 볼 수 있다.……애석하다. 자공도 오히려 통달하지 못한 바가 있음이여.”(深味其語意,則見其中自有人不及知而天獨知之之妙.……惜乎,其猶有所未達也)(「集註」)
그렇다. 자공(子貢)은 공문(孔門)의 지혜 제일이라 평한다. 그도 통달하지 못한 바가 있다. 이렇듯 ‘천명’이란 그저 하늘만이 홀로 아는 묘가 아닐까? 사람들이 모르는 바이니 그래서 그냥 ‘천명’이라 해버린 것일 수도. 물론 사람이 배워서 하늘이 알고, 하늘도 사람을 아니 서로 알아 기쁨일 테지만. 어찌 그리 쉬우랴.
그래서 뒤이어 공자보다 더 적극적인 관점이 등장한다.
“하늘을 좇아 하늘을 칭송하는 것과 천명을 제어하여 그것을 활용하는 것 중 어떤 것이 좋은 것인가?”(從天而頌之,孰與制天命而用之?)(『荀子·天論』)
인간이 알지 못하는 것이 천명이 아니라 ‘제어하는’ 것으로……. 하지만 여기서도 ‘천명’이란 무엇인지 명쾌히 제시하지 않는다. 대천세계의 주재인 ‘하늘’, 그리고 그가 내린 ‘뜻’? 그저 이렇게 모호하다.
그래서 이제 상고시기의 중원사람들의 심리를 좀 알아보고 넘어가자. 상고란 구석기의 수렵단계에서 신석기의 농경기로 이어져,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의 가부장제도가 확립된 하상(夏商) 초기시기로 이른바 선사시대라고 할 수 있다. 『중국문예심리학사』를 따라가 보자.
중국 고대인들은 나름의 석기 장식품을 지니고 있었고 일정한 토템활동, 무술의식, ‘인간의 머리에 뱀의 몸’을 가진 내용의 신화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른바 ‘방패와 도끼, 꿩 깃털로 만든 기와 우모의 털로 만든 지휘기[간척우모(干戚羽旄)]’등으로 ‘세차게 흔들며 분기하고 발을 구르며[발양도려(發揚蹈厲)]’ 원시 토템 가무를 즐겼다. 그들이 사용했던 도기의 조형과 문양 등은 모두 상고시대 인류의 정신활동의 산물이다. 동물 형상의 사실적인 모습에서 점차 추상화되고 부호화되어가는 것으로, 바로 내용에서 형식으로 이르는 과정이다.
청동기 시대로 접어들면서 급변한다. 동주가 멸망하면서 사라져버렸다는 ‘구정(九鼎)’이 있었다는데, 그와 관련한 다음 구절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옛날 하나라가 덕이 후하고 강성했을 때에 먼 각지의 기이한 경물을 그리게 됐습니다. 구주의 장관들이 구리를 공납하여 큰 정(鼎)을 주조하고 그 위에 여러 가지 경물들을 그렸습니다. 온갖 사물들이 구비되어 백성들은 어떤 사물이 신령한 것이고 어떤 사물이 간악한 것인지를 알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하천이나 산림에 들어가더라도 불길한 사물을 만나지 않았습니다. 산수의 요괴인 이매(魑魅)나 목석의 요괴인 망량(魍魎)과도 만나지 않았으며 이로 인해 아래위로 도움을 받아 하늘의 복록을 이어받을 수 있었습니다.”(昔夏之方有德也,遠方圖物,貢金九牧,鑄鼎像物,百物而爲之備,使民知神姦.故民入川澤山林,不逢不若,魑魅魍魎,莫能逢之,用能協於上下以承天休)(『左傳·宣公三年』)
온갖 사물들을 그린 목적은 신령하고 간악한 것을 알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어떤 것이 신령하고 어떤 것이 간악한 것인지를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는 수렵시대에 신령한 사물에 대한 숭배와 동물에 대한 숭배 사상에 이미 계급사회의 ‘아래위로 도움을 받아 하늘의 복록을 이어받을 수 있도록’ 신권(神權)을 부여하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통치의 논리가 생긴 것이다.
그래서 ‘도철(饕餮)’ 문양이 생겼다. ‘도철’이란 은나라 사람들이 숭배하던 신의 정면 형상이다. 주로 씨족이 지닌 동물 형상의 신 그림에서 변화돼 나온 문양이다. 각 토템, 즉 소나 오랑이 또는 용과 유사한 것이 있다. 정면의 뚜렷한 자리에 있어 사람들로 하여금 근엄하고 결코 넘겨볼 수 없는 신비감을 준다.
이외에도 식인동물의 형상이 많다. 대개 동물이 사람의 머리나 벌거벗은 사람을 잡아먹는 그림이나, 사람의 몸을 발로 낚아채고 있는 그림들이 도철 중간에 그려져 있다. 이것들은 대부분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조성하여 신령에게 애원하는 쪽으로 시선을 끌기 위함이자 ‘도철’의 위엄에 감복하도록 만들고자 함이다. 이는 노예제 왕권과 신권이 결합된 산물로 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후기에 와서 신화나 전설의 속박에서 벗어난다. 서서히 꽃과 같은 문양으로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더욱이 은나라가 주나라에 의해 멸망되자 은대에 지고했던 신들은 부차적인 지위로 강등되었다. ‘도철’과 같은 신적인 형상 역시 추악하기 그지없는 형상으로 변화했다. 이는 주대 초기의 정치와 종교, 사상의 변화된 양태를 반영하는 것이다.
이는 주나라가 은나라를 멸망시켰을 때 주나라 집권자는 ‘천명(天命)’을 선양하여 은나라 주왕이 천제의 뜻에 어긋났기 때문에 자신이 천제의 명을 받들어 은을 멸망시킨 것이라 하였다.
“더없이 크나큰 문왕, 하늘의 대명을 받들었어라.”(丕顯文王,受天有大命)(『大盂鼎』)
“하늘이 문왕에게 대명을 내리시어 융과 은을 멸망시키고자 하셨으니.”(天乃大命文王,殪戎殷)(『周書·康誥』)
이렇게 은나라 조상들이 모시던 신의 지위에도 변화가 생겼다. 그래서 ‘도철’이 이전에는 신령스런 신물이었지만 이미 추악하고 간교한 동물의 형상으로 변화하고 말았다. 당시 주나라 사람들은 정치적인 필요에 의해 천명과 덕치를 결합하여 은대의 ‘도철’ 대신에 봉황을 격상시켜 그 지위를 대체시켰다.
이후 신화, 혹은 신 중심의 사상에서 인간 본연의 문제를 더 집중적으로 파고들기 시작한다. 이른바 신화 중심에서 인본 중심으로의 전환이며 인간문제를 우선으로 고찰하는 인간중심사상의 사고가 본격화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신화의 세계에서 벗어나거나 신을 중심으로 했던 신본주의에서 인간과 신과의 관계를 숙고하기 보다는 인간 중심의 사상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인본주의의 선언과 같은 혁명적 언로가 나타난다.
“무릇 백성이 신의 주인이다. 그러므로 성왕은 먼저 백성을 이루고 난 뒤에 신에게 힘을 다하는 것이다.”(夫民,神之主也.是以聖王先成民而後致力於神)(『季梁諫追楚師·桓公六年』)
라는 관념이 그것이다. 신권을 부정하면서 “인간이 마땅히 하늘을 이긴다”(人定勝天)는 관점인 셈이다. 『논어』에도 그 일말이 보인다.
“자로가 석문에서 유숙하였는데, 신문이 묻기를 ‘어디에서 왔는가?’하자 자로가 ‘공씨(孔氏)에게서 왔소’하고 답하니, ‘바로 불가한 줄 알면서도 하는 자인가?’”(子路宿于石門,晨門曰:奚自.子路曰:自孔氏.曰:是知其不可而爲之者與?)(「憲問」)
“불가능한 것인 줄 알면서도 행하는 자”가 바로 공자다. 이는 공자는 ‘정(定)’해진 것이 있음을 인정하기는 하나, 소극적으로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노력하여 자신의 앞을 개척해나가는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바로 자신이 자신의 주인인 것이다.
끝으로, 마무리 하자면;
인간이란 무엇인가? 이 문제는 접어두자. 묻고 물어도 답을 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인간이란 어디서 왔을까? 이 문제도 넘어가자. 천년의 물음에도 아직 답이 없기에 그렇다.
하지만 어떻든 인간은 존재한다.
그리고 인간은 아직까지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말씀’이 신이다. 그 ‘말씀’이 모든 것을 존재하게 했다는 믿음이 인간의 원형이 됐다는 것도 부정하기 어렵다. 그래서 “여시아문(如是我聞)”이라는 초월적 존재를 상정됐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학이시습(學而時習)”이 된다. ‘말씀’이 있어 대천세계가 존재한다 하더라도, 또 말씀을 ‘들었더라’도, 우선은 ‘배움’이 있어야 한다. 신의 세계에서 인간의 세계로의 완전한 전이(轉移)다.
달리 말하면 조물주에 의해 창조됐든 진화의 산물이든, 인류는 있다. 언제부터라는 의문도 사실 불필요하다. ‘있다’는 그 자체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있기에 어떻게 있어야 하는지가 중심이 돼야 한다, 왜 존재하는가 보다는 어떻게 있어야 하는가가.
그런데 이제까지 인간은 왜라는 물음에 전착했지 않았나 싶다. 그래서 태초에 ‘말씀’이 있어야 했고 여시아‘문’(如是我‘聞’)이라 했었던 건 아닐까? ‘말씀’이 있다는 것은 인류가 인지하기 시작했다는 얘기가 된다. 인지능력이 생기면서 불가지한 것에 두려움이 있었을 것이며 그런 공포의식에 의해 생겨났고 생각하면서 먼저 떠올린 건 ‘신(神)’이 아니었을까? 그 신의 말씀에 의해 모든 것이 존재했다는 믿음, 곧 신화와 종교의 시작이다. 그리고 신화나 종교가 정치와 맞물리면서 권력의 유지나 강화를 위해 두려움에 부채질하여 더욱더 신에 종속시켰을 것이고.
그래서 지금까지도 인간은 신화와 전설, 그리고 종교에 자유롭지 못하다. 실로 조물주가 혹은 주재자가 존재하는지는 차치하더라도 존재에 대한 의문 때문에라도 초월적 능력을 가진 ‘어떤 것’에 천착하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공자도 만년에 『주역』을 즐겨 읽었다. 이는 현재 우리가 읽고 있는 『논어』 속 공자의 말에는 제자들에게 전해준 공자의 일부분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말이 된다. 특히 형이상학적인 부분은 찾기 힘들다. 더불어 같이 논할 이 많지 않은데,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은데, 자신의 생각을 어찌 다 펼칠 수 있었으랴. 그래서 『주역』에서 우주와 인간 자체를 찾으려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자신에게 50년만 더 주어진다면 『주역』을 더 배워 큰 허물이 없을 것이라 희망을 피력한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하더라도 공자가 한 말 중 한 부분이 우리의 주의를 끈다. 바로 “하늘이 무슨 말을 하시더냐? 사계절은 운행되고 만물은 생육되지 않는가? 하늘이 무슨 말을 하시더냐?”(天何言哉.四時行焉,百物生焉,天何言哉) 그렇다. 천지자연과 인간만물은 ‘스스로 그렇게 되고(自然而然)’, ‘끊임없이 생겨나고 생겨나지(生生不息)’ 않던가!
‘천(天)’은 말이 없어도 만물은 존재하고 생겨남이니 ‘도(道)’ 또한 생생불식하고, ‘인(人)’도 말이 없어도 만물은 존재하며 ‘도(道)’는 늘 우리와 함께 있음이니! 대천세계가 그러함이니.
그럼 우리는 하늘의 뜻을 어떻게 알 수 있는 것인가? ‘배움(學)’에 있고 ‘살핌(省)’에 있다. 자신이 노력하면 되는 것이다. 바로 ‘아래를 배우면(下學)’ ‘위에 달하는(上達)’ 것이다. 아래로 ‘인간의 일’을 배우면서 위로 ‘천리’를 통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종교를 가지고 있다. 왜? 아래를 배울 때 배워서 달(達)하는 ‘위’도 함께 생각해보고 싶기 때문이다.……그런데 나는 아직도 ‘천명’을 모른다. <끝>
☞이권홍은?=제주 출생. 한양대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중국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사·박사학위를 받았다. [신종문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는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언어문화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