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50을 일컫는 지천명(知天命). 제주의 도지사 당선인도 그렇거니와 소위 386세력으로 불리던 이들이 이제 지천명의 나이에 들어서 대한민국의 새로운 리더로 부상하고 있다. 공자의 뜻대로라면 천명을 알 나이다. 하지만 그 천명(天命)은 또 무언지 도통 철학적 의문으로 다가오는 시기다. 중국문학 전문가인 이권홍 교수가 다시 지천명의 세상을 돌아봤다. 스스로가 이른 나이에 대한 자아성찰적 고심과 고민이다. 10여차례에 걸쳐 ‘지천명’을 풀이한다. /편집자 주 |
공자는 하늘을 창조자(創造者)로 보고 있었을까?
공자의 생존 시기에는 하늘을 창조자로 보았다 하는 이들이 있다. 『시경(詩經)』에서 그 단서를 찾는다. “하늘이 뭇 백성을 낳으시니(天生蒸民)”라는 말이 그것이다. 그리고 “하늘이 백성(百姓)을 낳고 임금을 세운다(天生民而樹之君)”(『좌전(左傳)』)는 뜻으로 임금을 내세움은 백성을 위한 것이라는 말에서 실마리를 찾는다. 여기에서 하늘은 직접 인간을 창조하는 절대자로 표현됐다고 하는 것이다. 부정하지는 않겠다. 분명 고대 중국에서도 하늘을 창조자로 봤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공자도 하늘을 창조주라고 봤을까?
사실 공자가 ‘하늘(天)’을 ‘의지’가 있는 인격신(人格神)으로 보고 있는가 하는 것은 아직까지도 토론이 진행되고 있는 문제다. 엄격히 말하면 확답을 할 수 없다. 확답을 할 수 없는 원인은 문제를 제기하는 대상에 있지 않고 문제 자체에 있기 때문이다. 핵심은 현대인의 사유방식에 있다.
묻는 바의 ‘의지’가 가리키는 것은 무엇인가? ‘사람’과 같은 의지인가? 만약 ‘그렇다’라고 한다면 틀린 것이다. 공자는 ‘하늘’이 바로 ‘사람’이 가지고 있는 그런 ‘의지’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만약 ‘하늘’이 사람의 ‘의지’와 같은 것이 있다면 하늘의 ‘의지’는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그런, 무엇을 하고자하면 그것을 한다는 자유의지는 결코 아니다.
그저 자연적(自然而然)인 것이고 공평하며 합리적이고, 법칙이 있어 순환하는 것이며, 규율[규칙]이 있어 알 수 있고 성인이 마음으로 체득할 수 있는 것이다. ‘말을 안 해도’ 스스로 그렇게 있는 ‘의지’다. “하늘이 무슨 말을 하시더냐? 사계절은 운행되고 만물은 생육되지 않는가? 하늘이 무슨 말을 하시더냐?”와 같은 의지다.
인격신(人格神)이란 말에도 모순이 있다. 인격(人格)[인성(人性)]이면 인격이고 신격(神格)[신성(神性)]이면 신격이지 인격신이란 말이 어디에 있던가? 인격신이란 인격을 가진 신이란 의미일 텐데 그것은 인간이 자신들을 중심으로 신을 논하는 것이다. 인격의 범주를 벗어난 것이 신격이다.
공자의 ‘하늘’은 신격이 있는가? 있다! 하지만 인격은 없다.
이쯤에서 우리는 먼저 공자 생존시대까지 사회경제의 변동에 유의해볼 필요가 있다. 이는 공자가 과연 어떤 시대에 살면서 어떤 관점을 지니게 됐는지 이해하면 본질을 파악하기 쉽기 때문이다. 역사적 환경과 동떨어져 살 수 있는 인물은 없기에 그렇다.
잘 아는 바대로 중국의 선진시기 중 춘추전국시대는 극도로 혼란한 약육강식의 시대였다. 또한 중국 역사상 획기적인 전환을 맞이하는 시대이기도 하다. 바로 이때 제자백가들이 출현하였다. 저마다 자신들의 이론을 펼쳐 백가쟁명의 상황을 만든다. 분명 이들은 시대의 요청에 부응한 것이다. 즉 당시의 시대상황에 대응한 논리이자 정신이다. 이른바 ‘시대정신(時代精神)’인 셈이다. 한 시대의 지성과 문화의 지배적인 흐름이다.
먼저 당시 사회상황을 보자. 『중국사회사상사』를 따라가 보자.
문명 초기 단계였던 중원의 하(夏)문화는 상(商)대를 거쳐 주(周)대에 이르면서 본격적인 문명단계로 진입한다. 주대는 큰 정치적 통합을 성취하였다. 정치세력 범위는 대략 동으로는 산동(山東)반도의 연해안을 따라 안후이(安徽), 쟝수(江蘇), 저쟝(浙江)북부까지, 서로는 산시(陝西)에서 쓰촨(四川)까지, 남으로는 후난(湖南), 쟝시(江西)까지, 북으로는 허베이(河北), 랴오닝(遼寧)일대까지였다.
주대의 봉건제도는 왕과 제후, 제후와 경대부를 친소 기준으로 대종(大宗)과 소종(小宗)의 관계로 종족 내의 신분을 규정하는 종법(宗法)제도의 원리를 바탕으로 성립하였다. 기본적으로 최고 권력자와의 혈연적 친소에 따른 권력과 부의 차등적인 분배와 이에 상응하는 신분질서가 특징이었다.
그렇기에 정치적 결속은 공동혈연의식에 의해 유지되었다. 그리고 원래 원시적 씨족공동체 시대부터 습속과 관례로 전승돼온 행동규범이었던 ‘예(禮)’(제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진다)가 서주의 지배계층 내에서 지배체제를 뒷받침하는 사회질서의 기능을 하게 되었기에 서주는 ‘예’를 국가의 근본뿌리로 여겼다.
서주시대는 이민족 견융(犬戎)의 침입으로 막을 내린다(BC771). 이후 진(秦)의 통일까지가 동주(東周)시대로 곧 춘추전국(春秋戰國)시대로 중국역사상 획기적인 전환기였다. 춘추 중기를 전후로 종래의 왕조의 기틀이었던 씨족공동체적인 질서, 즉 종법 지배질서는 서서히 붕괴된다. 생산력의 증가와 제후국 간의 영토쟁탈을 위한 전쟁 격화에 따른 것이다.
노동생산성이 높아지면서 일부 농민들은 잉여생산물과 활동의 여유를 기초로 예농(隸農)의 지위에서 벗어나 지주가 되기도 하였다. 경제의 발달에 따라 노동 분화가 나타나면서 상인들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상인들은 축적한 부를 바탕으로 토지에 대한 개인 소유가 보편화된 것을 계기로 지주가 될 수 있었다. 이러면서 종법사회의 지배질서는 더욱 흔들리게 됐다.
이보다 더 혼란의 요인은 제후국 간의 전쟁 격화와 이를 계기로 집중된 권력이었다.
제후들은 자신의 지위를 보존하고 강화하기 위해 수단인 토지와 노동력을 전쟁을 통해 확보하려고 했다. 그러면서 봉건주이자 주나라 왕인 천자로부터 점차 독립돼 간다. 그리고 제후국 안에 있는 경이나 대부 같은 세습귀족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권력의 중앙 집중화를 꾀하면서 제후들은 봉토를 받지 않고 봉급만 받는 지식인관료, 즉 ‘사(士)’를 임명하였다.
소영주격인 귀족들도 생존과 지위 강화를 위해 제후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영역 안에서 중앙집권을 실시하고 지식인(士)관료들을 임명하였다. 그 결과 봉건 제후들과 귀족들 간에 이해 대립으로 마찰과 충돌이 잦아지면서 사회 혼란은 가속되었고 마침내 서주사회의 예법을 통한 종법 지배질서는 붕괴된다.
이처럼 전쟁으로 인해 사회혼란과 백성의 고통은 극에 달했다. 지식인들은 당시의 현실을 천하대란으로 인식하고 혼란을 빨리 극복하여 통일을 이루고 평화를 달성할 수 있기를 염원하게 된다. 이것이 당시의 ‘시대정신’이다.
☞이권홍은?=제주 출생. 한양대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중국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사·박사학위를 받았다. [신종문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는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언어문화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